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별들의 고향
이정훈
폭발하려는 걸까 안으로 무너지려는 걸까 먼지와 가스의 소용돌이 속을 방황한다 둥근 눈
한나절을 흘러도 읍내 다리목에 닿지 못하는 강물 옆에서 돌 하나는 의자 두 개는 탁자 천창天窓 고운 모닥불 시시덕거리는 불꽃을 작대기로 건드린다
날아가는 별들과 날아오는 별빛 다를 것도 없는 시간과 중력 속에서 나선으로 흐느낀다 내 익숙한 호랑지빠귀
은하의 별들이 태어나는 독수리 성운 칠천 년 전에 떠난 빛을 맞으러 늙은 밤나무 타고 날아간 할아버지 안녕 할머니도 안녕 변기 속 똥에게 잘 가, 손 흔들던 딸아이는 재작년에 시집갔습니다
백 걸음 걸으면 우리 집 다시 백 걸음 걸으면 영화 포스터 붙이러 다니던 운용 아재 골방 눈밭에 엎어져 울던 여배우는 안.인.숙
거적때기 한 닢 덮어쓰고 씨앗처럼 잠들던 그땐 아무 말 않아도, 알아들을 것도 없더니 날아간 불티들 난파한, 조난당한, 추방된, 유폐된
또 누가 오조 오천억 년쯤 나 같은 걸 생각하다 오.랜.만.에.함.께.누.워.봐.야 등짝에 묻어나는 모래밭의 별
3축 내린다
세 번째 축을 떨어뜨릴 때마다 누군가의 뒤꿈치 같단 생각 차체를 떠받치며 일어서려는 힘으로 열여덟 개의 바퀴가 찌그러진다 시멘트 가루 분분한 공장 바닥 흔들린다 산을 무너뜨리고 바위를 빻아 분화구 가마에 구워내다 땅속 스며든 힘이 엉덩이를 걷어찬 거다 심장 속으로 온몸 구겨 넣는 유압 샤프트, 펌프라는 게 단추 끝으로 무지막지 힘 퍼 올리는 관이다 새들 날아오르게 하고 흔들리는 가지 끝 꽃잎 밀어내는 푸른 압력으로 눈금 터질 때 계절의 부하負荷 견디려 바퀴 내리는 나무들 보라, 올해도 이파리 흩날리며 대차게 한 탕 뛰려는 거다 뿌리줄기를 지나 수액 차오르는 길 짐 다 털어놓고 휘잉, 돌아오고 싶은 나는 꽃 나는 트레일러, 직렬 6기통 일만 천팔백 시시, 사백팔십 마력의 힘으로 한 바퀴 돌아오는 태양이다 달이다 다섯 겹 꽃잎이다 붉고 푸른, 노랑의 환을 지나 쿵쿵, 발 옮길 때 바퀴 자국 길게 벌크 시멘트 트레일러 한 대 서있을 뿐이지만 내 안에 활대처럼 휘어져 반짝이는 것 바퀴가 구르는 앞쪽 더 위쪽, 일 년에 십칠만 킬로 미터씩 지구별을 끌고 달린다
*트레일러의 세 번째 바퀴는 가변축(boggie hoist)이 일반적이다. 짐을 실을 땐 무게를 버티기 위해 바닥에 내리지만 빈차일 땐 연비와 승차감을 위해 들고 다닌다.
<근작시>
안진터널 지나가다
슬래그 29톤 싣고 보름달 따라간다
달려도 달려도
저놈의 꽁무니 한 뼘도 가까워지질 않아
동쪽에 붉게 떠올라 서쪽으로 하얗게 지는 홍동백서紅東白西
귀신들 세상에선 다 반대가 된다는데
삼 년이 지나도록 제사 한번 못 모셨다
달의 운전석을 흘깃 보셨소?
으르렁거리는 엔진 위에 앉아
내리막에선 저 달 한번 추월해보겠소
바람소리 그치지 않는 열여덟 개의 바퀴
굴러 지나가는 길이라면 해도 달도 얼러보겠소
요놈아,
오늘은 나와 내기를 하자
저 산속에 잠든 짐승이 있다
내가 등에 나뭇가지를 얹어놓고 오면
너는 짐승을 깨우지 말고 가지를 집어오는 거다
달빛에도 삭정이 부러지는 밤
아들은 아직 마음 뒤집는 법을 몰라
멧돼지처럼 엎드린 산줄기 지날 때마다
깜박 떠오르는 아버지 별
낮에는 캄캄했다 밤이면 더 환해지는 터널
오르막이 살아났다 다시 죽는 곳에서
차 대가리 끄덕이는 절 받으시고
담배 연기나 한줄기 흠향하시오
<시작노트>
조금 전까지 누가 머물다 간 흔적을 느낄 때 있다. 나는 침입자. 먼지와 바람과 햇살의 세입자. 집의 주인은 따로 있다. 어떤 날엔 방과 내가 모두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럴 땐 내가 내 몸 밖 이방인.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는 적당히 멀고 알맞게 묵어 잠 덜 올 때 보기 좋다. 데루수 우잘라, 푸른 수염, 그리고 7인의 사무라이와 라쇼몽. 와이어 액션과 헐벗은 여배우 없이도 보여줄 것 다 보여주고 최민수와 이덕화를 반반씩 닮은 미후네 토지로는 언제나 멋지다. 딱 여기까지만 좋은 게 미덕.
라쇼몽 신드롬은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진실의 시각차를 말한다. 나무꾼과 산적과 사무라이와 사무라이의 아내. 관객들은 얼굴 비추지 않는 재판관이 되어 네 가지 이야기를 경청하면 그만이다. 반쯤 허물어진 누각 위로 억수같이 비 들이치는 여름날. 그런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과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는 너무 다르단 말이지.
말 못 하는 것들이 자꾸 말을 건다. 꽃, 새, 나무, 별, 물고기들과 대
화를 나눈다고 하면 조금 근사해 보이는데 요즘은 자동차도 말을 건다. 엔진, 트랜스미션, 심지어 고무 덩어리 바퀴까지. 어느 날엔 말 못하는 짐승인 것 같고 또 어느 땐 바가지 극심한 아내(라 쓰고 여편네라 읽는다!) 같기도 해서 참 곤란해.
게을러서였다. 볼펜 한 자루만 있으면 되니까. 게다가 스무 줄 안팎만 써도 된다니. 뒤집으면 볼펜 한 자루밖에 없는 천하의 게으름뱅이라서 시인- 이란 것이 되었더니 더 공부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도 열심히. 오는 말 대접해 보내기에도 하루가 짧은데.
이정훈 201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