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근엄하고 장중”한 문장을 지으려고 동서고금 현자, 석학의 자구를 빌려 “고상한 체” 한 적은 없나, 근엄하고 장중한 문장에 이르지도 못했으니 “고문의 찌꺼기”를 따다가 쓰며 고상한 체한 문장을 후회한다. 두루 ‘활달’에 이르지 못하고 ‘진의’가 없는 문장은 “농부가 잡풀을 뽑아버리듯” 뽑아버리자. 그래, “속될지언정 거짓 문학은 하지 말자.” 나는 또 심노승(1762-1837)의 말을 빌려 쓴다. 활달한 글은 어디에 있을까. 참된 시는 어디에 있을까.
남자들은 가래로 뻘 파 쉽사리 잡지만
여자들은 힘이 달려
몸뚱아리가 연장이여
팔 걷고 쑤셔 넣다 보면 어깨까지 다 닿는 겨
줄에다 산 낙지를 묶어서 손에 달고
살째기 집어넣으면
속에치 꼬셔 나오제
으찌나 잽싼지 몰라 깜빡 하믄 나만 망해불어
알 까고 죽은 낙지는 살 썩어도 냄새가 안나
알 보듬느라 묵지도 않고
헛껍딱만 남은 겨
세상에 모든 어매라는 것이 다 같은 거 아녀
-이지엽 <세상의 모든 어미>(《문학사상》11월호)
무안 사람이든 해남 사람이든 갯벌을 품고 살아온 “어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낙지잡이로 생계를 꾸려온 노모의 육성이든 시적 화자의 목소리를 빌린 시적 재구성이든 방언의 흡인력과 호소력이 차지다.
갯벌 속에 숨은 낙지를 잡으려면 화자의 말대로 “가래”나 삽을 써서 갯벌을 뒤집어야 한다. 아니면 조금 때를 기다려 갯벌에 드문드문 드러난 돌을 살짝 뒤집어 돌바닥에 붙어 있던 낙지를 잡는 짜릿한 행운도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얘기는 갯벌체험에 나선 사람들 얘기고 갯벌에 몸을 맡긴 어촌 아낙네들은 낙지구멍을 찾아야 한다. “힘이 달”리는 이 “여자들”은 “몸뚱아리가 연장”이다. “줄에다 산 낙지”를 묶어서 손에 달고 낙지구멍에 “살째기 집어 넣으면” 깊숙이 숨은 “속에치” 낙지까지 “꼬셔 나”온다. 이 낙지들이 “으찌나 잽싼지” 갯바닥에 엎드린 “어매”가 “깜빡 하”는 사이 낙지가 사라져 “망해”버린 게 한두 번 아니다.
사실 시인이 여기까지 나온 얘기를 하려고 연시조를 쓴게 아니다. 시인의 전언은 셋째 수에 있다. “알 까고 죽은 낙지는 살 썩어도 냄새가 안”난다. 알까기 위해 “알 보듬느라 묵지도 않”아 “헛껍딱만 남”긴채 굶어 죽었으니 썩을 것도 냄새날 것도 없겠다. 어미 낙지자 사람의 어미나 다를 게 없다. “세상에 모든 어매라는 것”은 “다 같”다. 나를 보듬느라 허리 굽고 손발가락 마디마디 틀어진 어머니, 이제 요양원 휠체어에 앉아 누군가 와서 밀어주기만을 기다리는 어머니, 죽으면 썩어질 몸뚱이라고 바람구멍 숭숭 뚫린 허리 휘도록 고육을 소진한 허깨비, 나의 어머니.
갯벌 낙지잡이로 생계를 꾸리는 어촌 아낙의 참된 목소리만으로 갯벌 풍경과 갯벌에서 부대끼는 인생이 환히 보이기에 활달한 <세상의 모든 어미>의 시경(詩境). 이 시경에 드러난 정경(情景)을 시인은 세상 모든 불효자의 가슴 앞에 펼쳐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