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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 선생님 회장 취임 60주년
청년부가 하라다 회장에게 듣는다
제7회 어디까지나 ‘한 사람’을 소중히(下)
한 장의 사진이 무한한 용기와 희망으로
‘가능하다면 전원과 악수해 격려하고 싶다’
촬영회는 사제가 무언의 서원 맺는 자리
니시카타 남자부장(이하 니시카타) -
세계는 코로나19 감염 확대라는 미증유의 위기에 휩싸여 있습니다.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선생님은 지난 세이쿄신문 4월 2일자(화광신문 4월 17일자) ‘신시대를 구축한다’에서 “‘변독위약(變毒爲藥)’이라는 희망과 소생의 철리가 무엇에도 지지 않는 세계시민이 자아내는 불굴의 네트워크를 더욱 강화하기를 나는 바랍니다” 하고 쓰셨습니다.
일본에서는 9년 전 동일본대지진(2011년 3월 11일)이라는 대재해가 있었는데 지금도 또 힘을 합해 시련에 맞설 때라고 생각합니다.
하라다 회장(이하 하라다) -
대지진 때 선생님은 ‘전광석화’로 위로하셨습니다. “묘(妙)란 소생의 의(義)이고”(어서 947쪽)라는 성훈을 배독하고 “지금이야말로 불굴의 신력, 행력을 불러일으켜 위대한 불력, 법력을 솟아나게 만들면서 이 고난을 반드시 이겨내지 않겠습니까” 하고 도호쿠를 비롯해 전국의 동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진 직후 16일자 세이쿄신문에서는 재해를 입어도 “마음을 파괴할 수 없는데(마음은 무너지지 않는다)”(어서 65쪽)라는 어서를 들어 “‘마음의 재(財)’만큼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고 최대의 격려를 보내셨습니다.
당시 도쿄에서 미야기까지는 선로도 도로도 항공로도 두절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17일에 야마가타를 경유해 현지로 향한다고 보고드릴 때도 “아무리 깊은 슬픔과 괴로움을 당해도 절대로 지지 않습니다. 묘법(妙法)을 부르고 묘법과 함께 꿋꿋이 살아가는 자기 생명 그 자체가 금강불괴(金剛不壞)의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하고 메시지를 의탁하셨습니다.
이 메시지를 들고 센다이시 와카바야시평화회관을 방문했을 때는 회원뿐 아니라 마을회장, 부녀회장을 비롯해 이웃 주민도 피난해 있었습니다. 그 대다수 분들이 선생님의 메시지와 헌신적인 학회원의 행동에 감동해 깊이 이해를 다졌다는 후일담도 있었습니다.
니시카타 -
재해지에 있는 학회의 회관은 일시적으로 피난소로 개방되어 약 5000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와카바야시평화회관 모습은 미국 CNN TV 뉴스에서도 방영되었습니다. 자기도 재해를 입었지만 현지 분들을 위해 진력하는 학회원의 모습은 큰 공감을 불렀습니다.
하라다 -
25일 저녁에는 선생님이 직접 니라사와 도호쿠장(당시)에게 전화를 걸어 “니라사와 군, 잘 있는가”라고 말을 거시고 “확실히 제목을 불러 도호쿠에 대승리의 역사를 남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진심이 고경 속에서 얼마나 큰 버팀목이 되었는가. 모두 “선생님의 말씀 덕분에 ‘어떻게든 이겨내겠다!’고 앞을 향할 수 있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가장 큰 난을 받은 도호쿠가 가장 승리해 번영하는 일이야말로 광선유포의 총마무리’라고 격려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도호쿠 동지는 힘을 내어 ‘미래까지의 설화’가 되는 역사를 남겼습니다. 우리도 지금이야말로 불굴의 신력과 행력으로 일어섰으면 합니다.
손은 점점 붉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오구시 여자부장(이하 오구시) -
여자부 집을 방문하면 선생님이 멤버의 부모님이나 가족과 기념촬영을 하신 사진을 볼 기회가 있습니다. 선생님이 얼마나 많은 동지에게 용기와 희망을 보내고 계신지 늘 감동합니다.
하라다 -
기념촬영회의 연원은 1965년 1월 18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돗토리 요나고에서 개최한 지구부장회에 참석하신 선생님은 기념사진을 찍고 참석자 170명 전원과 악수를 하셨습니다.
당시 저는 세이쿄신문사 직원이 된 지 1년차로 선생님을 수행한 선배 기자에게서 악수 이야기를 듣고 ‘선생님은 정말 굉장한 투쟁을 하고 계신다’고 깊이 감동한 일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3월 22일, 미야기 센다이에서는 600명 정도의 참석자 전원과 악수를 하셨습니다. 소설 ‘신·인간혁명’ 제10권 <언론성>에 당시의 이야기가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모두의 손은 부처의 손’이라고 확신하고 악수를 나누는 그의 가슴에는 동지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뜨겁게 고동치고 있었다. 신이치의 손은 점점 붉게 부어오르더니 드디어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의연하게 격려의 말을 건네며 계속해서 악수를 나누었다.”
8일 뒤인 30일에 개최한 나가노본부 지구부장회 때도 선생님 손의 통증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저도 기자로서 취재를 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악수를 대신할 격려 방법으로 기념촬영을 하자고 생각하셨습니다.
가바사와 男대학부장 -
‘수필’에는 기념촬영을 시작한 이유를 이렇게 쓰셨습니다.
“가능하다면 전국의 지구에서 기둥으로 서는 장년부, 부인부, 남자부, 여자부, 대학부 중심자 전원과 악수를 하고 격려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적으로도 점차 어려워졌다. 그래서 지혜를 짜내어 적어도라는 마음으로 발안한 것이 기념촬영회였다.”
하라다 -
1965년은 선생님이 회장에 취임하신 지 5주년을 맞는 가절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다 함께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 4월 16일 도쿄 제1본부 지구부장회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기념촬영회를 실시했습니다.
실은 이번에 지금까지 선생님이 몇명과 기념촬영을 해주셨는지 세이쿄신문사 멤버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조사했습니다.
본사에 보존하는 사진과 기록을 바탕으로 세어보니, 촬영 인원은 기념촬영회를 시작한 1965년부터 1973년까지 8년 3개월 만에 최소 총 71만 8550명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조사한 멤버도 “숫자를 세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따랐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정말 한 사람 한사람을 소중히 하셨다고 느껴 깊이 감동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 기간에만 ‘100만명은 넘을 것’이라고 말한 당시의 세이쿄 기자도 있습니다.
어쨌든 선생님과 함께 사진을 찍은 한 사람 한사람은 평생 잊지 못할 자기 신심의 원점을 새겨 그 반향이 대단했습니다.
이 기념촬영에 관해 일본사진가협회 회장을 역임한 미키 준 씨가 한 말이 소설 ‘신·인간혁명’ 제15권 <개화>에 나옵니다.
─ 투철한 사진가의 눈은 위선인지 진심인지, 보신인지 헌신인지를 예리하게 간파하는 힘이 있다.
몸을 내던지듯 혼신을 다해 회원들 속으로 들어가 끊임없이 격려를 보내는 신이치의 모습에서 미키는 자비라는 불법(佛法)의 정신을 보는 것 같았다고 한다.(중략)
최고의 보물이라도 내보이는 것처럼 자랑스러운 듯이 미소를 지으며 이전에 신이치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 주는 회원도 있었다.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그 사진을 꺼내 보며 스스로 자신을 고무시켜 역경을 극복했다는 회원도 있다.(중략) 그런 그가 어느 날, 신이치에게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쏟아 놓았다.
“선생님! 앞으로도 꼭 회원 여러분과 기념 촬영을 계속해 주십시오. 그 한 장의 사진이 모두에게 얼마나 용기를 주고 희망을 갖게 하는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
미키 씨는 당시 사진집을 발간하기 위해 선생님을 따라 여러 회합에 참석하고 지방지도에도 동행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시 동행한 어느 신문기자가 선생님에게서 “기념촬영은 동지와 맺는 무언의 서원(誓願)입니다. 적당한 마음으로는 함께 앉지 않습니다” 하는 말을 듣고 “힘들지 않으신가요?” 하고 묻자 선생님은 “나중에 녹초가 되지만, 촬영 중에는 진지합니다. 힘들다는 말 따위 할 수 없습니다” 하고 답하셨습니다.
기념촬영회는 선생님과 동지 한 사람 한사람이 ‘무언의 서원’을 맺는 자리이자 ‘사제공전의 여정’을 출발하는 무대였습니다.
명월천자여, 우리 벗을 지켜봐 주게나
하야시 女대학부장 -
4월 2일자 본 연재(화광신문 5월 1일자)에 선생님이 촬영하신 창가보광회관 사진(3월 24일 촬영)이 게재되었습니다. 선생님이 사진을 찍기 시작하실 당시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하라다 -
1969년 말부터 1970년 초까지 선생님의 건강이 나빠진 일은 지난번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러한 때에 어느 기업의 사장이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며 카메라를 선물해주었습니다.
1971년 6월 홋카이도의 오누마를 방문해 호숫가를 차로 돌 때, 달이 무척 아름다워 그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셨습니다.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달 촬영은 상당히 어려워 조금이라도 손이 흔들리면 아름다운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소설 ‘신·인간혁명’ 제15권 <개화>에도 나오는데, 차 엔진을 멈추고 세이쿄 사진기자의 조언을 받아 창틀에 양 팔꿈치를 대고 고정해서 찍으셨습니다. 또 차에서 내려 삼각대를 이용해서도 촬영하셨습니다.
그 후 하코네연수원(현 가나가와연수원)에서 폭풍이 몰아친 이튿날 사진을 촬영하시는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달 사진을 찍어 그중 16점을 모아 ‘사진집·달’을 발간했습니다. 그 사진집을 카메라를 주신 사장에게 “덕분에 이렇게 건강해졌습니다” 하는 말과 함께 보내셨습니다.
선생님은 처음 달을 촬영하실 때 심정을 “‘밤낮으로 투쟁하는 학회원 여러분이 이 달빛을 받아 영지가 빛나는 사람이 되기를…. 명월천자여, 우리 벗을 지켜봐 주게나’라는 염원을 담아 셔터를 눌렀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구름 사이로/ 달을 보려고/ 염원하는/ 아시아 민중에게/ 빛을 보내리라” “이제 가련다/ 월지(月氏) 끝까지/ 묘법을/ 넓히는 여정에/ 마음도 힘차게”라고 읊으신 도다(戶田) 선생님의 마음을 담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사진은 촬영자 마음의 투영(投影)이고, 피사체를 빌려 찍혀 나오는 자기 생명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에게 사진 촬영은 오로지 동지를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구시 -
선생님은 웅대한 하늘이나 아름답게 핀 사계절의 꽃, 또 철탑의 전선이나 돌담, 길가에 난 잡초나 노면 등 일상의 풍경도 촬영하셨습니다.
하라다 -
많은 사람이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길가의 꽃에도 마음을 써 촬영하고 그 아름다움과 매력을 이끌어내려고 하셨습니다. 거기에는 불법자(佛法者)로서 선생님만이 바라볼 수 있는 시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사진가인 요시다 준 씨는 선생님의 사진을 ‘순간의 움직임을 찍는 마음의 눈’이라고 표현하며 ‘촌사심안(寸寫心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프랑스의 미술사가 르네 위그 씨는 ‘이렇게 예술적인 사진은 처음 본다’며 자신이 관장을 역임하는 파리의 자크마르 앙드레 미술관에서 사진전을 개최했는데 이것이 해외에서 개최하는 선생님의 첫 사진전이었습니다.
학회 회관에는 현재, 선생님이 찍으신 사진이 액자로 걸려 있습니다. 학회 회관은 평화와 문화를 발신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회원들의 요청도 있어, 선생님의 허가를 얻어 사진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현재 세이쿄신문에는 ‘사계의 격려’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지금도 카메라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말을 건네며 용기와 희망을 보내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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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