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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보처 영화 검열위원이었던 아버지 부탁으로 신상옥 감독 門下에 들어가… “신상옥 감독은 저에겐 아버지”
⊙ 동생 대학등록금 들고 고교 친구 최인호 찾아가 소설 〈별들의 고향〉 판권 따내
⊙ 〈바람 불어 좋은 날〉 〈바보선언〉 등으로 장선우·박광수·봉준호 감독 등에게 영향
⊙ ‘기왕에 망치는 것, 온갖 실험을 다 하는 쪽으로 가자’고 만든 〈바보선언〉으로 대박
⊙ 북한인권국제영화제·락스퍼인권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활동… “이건 내 餘生의 숙제”
사진=조준우
이장호(李長鎬·76)의 영화는 1970~ 1980년대 한국 청년문화의 자화상(自畵像)이다. 농경공동체사회가 도시산업사회로 변모하던 격변의 20년. 산업화 초기의 풍요(豐饒)와 10월유신이라는 권위주의적 정치 환경이 교직(交織)하던 시대. 1970년대를 살아간 20대는 식민지와 전쟁을 체험하지 않은 신세대였다. 생존 방식과 삶의 목표가 앞 세대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는 뜻이다.
통기타와 청바지, 생맥주는 그래서 우리 사회가 생존과 기아의 문제를 뛰어넘었다는 걸 웅변하는 소도구였다. 동시에 청춘과 지성의 상징물이기도 했다. 이어령(李御寧) 교수는 “청바지와 통기타 등은 생활양식의 공통성이자 청년들의 동질성 표현”이라며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권위에 대한 반항, 물질주의·기계주의·상업주의에 대한 반항 의지의 표현으로 봐야 한다”고 평했다. 고고춤과 장발, 미니스커트도 1970년대의 청년문화를 상징하는 또 다른 이미지다.
신세대의 말, 생각, 행동은 확산이 빨랐다. 신선했고, 확실한 소비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청년문화는 대학가를 넘어서 문화판 전체로 침투했다. 해일(海溢)이었다. 영화와 노래가 위안과 오락을 위한 일회용 소모품에서 ‘문화상품’으로 신분 상승한 것도 이 무렵이다.
1974년, 29세의 젊은 감독 이장호가 ‘청년문화의 결정판’ 같은 영화를 개봉했다. 〈별들의 고향〉이다. 그가 깃발을 든 곳에서 때로는 환호가, 때로는 포연(砲煙)이 피어올랐다. 빈민가 청년들의 생존일기 〈바람 불어 좋은 날〉(1980년), 망치려고 작정했다 희대의 실험영화로 격상한 〈바보선언〉(1984년), 성(性)과 트라우마의 만남 〈무릎과 무릎 사이〉(1984년), 에로물이냐 에로물로 포장한 정치영화냐 논쟁이 일었던 〈어우동〉(1985년), 이현세 원작 만화를 영화화한 1986년 흥행 1위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년), 이제하 원작 소설로 유수의 해외영화제가 작가주의 작품으로 격찬한 로드무비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7년)까지, 이장호가 있는 곳이 대중문화와 시대의 최전선이었다.
아버지는 영화 검열위원
이장호가 처음 영화를 접한 곳은 ‘아버지 무릎 위’다. 부친 이재형(李在亨· 1920~1999년)은 정부 수립 후 공보처 영화과 검열위원으로 일했다. 국내 개봉영화를 모두 봐야 했기에,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영화를 보았다. 집안 여기저기에 영화 필름이 있었고, 아이는 전등에 필름을 비춰보며 그 안의 ‘그림’에 흥미를 느꼈다. 영화 필름은, 불이 확 붙는 물건이니 절대로 성냥불을 붙이지 말라는 ‘불장난 엄금’의 위험물질이기도 했다.
“중앙청 지하에 시사실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저를 데리고 가기도 했죠. 근무시간 중에 아이가 출입해도 뭐라는 사람이 없던 목가적인 시절입니다.”
아버지의 꿈은 영화배우였다고 한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경수로 발전소 건설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함경남도 북청군 신포(현 신포시)가 고향이다. 명태잡이 선주(船主)였던 할아버지는 경성(京城)에도 근거지가 있었다. 명동 기쁜소리사 앞 커다란 명태가게가 할아버지 소유의 빌딩이었다. 그의 가족이 해방 전부터 서울로 이사해 살았던 배경이다.
“아버지는 우에노 음악학교에 다녔다고 합니다. 윤심덕, 홍난파 등이 졸업한 학교죠. 성악과 학생이었는데, 성대 이상으로 수술을 한 뒤로 예술가의 꿈을 접었다고 들었습니다.”
도쿄 호세이대학(法政大) 경제학과로 적을 옮긴 이재형은 신포읍 유치원 교사던 한월춘(韓月春·1924~ 2019년)에게 반해 청혼했다. 결혼 후, 두 사람은 일본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부부의 3남 2녀 중 차남이 이장호다. 그의 밑으로 여동생 둘, 남동생 하나가 있다. 남동생은 이장호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배우 이영호. 매제(妹弟) 중 하나가 정치인 유인태다. 이재형도 훗날 아들의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며 청년 시절의 회한을 풀었다.
영화 〈싱고아라〉의 기억
〈별들의 고향〉 개봉 직후 최인호(오른쪽)와 이장호 두 사람은 서울高 동기다. 사진=이장호 제공 |
― 유년 시절 본 영화가 생각납니까.
“스토리도 모르고 인상 깊은 화면만 떠오르죠. 그래도 몇 작품은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싱고아라(Singoalla)〉 (1949년·한국 개봉 1952년)라는 프랑스 영화도 그 가운데 하나죠. 중세가 배경이고, 미혼 시절 낳은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가는 이야기인데, 아버지가 몽유병자입니다. 몽환적인 분위기가 스크린 전체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 영화는 부산으로 피란 가서 봤는지도 모르겠네요.”
이장호는 1·4후퇴 때 피란, 부산 부민국민학교에 다녔다. 환도(還都) 후엔 북아현동 적산(敵産)가옥에 거주하며 바로 윗집 무역회사 사장님 댁 딸들과 동무를 하며 놀았다. 세 딸에게 니나, 엘라 등 서양 이름을 따로 붙여주던 집이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상하이를 오가며 사업을 해서 국제적인 분위기가 물씬 나던 이웃이다. 그때 읽었던 미국 동화책의 고급스러운 질감과 색감을 잊을 수 없다. 기독교 어린이 잡지 월간 《새벗》, 강소천(姜小泉)의 동화집 《꽃신》도 잊지 못할 독서 목록이다.
“저보고 집에서 늦번지다(‘늦다’의 함경도 사투리)고 했죠. 저는 열등감이 많은 아이였어요. 덕수초등학교 시절 통지표에 담임선생님이 ‘머리는 좋은데 노력이 부족하다’라고 써주셨는데, 그게 위안일 정도였습니다. 소원이 세상과 떨어져 목장에서 로맨틱하게 살면서 아내와 아이들 음악도 시키고 자유롭게 사는 거였어요. 사회성이 낮고 꿈꾸듯 살아서, 나중엔 아버지가 넌 공부해서 성공할 타입이 아니라는 말도 하셨죠.”
― 유년 시절을 자유롭게 보냈다는데, 명문 서울중·고를 졸업했습니다.
“운이 좋았으니까요. 1958년도 제가 6학년 때 교육제도가 바뀌었어요. 중학 입학시험이 주관식에서 사지선다로 나왔습니다. 어렴풋이 알아도 정답을 맞힐 수 있게 된 거지. 덕분에 갑자기 성적이 확 올랐습니다.”
이때 서울중·고 동기가 소설가 최인호(崔仁浩), 음악가 정성조(鄭成朝)다. 중·고교를 거쳐 홍익대 건축과에 입학. 건축을 전공한 건 가정교사 김덕초의 영향이다. 평안도 실향민으로 서울대 공대 건축과를 다닌 김덕초는 오페라 아리아도 잘 부르고 악기 연주에도 다재다능하던 선배였다. 나중에 대우건설 사장을 역임하는 김덕초는 이장호에겐 〈데미안〉의 싱클레어 같은 존재였다. 그의 영향으로, 중1 때 밴드부에 들어갈 정도였으니까.
신상옥 감독과의 만남
대학에 들어갔지만 강의실보다 술집을 전전하는 아들을 보다 못해 아버지가 영화사에 자리를 부탁했다. 신상옥(申相玉·1926~2006년) 감독이 “뭘 하고 싶냐?”기에 ‘저도 연출하고 싶습니다’라고 답했다. 배우를 하고 싶었지만, 당대의 미남 신상옥 감독의 실물을 보고 주눅이 들어서 얼떨결에 뱉은 말이다. 바로 학교를 그만두고 신필름 연출부에 입사했고, 그때부터 현장에서 8년을 보냈다.
“신상옥 감독님은 저한테 아버지였어요. 넥타이 대신 스카프를 하고 다니시는 것, ‘찌꾸’라는, 일본 단학사(丹鶴社) 제품 머릿기름 스틱 등 습관과 기호품이 아버지와 닮았으니까요. 심지어 두 분이 체취도 비슷했죠. 모두 함경도 분이기도 하고(신상옥 감독은 청진). 아버지와 신 감독님이 너무 비슷해서 혼란스러운 친밀감이 들 정도였습니다.”
〈청일전쟁과 여걸민비〉(1965년)가 그의 입사 당시 신필름이 제작하고 있던 영화다. 1960년 설립한 신필름은 전성기 200여명의 제작진에게 월급을 주던 국내 굴지의 영화사였다. 서울 용산에 1000평 규모의 촬영소, 녹음실, 편집실, 영사실이 있었다. 안양 촬영소도 인수했으며 자체 연기자 양성소도 운영했다. 미국식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의 제작방식을 이식한 야심만만한 프로젝트였다. 국내 영화 제작의 40% 정도를 신필름 한 회사가 맡아서 진행할 만큼 독보적이었다.
촬영장을 오가며 정신없이 살던 당시의 경험은 《모두 주고 싶다: 이장호의 스무 살 일기장》(1981년)이라는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출판사 일을 하던 지인이 이거 책으로 만들자며 일기장을 가져간 후, 광고 카피라이터 이만재가 원문에 평을 달아서 출간한 단행본이다. 촬영장 고생담뿐 아니라 20대 초반의 사회의식, 거센 성 충동 등이 날것 그대로 실려 있는 기록이다.
“장호, 수고했다”
1996년 제1회 부천 국제판타스틱영화제. (왼쪽부터) 이장호 집행위원장, 최은희 심사위원장, 이해선 당시 부천시장 부부, 신상옥 감독. |
― 신상옥 감독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거인(巨人)이죠. 천재의 차가움도 있고…. 1964년에 아시아 최대의 영화사 홍콩 쇼브라더스사(邵氏兄弟有限公司)와 신필름 합작으로 〈비련의 왕비 달기〉를 만들었습니다. 몇 편 더 협업을 했는데, 샤오런메이(邵仁枚) 회장이 홍콩 스태프들에게 ‘신 감독 영화를 그대로 카피해서 다시 찍어라. 이 영화를 그대로 극장에 붙이면 감독, 스타가 다 한국에서 나온다. 아시아 전체를 한국 영화가 석권할 것’이라고 했답니다.”
영화에 미친 남자, 24시간 영화만 생각하는 신상옥에 대한 증언은 여러 편이 더 있다. 최은희(崔銀姬) 여사의 회고도 그 가운데 하나다.
“가재도구가 뭐가 있는지 신경도 안 쓰며 살던 분이 어느 날 갑자기 소파며 탁자를 유심히 본다. 그럼 불안하다. 가구들이 며칠 후 촬영장으로 실려 가 소품으로 쓰이는 전조(前兆)이기 때문이다.”
‘영화만 생각하는’ 신상옥은 4년이 지나도록 이장호의 이름을 몰랐다. ‘야, 임마’ ‘이 자식’ 등의 대명사가 그의 호칭이었다. 〈전쟁과 인간〉 촬영 때 여주인공 마네킹을 산 아래로 떨어뜨려야 하는데 소나무에 걸렸다. 로프로 몸을 묶고 내려가 ‘마네킹 추락신’을 무사히 마치고 산 아래로 내려가니 “장호, 수고했다”는 칭찬이 들렸다. 다른 스태프들을 다음 장소로 먼저 보내고, 홀로 남아 그를 기다리던 거장이 처음 불러준 이름 석 자다. 감격, 무안함, 뛰어서 하산한 가쁜 호흡 등이 겹쳐 눈물을 쏟는데 “자식, 뭐 대단한 거 했다고…”라고 놀리며 거인은 그를 지프 앞자리 상석에 태워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재미는 있었지만, 영화사 월급이 지금 수준으로 30만원 정도? 생활이 불가능했죠. 양장점을 하며 가계를 책임졌던 어머니에게서 매일 용돈을 받아 끼니를 해결했어요.”
결혼식 주례는 최은희
점심은 굶고, 집에 오는 길에 중국집에서 우동 한 그릇 사 먹고 곯아떨어지는 나날이 이어졌다. 변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1971년 잠시 신필름을 나와 연극을 했다. 서울고 선배 무세중(巫世中), 박정규 등이 만든 ‘민족극단’이다. 이때 단원의 여동생과 사랑이 싹텄다.
1972년 결혼식의 주례는 최은희 여사. 아버지가 신상옥 감독에게 주례를 부탁했는데, 신 감독이 자신은 주례를 서본 적이 없다며 최은희 여사를 추천했다. 결혼식은 이장호의 매스컴 데뷔다. 여성 주례가 화제가 되어 여기저기 화보가 실렸다. 주례가 처음이기는 최은희 선생도 마찬가지. 그래도 대배우는 땀을 뻘뻘 흘리는 신랑을 보고 주례 도중 한복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아줬다.
1972년 극단은 해체했고 이장호는 신필름에 재입사했다. 군(軍) 문제는 이 무렵 정리했다. 지방 촬영을 다니느라 집으로 신체검사 통지서가 온 줄도 몰랐기에, 서류는 ‘소재불명’으로 반송되곤 했다. 이장호는 병역기피자 일제자수기간에 중부경찰서에 출두, 진술을 하고 신검(身檢)을 받았다. 판정은 연령초과로 소집 면제. 지금도 병역을 필한 동년배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1973년 홍콩합작영화 제작팀에 합류해 1년을 홍콩에서 보낸 시간이 영화인 이장호가 개안(開眼)한 시간이다.
“말이 연출부지 제가 그간 한 일은 조수로 막노동하는 거였습니다. 합작 프로젝트가 지지부진해서 예정만큼 촬영일이 이어지지 않았어요. 그 시간을 틈타 열심히 심야영화를 보러 다녔습니다. 당시 한국에선 연간 20편 정도의 외화(外畵)를 수입했습니다. 그것이 일반인이 볼 수 있는 외국 영화의 전부였는데, 홍콩에선 찰리 채플린이며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프랑스・이탈리아 등 유럽 영화가 상시(常時) 상영이었거든요. 신세계였습니다. 제 연출의 감성은 이때 길러진 셈입니다.”
〈별들의 고향〉
이장호의 데뷔작 〈별들의 고향〉은 46만5000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대히트를 쳤다. 사진=이장호 제공 |
1972년 9월부터 1973년 9월까지 신예작가 최인호가 《조선일보》에 소설을 연재했다. 〈별들의 고향〉이다. 이 감독의 아버지는 이 소설을 스크랩해서 홍콩으로 우송했다.
“최인호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동창이죠. 1963년 고2 때 단편 〈벽 구멍으로〉가 《한국일보》 신춘문예 가작으로 뽑혀서 난리가 났지만, 어렸을 때부터 백일장 장원은 맡아논 친구였어요. 중·고교 시절엔 선생님들도 깜짝 놀랄 만한 작품을 이미 쓰고 있었죠.”
당시 신문 연재소설은 지금의 드라마 못지않게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점심을 마친 직장인들이 소설 속 주인공들의 대화와 행동을 주요 화제(話題)로 삼았다. 미처 소설을 못 읽은 사람은 주변의 해설을 기다릴 정도였다. 이병주, 유주현 등 연배가 있고 비중이 큰 작가들이 주요 집필진이던 신문연재를 20대 작가가 차지한 것도 화제였지만, 〈별들의 고향〉에 대한 시중의 인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어제 경아 어떻게 됐어?”라며 남자들은 술잔을 기울였고, “경아 그만 고생시켜라”며 여자들은 신문사로 전화를 걸었다. 주점(酒店)의 여급(女給)들 거의 모두가 예명을 ‘경아’로 바꾼 건 또 다른 전설이다.
자연히, 영화화에 대한 기대 또한 적지 않았다. 판권 경쟁에 관한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이장호는 친구 최인호의 집을 급습, 버티기를 시전하며 판권을 따냈다. 군자금(軍資金)은 동생의 대학등록금. 친구라지만, 겨우 제2 연출부(조감독이 되려면 제1 연출부로 승진해야 했다)에 머물고 있던 이장호에게 영화 판권을 준다는 건 최인호로서도 흔쾌한 결정은 아니었을 터다. 최인호는 “야,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네 맘대로 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도장을 찍었다.
이장호가 〈별들의 고향〉 판권을 샀다는 소문은 금방 충무로에 쫙 퍼졌다. 신상옥 감독은 “연출은 네가 하더라도 촬영은 베테랑 이형표 감독에게 맡기자”고 했다. 이장호는 “알겠다”고 답한 뒤 그날로 책상을 빼서 줄행랑을 놨다. 신상옥 감독이 나중에 “키워놓으니까 말도 없이 도망쳤다”고 섭섭해한 이유다.
“윗분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제 마음대로 영화를 만들고 싶었거든요. 화천공사에 찾아가 제작 조건으로 ‘코닥 필름 3만 자’를 달라고 했습니다. 다른 영화의 두 배 남짓 필름을 쓰겠다고 한 거죠.”
이장희 작곡, 윤시내 노래
당시 필름은 비싸고 귀한 물품이었다. 필름을 횡(橫)으로 이등분해 두 배로 늘려 쓰는 신공(神工)이 유행하던 시절이다. 오죽하면 세계적 거장인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도 평단의 지적에 “나도 펜만큼 싼 카메라를 가지고 원고지만큼 싼 필름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작품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항변했겠는가.
화천공사는 소설 〈별들의 고향〉의 인기를 믿고 이장호의 제안을 받아줬다. 대신 개런티는 감독협회가 정한 최저선인 40만원에 합의했다. 동생에게 빌린 등록금 15만원을 갚고 조연출에게 25만원을 주며 전투 준비를 마쳤다.
감독 경험이 없으니 콘티도 없이 즉흥 촬영이 많았지만, 서울고·홍익대 선배인 촬영기사 장석준이 이장호의 희한한 요청을 다 받아줬다. 영화음악 역시 관행을 무시한 결과다. 서울고 2년 후배 이장희와 홍익대 1년 후배 강근식에게 음악을 맡겼더니 영화를 보기도 전에 완성품을 만들어왔다. 소설만 보고 느낌에 따라 작업한 결과였다.
다른 영화는 완성본이 나오고 단시일 내에 음악을 만들었는데, 두 사람은 신세계 레코드 스튜디오에서 40일 동안 숙식을 하며 작품을 내놨다. 다른 작품처럼 영상과 소리가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장면이 바뀌어도 노래가 계속 흐르는 건 노래가 먼저 만들어진 탓이다. 그래서 노래는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의 여운을 관객들에게 자연스레 전달한다. 마치 계절이 바뀌어도 그리운 이의 얼굴이 떠오르듯이.
이후의 이장호 영화와 마찬가지로, ‘노래’는 영화 곳곳에서 풍성하게 흐른다. ‘음악’이 영화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시청각(視聽覺)이 병진(竝進)하는 것이다. 서두에 나오는 ‘한 잔의 추억’, 하이라이트 때 깔리는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와 ‘휘파람을 부세요’는 영화를 넘어 불후의 명곡이 되었다. 20대 초반의 가수가 청순한 목소리로 취입한, 경아가 죽을 때 들려오는 ‘난 그런 거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왠지 겁이 나네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로 시작하는 ‘나는 열아홉 살이에요’도 공전의 히트를 쳤다. ‘얼굴 없는 가수’는 잠시 사라졌다 몇 년 후 허스키한 목소리로 돌아와 가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열애’의 윤시내다.
대마초 파동
이런 과정을 거쳐 세상에 나온 〈별들의 고향〉은 단관 개봉시대에 46만5000명의 관객을 모은다. 관객 5만명이면 대히트라고 평가하던 시절이다. 관행에 도전한 젊은 감각의 승리였다.
청년 세대는 자기 세대의 감각이 투영된 영화에 열광했다. 맑고 순수한 오경아(안인숙)가 사랑에 배신당하며 여러 남자를 만나다가 마지막에는 눈 덮인 한강 얼음판 위에 쓰러져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는 이야기를 청년들은 유신시대를 살아가는 자신들의 생애와 등치(等値)했는지도 모른다. 주인공 안인숙의 대사 “추워요, 안아주세요”와 경아의 마지막 남자 신성일의 대사 “경아, 오랜만에 같이 누워보는군”은 40여 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유행어의 지위를 내려놓지 않고 있다.
〈어제 내린 비〉(1974년·음악 정성조) 등 3편의 영화를 감독하며 승승장구하던 이창호가 덫에 걸린다. 대마초 파동. 1976년의 일이다.
“그땐 각 대학 앞에서 와이셔츠곽에 담은 개비 담배를 팔던 시절인데, 절반이 대마초였어요. 그만큼 흡연 문화에 관대했습니다. ‘환각’에 대한 호기심도 있어서 딱 한 번, 정말 딱 한 번 피워봤습니다. 그런데 별 감흥이 없더라고. 감흥이 있었다면 계속 피웠겠죠.”
남대문 도큐(東急)호텔 건너편에 있던 검찰, 보건사회부, 내무부, 시경 합동조사반에 불려갔다. ‘딱 한 번’뿐이라 별 생각 없이 선선히 자백했는데 예상과 달리 응암동 정신병원으로 끌려갔다. 다른 ‘대마초 연예인들’이 갇혀 있던 곳이다.
〈바람 불어 좋은 날〉
2019년 8월 서초문화회관 수요시네마 행사에서 이장호 감독은 배우 안성기와 함께 〈바람 불어 좋은 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진=이장호 제공 |
혹시 ‘보복’은 아니었을까? 〈그래 그래 오늘은 안녕〉(1976년)을 동숭동 시민아파트에서 촬영했는데, 검열위원 중 누군가가 “이거 빨갱이 영화 아니냐”고 했다는 걸 나중에 들었다. 이탈리아의 고전 〈자전거 도둑〉(1952년)처럼, 서민 생활의 비참함을 묘사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대마초 흡연의 결과는 무기한 활동 정지. 1979년 10·26이 터지고 12월 대마초 규제가 풀릴 때까지 이장호는 4년을 야인(野人)으로 지냈다.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막걸릿집을 했고, 그는 울분을 삼키며 기약 없는 독서를 하고 다른 감독들의 영화를 봤다.
본인이 가난해지니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눈에 들어왔다. 복귀작 〈바람 불어 좋은 날〉(1980년)은 4년 면벽수행(面壁修行)이 응축된 작품이다. 발랄한 청춘 이장호는 ‘진지한 장년’으로 진화해서 돌아왔다. 감각에 의존한 즉흥적인 연출방식에서 벗어나 꼼꼼하게 콘티를 짜고 메가폰을 잡았다. 시골에서 상경한 자장면 배달부 덕배(안성기 분)와 이발사 춘식(이 감독의 동생 이영호 분), 여관 종업원 길남(고 김성찬 분)의 험난한 도시생활 생존기. 여배우로는 유지인, 김보연, 임예진이 나온다. 이 영화는 아역배우 출신 안성기의 성인역 데뷔작이기도 하다.
“주인공들이 다 농촌에서 무작정 상경한 젊은이들이었으니까 영화에 필요한 세부묘사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서울역과 남대문시장 주변 인력시장을 돌아다녔어요. 그런데 가서 보니까, 초 5·6, 중학교 1·2학년 또래 아이들이 팔려 가기를 기다리고 있더라고. 사환이나 식당 홀 정리를 한다고 그래요. 충격이었죠. 울컥해서 배창호 조감독한테 좀 근사한 데를 가자고 그랬어요. 시청 앞 플라자호텔 커피숍에서 창밖을 보니까 거기는 또 완전히 다른 세상인 겁니다. 걸어서 닿을 수 있는 거리 안에 완전히 다른 세상이 공존하는 느낌?”
장선우·박광수·봉준호 등에게 영향
운동권의 울분을 담은 듯한 영화는 대학 영화 동아리에 큰 울림을 전했다. 장선우, 박광수 등이 그를 찾아왔다. 사회적으로 충격을 준 화제작이 또 있다. 2019년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자 봉준호 감독이 인생영화 가운데 하나로 꼽은 작품이다. 〈어둠의 자식들〉(1981년),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1981년), 〈낮은 데로 임하소서〉(1982년)를 거쳐 나온 문제작 〈바보선언〉(1983년)이다.
“그때는 영화사마다 1년에 4편을 의무 제작하고 반대급부로 외화수입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둠의 자식들〉 속편 시나리오가 사전검열에서 계속 반려되더라고요. 우리나라의 실상을 북에서 악용할 우려가 있다면서 〈어둠의 자식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해외 반출 불가라고 하고.
반려당하면 수정본 넣고 또 반려당하고 하다가 한 달이 지났어요. 제작자는 초조하지. 의무 제작 편수를 못 채우면 그해 외화수입 쿼터를 못 받으니까. 〈별들의 고향〉 이후에는 영화가 내 천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때는 영화를 관두고 싶더라니까. 그런데 내가 못 하겠다고 하면 제작자가 계약서 갖고 와서 법적으로 걸거나 아무튼 그냥은 안 넘어갈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영화를 찍되 망치자!’라고 생각했죠. 영화를 말아먹은 감독한텐 기회를 안 줄 테니 제가 자연스럽게 은퇴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사전검열 통과용으로 교과서적인 모범답안 시나리오를 만들고, 제목도 여러 개 만들어서 문공부 사람들에게 고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화천공사 박종찬 사장도 좋다고 그랬어요.”
망치려고 작정하고 만든 영화
망치려고 작심하고 만들었다가 히트작이 된 〈바보선언〉. |
훗날 문화부 장관을 하는 김명곤이 다리 저는 역할로 나오고, 이보희는 뭣도 모르고 여주인공을 했다. 저속으로 찍었다가 고속으로 찍었다가, 시나리오도 없이 현장에 나가서 다큐멘터리처럼 찍으며 좌충우돌(左衝右突)했다. 배우들의 대사가 없고, 영화 제목과 감독, 배우 이름이 나오는 타이틀도 크레파스로 그려서 썼다. 감독 자살 장면도 넣고 판소리도 넣고, 나중엔 전자오락 음향도 넣으며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게 만들었다.
시사회 하던 날, 지방 흥행사들이 하나둘 일어나더니 모두 중간에 나가버렸다. 혼자 남은 박종찬 사장이 “야, 이장호, 잠깐 사이에 개판 쳤구나!”라고 일갈할 정도였다. 이장호는 그렇게 영화계에서 강제 은퇴했고, 새마을 영화를 찍으며 생계를 해결했다.
영화 완성 후 1년이 지났다. 화천이 수입한 외화의 흥행성적이 좋지 않았다. 얼른 다른 외화를 거는 것이 해결책이었다. 외화와 한국영화를 교차 상영하는 것이 규칙이었기에 1년 전 완성 후 창고에서 잠자던 〈바보선언〉을 단성사에 걸었다. 딱 일주일만 돌리고 내리는 패전처리용이었다. 그런데 대박이 났다.
“사실은 촬영 중간에 김희수 편집 기사가 저를 부르더라고요. 자기가 편집한 걸 보여주면서 ‘이 감독, 이번 영화는 한국영화에서 못 보던 독특한 영화 같아’라는 겁니다. ‘무서운 영화가 될 것 같다’고 하기에 ‘기왕에 망치는 것, 온갖 실험을 다 하는 쪽으로 가자’라고 마음먹었죠.”
1987년 이후 시련의 연속
1986년 관객동원 1위 〈이장호의 외인구단〉 촬영현장. (왼쪽부터) 주인공 까치 역의 최재성, 이장호, 원작자 이현세, 손병호 감독 역의 안성기. 사진=이장호 제공 |
망치려고 작정한 영화가 극찬을 받으니 기회가 다시 왔다. 〈무릎과 무릎 사이〉(1985년), 〈어우동〉(1986년)으로 연타석 안타를 쳤고, 영화사 설립 규제가 풀린 후엔 직접 영화사 ‘판’을 설립해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년)을 제작했다.
하지만 1986년 흥행 1위 〈외인구단〉을 끝으로 흥행감독 이장호의 전성기는 다시 오지 않았다. 소설가 이제하의 원작을 AFKN 제2차 세계대전 다큐멘터리처럼 세피아 톤으로 찍은 로드 무비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7년)는 흥행은 저조했으나 평단의 극찬을 받은 이장호의 마지막 걸작이다. 유수의 해외영화제가 그를 초청했다.
이후에 만든 영화는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거의 외면당했다. 김지미의 지미필름이 제작한, 사할린 현지촬영까지 감행한 야심작 〈명자 아끼꼬 쏘냐〉(1992년) 역시 완전히 망했다. 1987년 이후 지금까지는 시련의 연속이다. 제작한 8편의 작품이 하나같이 실패했고, 집도 경매에 들어갔으며, 외도로 가정을 무너뜨렸고, 교통사고도 크게 당했다.
― 대중이 갑자기 이장호의 영화를 외면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가 너무 상업적으로 흘렀으니까요. 매력을 잃은 겁니다. 자연도태(自然淘汰)죠.”
북한 인권 戰士가 되다
이장호 감독은 지난 6월 개최된 제1회 서울락스퍼인권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왼쪽부터) 허은도(영화감독) 프로그래머, 박선영 조직위원장, 이길원 운영위원장, 이장호 집행위원장. |
이장호의 현직은 서울영상위원회 위원장이다. 서울에서 영화를 찍고 싶은 국내외 영화사를 유치・지원하는 기관이다. 시나리오 창작, 영화 편집 등 작가와 연출가를 지원하는 공간도 운영해 영화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2011년부터 집행위원장을 맡아 진행한 북한인권국제영화제도 그의 주요 활동 무대다.
“저 자신이 실향민(失鄕民)의 아들이기도 하고, 탈북민(脫北民)이 많아지면서 저도 북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어요. 북한의 실상을 제 눈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첫해 초청작 중에 〈노스 코리아 VJ〉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었죠. 북한 지하 언론인들이 촬영해 넘겨준 영상을 일본의 이시마루 지로 감독이 40분으로 편집한 작품입니다. 비쩍 마른 여자아이가 남루한 옷에 거무튀튀한 얼굴로 토끼풀을 뜯고 있죠. 자기가 먹으려고 한다면서요. 나중에 그 아이가 죽었다는 기사도 나왔어요. 초등학교 5~6학년으로 보였지만, 촬영 당시 그 아이의 나이가 22세인가 23세입니다. 영양실조죠. 고운 이름을 가진 아이였는데, 부모님이 예쁜 이름을 지어줬을 때 심정을 생각하니 눈물이 막 쏟아졌습니다.”
이장호 감독은 ‘자유·정의·인권’을 기치로 내걸고 지난 6월에 열린 ‘제1회 서울락스퍼인권영화제’에서도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박선영 조직위원장(물망초 이사장·제18대 국회의원)의 권유도 있었지만, 북한인권국제영화제를 하며 느낀 문제의식이 그를 북한 인권 전사(戰士)로 만들었다.
“몇 해 전 서울역 광장에서 북한인권국제영화제 개막식을 하는데 젊은이들이 무관심하더라고요. ‘삼국시대처럼, 아예 다른 나라로 가자’는 친구들도 있고. 노숙자들은 ‘우리도 먹고살기 힘든데 왜 북한까지 도와야 하나’ 하더군요. 누군가 계속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북한인권은 사각지대(死角地帶)가 되겠구나, 이건 내 여생(餘生)의 숙제다, 숙제가 크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1970~1980년대 내내 정부에 비판적이었는데, 좌(左)에서 우(右)로 방향을 튼 겁니까.
“그때도 제가 좌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군부독재가 영화를 마음대로 못 만들게 해서 반발했던 겁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청렴결백했고, 국가를 위해 헌신한 점은 인정합니다. 다만, 국민과 상호 소통했다면 나라를 좀 더 발전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은 지금도 합니다.”
이번 영화제에 관해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문제가 있다. 폐막작 미국 라이언 화이트 감독의 영화 〈암살자들〉 이야기다. 2017년 2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벌어진 김정남 피살 사건을 재구성한 다큐멘터리인데, 2020년 1월 미국 내 독립영화제 ‘선댄스 영화제’에서 처음 상영한 이래 세계의 여러 영화 평점 사이트에서 만점에 가까운 호평을 받았다. 평점만 보자면, 〈기생충〉과 거의 동급이었다. 배급사 측은 한국 내 정식 개봉을 준비했는데, 한국 영화진흥위원회는 이 영화를 예술영화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영진위가 지원하는 극장과 대형멀티플렉스 극장 등에서의 상영을 사실상 막은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말고, 대한민국의 기생충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민의 혈세(血稅)를 받으면서도 오히려 대한민국을 위기에 빠뜨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이 바로 ‘기생충’이죠.”
최은희·신상옥 拉北
북한인권에 눈을 뜬 계기라면 신상옥·최은희의 납북(拉北), 그리고 그들의 탈출과도 연관이 있을 터이다. 홍콩에서 최은희 여사가 납북된 해가 1978년, 곧이어 신상옥 감독도 북으로 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최은희 선생님이 실종되었을 때 먼 나라 얘기 같았어요. 현실감이 없었으니까. 선생님은 감독님과 이혼한 뒤 우연히 충무로 뒷골목에서 뵌 적이 있어요. 함께 소주를 마시면서 신상옥 감독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상당히 쓸쓸해 보였어요. 홍콩 출국 불과 얼마 전입니다.”
안양예고 운영 문제 등으로 최은희 여사는 스트레스가 많았다. 학교 운영비 투자 제안을 받고 홍콩으로 출국한 후 종적이 끊어졌다. 얼마 후 신상옥 감독도 홍콩에서 사라졌다. 신상옥 감독의 상황은 더 나빴다. 검열법 위반으로 신필름의 영화사 등록이 취소되었고, 정권과 척을 졌다는 건 비밀도 아니었다.
“DJ 납치 사건을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는 말씀을 자주 하고 다니셨거든요. ‘화제성이 있는데다 흥미진진한 활극의 요소도 있고, 한・일을 오가며 찍는 국제적 작품이다’라고. 그만큼 재미있는 영화 소재도 없다는 뜻이었는데, 정보기관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습니다.”
두 예술가의 납북은 이장호에겐 이해하지 못할 충격이었다. 두 사람 모두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현실인데 믿기지 않았다.
“신문에 두 분 납북 소식이 실렸지만, 영화계에선 별별 소문이 다 돌았습니다.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을 받다가 뇌를 다쳤다’ ‘한양대 병원에서 극비 뇌수술을 했다’ ‘부산에서 신 감독님이 변장하고 아이스크림을 파는 걸 봤다’…. 그래서 처음엔 납북 자체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재회
1986년 북한에서 탈출한 두 사람을 다시 만난 건 워싱턴에서였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로 뉴욕필름페스티벌에 초대를 받고 미국 도착 즉시 전화를 넣었다. 필라델피아에서 공부 중이던 김홍준 현 한예종 교수와 동행했다. 약속 장소인 워싱턴 레스토랑에서 창밖을 보고 있는데 벤츠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와 거칠게 회전했다. 운전 솜씨만 보고도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왈칵 눈물이 나고 신기하고 반갑고 서러웠다.
“저보다는 두 분이 더 궁금하신 게 많았습니다. 한국영화의 현실이라든가…. 북에서 〈어둠의 자식들〉(1981년) 같은 제 영화를 보셨다고 해서 깜짝 놀랐죠. ‘해외반출 불가(不可) 영화였는데, 김정일이 영화를 좋아하기는 좋아하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신상옥 감독이 북에서 만든 영화는 보셨습니까.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년)를 보고 실망했어요. 연기, 화술(話術) 등 배우들 감각이 너무 떨어지더군요. 〈소금〉(1985년)은 인상적입니다.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탔죠. 신상옥 감독님이 〈벙어리 삼룡이〉(1964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년)를 찍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일부러 흑백으로 만들었고, 문학성이 영화로 잘 흡수된 명작이었습니다. ‘배우들 연기를 단기간에 끌어올리기는 어려우니까, 사극이라면 연기력의 약점이 덜 드러나리라’ 고심하신 흔적도 읽혔습니다.”
이장호 감독이 보기에 신상옥·최은희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북한 주민들에게 혁명적 변화와 충격을 줬기 때문이다. 김씨 일가 찬양 일색이던 북한 예술계에 감독과 배우 이름, ‘신필름’이라는 제작사가 크게 쓰인 크레디트는 그 자체가 변화의 상징이었을 터이다.
이후에 자주 찾아뵙고 들은 두 사람의 북한 시절 경험담, 북한 수뇌부의 대남관(對南觀), 김정일이 고백했다는 한국 내 정치・사회・문화 공작 등은 통일이 되어야만 진실 확인이 가능할 것이다.
“영화는 영혼을 깨우는 수단”
(사)신상옥기념사업회 전(前) 이사장으로서 이장호는 또 다른 꿈을 꾼다. 신상옥 감독이 남에서 만든 영화, 그리고 신상옥・최은희 탈출 이후 북에서 상영 금지한 모든 작품을 세계 전역에서 자유롭게 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할 시간이 왔다.
― 이장호에게 영화란 무엇입니까.
“영혼을 깨우는 수단이죠. 삶의 문제, 영혼의 문제를 다루고 영혼을 살리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 젊은 후배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균형감각을 길러라. 젊다는 건 열정이 넘치지만 다른 면에선 편견에 빠지기 쉬우니까요. 사회, 인생을 보는 눈을 기르고, 인문적 소양을 길러야 오래갈 수 있습니다.”
― 본인의 인생을 평가한다면.
“나를 이룬 것에는 위장(僞裝)이 많다. 다 청소하고 싶다. 나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하나님이 계셔야만 구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하나님 계신 곳이 ‘별들의 고향’일지 모른다. 경아가 그곳에선 행복하길 빈다.
출처;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