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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년 전에 찰스 다윈의 「인간의 유래」가 출간되었다
우리는 올해 파리 코뮌 150주년을 기념한 바 있다. 또한 우리는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책,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도 기념해야 한다. 이 책의 초판은 파리의 노동 인구들이 대포들을, 아돌프 티에르(Adolphe Thiers)가 몰수하기에 앞서, 몽마르트르(Montmartre) 언덕 등지로 옮기기 며칠 전인 1871년 2월 23일에 런던에서 출간되었다.
과학의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혁명
이 두 사건의 근접성은 그 날짜보다는 정치적이다. 19세기 후반에 자본주의는 모든 곳으로 팽창하여 산업, 기술, 사회, 과학 같은 모든 수준에서 사회에 혁신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진보는 아주 현실적이었지만, 직선적이지도 조화롭지도 않았다. 자본주의는 가스와 전기 사용을 촉진했지만, 프롤레타리아트를 끔찍한 고통에 처하게 했고, 식민지들에서 끊임없는 대량학살을 수행했으며, 인간성을 말살했다. 자본주의는 여전히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에 기초한 궁핍한 사회이지만, 생산력의 어마어마한 발전을 초래했다. 그러한 사회에서, 적어도 그 초기에는 과학이 엄청나게 발전했다. 그것은 지식의 축적과 인간 문화의 발전에 기여했다. 하지만 또한 종종 그것은 과학이 무력하게 부르주아지에 지배당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부르주아지는 과학적 발견의 성과들을 포착하여 인간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윤과 전쟁, 파괴와 죽음을 향하도록 했다. 이것은 오늘날 아주 분명한 사항인데, 과학적 진보의 대부분(보기를 들어 우주 정복, 인터넷, 인공지능)이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요청을 통해서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점차 그것의 역사적 임무의 끝에 도달하게 되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인간에 의해서 축적된 문화적·과학적 유산의 수호자가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썼다. “계급으로서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대한 문화적 형제애로서 인류의 발전과 인류의 미래와 연결한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의 투쟁과 문화 전반의 이익 사이에 밀접한 관계를 낳았으며, 그리하여 오늘날 모든 나라의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트를 (이제는 상속권을 상실한 의붓자식이 된) 저 부르주아 문화의 지식과 기예에 대한 가장 열렬하고 가장 이상주의적인 옹호자로 만드는 아주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현상을 창출한다.”1)
분명 맑스주의는 과학이 아니지만, 상이한 영역에서 일어난 과학적 진보를 점진적으로 통합한 과학적이고 투쟁적인 이론이며, 또한 유물론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봉건제 안에서 부르주아지와는 반대로)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아무런 재산도 지니지 못함으로써, 그 의식과 이론을 최고도로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을 해방하는 동시에 인류를 계급 사회의 감옥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는 이유는 프롤레타리아의 의식, 혁명 이론(맑스주의), 단결, 자체의 조직, 그리고 세계 혁명 정당으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윈의 발견 그리고 과학 전반의 발견이 아주 중요한 이유가 그것이다. “인간의 유래” 문제에 착수하면서, 1868년 2월 4일 다윈은 새로운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두 번째 에피소드로 넘어갔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영국 해군함 비글(Beagle)호로 세계 일주 여행(1831-1836년)을 하고 돌아오면서 시작되었는데, 이때 그는 「종의 변화에 관한 노트북들」(Notebooks on the Transmutation of Species)을 쓰기 시작했다. 여행하면서 관찰한 모든 것과 참고문헌을 나열한 이 강렬한 저술은 1859년 「종의 기원」의 출간으로 결실을 보았다.
엄격하게 과학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이 저술에서 그는 생명 세계의 계보학이 존재하며, 유기체의 여러 세대가 다양화를 통해 이어져 왔다는 것을 예증했다. 그리하여 그는 “변이를 동반한 계승”과 그것의 원동력인 “자연 선택”을 발견했다. 모든 유기체는 완전히 변칙적인 변화를 나타냈다. 환경 때문에 변화할 필요가 있거나 환경 자체가 변했을 때, 유리한 변이가 선택되어서 어떤 개체들은 더 많은 자손을 낳고 다른 개체들은 점진적으로 제거되도록 만들었다. 조만간 이 과정은 상대적 안정성을 지니는 새로운 단계에 부합하는 새로운 종의 출현을 낳았다.
자연 선택 이론은 변형 관념을 뒷받침하고 활력을 불어넣었는데, 이 관념은 라마르크(Lamarck) 이후에 획득(후천) 형질의 전파 이론으로 상징되는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제 각종 역사(계통학)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그 종이 이전에 어떤 종의 산물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몇몇 종의 공통 조상을 재발견함으로써 지구상의 생명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것으로 형질 변화에 대한 견고한 과학적 기초가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이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두 번째 에피소드는 훨씬 더 중요했다. 「종의 기원」 이래로 형질 변화가 일반적으로 인정되었으며 “인간이 유인원의 후손이다.”(더 정확하게는 사람과 유인원은 공통의 조상을 지닌다)는 사실이 대략적으로나마 이해되었다.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으로 다윈은 두 가지 새로운 중요한 과학적 진보를 제시했다.
- 종으로서 인간(homo)은 분명 동물들의 계열에 속했지만, 그것의 출현은 파열 없이 이루어졌다. 본성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만 있었다. 갑작스러운 출현이 아니라 출현의 과정이었다.
- 인류의 출현과 더불어, 선택과 도태(가장 유능한 것이 선택되고 가장 적절하지 못한 것이 도태되는 것)는 점차 약해져서 최약자와 최빈자에게 혜택이 가는 경향이 있었다. 존재하기 위한 싸움은 동정심의 점진적인 발전과 서로에 대한 상호 인정에 의해 대체되었다. 자연 선택은 인간종의 출현과 통합되는 문명을 생산했다. 그것은 연대, 집단적 합리성 그리고 도덕적 정서의 발전으로 특징지어진다.2) 이 진화는 사랑과 합리성을 통합하여, 문명 진보의 중요한 족적인 이타주의를 제도화하기에 이르렀다.
진화의 반전 효과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이 두 가지 결과는 생물학적 변화, 사회적 본능, 행동, 합리적 능력도 유전으로 전달된다는 사실에 의해 설명된다. 다윈에게서 우리는 자연이 문명으로 이행하는 것을 목격하는데, 그것은 최약자의 도태로 특징지어지는 자연 선택이 덜 유능한 자의 보호로 이끄는 사회적 본능을 선호하게 된 이래로 파열 없이 이루어진다. 도태의 도태가 있다. 이 파열 없는 전복을 설명하기 위하여, 파트리크 토르(Patrick Tort)는 “진화의 반전 효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3) 그것은 도태의 억제가 자연 선택 자체의 중요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다시 말해 문명은 도태적 선택을 통해서 유리한 것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종의 기원」이 출간되었을 때, 지배계급 특히 그 종교와 과학 권위자들의 저항은 맹렬했다. 그렇지만 진화 이론의 수용은 시간의 문제였다. 자연 선택의 행위와 그 결과는 즉각적으로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농부, 식물 재배자, 가축 사육자들의 인공적 선택의 사례들이 있었으며, 부모와 그 부모에게서 나온 아이들 사이에서처럼 어떤 종들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맑스와 엥겔스는 새로운 이론을 열렬히 환영했다. 1860년 12월 19일에 맑스는 엥겔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보냈다. “이 책에서 우리의 관점에 대한 역사적-자연적 토대를 발견할 수 있다.” 경험적·기계적 유물론을 넘어서기 위해 싸우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연 과학에서 또다시 동맹 세력을 발견한다. 1848년에 「코뮤니스트 선언」이 출간된 이후, 1859년에 「종의 기원」은 다시 현대 유물론이 생명과 사회 양쪽 모두에서 변형 과정을 설명하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맑스와 엥겔스에게 있어 이러한 호의적인 반응은 회의론으로 그리고 그다음 전면적 거부로 대체되었다. 1862년 6월 18일에 맑스는 엥겔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동물과 식물들 가운데에서, 다윈이 분업, 경쟁, 새로운 시장 개방, 맬더스적 생존 투쟁을 지니고 있는 자기 자신의 영국 사회를 어떻게 인지하는지 보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맑스와 다윈 사이의 이 만남은 맑스주의 이론적 발전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던 것 같다. 1907년에 작성된 플레하노프(Plekhanov)의 무지의 사례를 보라. “많은 사람이 변증법을 진화의 학설과 혼동한다. 사실 변증법은 진화의 학설이다. 하지만 그것은 속류 ‘진화론’과는 본질적으로 다른데, 속류 진화론은 자연도 역사도 급속한 진보를 창출하지 못하며 세상의 모든 변화는 점진적으로만 일어난다는 원리에 주로 의존하고 있다. 이미 헤겔은 그런 식으로 이해된다면 진화의 학설은 모순적이며 터무니없는 것임을 보여주었다.”4) 다윈에 대한 이 빈약한 해석의 결과는 연속성에 대한 거부와 “질적 도약”이라는 사변적 관념으로 표현된다.
맑스주의와 다윈주의
이러한 실수는 1859년부터 영국과 독일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사회 다윈주의가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비롯했다. 다윈은 「인간의 유래」를 출간하기 전에 10년을 기다렸는데, 그 책에서 그는 자신의 진화 이론을 마침내 인간에게 적용했다. 그는 자신의 인류학 저술의 출간이 폭발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비판에 답하고 논박하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그리고 여러 개정판을 감독하고 검토하여 「종의 기원」을 완성했다.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는 종합적인 진화의 철학을 창조함으로써 이득을 보았는데, 그것은 자유주의에 고무되어 다윈이 식물과 동물의 세계에 명백하게 한정했던 원리인 생존 투쟁, 약자 제거의 원리를 인간에게 적용한 새로운 체계였다. 다윈은 스펜서나 멜더스로부터 자기 자신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이미 너무 늦었고, “사회 다윈주의”라는 사기 이론은 곳곳에서 존재를 드러냈다. 그 이론의 가장 열렬한 옹호자 중 한 사람이 카를 포크트(Carl Vogt)였는데, 그는 맑스를 비방했던 나폴레옹 3세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인간의 유래」의 프랑스어판 번역을 책임졌던 인물이다.5)
점진적으로, 1980년대 내내, 그다음 다윈 탄생 200주년을 맞이한 2009년에 우리는 그의 진정한 인류학이 (재)발견되는 것을 목격했다. 자본주의, 경쟁과 전쟁, 그리고 약탈적인 수컷의 행위가 증대하는 속에서 가장 불리한 조건을 지닌 층들의 위태로움은, 우리가 유리한 변화의 선택, 덜 유능한 자의 제거, 그리고 생존 투쟁이 인간 사회에서도 여전히 지배적인 요소라고 생각하도록 이끌 수 있었다. 이것이 자본주의를 자연적이고 이로운 숙명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사회 다윈주의가 성공하는 토대이다. 강자가 약자에게 손실을 입혀 진보하도록 방치함으로써, 국민과 국가는 진보하고 존재를 각인시키고, 결국에는 군사적·경제적 경쟁에서 승리하고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착취율을 증대할 수 있다는 것이 사회 다윈주의의 입장이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그러나 실제 사정은 아주 다르다. 문명은 반전을 통해서 발전한다. 진화의 반전 효과에 대한 설명에서 보았듯이, 연속과 불연속이 모두 있다. 제거적 자연 선택으로부터 정서적·사회적 연대(“문명화된” 사회라면 널리 퍼져 있다고 추정되는 것)로 나아가는 과정을 묘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파트리크 토르가 설명하듯이 단절이 인류애를 낳는다기보다는 단절이 인류애의 산물이라고 결론 내려야 한다. 비로소 종은 어쩔 수 없이 환경에 순응하는 것(가장 유능한 자를 선택함)이 아니라 생존 수단을 생산함으로써 환경을 개조하고 변형시킬 수 있다.
환경 운동가들이 반복해온 어리석은 행위와는 반대로, 자연을 파괴하고 있는 것은 인간 종 그 자체가 아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인간이 자연에서 직접 먹을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생존 수단을 생산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인간종이 아니라 특정한 생산 방식, 즉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는 생물 다양성을 공격하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유기적인 균형을 파괴한다.
도구 제작이 종으로서 인간의 독특한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잘못을 범했다. 하지만 과학적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의 동물 종(척추동물, 무척추동물, 포유동물, 조류, 파충류, 물고기 등)은 도구를 제작하거나 사용할 수 있으며 인간(호모) 속의 출현에 따른 근본적인 변화는 모든 생활필수품의 생산이다.
다윈과 맑스 사이의 조화가 마침내 가능하게 되었으며 맑스의 첫 번째 반응은 올바른 것이었다. 다윈이 발견한 이념은 맑스의 저작의 한가운데에 포함되었다. 보기를 들어, 맑스와 엥겔스가 1846년에 작성한 「독일 이데올로기」에 나오는 한 구문은 진보에 대해서 다윈과 동일한 문구를 사용하고 있다. “인간은 의식, 종교, 또는 그가 원하는 다른 무언가에 의해 동물과 구별될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을 동물과 구별하기 시작한 것은 생존 수단을 생산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것은 그들이 육체적 조직에 의해 규정되는 단계이다. 자신들의 생존 수단을 생산함에 의해 인간은 간접적으로 그들의 물질적인 삶을 생산한다.”
연속성은 특히 “육체적 조직에 의해 규정되는 단계”라는 정식화를 통해서 완전하게 인정된다. 반전 효과라는 개념을 통하여, 진화적 연속성과 “질적 도약”도 유물론적으로 그리고 변증법적으로 재통합된다.
문명을 창조하면서, 인간종은 자연과 생물학적 활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강렬한 퇴화의 국면에서 야만과 최약자 제거가 명백하게 다시 나타나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 역사의 기초는 아니다. 문명은 생산양식들의 연쇄라는 형태를 취해왔고 결국에는 자본주의를 낳았다. 자본주의에서는 인간에 의해 창조된 사회적 힘에 대한 통제력 상실이 모든 범위에서 나타났고, 그리하여 그 힘이 인간에게 적대적이고 인간의 생물학적 자연적 뿌리에 적대적이게끔 변화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프롤레타리아혁명만이 인류가 자기 자신의 발달 과정에 대한 통제력을 재설립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부르주아지의 권력을 전복시킴으로써, 그리고 인류가 지구라는 우주선을 타고 여행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마주치게 될 새로운 생물학적·전염병적·생태적 문제들에 대처할 수 있는 사회를 창조함으로써 이것은 가능해질 것이다.
이론 대 허무주의
자연 선택을 수단으로 한 수정된 유전 이론과 다윈주의 인류학이 온전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았다. 그런데 지금껏 다윈주의 인류학은 왜곡되고, 무시되고, 사방에서 공격받았다. 그리고 창조론자와 종교적 근본주의자들뿐 아니라, 「종의 기원」(과학적 가치를 인정한다)과 「인간의 유래」(철학 저작으로 소개한다)를 분리하라고 말하는, 다시 말해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다윈을 분리해버리는 모든 관념론자에 의해서도 오늘날 계속해서 공격받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그리고 그들의 혁명적 관점)가 사회 현장으로부터 잠시 자리를 비운 현 상황에서, 과학과 모든 과학적 이론을 거부할 길은 열려 있다.
17세기에 아일랜드 아마(Armagh)의 대주교 제임스 어셔(James Ussher)는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의 전날 밤에 창조가 일어났다고 포고했다. 심지어는 그 시간이 토요일 밤에 시작되었는지 일요일 아침에 시작되었는지를 두고 격렬한 토론도 있었다. 19세기에도 여전히 대다수 과학자는 여섯 번째 날에 인간과 가축이 “그 종류대로” 창조되었다는 성서의 전설을 옹호하고 있었다.
오늘날 과학에 대한 음모론들, 불합리한 믿음들, 그리고 회의론은 기존 사회에 의해 제공된 전망의 부재를 반영한다. 그와는 반대로 착취에 맞선 노동계급의 싸움과 노동계급의 혁명적 전망에 대한 확신은 의식의 자유로운 발전 그리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의 자유로운 발전을 수반할 것이다.
2021년 6월 20일
A. Elberg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옮긴이 ┃ 김종원
<주>
1. 로자 룩셈부르크
https://www.marxists.org/archive/luxemburg/1909/national-question/ch05.htm
2. 아래 사이트 참조
https://en.internationalism.org/icconline/2009/04/darwin-and-the-descent-of-man
3. Patrick Tort, The Darwin Effect (2008).
4. Plekhanov, The Fundamental Questions of Marxism.
5. Anton Pannekoek, Patrick Tort, Darwinism and Marxism (2011).
<출처>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7049/descent-man-charles-darwin-came-out-150-years-ago-y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