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문집과 목판...선비의 일생 담은 문집, 그 숫자가 '가문의 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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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305개 문중과 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던 문집목판을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했는데, 그 수량이 6만4천여개다. 제작시기와 지역이 다르지만 집단지성의 표상으로 '유교책판'이라 부른다.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보관 중인 유교책판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
옛 선비들은 글을 사랑했다. 글 짓는 일이 일생의 업이었고 글을 곧 도(道)라 여겼다. 고려시대 최자가 쓴 보한집 서문에 글이란 도를 밟아가는 문으로 떳떳한 이치에 맞지 않으면 건너지 않는다고 했다. 최치원의 고운집에는 글을 도의 개화라 했다. 글을 아끼고 사랑한 선비가 세상을 떠나면 후손들은 그의 글을 모아 문집을 만들었다. 문집은 선비의 일생이었고 집안의 가보였다. 문집이 없는 선비는 진정한 문사로 대접받지 못했으니 선비의 평생 염원은 문집 발간이었다.
◆선비의 향기 문집
우리나라에는 고려전기 이전 문집은 거의 전해오지 않는다. 조선 성종 때 서거정이 중심이 되어 만든 동문선에 신라인 김인문· 설총의 시문 몇 편이 수록되어 있고 최치원의 계원필경이 문집으로 유일하다. 강감찬과 김부식 문집이 있었다고 하나 절멸됐고 대각국사 의천의 시문이 절집으로 전해오던 것을 일제 강점기에 해인사에서 문집으로 간행했다.
인쇄술은 12세기 초조대장경을 만들면서 발달하게 되는데 그 결과 무신정권 후반기부터 문집이 전해온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을 필두로 이제현의 익재난고, 이색의 목은집, 정도전의 삼봉집 등 여말 신진사류들이 아호를 딴 문집을 대부분 간행했고, 그 흐름이 이어져 조선은 문집의 나라가 된다.
문집 발간은 옛날부터 어려운 일이었다. 고려시대 이인로의 파한집을 발간하면서 아들 이세황은 발문에 이렇게 썼다. '선친의 유고를 글자 한 자라도 잃어버릴까봐 깨어있을 때나 잠잘 때나 항시 휴대한 세월이 50년이었다. 나의 힘이 부족하여 이루지 못한 것을 안렴사 도움으로 목판에 새기니 찬란한 빛이 선친의 유택(幽宅)을 밝히게 됐다.'
가장 큰 어려움은 비용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관아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후기에는 문집 발간을 유림의 공의로 결정하고 비용을 공동 부담했다. 아울러 서원의 주요 사업으로 추진되면서 간행이 활발해졌다. 비록 한사(寒士)로 살았을지언정 조상의 글을 문집으로 만들어 향당에 올리는 일은 가문의 더없는 영광이었고 문집 발간 인물 수가 가문 위세의 척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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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경전을 인쇄하기 위해 만든 목판이 대장경판이다. 해인사 장경각에 보관된 경판이 8만1천258개이므로 팔만대장경이라 부르고 경판 두께가 3㎝ 내외이므로 대장경판을 한 줄로 쌓아 올리면 백두산 높이와 비슷하다. 2007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문화재청 제공> |
◆인류유산 경판과 책판
금속활자나 목활자는 조정의 교서관에서 교재를 만드는데 사용했고 민간에서는 주로 목판을 만들어 찍었다. 불교경전을 인쇄하기 위해 만든 목판이 대장경판이다. 해인사 장경각에 보관된 경판이 8만1천258개이므로 팔만대장경이라 부르고 경판 두께가 3㎝ 내외이므로 대장경판을 한 줄로 쌓아 올리면 백두산 높이와 비슷하다.
문집도 대부분 목판을 만들어 찍었다. 유림세가 강한 경상도의 305개 문중과 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던 문집목판을 최근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했는데 그 수량이 6만4천여 개다. 제작시기와 지역이 다르지만 집단지성의 표상으로 '유교책판'이라 부른다. 대장경판은 2007년, 유교책판은 2015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판각 재료는 주로 산벚나무, 돌배나무, 고로쇠나무, 박달나무였고 뒤틀림을 방지하고자 바닷물이나 진흙 속에 수개월 담그고 쪘다. 목판에 글을 새기는 사람을 '각수(刻手)'라 부르는데 각수의 우두머리를 '도각수'라 했다. 각수는 평생 판각만 하는 장인이었고 평민보다 스님이 많았다. 고려시대부터 기법이 전승돼 왔으며 숙련된 각수는 3일에 목판 한 장을 새겼고 필사본으로 문집을 만드는 달필가는 하루에 3장을 필사했다고 한다. 먹물은 소나무를 태워 생긴 그을음으로 만든 '송연묵'을 사용했다. 한 권의 문집을 만드는데 평균 150여 장의 목판을 판각했으며 수개월에서 2년 반이 걸렸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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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유교책판' 중 퇴계문집 목판.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
◆각수승
실학자 이수광은 그의 문집 지봉집에 '가야산의 늙은 각수승 묘순은 재주가 뛰어나지만 성품은 순박하다네. 글씨 새기는 것이 이번 생의 업이고 스님 노릇은 허깨비로다'라고 친하게 지내던 용봉사 승려 묘순을 스님이 아니라 각수라고 놀렸듯이 각수승은 많았다.
경상도 유학자 정시한은 그의 산중일기에 '울산 운흥사 스님 연희는 홀로 불경 수 천판을 11년 동안 하루같이 새겼는데, 새벽부터 저녁까지 한결같아 보는 사람은 힘들어도 본인은 팔짱을 끼고 있는 것처럼 편하다'고 했다. 이렇듯 각수승에게 판각은 곧 수행인 듯하다. 인조 때 전라감사 원두표는 각수승 100여 명을 불러 모아 주자전서를 찍었다는 기록이 있다.
선비의 평생 염원이자 집안의 보물
12C 인쇄술 발달되면서 본격 간행
한 권 만드는데 목판 150여장 판각
바닷물에 수개월 담그고 찌고 새겨
수행하듯…솜씨좋은 각수 절에 多
사찰소유 불교경판·문집 2만여점
305개 문중·서원 소장 '유교책판'
"집단지성 표상" 유네스코 유산돼
솜씨가 좋은 각수는 절집에 많았고 나무재료를 구하기 쉬웠으므로 문집 간행은 사찰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퇴계문집 중간본은 안동 봉정사, 서애문집 초간본은 해인사, 노론의 박세당 문집은 성주 쌍계사에서 간행했다. 박세채 문집목판이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으니 간행을 해인사에서 한 듯하다.
최근 문화재청은 전국 114개 사찰에 보관하고 있는 목판을 전수 조사했는데 불교경판이 1만9천여점, 문집목판이 7천5백여점 나왔다. 이처럼 문집의 판각과 인쇄는 사찰에서 많이 이루어졌고 판각한 목판을 사찰 장판고에 그대로 보관했다. 17세기 이후 문중 족보도 대부분 사찰에서 간행했다.
큰 사찰에는 아직 반석과 구유가 남아있는데 반석 위에 닥나무 껍질을 찧고 구유에 닥풀을 만들어 한지를 뜬 흔적이고, 통도사에서는 조정 공물인 한지 만들기가 힘들어 스님들이 몰래 도망갔다는 기록도 있다.
◆문집 수난사
연산군은 무오사화 때 점필재 김종직을 부관참시하면서 문집을 전부 수거하여 불태웠고 문집 편찬자와 간행자를 귀양 보냈다. 점필재집은 중종 때 다시 발간되었는데 사림의 종장인 그의 문적이 많이 없어져 시문만 전해온다.
숙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갈암 이현일은 영남사림으로 남인을 이끌며 노론과 치열하게 싸웠다. 그의 문집이 사후 100년이 지나 순조 때 발간되자 아직 신원이 해배되지 않았다고 어렵게 만든 문집과 목판을 노론 조정에서 불태워버렸다. 갈암집은 왕조가 망하기 직전 1909년에 해배되어 비로소 간행됐다.
노·소론 분당의 단초가 된 인물이 백호 윤휴다. 19세 때 10년 연장의 송시열과 속리산 복천사에서 3일 토론 끝에 송시열이 30년간 나의 독서가 참으로 가소롭다고 자탄하게 만든 인물이다.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탄받아 그의 저술은 왕조 내내 빛을 보지 못하고 사후 250년인 1927년에 백호집이 발간됐다.
◆송자대전
문집 이름에 대전을 붙인 것은 송시열의 문집 '송자대전'이 유일하다. 정조 임금의 문집도 홍재전서다. 원래 송시열 문집은 사후 30년에 간행된 우암집이 있었는데 노론이 장기집권하자 제자들이 세를 과시하면서 문집을 새로 만들었다. 서문은 정조 임금한테 받고 송시열을 조선의 주자로 격을 올리고 주자대전을 본받아 새 문집을 송자대전이라 했다.
송자대전의 크기도 우리 역사상 가장 방대한 215권 102책으로 나랏 돈으로 만들었고 퇴계문집은 51권 31책으로 도산서원에서 발간했다. 송자대전은 크기에 치중하고 내용을 엄선하지 않아 선비의 덕목인 겸양과 절제를 잃어버렸다. 다양한 견해에 사문난적의 굴레를 씌우고 소중화에 매몰돼 주희를 지나치게 존숭하여 후세인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 문집의 꽃은 시(詩)
문집의 꽃은 시다. 모든 문집은 시로 시작한다. 글을 사랑한 우리 조상들은 어디를 가든 자연과 하나가 되어 시흥을 즐겼다. 같은 한시라도 중국시는 어딘가 중국 냄새가 나고 조상이 지은 한시는 우리 정서가 담겨 있다. 세종 임금이 한글을 창제하고 동국시언해를 만들지 왜 두시언해를 만들었는지 안타깝다.
아쉬운 점은 우리 조상의 주옥같은 글이 전부 한자로 되어 있어 국역을 하지 않는다면 읽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이 중심되어 지금까지 우리 고전의 20%가량 국역한 것으로 추정되고 전부 국역하려면 앞으로 30년 더 걸린다고 한다.
고려시대 최고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이규보의 시 '샘 속의 달(詠井中月)'이다. 최근 고교 국어영역 예문으로 나오는데 우리 조상의 글은 이렇게 아름답다.
'산승이 달빛을 탐하여/ 병 속에 물과 함께 길어 담았네/ 절에 다다르면 비로소 깨달으리라/ 병을 기울이면 달빛 또한 텅 빈다는 것을'
여행작가·역사연구가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입력 2021-05-21 발행일 2021-05-21 제35호ㅣ수정 2021-05-21 08: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