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15
복음학교 / 마가복음 8장 1-13절(4천 명을 먹이시다)
1)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3)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4)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5)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6)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더라.
7)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시니
8)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9)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10)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12)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3)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갈릴리 사역의 마지막으로 가고 있습니다. 큰 무리가 또 모였습니다. 이제는 무리가 사흘이나 예수님과 함께 지냈습니다. 이때도 예수님은 휴식할 수 있는 조용한 시간을 찾았지만 모여온 무리 때문에 계획을 취소하고 그들을 가르치며 병을 고쳐주는 일에 몰두하였습니다. 사흘 동안 그들을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가르치는 데 정열을 다 쏟으십니다. 제자들은 다른 데 마음을 쓰고 있지만 백성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청종합니다. 이 기간에 많은 환자도 고쳐 주였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어떤 학자들은 위에 언급된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쳐 주신 사건이 바로 이 기간에 일어난 일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들에겐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다고 예수님이 직접 언급하셨습니다.(3절) 혹 그들이 돌아가다가 기진할 것 같다고 염려도 하셨습니다. 그들을 보시는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주님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고 마음을 토로하셨습니다.(2절) 주님은 연민(compassion)이십니다. 그동안 그분의 연민은 행동으로만 나타나셨지 말로 표현한 적은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분의 마음이 겉으로 확실하게 표현되었습니다.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이 말은 영어의 “My heart goes out to them”이란 말과 비슷한 표현입니다. 영어 표현을 직역하면, “내 심장이 밖으로 뛰쳐나와 그들에게로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스프랑크니조마이”(σπλαδχίζομαι)는 복음서에 13번 언급되었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10:33)에서와 돌아온 아들의 비유(눅15;20)를 제외하고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사용된 단어입니다. 렌스키는 그의 [누가복음 주석]의 “사마리아인 비유” 부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불쌍히 여겼다. 회랍인들은 정서를 심장, 폐, 간과 같은 ”내장“((σπλαδχνα)안에 위치시켰다. 그래서 동사 ”스프랑크니조마이”는 내장까지 움직인다는 뜻, 즉 동정과 연민으로 가득 차게 된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이 단어는 예수와 관련하여 사용된다.(마8:36,7;13,10:35) 이 예화에서 본질적인 것은 이 정서이다. 그것이 다음의 모든 배후에 놓여 있다.” 본문의 내용 중에 많은 부분이 5천 명을 먹이시던 경우와 비슷합니다. “무리를 명하여 앉게 하셨다”는 말도 “식탁에 비스듬히 앉는 것”(recline)을 말합니다. “축사하시고”, “나누어 주시고” 또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거두었다.” 다른 점은 이곳에서는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막7:41)가 생략되었고,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먹은 사람이 4천 명이란 점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제자들과 함께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이 구절도 5천 명을 먹이실 때의 내용과 비슷하게 예수께서 무리들을 흩어 보내시지만, 다른 점은 배를 타고 제자들과 함께 달마누다(dalmaanutha/달마누다 지역은 알려진 바가 없다. 아마도 마가단(Margadan) 지방의 작은 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마15:39) 지방으로 가신 점입니다. 이 두 기적 사건은 많은 부분이 유사하기 때문에 한 사건의 반복 기록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아다니던 상황으로 보아서 같은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났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연민”은 그들을 계속해서 먹이시고 남았을 것입니다. “연민”은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그런 어려운 상황이면 언제나 같은 행동을 반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라마 윌리엄슨(Lamar Williamson.Jr)은 5천 명 급식 사건과 4천 명을 먹이신 사건에서 광주리 수를 우회적으로 해석했던 초대 교부 주석가들의 견해를 그의 [마가복음 주석]에서 소개했습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이나 베데(Bede)와 같은 기독교 교부 주석가들은 이 수치들을 우회적으로 해석했다. 첫 번째 5천 명 먹이신 사건에서 다섯 조각과 5천 명은 모세 오경을 상징한다고 했고, 두 번째 급식 사건은 신약을 상징한다고 했다. 즉 일곱 조각은 성령의 일곱 은혜를 상징하고, 4천 명은 사복음서에 나타난 교회를 나타낸다. 20세기 주석가들은 그 수치들을 유대인들(열두 광주리는 열두 지파)과 이방인들(일곱 광주리는 전 인류의 완성, 또는 이방인 70나라들)과 연결시켰다. 마가복음 8장 19절과 20절에서, 12광주리로 사용된 단어와 7광주리에 사용된 단어가 다릅니다. 12광주리의 경우에는 ”코피노스“(κοψίνος)로 작은 바구니를 말하지만, 이 단어는 후기에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단어였습니다. 7광주리로 사용된 ”스프리스”(σπυρίς)는 좀 큰 바구니를 말하지만, 언어상으로는 헬라인들이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왜 마가는 같은 본문에서 이처럼 광주리란 단어를 각각 다르게 썼을까요? 12광주리는 12지파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제는 12제자로 상징되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7광주리는 이방에 복음이 충만하게 퍼져 나갈 것을 암시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두로와 데가볼리 지역으로 다니는 동안 보이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이 다시 막달라 도시에 등장했습니다. 손 씻는 정결법을 가지고 예수님과 한바탕 논쟁을 벌였던 이후에 처음으로 다시 나타난 것입니다. 마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함께 나타났다고 했습니다.(마16:6) 그렇다면 문제는 심각합니다. 당시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그룹이고 바리새인들은 서기관 그룹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함께 내려온 것은 예수님의 사역에 결정적인 단서를 잡으려고 온 것이므로 아주 불길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거룩한 의자를 버리고 데가볼리에 속한 이방인의 도시에 왔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11절) “표적을 구한다”에서 “구하다”의 단어는 묻기를 시작했다는 말로, 서로 번갈아 가면서 질문을 계속 던졌다는 뜻입니다.(여기서 사용된 “스제테인”(συζηυείν)은 “함께 시험하다. 함께 찾는다. 또는 논쟁하다”는 의미로 현재 부정형으로 계속되는 동작을 말한다) 이들은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구하였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기적을 행하여, 그 기적이 과연 하나님의 권위나 은혜로 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도록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는 뜻입니다. 즉 이들은 예수가 메시아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이 바리새인들도 4천 명을 먹일 때 그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기적을 다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그리고 악한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배를 타시고 그곳을 떠나셨습니다.(13절) “이 세대”란 말은 “가족”을 뜻하며 때때로 전체 이스라엘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루살렘으로부터 파견되어 온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벨로(Belo)는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거절한 내용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파워풀한 예수의 실행은 하늘을 불러오지는 않았다.......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거절 이유를 읽게 만들어 준다.......너희들은 충분한 표적들을 이미 여기 땅 위에서 펼친, 내가 실제로 이룬 사역 속에서 보았다. 무리들이 이미 읽었던 사인(sign)들을......그러므로 이 사인들을 읽어라. 나의 내러티브의 독자가 되어라......더 이상의 하늘로부터 오는 사인은 없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이 땅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마가가 4천 명 먹이신 사건을 통하여 하늘나라의 사인은 모든 사람들이 “먹고(ate) 그리고 만족했다(be satisfied)”고 말하는 새로운 질서 속에서 이미 세상에 보이도록 와 있는 것임을 선언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그들이 요구한 것은 광야에서 사탄이 요구한 것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사탄도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3)고 시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시험을 원천봉쇄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