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뿌리의 생태학적 관계를 시 속으로 끌여들여 대상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순환하는 삶의 의지를 형상화한 시이다. 시적 화자는 사랑으로 품어온 '너'의 성장을 '축복'하면서 사랑의 '기쁨'이 충만하던 때를 되돌아보고 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삶의 '슬픔'까지를 사랑으로 승화시며 '너'에게 쏟아 주면서 자신을 완전히 비우게 된다. 그러면서 머지않아 밝고 따뜻한 세상이 도래하면 '너'가 건강한 모습으로 우뚝 서게 되고, 자신 또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 사랑의 삶을 영위하게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한권에 잡히는 현대시)
* 흙과 뿌리의 관계를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에 설정하여, 뿌리가 성장하면서 흙이 거칠어지는 자연 현상에서 자식을 향한 희생적인 모성애를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의인화의기법으로 상징적 의미를 잘 살리고 있는 이 시는 흙이 '착한 그릇 → 껍데기 → 빈 그릇'의 과정을 거쳐 다시 연한 흙이 된다고 하여, 또 다른 생명을 탄생 · 성장시키는 순환 과정의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흙과 뿌리의 관계를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로 보는 것과 함께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보는 견해도 있다. (현대시 해설)
* <시인의 말> "꽃의 향기에 비해 과일의 향기는 육화된 것 같아서 믿음직스럽다. 나의 시가 그리 향기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쓰는 이유는, 시란 내 삶이 진솔하게 육화된 기록이기 때문이다. 삶과 시에 대한 이 미더움을 버리지 않고 천천히 익어가고 싶다."
<나희덕(羅喜德) : 1966 - >
* 1966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현재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
* 시집으로 [뿌리에게](1991),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1994), [그곳이 멀지 않다](1997), [어두워진다는 것](2001), [사라진 손바닥](2004), [야생사과](2009),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산문집 [반통의 물]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1998),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01), 현대문학상(2003), 이산문학상(2005), 소월시문학상(2007) 등을 수상했다.
◈ 귀뚜라미/나희덕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 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 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 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해설> 소외되어 있던 귀뚜라미는 언젠가 좋은 날이 찾아와 자신이 부른 노래가 다른 이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 시의 계절적 배경은 ‘매미 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인 여름이다. 이 계절의 주류가 판치는 매미들의 세상에서 귀뚜라미가 내는 소리는 ‘울음’이지 아직 ‘노래’가 아니다. 귀뚜라미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소리를 내고 있는데 이 소리는 자신이 바라는 ‘노래’의 상태가 되기는커녕 자신이 살아 있음을 간신히 알리는 ‘타전소리’일 뿐이다. 하지만 자신의 소망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귀뚜라미는 가을이 와서 자신의 치열한 울음소리가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 가고 위안을 주는 노래였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나타내고 있다. (현대시 작품, 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