3.고증 과정 및 후손들의 과제
1)보성군수공(諱 赫萬)께서 근래 후손들에게 알려지게 된 계기는 원곡(상복) 종원의 증조부님 후릉참봉공(휘 세량 32세, 1859~ ?)께서 본향에서 한의사업에 종사하면서 公의 교지 2매, 전령 1매, 유서 1매 등을 수집 소장하여 4매를 자손에게 물려주어 원곡(상복) 종원이 집에서 소장하고 있었다. 자연적인 훼손(毁損) 방지(防止)와 여러 사람들에게 알림의 목적으로 2006년 本鄕 방촌유물전시관에 기탁(寄託) 하여 소장되었다. 이후 2014년 원곡(상복) 종원이 필자에게 방촌유물관에 기탁한 물품에 대해 사진 촬영 협조를 요청해와 고향에 갔었을 때 유물관에 들러 기탁한 4매를 촬영하였다. 이중 유서 1매를 야운(이환) 종원이 판독한 사례가 있었다. 2016년 2월 제주도 서귀포 지역에서 국회의원 예비 후보로 성곤 종친이 활동하면서 청장년밴드에 글을 게재하자 원곡(상복) 종원이 혁字만 할아버님이 서귀포 정의현감(旌義縣監) 역임 사실 및 서귀포와 장흥위문과의 緣을 댓글로 언급하였다. 이에 대해서 재치(현동) 종원이 公의 정의현감 재임 선정비(善政碑) 사진을 인터넷 검색을 통해 발췌하였다. 이후 "씨족문화연구위원회"를 중심으로 조명과 관심을 받게 되었다.
2)최근 필자는 장흥위문 내 선조의 교지(敎旨)을 포함한 고문서에 대해 원소장자, 해당 종중 관계자의 자문과 협조를 통해 SNS(밴드,카톡)상에서 세수(世數)의 순서(順序)에 따라 현존(現存)한 교지를 게재 해오면서 후손들에게 선조(先祖)의 업적(業績)을 알려드리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公에 대한 자료 게재를 앞두고 기묘보 면주 등 장흥위문 내 여러 기록물을 참조한 후 정확한 고증자료(考證資料)라 할 수 있는 조선시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통해 公에 대한 관직명(官職名), 제수(除授) 년(年) 월(月) 일(日) 등 행장(行狀) 고증으로 선대(先代) 기록(記錄)과 비교를 통해 일부에서 오기(誤記)를 확인할 수 있었다.
3)제주도에서 거주하고 있는 公의 직계 후손들을 찾기로 마음먹고 기묘대동보 면주 상에서 현재 생존 가능 연령에 해당되는 1940년생부터 1970년까지 종원 17명을 이름을 발췌하여 제주도지역 전화국(제주시, 서귀포시) 114에 인명전화번호를 의뢰하여 이중에 2명이 등재되어 있음을 안내 받았다. 이후 여러 차례 전화 연락하여 ㅇㅇ종원의 부인과 전화가 연결되어 제주도 거주 후손을 찾는 연유를 설명하였다. 이에 대해 8촌뻘 되는 ㅇㅇ종원이 시내에서 주유소를 하고 있다고 하면서 더 이상 협조를 해주지 않고 귀찮다는 표현을 하면서 전화를 끊어 참 애석하였다. 계속해서 ㅇㅇ지역 일대의 주유소 9곳의 전화번호를 114에 의뢰한 후 9곳 주유소의 종사자와 모두 통화하여 ㅇㅇ종원을 찾는다면서 협조를 구하였다. 대부분 주유소 관계자들은 짜증을 내면서 "왜 아침부터 여기로 전화하느냐"면서 협조에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 ㅇㅇ주유소에서 찾고 있는 ㅇㅇ종원의 모친의 전화번호를 알려준다면서 직접 휴대폰에 연락이 왔었다. 어렵게 ㅇㅇ종원의 모친 휴대폰 번호를 알아내서 모친과 통화를 할 수 있었다. ㅇㅇ종원의 모친에게 아들이 경영하는 ㅇㅇ주유소 전화번호를 안내 받아 찾고 있는 광준(1960년생, 35세) 종원과 어렵게 전화 통화되었다. 광준 종원과 수회 전화 통화에서 보성군수공의 정의현감 재임과 선조의 제주도 정착과 이후 300년간 후손 거주 사실, 묘소 위치•제향, 현 종원들의 거주 사항 등 서로 안내와 설명하면서 차후 계속해서 협력하기로 공감하였다. 이후 광준 종원을 통해 상훈(36세) 종원 등 여타 종원들과 연결되었다.
4)보성군수공(諱 赫萬)은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훌륭한 선조 중에 한분이다. 그러나 직계 장손 계열 29세 때 후사(後嗣)가 없었다. 차손(次孫)과 삼손(三孫)의 계열 후손들은 300여년 제주도에서 거주와 本鄕과의 지리적 요인으로 인해 교류(交流)가 적어 관심(關心)을 갖지 못하였다. 또한 괴봉공파종중에서도 公에 대한 세밀한 조명을 하지 않아 현재까지 후손들로부터 제향(祭享) 봉행(奉行)을 받지 못하고 있다. 후손으로써 선조(先祖)에 대한 가장 기본적 예(禮)는 제향(祭享)이다. 제주도 거주 직계후손과 本鄕 괴봉공파종중 (21세 휘 大用→22세 휘 弘宙→23세 휘 國寶→24세 휘 天相→25세 휘 赫萬→26세 휘 原徵) 후손 간 상호 방문 등 교류를 통해 문중사(門中事)에 참여하면서 公을 조속히 本鄕 행원 석천사(石川祠)에 추배(追配) 함이 후손들의 최우선 과제라고 사료된다. -끝-
끊어진 피를 잇고 잊혀진 정을 찾으려는 자손의 도리가 눈물겹습니다. 이를 위해 백방으로 헌신한 백강위원을 비롯 원곡위원 야운위원 재치아우 모두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300년이 지난 오늘에야 이산가족을 찾고 새로 다리를 놓았습니다.
휼륭한 문중 조상님 보성군수공에 대해 많은걸 알게되었네요.
수고한 먄큼 보람도 가득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