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몸담아온 공직 생활의 마지막 페이지는 낯선 객지인 포항에서 쓰였다. 집을 떠나 홀로 마주한 영일대의 바다는 아늑하기보다 서늘했고, 창가로 불어오는 늦봄의 밤바람은 객지 생활의 외로움을 은근히 자극하곤 했다.
어깨 위에 얹힌 마지막 책임감과 낯선 곳에서의 시름이 묵직한 오라처럼 나를 감싸던 날들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낯선 항구 도시의 색다른 정취는 은근한 호기심에 발동을 걸며 나의 발길을 이곳저곳으로 이끌기도 했다. 익숙한 도시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갯내음 섞인 공기와 바다를 낀 이국적인 풍경들이 쓸쓸함의 틈새로 묘한 설렘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영일대 바다 근처와 해안로에서 나는 뜻밖의 소소한 위로와 마주했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이 선물한, 찬란하게 피어난 장미정원이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일제히 피어난 포항시의 시화(市花), 전 세계의 명품 장미들이 저마다의 유래와 빛깔로 서걱한 퇴근길의 이방인을 격하게 반겨주고 있었다.
저마다 이름표를 단 각양각색의 그 수많은 장미 송이들이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줄 때마다 저마다의 사연과 몸짓으로 내게 말을 건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세계장미협회 명예의 전당에 빛나는 순백의 '아이스버그(Iceberg)’였다. 독일어로 ‘백설공주(Schneewittchen)’라는 본래 이름처럼 맑고 깨끗한 그 자태와, 네덜란드에서 화훼용으로 귀하게 육종되어 단단하게 뭉쳐진 백장미 ‘티네케(Tineke)’의 흐트러짐 없는 모습은 서로 닮은듯 각자의 유니크한 개성을 지녔다.
그 옆으로 대조를 이루며 피어난 검붉은 장미들은 청춘을 다 바쳐 뜨겁게 일했던 지난날의 열정을 상기시켰다. 베니스의 곤돌라 사공이 부르는 노래에서 이름을 딴 정열의 핏빛 '바카롤(Barkarole)’은 최고급 벨벳 같은 흑장미의 매력을 뿜어냈고, 프랑스 와인빛을 머금은 ‘부르군트 81(Burgund 81)’과 작은 망울만 영근 '루지 메이앙(Rouge Meilland)’의 묵직한 붉은색은 프랑스 장미 명가의 자부심이 넘쳐 흐른다.
신대륙 발견 500주년을 기념해 명명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의 성숙하고 고전적인 오렌지빛 붉은 향기와, 꽃잎 안쪽은 진빨강인데 뒷면은 은백색을 띠는 반전의 장미 ‘러브(Love)’는 인생의 열정과 순수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듯했다.
영일대의 밤바람을 타고 번지던 향기는 또 어찌나 깊던지.
프랑스 장미 명가가 세기의 배우 그레이스 켈리에게 헌정한 정말 진한 향의 '프린세스 드 모나코(Princesse de Monaco)’는 핑크빛 립스틱을 바른 듯한 우아함으로 눈과 코를 사로잡았고, 프랑스 역사적 건축물의 이름을 딴 향기지수 별 다섯의 '아바에 드 클러니(Abbaye de Cluny)’의 스파이시한 달콤함과 프랑스 패션 매거진의 창간을 기념한 묵직한 향의 '엘르(Elle)’가 풍기는 시트러스 향은 객지 생활의 피로를 단숨에 씻어내 주었다.
오페라의 전설적인 여주인공 이름을 딴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나 일본이 자랑하는 복색 장미 ‘코사이(Kosai/光彩)’는 비록 향은 밋밋할지언정, 태양광을 받아 광채를 뿜어내는 당당한 자태로 자신만의 개성을 뽐내며 겉러운 화려함보다 내실의 중요성을 속삭였다.
산책길은 매일이 새로운 발견이자 활력이었다. 노란 샤쓰 입은 여인을 닮은 '서프라이즈(Surprise/Golden Monica)”의 경쾌한 개나리색 노란빛과 프랑스 메이앙 사의 황금빛 ‘골드바니(Gold Bunny)’, 풍부한 골드 톤의 ‘킨세카이(Kinsekai/金세계)’는 지친 퇴근길의 작은 위안이었다.
사막의 태양을 닮아 노란색에서 핑크빛으로 변해가는 ‘사하라 98(Sahara 98)’과 미국의 격렬한 재즈 댄스 이름을 따서 노랑, 오렌지, 빨강으로 춤추듯 물드는 ‘찰스톤(Charleston)’, 사막의 평화를 노래하는 ‘데저트 피스(Desert Peace)’의 강렬한 생명력은 변화무쌍한 인생의 아름다움을 대변하는 듯했다.
장미 정원의 색채는 영일대 밤바다의 푸른빛과 어우러져 한 폭의 환상적인 수채화를 만들어냈다. 하얀 눈밭 위의 두루미를 닮아 정수리부터 붉어지는 일본 원산의 ‘탄초(Tancho/丹頂)’의 절제미, 장미에 없는 푸른색을 향해 육종가들이 피땀으로 빚어낸 연보라빛 ‘블루문(Blue Moon)’과 프랑스 대통령의 이름을 딴 ‘샤를 드 골(Charles de Gaulle)’의 신비로운 라벤더 향기는 홀로 삼키던 저녁의 쓸쓸함을 온기로 채워주었다.
독일어로 ‘정원의 즐거움’을 뜻하는 ‘가르텐슈파스(Gartenspaß)’의 화사한 그라데이션, 크림색 바탕에 핑크빛 선을 두른 달콤한 향의 ‘니콜(Nicole)’, 그리고 사랑스러운 분홍빛의 ‘핑키(Pinky)’와 프랑스의 정원을 옮겨온 듯한 ‘쟈뎅 드 프랑스(Jardin de France)’는 객지의 이방인에게 다정한 말을 건넸다.
미국 출신으로 흰 바탕에 붉은 줄무늬가 불규칙하게 들어간 예술적인 ‘센티멘탈(Scentimental)’, 명랑함을 뜻하는 살구빛의 ‘프로신 82(Frohsinn 82)’, 노을빛 구름을 닮은 일본의 ‘사이운(Saiun/彩雲)’과 부채처럼 화려한 ‘히오기(Hiogi/緋扇)’, 그리고 추위와 병충해를 이겨내고 불사조처럼 담장을 붉게 물들인 ‘함부르크 휘닉스(Hamburg Phoenix)’와 정겨운 이름의 덩굴장미 ‘심파시(Sympathy)’까지.
서로 얽혀 장미 정원을 든든하게 채운 그 품종들 틈에서, 나는 잠시나마 알수 없는 희열과 온전한 평온을 찾을 수 있었다.
포항에서의 마지막 보직은 거칠고 쓸쓸한 객지 생활로 기억될 뻔했다. 하지만 호기심에 이끌려 나선 발길은 오월의 장미정원처럼 뜻하지 않은 위로를 건네주곤 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과 더불어, 그 수많은 장미의 이름과 유래, 그리고 향기는 지금도 내 삶의 가장 찬란했던 쉼표로 바닷바람을 타고 가슴으로 밀려올 것만 같다. 2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