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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십자가 사랑으로 사랑해 봐요 = 창세기29;31-35
PW : 믿음 BIW : 그래도 사랑하라 AG ; 레아
TS : 믿음은 십자가의 사랑을 가지고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다.
초음파 검사에 그런 것도 나오나요?
산부인과를 새롭게 개원한 한 남자 의사는 쑥스러워 하는 여자 환자들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찾기에 분주했습니다.
어느 날 초음파 검사를 한창 하는데 환자가 여간 부끄러움을 타는 게 아니었습니다.
순간 의사의 눈에는 그 환자가 입고 있는 셔츠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티셔츠에는 방콕에서의 추억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서 의사는 환자에게 조용히 물었습니다.
“방콕에는 언제 다녀오셨어요?”
그랬더니 환자는 놀라면서 물었습니다.
“초음파 검사에 그런 것도 나오나요?”
물론 병원에서 검사하는 초음파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검사하는 초음파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실시하는 초음파에는 모든 것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나타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도, 눈꼽 만큼도 숨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다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인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님들은 오직 주님의 사랑으로 정결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P4.
야곱은 70대 초반에 라반의 집으로 가서 20년을 거주하게 된다.
야곱은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서 7년 동안 라반의 집으로 데릴사위로 산다.
신분이 사위이기는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종이나 다름없는 신분으로 산다.
7년 동안 오직 라헬과 결혼하기 위한 마음으로 열심히 살았다.
7년이 마치 며칠인 것처럼 느낄 정도로 딴 생각하지 않고 오직 라헬만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일하면서 살았다.
결혼식이 거행되는 날 라반의 계략에 의해서 라헬과 결혼하지 못하고 언니인 레아와 결혼하게 된다.
야곱은 심하게 반발한다.
반발하는 야곱에게 라반은 다시 7년을 일하는 조건으로 라헬과도 결혼시켜 준다.
야곱은 외삼촌의 집에서 14년은 결혼비용을 마련하는 조건으로 일하게 된다.
그런 후 6년 동안은 자신의 가업을 일으키는 일에 매진하게 된다.
야곱이 레아와 라헬과 결혼한 나이는 70대 후반이다.
그러면 레아와 라헬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이들은 몇 살 차이가 날까?
정확하게 측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30-40년 차이가 나지 않을까 싶다.
라반에게 이 두 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자녀들이 있다. 많은 자녀들 중에서 하나님은 레아와 라헬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 삼아주시기 위해서 준비시켜 주신 것이다.
아람족의 딸들은 조혼하는 민족이다. 딸을 일찍 시집보내는 민족이다.
레아와 라헬은 이미 결혼할 만큼 조숙한 여인들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아람족의 남성들과 결혼할 수 있는 나이이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두 여인을 야곱과 결혼하여 하나님의 언약 백성 삼아주시고, 이스라엘 민족의 기초돌을 넣기 위해서 아람족의 남성과의 결혼을 할 수 없도록 막고 계신다.
하나님은 야곱을 밧단아람으로 보내시고, 레아와 라헬을 결혼시키면서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삼아주고 계신다.
레아는 야곱과 결혼했지만 야곱은 자신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동생 라헬과만 함께 하려고 한다.
순서를 따라서 자신과 잠자리만 할 뿐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다.
레아는 너무 너무 속상하다.
모든 관계를 청산하고 싶은 마음도 든다.
그럴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레아의 마음을 다독거리면서 ‘그래도 네 남편을 사랑하라’고 속삭여 주신다.
레아는 야곱을 사랑할 수가 없다.
① 남편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어쩌다가 순서에 따라서 잠자리만 할 뿐이다.
사랑이 없는 자녀를 낳게 된다.
내가 남편의 사랑을 받고 싶지 애 낳는 공장처럼 살고 싶지 않다.
② 하나님께서 자식을 낳도록 잉태시켜 주시니 자식을 낳는다.
신랑은 내가 자식을 낳아주어도 똑 같다.
자식을 낳아주면 바뀔까 기대하는데도 전혀 변화가 되지 않는다. 바뀌지 않는다.
③ 동생이 미워죽겠다.
차라리 동생이 없었으면 나 혼자 야곱과 결혼해서 향복하게 살고 있을텐데...
내 동생이지만 해도 해도 너무 하는 것 같다.
아버지가 원망스럽다.
어떻게 한 남자에게 우리 자매를 함께 시집보내서 이런 고생을 시킨단 말인가?
생각 같으면 당장이라도 이혼해서 독립하고 싶다. 애들이랑 같이 따로 나가서 살고 싶다.
D4.
①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세워주시는 하나님
라반의 집은 아람족이다. 이방인이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은 오직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연결되는 가족에게만 상속되어진다.
아브라함의 8아들 중에서도 이삭만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다. 다른 7명의 아들은 이방민족이 된다.
이삭의 2아들 중에서도 야곱만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다. 에서는 에돔족속이 되어 이방인이 된다.
라반의 가족은 데라의 후손이지만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될 수 없는 민족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라반의 아들들과 다른 딸들은 이방인으로 놔두시고, 오직 레아와 라헬만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삼기 위해서 야곱과 결혼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두 여종, 빌하와 실바는 주인을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어진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택한 백성만을 언약백성으로 삼으신다.
아브라함의 후손, 이삭의 후손, 야곱의 후손이라는 혈통적인 의미보다는 하나님께서 직접 언약백성으로 삼아주시고 불러주신 백성만을 언약백성으로 삼아주시는 것이다.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세상의 수많은 인류, 사람들 중에서 우리들을 특별히 선별하여 직접 뽑아주시고, 불러주시고, 감동을 주시면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는 것이다.
레아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선택하시고 불러주시고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삼아주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남편 야곱이 자신을 제대로 사랑해 주지 않아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은 믿음으로 야곱을 사랑하라고 권고하신다.
믿음으로 야곱을 사랑하는 길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는 길이다.
② 6남1녀의 애미가 되는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레아와 라헬 두 여인 중에서 남편의 사랑을 덜 받고 있는 레아를 측은히 여겨주신다.
남편의 사랑을 받는 수준으로 보면 동생보다 레아가 더 약한 사람이 된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대신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더 많은 축복을 입혀 주신다.
어쩌다 한 번씩 순서에 따라서 남편과 부부관계를 맺을 때마다 하나님은 레아의 태를 열어주신다.
레아는 자신의 여종 실바가 낳은 두 아들까지 합치면 8남1녀의 애미가 되는 여인이 되는 축복을 받는다.
종이 낳은 자식은 종의 자녀가 아니라 주인의 자녀가 되기 때문이다.
중동지역에는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이 여인에게 주어지는 축복 중에 가장 큰 축복이다.
실바는 두 아들을 낳았지만 실바가 낳은 두 아들은 곧 레아가 낳은 아들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레아는 8지파의 애미가 되는 축복을 받는 여인이 된다.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서 2/3에 해당되는 지파의 애미가 되는 축복을 받는다,
하나님은 약한 자의 편에 서시는 분이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에서도 누가 봐도 확 드러나는 것은 강한 자는 골리앗이고, 다윗은 약한 자이다. 그럴 때 하나님은 약한 자의 손을 붙잡아 주신다.
사울 왕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사울 왕과 다윗을 보면 누가 봐도 강한 자는 사울 왕이고, 다윗은 약한 자이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약한 다윗의 손을 붙들어주신다.
성경에는 강한 자와 약한 자를 구분했을 때 강한 자의 손을 들어주시기 보다는 약한 자의 손을 더 많이 붙잡아주시고 위로하시고 힘주시고 승리케 하시는 분이다.
에서와 야곱의 관계에서도 강한 자는 에서이고, 야곱은 약한 자이다. 그럴 때 하나님은 약한 자의 손을 붙잡아주시고 축복해 주신다.
하나님은 약한 자의 마음을 붙잡아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분이다.
레아는 라헬보다 언니이기 때문에 레아가 라헬보다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남편의 사랑을 받는 측면에서는 레아가 라헬보다 더 약한 자이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약한 자의 손을 붙잡아주시고 많은 축복으로 감싸 주신다.
하나님은 약한 자의 손을 뿌리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약한 자의 손을 붙잡아주시고 조금이라도 더 많이 주시고 축복해 주시려고 하신다.
우리들이 세상에서 누군가와 비교했을 때 내세울만한 조건들이 하나도 없고, 약하다고 한다면 실망, 좌절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더 많은 은혜를 주실 것이고, 사랑해 주실 것이고, 축복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러 약한 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약한 자라는 것 때문에 기죽거나 좌절하거나 포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③ 남편을 따라서 가나안으로, 언약의 나라로 이주하게 하시는 하나님
야곱이 밧단아람 처갓집에서 데릴사위로, 종으로 20년 동안 살고 있다.
어느 날 주변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예전같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더욱 하나님께서 라반의 재산을 빼앗아서 야곱에게 주심에 따라서 야곱의 재산은 늘어만 가고, 라반의 재산은 눈에 확 뜨일 정도로 줄어주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라반의 식솔들이 야곱을 좋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럴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에 찾아오셔서 ‘네 고향, 아버지의 고향, 할아버지의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은 야곱은 자기 아내들과 자녀들을 비롯한 식솔들을 불러 모아서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노라.’고 말한다.
이 때 레아를 비롯한 식솔들도 야곱을 따라 가겠노라고 다짐한다.
그래서 레아는 친정을 떠나서 이제는 시댁으로,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게 된다.
시집간 여인이 시댁으로 돌아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이제 시댁으로 가게 되면 영영 친정식구들은 볼 수 없다.
부모형제들을 비롯한 식구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남편을 따라서 가나안으로 돌아간다면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모른다.
특히 에서 시아주버니가 남편 야곱을 해치기라도 한다면 어쩌겠나?
시아주버니가 남편이 자신이 받을 복을 가로챘다고 하면서 반드시 죽이겠다고 하지 않았나?
남편은 아무런 힘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데 남편이 시아주버니로 인해서 좋지 않은 일을 당하게 된다면 우리들은 그야말로 쪽박 찬 신세가 되는 것이지 않은가?
그러면 많은 애들이랑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그러니 남편을 따라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시련이 일어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도 레아는 믿음으로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을 따라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만약에 레아가 남편을 따라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거절하고 여전히 밧단아람에서 애들이랑 살겠다고 고집 피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남편이 제대로 자신을 사랑해 주지도 않는데 이번 기회에 갈라서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여기서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아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밧단아람에 머물러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되었다면 레아는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지 못한다.
애들도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될 수 없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려고 많은 자녀들을 주셨는데, 자녀들에게 그 축 복을 받을 기회를 빼앗아버리는 꼴이 되고 만다.
레아는 많은 어려움과 시련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믿음으로 남편을 사랑하면서 남편을 따라서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는 것이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레아에게 8지파의 애미가 되는 축복을 주신다.
8아들은 각각 지파를 형성하는 아들들이 된다.
④ 자식들 때문에 가슴 아픈 한을 갖고 살아야만 되었던 여인.
우여곡절 끝에 믿음으로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을 따라서 가나안 땅으로 이주했는데 레아에게는 생각하기도 싫은 사건들이 터져 나오게 된다.
남편 야곱의 상황판단을 잘못하고, 믿음으로 살지 못함에 따라서 벧엘로 올라가야 되는데, 벧엘로 올라가지 못하고 세겜성으로 이주함에 따라서 일어난 사건이 바로 디나 사건이다.
디나가 세겜성 추장의 아들로 인해서 성폭행을 당하고, 이 사건으로 인해서 레아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살인자가 된다.
그런가하면 첫 아들 르우벤은 라헬의 여종인 빌하와 동침하는 사건까지 발생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르우벤은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장자권을 빼앗기게 된다.
르우벤도, 시므온도, 레위도 아버지 야곱이 임종하기 전에 축복할 때 축복다운 축복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되고 만다.
디나도, 르우벤도, 시므온도, 레위도 레아의 자녀들이다.
레아의 자녀들이 좋지 않은 사건에 휘말리면서 레아는 자식들 때문에 가슴 아픈 삶을 살아야 되는 여인이 된다.
레아가 낳은 7남매 중에서 4남매가 좋지 않은 사건에 연루되는 것이다.
그러니 레아는 많은 자식들을 낳는 복을 받았지만, 그 자식들 때문에 마음 고생한 여인이다.
평생 자식으로 인해서 가슴 절절이 아픈 여인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야 되는 여인이다.
사람이 일평생 살아가면서 항상 좋고 행복하고 즐겁고 축복받는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좋지 않은 일들도 수없이 많이 일어난다. 불행하다고 생각되는 일들도 수 없이 일어난다.
슬프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들도 수없이 일어난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축복을 받는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좋은 일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항상 좋지 않은 일들, 슬프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들만 있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가슴 아프고 저리고 멍들고 어려워서 울어야 되는 일들도 있다.
때로는 기쁘고 즐겁고 행복해서 호탕하게 웃을 수 있는 일들도 있다.
그래도 우리들은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다.
⑤ 넷째 아들 유다의 후손을 통해서 인류의 메시야가 태어나는 축복을 입은 여인
하나님은 레아의 4째 아들인 유다의 후손을 통해서 인류의 구원자, 메시야를 보내주신다.
이처럼 하나님은 레아를 사랑해 주신다.
레아를 축복해 주신다. 레아의 양손을 붙잡아 주신다.
가슴 아프게 살았던 만큼 하나님은 레아의 가슴과 마음을 쓰다듬어주시면서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축복해 주신다.
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위로와 격려해 주시면서 축복으로 감싸주신다.
L4 & B4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사랑해야 되는 줄은 알지만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대상들이 있다.
나를 어려운 곤경에 처하게 만들기도 하고, 상처주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고, 망하게 만들기도 하고, 돌이킬 수 없도록 시련을 주기도 한다.
나를 오해하여 핍박하기도 하고, 멸시하고, 조롱하기도 하고, 돌아올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지게도 만들기도 한다.
입만 열면 험담하고 비난하고 욕하고 기분 상하게 만드는 이들도 있다.
외도하고, 도박하고, 게임에 중독이 되어있고, 마약을 하고, 폭행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냥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이리 생각해도 사랑할 수 없고, 저리 생각해봐도 사랑할 수 없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들조차도 사랑하라고 하신다.
충분히 사랑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사람은 사랑하지 말라고 해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을 해봐도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앞에 두고서 그래도 사랑하라고 감동을 주시며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살리고 회복시켜서 하나님의 자녀삼아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랑만 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만 우리들은 사랑할 때도 있지만 사랑하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다.
사랑할 수 있는 조건을 찾으라고 한다면 몇 개 찾을 수 없을 것 같은데, 사랑하지 못할 이유들을 찾으려고 하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수없이 많다.
사랑할 수 없는 조건들이 수없이 생각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가지고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뭘까? 주님의 십자가 사랑은 자신을 십자가에 꽝꽝 못 박아 죽이는 사랑이다.
죽지 않고서는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할 수 없고, 설령 체험한다고 해도 끝까지 그 십자가의 사랑을 누리지 못한다.
십자가 사랑을 하려고 하면 내가 죽지 않으면 십자가의 사랑을 할 수 없다.
내가 먼저 주님의 십자가에 죽어야만 십자가의 사랑을 할 수 있다.
내가 십자가에 죽어서 십자가 사랑을 하게 되면 우리들은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는 영광도 누리게 된다.
예수님께서도 사랑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듯이 우리들도 그들을 기꺼이 사랑하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어야 한다.
죽어야 다시 산다. 죽지 않으면 다시 사는 것도 없다.
믿음은 죽는 것이다. 믿음은 죽어야 다시 사는 것이다.
믿음은 죽어서 사랑하는 것이다. 믿음은 죽어서 다시 살고 회복시키는 것이다.
믿음은 주님의 십자가에 우리의 모든 것들을 죽였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하심으로 다시 살아서 회복하는 것이다.
믿음은 도무지 사랑할 수 없을 이들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되는 것들 때문에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주님은 그래도 그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이리저리 생각하고 계산해도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원수같은 이들을 기꺼이 품어주고 아껴주고 애정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은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사랑은 피동이 아니라 능동이다.
믿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피동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레아에게 축복해 주신 것처럼 우리들도 축복해 주신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지만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들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고 체험하고 고백하고 누리는 사람이 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이 있다면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내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한 십자가 사랑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십자가 사랑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 사람은 축복된 사람이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뭐라 뭐라 중얼거린다 해도 우리들 자신만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 깊이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사랑, 주님의 사랑, 성령님의 감동을 입으면서 사는 사람이 정말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면서 사는 사람이다.
우리가 그래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면 그 축복은 바로 우리들의 것이 된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깊이깊이 되새김질하면서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가득 채워지는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아멘.
대전와우리교회http://cafe.daum.net/GRACEOF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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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설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말씀 스크렙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좋은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