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내용 |
충북 영동(永同) 사람이다.경성제1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영창서관(永昌書館)의 직원으로 근무하던 중 장 준(張埈)·김두수(金斗洙) 등과 교류하면서 독립의식을 길러 갔다. 그러던 중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광주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자, 그는 서울에서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 확대에 힘을 쏟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피체 후 그는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투옥되었으나 1930년 9월 예심면소(豫審免訴)를 받아 귀향하였다.1931년 초 영동농민조합(永同農民組合)에 가입하여 농민운동에 종사하던 그는 1931년 4월 농민조합 정기대회를 개최하며 600여 명의 조합원 단결에 힘을 쏟으며, 표면으로는 합법적 농민단체로 위장하면서 비밀결사 활동을 전개하였다.그는 황간지부원 김순화(金順化)·박개천(朴開天)·박기철(朴基喆)·방영준(方英俊)·김완수(金完洙)·박찬영(朴燦榮) 등 10여 명을 비밀결사 요원으로 포섭하는 등 조직 기반을 확대해 갔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적우동맹(赤友同盟)을 조직하였으며, 이 때 그는 정치경제부의 일을 맡았다. 적우동맹은 일제 식민지통치를 전면으로 부정하며 지하 조직을 통한 농민운동의 활성화를 꾀하여 소작쟁의·동맹파업 등을 배후에서 지도하였다.그러던 중 활동이 발각되어 피체된 그는 1933년 6월 13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1933년 6월 1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註·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별집 제2집 345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집 869∼893면 ·동아일보(1932. 8. 5, 1933. 5. 26, 1934. 5. 8) ·조선일보(1931. 4.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