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의 의심
카라바조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는
당시 회화 세계에 혁신을 일으킨 사람이다.
그는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 화가로서
빛을 그림에 접목한 사람이다.
그는 종교적인 주제로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림의 소재를 대부분 거리의 서민들에게서 취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늘 친숙하다.
그가 1603년경에 그린 <토마스의 의심>도
우리의 의문을 친숙하게 대변해 준다.
이 그림의 배경은 요한복음 20장 19-31절이다.
토마스는 그날 저녁 거기 없었다.
그는 그 중요한 저녁,
예수님께서 성령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시던 그 저녁에 거기 없었다.
그렇다면 토마스는 왜 거기에 없었는가?
그는 더 이상 믿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희망하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기도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실망해 버렸다.
그는 그가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았던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모든 것을 포기해 버렸다.
그리고 그는 결심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직접 보고,
내 손으로 만져본 것만을 믿겠다고.
우리도 토마스처럼 행동한다.
눈에 보이는 것 속에 감추어진
그 너머의 것을 보지 못한 채
자기 시야를 좁혀버린다.
그래서 우리도 토마스의 세계에 빠져
그저 먹고, 즐기고, 짝 짓고,
의미 없는 잡담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토마스와 같은
이런 우리에게 나타나신다.
그리고 당신의 옆구리를 보여주신다.
이 그림에는 등장인물이 네 명 나온다.
예수님은 황금분할 선상에 자리하고 있고,
세 제자들이 오른쪽에서 예수님을 향해 다가선다.
그리고 의심하는 토마의 머리와
다른 제자들의 머리가
정확히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토마스의 손가락에 모아지고 있다.
예수님의 두 손 사이에 토마스의 손이 있다.
예수님은 한 손으로 옷자락을 걷고
다른 한 손으로는 토마스의 손목을 붙잡아
상처의 갈라진 부분으로 당기고 있다.
그분의 손등에는 못자국도 또렷하게 보인다.
토마스는 자기 손가락으로 예수님의 상처를 헤집는 동안
다른 제자들도 눈으로 상처를 더듬고 있다.
그래서 우리도 촉각과 느낌으로 그분의 상처를 더듬고 있다.
토마스는 그분을 보았고 그분을 만졌다.
그리고 고백한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그는 그렇게 고백함으로써
자기 주위를 둘러쳤던 불신의 테두리를 무너트렸다.
그분께서는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보지 않고도 믿는 행복이 그리운 오늘이다.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이 행복인 것을…….
[출처] 그림읽어주는 신부님블러그
(본당의 작은 쉼터)
출처: 아굴라와 브리스가 원문보기 글쓴이: 아굴라
첫댓글 아멘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