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감, 각 성문에다 기마군관을 보내어 그자의 용모파기를 알렸소이다."
정종이 눈만 부릅뜨고 있었으므로 부장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대감, 그자가 성문을 나갔을 경우를 대비하여 경기도 도찰사께 급보를 전하
는 것이."
정종이 희미하게 머리만 끄덕였으므로 부장은 옷자락을 날리며 돌아섰다. 집
안의 분위기는 아직도 흉흉했다.
정시택의 참혹한 시체는 아직도 방에 놓여져 있었는데 피비린내가 청에까지
맡아졌으며 아들의 시체를 보겠다고 악을 쓰던 정종의 부인 박씨는 혼절을
소동이 일어났다.
하인들이 군관들과 함께 이리 뛰고 저리 걸었는데 모두 두서가 없고 눈동자
가 떠 있다. 청에 선 정종은 이를 악물고 앞쪽을 노려보았다. 놈은 가족들만
을 차례로 살해한 것이다.
이행검의 조카를 시작으로 안희손의 자식,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의 자식을
죽였다. 이것은 당사자에게는 자신이 죽는 것보다 몇배나 더한 고통인 것이
다. 그때 중문 밖까지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안희손과 10여인의 군
관들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대감, 이게 도대체 어인 변고란 말입니까?"
청에 서있는 정종을 보자 안희손의 눈이 금방 충혈되었다. 동병상련인 것이
다. 청에 오른 안희손이 다가섰을 때 정종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그놈은 아무래도 이징옥의 자손인 것 같소. 그,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넷
째 자식 말이오."
"이반입니다."
상기된 표정으로 말한 안희손이 힐끗 옆쪽 정기택의 방을 보았다. 방에서는
시체를 간수하느라 하인들이 분주하게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어제 첩자를 북방으로 떠나 보냈습니다."
이미 죽은 자식 나이 세는 일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북방의 여인 부족들의
기세가 예전과는 전혀 달라서 명(明)까지 위협하고 있다. 명에 의존하여
문치에만 빠져있는 조선국의 군세로는 감히 건드리지도 못할 상대가 되어있
는 것이다.
불과 10여년전, 이징옥은 여진족을 규합하여 난을 일으켰지만 이징옥이 제거
된 후로 여진족의 기세는 더 융성해졌다.
여진으로써는 기회를 만난 것이 될 것이다.
"죽어야겠다."
무릎에 이마를 붙인채 앉아있던 정연미가 문득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가슴이 조금 트이더니 숨쉬기가 나아졌다.
이제 눈물은 말랐어도 가슴이 더 찢어질듯 아파와서 거의 정신을 놓고 있었
던 것이다. 오시 무렵이라 집안 분위기는 가라앉았으나 수선거리는 것은 여
전했다.
아버지는 대궐로 가시기 전에 정연미에게 들러 방에서 꼼짝하지 말라고 다시
한번 엄명을 내렸지만 손끝 하나 움직이기도 힘든 정연미였다.
어머니 박씨 부인은 아직도 누운채 헛소리를 하고 있어서 내실쪽 분위기도
어수선했다.
"목을 매고 죽을테야."
다시 중얼거렸던 정연미는 이를 악물었다. 박세진이 금귀라는 말에 처음에는
부정하고 반발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는 이제
그것이 믿어졌다.
박세진은 저택에 손님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간계를 쓴 것이다. 병판댁 사랑
채만큼 안전한 은신 장소는 한양장 안에 없을 터였다. 박세진은 나를 이용한
것이다. 그런줄도 모르고 나는 마음과 몸을 다 바쳤다.
역적의 일당인 박세진에게 모두를 바친 것이다. 무릎에서 이마를 뗀 정연미
는 초점 잃은 시선으로 문쪽을 바라보았다. 어젯밤에 박세진이 한 말이 갑자
기 떠올랐기 때문이다.
"두달 후에 다시 오리다."
그렇게 말한 박세진이 이를 드러내고 소리없이 웃었다.
"그때쯤이면 그대가 내 자식을 뱃속에 싣고 있을지도 모르지."
정연미는 무의식중에 손을 펴 자신의 배를 덮었다. 두달 후에는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박세진의 표정을 다시 떠올린 정연미는 눈을 커다랗게 치켜떴다.
만일 아이를 배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역적의 자식을 잉태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아버지는 틀림없이 칼로 벨 것이었다.
박세진은 그것까지를 예상하고 있었을까? 길게 숨을 뱉은 정연미는 무릎 위
에 다시 이마를 내렸다. 그리고는 어깨를 들썩이고 짧게 흐느꼈다. 그것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안감과 외로움 때문이다.
경황이 없어서 아직 자신을 되돌아볼 여유가 없는터라 박세진에 대한 원망이
나 분노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는 못한 상태이다.
"그대의 자식까지 살해 되었다니 이징옥과의 악연이 길구나."
세조가 입궐한 정종을 보더니 대뜸 말했다. 그는 이미 듣고 있었던 것이다.
"잔혹한 놈이다. 자식들만을 골라 죽이다니."
입맛을 다신 세조가 백관을 둘러보았다. 오늘은 좌우로 3정승 외에 6부 판서
와 도승지, 대제학 대사간까지 정2품 이상의 고관들이 모두 모여 있었는데
세조가 부른 것이다.
세조의 시선이 왼쪽 맨 앞에 앉은 좌의정 한명회에게로 옮겨졌다. 세조의 측
근 신하중 좌장이며 정난공신 1등이었던 권람이 작년에 병을 칭하고 관직에
서 물러난 후로 한명회는 권람이 맡았던 좌의정을 물려받았다.
그는 이제 세조와 사돈간이며 측근 신하의 좌장이다.
"좌상, 이징옥의 4남 이반이란자가 분명하다니 조선 8도에 파발을 보내 잡아
들이도록 하오."
"예. 전하."
앉은 채로 허리를 굽혀보인 한명회가 정색했다.
"하오나 금귀 색출의 주관처와 주장(主將)이 있어야 될 것 같사옵니다. 그래
서 이번에 병판과 같이 자식을 잃은 경상도 수군방어사 안희손을 토포사로
임명하시어 지휘하게 하시는 것이 나을 듯 싶사옵니다."
그러자 세조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도록 하라."
^^
■ 산적
유천에서 충주로 가는 지름길에는 거두산과 성무산의 산줄기 두 곳이 가로질
러져 있어서 행인들은 이틀 노정으로 오갔다.
거두산은 유천현령의 관할이라 산자락 밑의 주막에 가끔 유천 관가의 포졸
서너명이 주저앉아 있다가는 행인들을 겉단속이나 했지만 산은 넘지 않았다.
그것은 성무산에서부터가 충주부 관할이기도 하려니와 산속에 흉악한 산적
떼가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쑥패라고 불리운 이 산적 무리는 대충 10여인쯤 되었는데 불쑥 튀어나온다
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고도 하고 누구는 칼질을 불쑥불쑥 하는 바람에 그런
이름이 붙어있다고 했다.
아닌게 아니라 작년에 유천 관가의 칼 깨나 쓴다는 포장 하나가 술김에 거두
산을 넘어 성무산 산자락까지 나아갔다가 숲속에서 불쑥 내지른 창에 꼬치
산적처럼 되어 죽은 일이 있었다.
그 일로 유천현령이 충주부사에게 불쑥패를 토멸해 줍시사하고 세번이나 청
을 넣었지만 부사 영감이들은 들은 체도 안했으므로 나중에는 충청 도찰사한
테 직소를 했다가 닷새만에 파직이 되었다.
도찰사와 충주부사는 좌의정 권람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후로 새로 부임
해온 유천현령은 불쑥패 무리를 옆집 소보듯이 했고 역시 전임해온 충주 부
사도 소가 닭보듯이 했다.
그것은 불쑥패가 뜨내기 행인이나 타지방 출신의 장사꾼만 노렸다가 털어서
유천이나 충주부 사람들은 거의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시가 지나 땡볕이 가장 기승을 부릴 무렵에 거두산 밑의 주막으로 사내 하
나가 들어섰으므로 늘어져 있던 군상들은 모두 시선을 들었다.
나그네 차림의 사내는 등에 꽤 무겁게 보이는 등짐을 매었고 머리에는 중인
이 쓰는 반갓을 썼다. 그러나 무명 옷차림은 먼지에 덮였지만 말쑥한데다 허
우대도 멀쩡한 호남이다. 바로 이반이다.
"어서 오십시오."
골방 벽에 기대앉아 가물가물 낮잠에 들려던 주모가 일어나더니 다가왔다.
그 서슬에 이쪽 저쪽에 늘어져있던 행인 7,8명에다 포졸 세명도 수선거렸으
므로 주막 안은 생기가 돌았다. 등짐을 내려놓는 이반의 앞에 서자 주모는
해죽 웃었다.
"더웁지요? 시원한 곡주를 드릴까요? 금방 잡은 돼지고기도 있습니다."
"곡주 한병하고 돼지고기 두근만 주게."
"그럼. 여섯푼입니다."
산골 주막이 대처 술값보다 비쌌지만 이반은 내색않고 머리를 끄덕였다.
"금방 가져오겠습니다요."
이반의 눈치를 살피던 주모가 바람을 일으키며 안으로 사라졌을 때 이반의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났다. 머리를 돌린 이반은 텁석부리 수염에다 길게 찢
어진 눈을 가진 사내를 보았다. 사내는 베저고리에 바지 차림이었는데 굵은
팔이 다 드러났다.
시선이 마주치자 사내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디까지 가시는가?"
"내가 어디를 가든 왜 묻는게여?"
이반이 정색했을 때 사내가 허리춤에서 유천현령 관인이 찍힌 나무조각을 꺼
내 보였다.
"난 도적을 잡으러 나온 관가 포도군이다. 끌려가기 전에 낱낱이 대라."
"포도군이란 주막 안에서 손님을 닥달하는 직임인 모양이다."
쓴웃음을 지은 이반이 역시 허리춤에서 가죽조각을 꺼내 보였다.
"난 병판대감의 집사로 진주에 가는 길이야. 여기 병판댁 직인이 찍혀 있으
니 두 눈 크게 뜨고 보아."
목이 떨어져 죽은 박시윤이 만들어 준 통행패이다. 사내가 눈을 껌벅이며 통
행패를 보았다.
"음, 그런 것 같군."
사내가 통행패에서 시선을 떼더니 털썩 옆쪽 마루에 앉았다.
"병판대감댁 자제분도 금귀한테 당했다는 소문이 났던데 사실인가?"
"머리를 목에서 떼고 싶거들랑 그 이야기를 한번만 더 말해보게."
눈을 치켜뜬 이반이 사내를 노려보았다.
"설령 유천현령이라도 목이 성하지 못할 것이야."
"허어. 소문이라는데두."
기가 질린듯 사내가 좌우를 둘러보더니 헛기침을 하고 입을 다물었지만 이반
의 목소리가 더 굵어졌다.
"만일 토포사께 직보하면 그 소문을 누구한테서 들었느냐고 사지를 잘라내는
고문을 받을게야. 그럼 다 죽어."
주막 안의 10여인은 일시에 말을 잃었고 사내는 엉덩이를 들더니 옆쪽의 제
동무 포도군에게로 갔다. 주모가 개다리 소반에다 돼지고기와 나물, 술병을
얹어 가져왔는데 안에서 들었는지 웃음이 더 헤퍼졌다.
"나리, 천천히 듭시오. 미시가 지나면 땡볕이 꺼질테니 그때 산을 넘으시지
요."
"오면서 들었는데 성무산에 흉악한 산적떼가 있다는게 맞는가?"
그러자 주모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얼굴의 웃음기도 걷혔다.
"쇤네는 잘 모릅니다."
"허어. 산 아래에 살면서도 몰라?"
이반의 시선이 아까의 텁석부리 포도군에게로 옮겨졌다.
"이보우, 여기 와서 고기 좀 드시우. 고기가 남을 것 같소."
손짓해 부르자 사내가 벌떡 일어서더니 휘적거리며 다가와 앉았다.
"아까는 결례를 하였소. 유천관가에 있는 포도군 백한이오."
정색하고 수인사를 했으므로 이반도 허리를 폈다.
"난 김만이라고 하오. 대를 이어서 병판대감 집안일을 해왔는데 아비가 죽고
나서 지금은 집사를 맡고 있소."
"애쓰시오."
백한은 이반이 따라준 곡주를 한숨에 들이켜더니 돼지고기를 입 안에 가득
넣고 씹어 삼켰다. 이반은 주위의 시선이 온통 쏠려 있는 것을 아까부터 눈
치채고 있었는데 가까운 곳에서는 침 넘어가는 소리도 났다.
때는 세조 11년 6월 말이었으니 조정에서는 태평성대라고 자찬을 했지만 충
청과 경상도 지역은 가뭄이 3년째 계속되어 백성들은 많이 굶었고 물가가 두
배 이상 뛰었다.
이반이 소리쳐 주모를 불렀으므로 주막 안은 조용해졌다.
"집사나리, 부르셨습니까?"
재빠르게 나타난 주모가 사근대며 묻자 이반이 허리춤에서 은화 두닢을 마루
에 던졌다.
"이 은화면 고기와 술을 얼마나 줄 수 있는가?"
"예. 저것."
눈을 둥그렇게 뜬 주모가 마루에 떨어진 은화와 이반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
니 한참만에 계산을 해냈다.
"예. 집에 고기가 스무근 정도 남았는데다 술이 열병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것을 어찌 다 드시려고."
"다 내와서 손님들께 나눠 드리게."
그리고는 이반이 눈을 가늘게 뜨고 주모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흉년이 들었다지만 충청도 인심이 왜 이런가? 은화 두냥값이 그것
밖에 안된단 말인가?"
"한냥이면 됩니다."
그 때 끝자리에 앉아있던 백한의 동무 포도군이 소리쳤고 귀를 세우고 있던
손님들도 한소리로 주모를 성토했다. 그러자 백한이 은화 한냥을 집어 이반
에게 내밀었다.
"집사어른, 이건 도로 넣으십시오."
미시가 되었을 무렵에 이반은 주막을 나왔다. 해는 중천에서 조금 기울어져
있었지만 햇살은 여전했고 바람 한점 불지 않는 숲길에서 짙은 풀냄새가 맡
아졌다.
충주로 간다는 상인 셋에다 대갓집 하인으로 보이는 사내 둘까지 다섯이 동
행이었고 유천 관가의 포졸들은 주막 밖까지만 그들을 배웅했다.
"댁은 충주에서 묵으실라우?"
꽤 무거워 보이는 등짐을 진 상인 하나가 이반의 옆으로 붙어서며 물었다. 3
0대쯤의 장신이었는데 턱수염이 짙었고 술기운 때문인지 눈에 핏발이 섰다.
이반이 머리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진주에는 무슨 일로 가시오?"
"대감의 전답이 그곳에 있소."
"그렇군."
건성으로 대꾸한 사내가 베 수건을 꺼내더니 이마의 땀을 씻었다. 산길이 점
점 가팔라져 갔으므로 대열은 자연히 종대가 되었는데 발이 빠른 사내 하나
가 십여보 떨어져서 앞장을 섰고 이반은 세번째였다.
산은 올라갈수록 숲이 울창해지면서 길이 좁아졌다. 유천현에서는 근처 백성
들을 동원하여 년전에 길을 닦았지만 수레 한대가 겨우 지날만한 폭에다 도
처에 잡초가 무성해서 가끔 허방을 밟는 때도 있다.
"에이, 힘들다."
멀찌감치 앞서가던 사내가 꽤 큰 소리로 투정을 했는데 숲 속이라 메아리도
안들렸다. 다람쥐 몇마리만 보일 뿐 숲속은 괴괴한 정적에 파묻혀 있었다.
그들이 거두산의 8부 능선 쯤에 닿았을 때는 모두 땀으로 범벅이 되어서 입
에서는 쇳소리가 났다.
"에이. 쉬어 갑시다."
정상이 바로 눈 앞에 보였을 때 앞장섰던 사내가 다시 큰소리로 말했다. 그
때였다. 옆쪽 숲에서 부시럭거리며 풀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세 사내
가 나타났는데 모두 손에 장검을 쥐었다.
"이놈 섰거라."
앞장 선 사내가 느긋하게 말하고는 칼을 앞으로 흔들어 보였다.
"그 자리에 당장 꿇어 앉아."
사내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쏠려져 있는 것을 보자 이반이 입술을 비틀
고 웃었다.
"이 놈이 갑자기 실성을 했나? 왜 비실비실 웃는게여?"
사내가 눈을 부릅뜨더니 칼을 치켜들고 서너발짝 다가서는 동시에 나머지 두
사내는 재빠르게 이반의 좌우로 갈라섰다.
이반이 좌우를 둘러보았다. 동행 다섯명은 어느새 흩어져서 이반을 빙 둘러
쌌다. 그제서야 이반이 정색하고 말했다.
"이놈들이 모두 한패였구나."
"너한테 술과 고기를 배불리 얻어 먹었으니 해치지는 않을테여."
처음에 말을 걸었던 상인이 정색하고 말했다. 등짐을 벗어놓은 그의 손에도
짧은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보아하니 무술 꽤나 한 놈 같이 보이는데 만용 부리지 마라. 내가 이래뵈도
한 때 북방군 군관이었다."
그가 무리의 두목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앞장 선 놈이 큰소리를 연달아 지른
것은 숲에 숨어있는 동료를 부르는 신호였을 것이다. 이반이 등짐을 벗어 발
밑에다 놓고는 두목 격인 사내에게 한걸음 다가섰다.
"네가 북방군 군관이었다구? 어느 군 소속이었느냐?"
"나는 감찰사 소속 군관이었다."
뱉듯이 말한 사내가 이반을 지그시 보았다.
"긴 말 하기 싫다. 네 등짐에 은화가 가득 들어있는 걸 안다. 벗어놓고 간다
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이놈들은 모두 네 수하인가?"
이반이 주위를 둘러서 있는 사내들을 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보니 유천현의 포졸들까지 모두 한통 속이구나. 주막집 주모도 내막
을 알고 있을테지."
"이놈아, 꿇지 않을테냐?"
그때까지 손에 쥔 장검을 건들거리고 서 있던 오른쪽 사내 하나가 참지 못하
겠다는 듯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장에 목을 쳐 죽일테여."
"어디 쳐 보아라."
이반이 오히려 오른쪽 사내에게로 한걸음 다가섰으므로 주위에는 긴장감이
돌았다. 두목격인 사내도 눈만 치켜뜨고 있는터라 오른쪽 사내는 분기를 일
으킨듯 코로 숨을 내뿜었다.
"에에잇!"
사내가 몸을 솟구친 것은 바로 그 다음 순간이었다. 그리고는 이반의 머리
복판을 겨누고 칼을 내려쳤는데 둘러선 사내들은 모두 숨을 삼켰다.
이반의 머리가 두 쪽으로 갈라질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순간
이반의 몸이 비틀리더니 사내가 두 손을 허우적 대면서 땅바닥에 머리를 박
았다.
어느사이에 이반의 손에 사내의 장검이 쥐어진 것이다. 눈 깜짝할 순간에 일
어난 일이어서 둘러선 사내들은 미처 입도 떼지 못했고 엎어진 사내만 신음
소리를 냈다.
이반이 손에 쥔 장검을 빙글빙글 돌려 보더니 두목격 사내에게 불쑥 물었다.
"네 소굴이 어디냐?"
두목은 눈앞을 어지럽게 굴렸는데 머리 속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두 손으로
장검을 움켜쥐고는 있었지만 부하가 엎어진 후로 한발짝도 떼지 않았다. 이
반이 한걸음 다가섰으므로 두목은 한걸음 물러났다.
이반의 솜씨를 눈 앞에서 본터라 아직 결심이 서지않은 것이다.
"네 소굴에서 며칠 쉬어 가야겠다. 네 소굴로 안내해라."
이반이 말하자 두목은 마음을 정한 듯이 칼 끝을 내렸다.
"좋수다. 내가 손님으로 모시리다."
그리고는 주막에서 이반과 함께 온 다섯 사내에게 소리쳤다.
"행손이하고 동이는 주막으로 돌아가고 나머지는 산채로 간다."
바람 한점 불지않는 산 속은 습기까지 배어있어서 마치 삶는 듯이 더웠다.
길을 벗어나 짐승도 다니기 힘들어 할만큼 가파른 비탈을 오르고 바위를 넘
어 산채 앞에 도착했을 때는 신시가 넘어갈 무렵이었다.
서쪽 산줄기 위에 걸린 태양빛은 이쪽의 8부능선 위로만 비쳤다.
"저기 올시다."
산을 타고 오는 도중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도 서로 말이 없었던 터라
이반은 두목이 가리키는 앞쪽의 산채를 보았다.
산채는 나무껍질로 지붕을 덮고 굵은 통나무로 벽을 만들었는데 가옥이 대여
섯채는 되었다. 그리고 앞쪽에는 세길쯤 높이의 담장을 쌓았는데다 망루까지
세운 것이 뒤쪽의 깎아 세운 듯한 절벽과 어울려 천혜의 요새였다.
"졸개가 3,40명은 되겠구나."
이마의 땀을 손바닥으로 훑어 씻은 이반이 눈을 가늘게 뜨고 산채를 보았다.
"오는 중에 매복채도 세곳이나 있던데. 그만하면 대군과 싸울만 하다."
"보셨소?"
놀라듯 눈을 크게뜬 두목이 물었으므로 이반이 쓴웃음을 지었다.
"네가 궁사들한테 쏘지 말라고 손짓 하는 것도 보았다."
"화살은 피할 수 없었을 거요."
"시험해보지 그랬느냐?"
이반이 정색하고 말했다.
"네 신중함이 네 목숨을 살린 것이다."
망루를 지나 산채 안으로 들어섰을 때 20명 가까운 사내들이 몰려왔는데 손
에는 모두 칼과 창을 들었다.
"두령, 어찌하실라고 이러시우?"
기골이 장대한 텁석부리 사내가 앞으로 나서더니 이반을 흘겨보며 물었다.
그가 손에 쥔 장검은 넉자도 넘게 보였다.
"이자가 제 아무리 무술이 뛰어났다고 해도 오는 중에 얼마든지 처치하실 수
가 있었지 않소? 이곳까지 데려온 이유가 무엇이오?"
"난 내 수하들을 다치게 하고싶지 않다. 입 다물고 물러가라."
두목이 나무랐지만 사내는 콧방귀를 뀌었다.
"억만이가 칼을 뺏기고 내동댕이쳐졌다는 이야기는 들었소. 하지만 억만이
솜씨는 무리중에 중하(中下)요. 그것만 가지고 순순히 데려오다니 경솔했
소."
"도대체 네 놈은 무엇하는 놈이냐?"
갑자기 이반이 눈을 치켜뜨고 물었으므로 무리가 술렁댔고 텁썩부리는 어깨
를 부풀리더니 한걸음 다가섰다.
"난 부두령 최돌이다. 내 칼을 세번만 받아주면 두령 뜻대로 손님 대접을 하
마."
"두령의 영을 따르지 않겠다는 말이구나."
"닥쳐라. 이놈."
최돌이 손에 번갈아 침을 뱉더니 장검을 고쳐 쥐었으므로 구경꾼은 더 늘어
났다. 어린애와 여자들까지 사내들 틈에 끼어든 것이다.
입맛을 다신 이반이 최돌을 바라보았다.
"너도 북방군 출신인가?"
"북방군 따위는 난 모른다. 충청도에서 거두산 산신령 최돌이를 모르는 놈은
없느니라."
"네 두령이 인명을 살상치 않는다고 해서 나도 삼가하려 했으나."
순식간에 차가운 표정이 된 이반이 등에 맨 등짐을 벗으면서 한자도 안되는
단검을 꺼내 들었다.
"두령의 영을 거역하는 네 놈의 행태를 보니 이 산채에서 없애줘야 되겠다."
"이 젖비린내 나는 놈이."
이를 간 최돌이 장검을 중단으로 겨누었다. 그러자 주위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으면서 무거운 살기로 덮였다.
"에이익!"
먼저 치고 나온 것은 최돌이다. 넉자가 넘는 장검을 마치 수수깡 대를 휘두
르는 것처럼 가볍게 순식간에 세번이나 후려치고 찌르고 내려쳤는데 검풍에
먼지까지 일어났다.
"아앗!"
그 순간 주위에서 탄성이 일어났다. 이반의 몸이 먼지 속을 굴렀다가 튕겨
올랐으며 나중에는 옆으로 꺾어진 듯 눕혀졌기 때문이다.
단숨에 세번 칼질을 한 최돌이는 몸을 가누면서 칼을 고쳐 쥐더니 풀무 같은
숨을 뱉았다. 그리고는 온몸으로 땀을 쏟았는데 머리 끝이 곤두설 만큼 긴장
하고 있었다. 검술로는 산채 뿐만이 아니라 이제까지 적수가 없었던 최돌이
다.
북방군 군관 출신인 두령 하무석이 지략과 인품으로 산채를 통솔한다면 최돌
이는 힘으로 눌러왔다. 그래서 산채에는 두령이 둘인 셈이었다.
"이, 이놈."
최돌이가 기합을 내지르며 다시 한걸음 내디뎠을 때였다. 이반이 단검을 비
스듬히 들더니 최돌을 향해 한걸음 나아갔으므로 둘 사이의 거리는 대번에
세걸음 간격으로 좁혀졌다.
"자, 이제 네 목이 떨어진다."
이반의 차분한 목소리가 산채를 울린 순간이었다. 최돌이의 몸이 먼저 뛰어
올랐고 이반은 그보다 한발 늦었지만 두 몸은 허공에서 부딪치면서 각자 상
대방의 위치로 떨어졌다.
일순간 두령 하무석이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뱉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
무리들이 일제히 비명과 신음같은 탄성을 뱉았다. 최돌이의 몸에 목이 붙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시체를 치워라."
그때 하무석의 목소리가 산채를 울렸다.
"자업자득이다. 어서 치우고 손님 모실 준비를 해라."
사람들이 흩어지면서 한번씩은 이반을 힐끔 거렸는데 적의는 보이지 않았고
경탄의 표정이 역력하게 배어 있었다.
하무석은 산채 맨 뒤쪽 가옥으로 이반을 안내했다. 제법 청이 번듯했고 마당
에 모인 졸개들을 호령하기 좋도록 마루도 높인 것이 두령의 숙소인 모양이
었다.
청의 상석에 이반을 앉힌 하무석이 그때서야 정식으로 통성명을 했다.
"소인은 하무석이라고 하오. 북방군 감찰사 김삼의 휘하 군관이었는데 대금
황제께서 살해되신 후에 남행하여 산적이 되었소이다."
"그런가?"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이반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대처럼 북방군 출신이었다가 남행한 동무 군관이나 장수들이 있는가?"
"대금국이 해체 되고나서 대부분은 여진족에 가담하였거나 바다를 건너 왜국
으로 갔소이다. 나처럼 산적이 되어 연명하는 자는 없을 것이오."
"산적 생활이 몇년째인가?"
"올해로 10년째 올시다. 2년 동안은 그냥 숨어 지냈지요."
이반이 머리를 끄덕였을 때 아래쪽에서 옅은 기침소리가 났다. 가는 체격에
머리에다 수건을 질끈 동여맨 해사한 용모의 사내가 그들을 올려다 보고 있
었다.
"술상을 봐 올릴까요?"
목소리를 들은 이반의 얼굴이 굳어졌다. 남장 여자였던 것이다. 하무석이 머
리를 끄덕였다.
"시장하다. 술과 밥을 함께 올려라."
여자가 몸을 돌렸을 때 하무석이 이반의 눈치를 보았다.
"산채에 여자가 10여인 있습니다. 오갈데 없는 여자를 잡아 짝을 만들어 주
거나 부엌일을 시키지요."
"그대가 날 산채로 순순히 안내해 온 것은 부두령을 내 손으로 베게하려는
계략이었겠지."
하무석이 정색했으므로 이반이 입술 끝을 비틀고 웃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산채의 위치며 내막을 다 알게 되었으니 나만 없애면 앞
길이 구만리로 펼쳐지겠구나."
"소인이 산적질을 10년이나 해온 것은 결코 운이 좋아서 된 것이 아니올시
다."
하무석이 눈을 치켜뜨고 이반을 보았다.
"유천현은 물론이고 중주부 아전놈들을 대부분 수중에 넣고 있지요. 재물이
생기면 꼭 나누어 주었고 하다못해 현 관가의 수노 아들놈이 혼례를 치른다
고 해도 무명 다섯필은 주었소이다."
"허, 거두산에 성군이 나셨구나."
"주막에서 통행패를 보이며 병판댁 집사 김만이라고 하셨다지만 소인은 속이
지 못하시오. 병판댁 집사는 고석이오. 김씨 성이 아니올시다."
그러자 이반이 다시 입끝을 허물고 웃었다.
"그렇다면 내가 누구란 말인가?"
"병판댁 사랑채에 머물던 사내가 금귀라고 했소이다. 그자는 통행패까지 갖
고 있었지요. 그리고 충주부에 넘어온 금귀의 용모파기가 나리와 닮았습니
다."
거침없이 말한 하무석이 청 바닥에 두 손을 짚고 이반을 보았다.
"주막에 있던 유천현의 포졸은 아직 금귀의 용모파기를 보지 못했겠지요. 소
인은 수하의 말을 듣고 긴가민가 했다가 나리의 솜씨를 보고서야 확신을 했
소이다."
"과연 산적질로 10년을 연명할만 하다."
정색한 이반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 내가 금귀다. 그리고 난 대금국황제의 4남 이반이다. 네 형제중 나
만 살아 남았다."
"예?"
벼락을 맞은듯이 놀란 하무석이 눈을 부릅떴다.
"그 그렇다면 나리께서."
"난 바시르 부족에 맡겨져 자랐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일년도 안되어서 병사하셨다는 소문이."
"수양의 첩자들을 속이려고 같은 또래의 아이가 죽었을 때 나로 위장하여 장
례를 치뤘다."
"아아, 나리."
마침내 주르르 눈물을 쏟은 하무석이 이마를 청 바닥에 소리나게 부딪쳤다.
"황제폐하의 혈통이 남아 계셨군요."
"네가 북방군 소속이었다는 말을 듣고 널 베지 않았던 것이야."
"이제야 금귀가 배신자의 가족들만 해친 이유를 알았소이다."
손등으로 눈물을 씻은 하무석의 얼굴이 이번에는 발게 펴졌다.
"나리, 돼지를 잡고 잔치를 벌여야겠소이다. 소인은 다시 태어난 것 같습니
다."
"내가 이반이라는 소문은 퍼뜨리지 마라."
정색한 이반이 하무석을 보았다.
"만일 소문이 퍼진다면 수양은 대군을 보낼 것이다. 그렇게되면 이 산채는
순식간에 토멸된다."
"소인만 알고 있겠소이다."
정색한 하무석이 다시 청 바닥에 이마를 붙였다.
"이렇게 모시게 되어 광영이올시다. 목숨을 바쳐 보필하겠소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부하도 생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