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이순신의 빛나는 면모들
*이순신의 바다 / 황현필 / 역바연 2022년판
1
어린 시절 동네를 주름잡는 대책 없는 골목대장에서부터, 침략하여 승승장구했던 조선에서 교착상태를 거쳐 전쟁 패배의 전운이 짙자 몰래 조선을 빠져나가는 왜군을 섬멸하려다 장렬히 전사한 노량해전까지 이순신이라는 한 위대한 인물의 일대기를 정리한 일종의 전기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에 관한 한 작가가 밝힌 포부는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모든 책들 가운데서 가장 정리가 잘 된 감동적인 기록물이라는 자신감이다.
-이 책을 읽은 후에는 읽기 전과 읽은 후가 극명하게 달라질 것이다.
마치 한 편의 감동적이고 통쾌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기분이었는데, 아마 모든 독서가들도 나와 같이 읽는 순간부터 책을 놓지 못하고 단숨에 읽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 땅에서는 너무나 유명한 인물이라 별도로 밝히고 알려줄 사실이나 이야기는 없을 것 같다. 대신 인간 이순신의 일대기를 소상히 밝힌 이 책에서 그의 면모를 드러내는 기록들을 몇 가지 간단하게 추려봄으로서 기억 속에 저장하고자 한다.
2-야성(野性)의 면모 : 대책 없는 골목대장
어릴 때 틈만 나면 이순신은 마을 아이들을 모아 전쟁놀이를 했고, 그 와중에 이순신이 설치한 진(陣)중으로 마을의 노인이 무심코 지나가다 그에게 거센 항의를 받았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 무렵의 일이라고 한다. 놀이가 끝나고 순신이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는데 그만 참외밭 옆으로 지나가게 되었다. 시장기가 들어 출출하던 참에 순신은 참외를 보자마자 먹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참외밭 주인에게 조금 얻어먹기를 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참외밭 주인의 인심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시골인심’이 아니었던 듯 매몰차게 거절해버린다. 그러자 거절당한 순신은 ‘욱’하는 마음에 집으로 돌아가 말을 타고 와서는 일대 참외밭을 어느 것 하나도 먹을 수 없도록 말 그대로 쑥대밭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얼마나 대책 없는 말괄량이인가. 철모르는 시절 사고를 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대책 없는 동정심을 유발시켜 본다. 장차 이순신이 성장해서 무관으로 길들여지기 전의 야성(野性)의 면모를 엿보게 된다.
3-휘어질지언정 결코 꺽이지 않는 기개(氣槪) : 백의종군
등불 앞의 위태로운 나라를 구했음은 민족의 자랑이자 긍지요, 자부심인데 이 영웅적 면모를 감싸주지 못하는 당시 왕과 조정의 속 좁은 처사는 다시 한 번 국가와 한 인간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만다. 이름 하여 백의종군. 병영의 모든 직권을 박탈하여 평범한 군사 직분으로 전쟁에 나가 국가에 충성할 기회를 준다는 것. 그나마 있던 막강한 전력은 원균의 패배로 칠천량에서 바닥을 친다.
남은 배는 불과 열두 척. 아무리 조선의 판옥선이 튼튼하고 규모가 일본의 전함(세키부네)보다 크다고 해도 함대 규모에서 열 두 척과 수백 척은 전투가 개시되기 전에 이미 기싸움에서 끝났다고 봄이 상식적이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꺽이지 않는 장군의 위대함은 여기서도 재삼 빛을 발한다. 명량대첩과 노량해전에서의 대승이었다. 적선 삼백 여척을 격파한 명량대첩이 끝나고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다.
-명량해전 승리는 실로 천운이었다.
명량해전 이전에는 민족의 영웅이었다면 명량해전의 승리로 장군은 이제 성웅이 되었던 것이다.
4-인간의 면모 : 효자, 애민(愛民)정신
장군은 부모님에 대한 사랑이 극진한 분이다. 함경도 건원보 권관으로 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군의 가장 어려운 시기인 백의종군을 하던 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비보를 들을 때마다 장군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슬퍼했다고 하는데, 딱한 것은 어머니께서 팔십의 노구에 아들의 얼굴을 보시겠다고 뱃길을 따라 올라오시다가 배에서 기력이 다해 숨을 거두신 것이다. 그나마 백의종군으로 권율의 휘하로 급히 가야하는 몸이어서 어머니 상을 채 칠 일도 채우지 못하고 길을 떠나고 만다. 이 얼마나 원통하고 또 원통한 일인가. 난중일기에는 장군의 원통한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4월16일.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리고 나니 비가 크게 쏟아졌다. 나는 기력이 다 빠진 데다 남쪽으로 떠날 길이 또한 급해서 소리 내어 울부짖었다. 다만 빨리 죽기를 기다릴 따름이다. <난중일기>
장군은 백의종군 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는데 완도 고금도로 진을 옮겼다. 그리고 고금도에서 피난민들을 받아들였는데 당시 고금도에는 4만 여호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한 가구당 사오 명이 기거했다고 한다면 적어도 십육 만에서 이십 만의 백성이 장군에 의지해서 진 주변에서 살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는 백성들의 장군을 따르는 마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장군이 노량해전으로 전사하자 수많은 백성들이 운구가 지나가는 길로 나와 울부짖었다고 한다.
5-기록하는 사람(記者) : 철저한 자기 관리
대체로 조선 시대는 기록의 나라로 정의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 일기>는 공적인 기록의 소산물이고 사적인 기록의 산물로는 수많은 선비가 스스로 기록한 일기나, 수필, 여행기 등의 문학과 역사, 과학, 의술, 국방 등에 관한 다양한 기록물들이 있다.
이순신 장군은 무관인 동시에 선비로서의 자세를 평생 견지해 나갔는데 그가 쓴 <난중일기>는 임진란 중에 군사적 업무를 수행하며 남긴 진중일기다. 군사적 업무에 대한 일과와 일과 후의 일상인 생활, 만남, 인간적 고뇌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의 습관은 풍전등화의 전란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그의 불굴의 정신을 발휘하게 만든다.
(202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