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의 일본군에는 군 시설의 일부로 위안소가 있었습니다.
그곳에 젊은 여인들이 위안부로 수용되어 군인과 군속들에게 성적 위안을 제공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상당수의 조선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여인들에겐 행동의 자유가 없었습니다.
성적 위안은 여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강요되었으며, 여인들은 거부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외출의 자유조차 박탈되었습니다. 그녀들은 노예와 마찬가지 신세였습니다.
요컨대 일본군의 위안소 제도는 여성의 인권을 침해한 반인륜 범죄였습니다.
일본군과 일본국가가 공식 사과하고 책임을 져야 할 전쟁범죄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은 그 점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일본국가가 공식적으로
책임질 일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마치 있을 만한 일이 있었던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점을 납득할 수 없으며,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세상사가 다 그러합니다만, 분노가 지나친 걱정으로 흐르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냉정하게 책임을 추궁하는 데
격정의 분노는 경우에 따라 장애가 되기 때문이지요. 사건의 내용을 잘못 알거나 본질을
잘못 짚으면 쓸데없는 논쟁만 생기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전쟁범죄를 다룸에 있어서 마치
재판정에서 진실을 다투는 법률가처럼 엄숙하고 냉철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는 《재인식》의 편집에 있어서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두 편의 논문을 추천하였습니다.
저의 추천 의도는 그러하였습니다. 여태껏 한국인들이 이 문제와 관련하여 잘 생각해 보지
않았던 사건의 복합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고 싶었던 것이지요.
우선, 한 가지 지적해 둘 점은 위안부와 정신대(挺身隊)는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점을 제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만, 그때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시초문이라며 놀라워합니다. 그만큼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은 정신대 하면
곧바로 일본군 위안부인 줄 알고 있습니다. 일제가 조선의 순결한 처녀들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동원하여 일본군의 위안부로 삼았다는 것이지요. 나중에 소개하겠습니다만,
중·고등학교의 역사교과서에도 그렇게 쓰여 있으니 그렇게 아는 것은 당연하겠습니다.
교과서뿐만이 아닙니다. 제가 쓰고 있는 <국어대사전> (금성출판사)에서도 '정신대'를
찾으니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의 위안부로 강제 종군한 한국 여성들의 대오"라고
되어 있군요. 인터넷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정신대'는 '식민지의 여성들을 강제로 징용하여
일본 군인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만든 성적 노예집단인 종군위안부를 일컫는 말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수가 무려 20만이나 되었다고 하는군요. 이 수치는 한때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도 인용된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위안부와 정신대는 내용이나 경위가 전혀 별개인 사건이었습니다. 이미 그에
관해서는 <국사교과서에 그려진 일제의 수탈성과 그 신화성>(<시대정신》28, 2005)이라는
논문을 쓴 적이 있는데요, 보다 자세하게는 그 글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마디로 정신대는 일제가 전시기에 여성의 노동력을 산업현장으로 동원한 것을 말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영국 등의 연합국도 남자들이 군대에 나가 자리가 비자 여자들을
군수공장으로 동원했습니다. 일제는 그 점에서 연합국보다 오히려 늦었던 편입니다.
일본에서 정신대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는 것은 1943년 9월부터이며, 공식 결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1944년 3월로 알려져 있습니다. 14세 이상의 미혼 여성들을 자발적으로 학교, 지역,
직장 단위의 정신대로 조직하여 군수공장으로 가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별 효과가 없자
1944년 8월 '여자정신근로령(子挺身勤勞令)' 이란 법령을 발동합니다. 이 법에 따라
12~40세의 미혼여성이 국가에 의해 공식 동원되어 군수공장에 보내졌습니다.
조선에서는 이 법이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1944년 그해에 시행된 징병제兵制)나
징용령(敎用合)에서처럼 국가가 행정력을 발동하여 여자들을 공식 동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상 동원과 같은 강제가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만,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관의
모집과 알선에 지원해서 나가는 식이었습니다. 예컨대 여학교의 교사가 여학생들에게 나라를
위해 정신대로 나가라고 권유하였는데요, 권유를 받는 여학생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강제와
같았던 것입니다. 조선에서 정신대가 조직된 최초의 사례는 1943년 11월 서울시내의
집객업소에 종사한 3,349명의 여자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뒤이어 1944년 3월에 여자정신대
제1대가 평양의 군수공장에 4월에는 고녀생 제1회 정신대가 인천의 조병창)에 투입되었습니다.
뒤이어 일본으로까지 건너가 군수공장에서 노동한 정신대의 행렬이 있었습니다. 그 정확한
총수에 대해서는 자료가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아 알지 못합니다. 다만 나고야에 있는 미츠비시
항공기 공장의 300명 등, 알려진 한에서 정신대가 투입된 공장의 사례들을 모두 합하면
약 2,000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이영훈 저, ‘대한민국 이야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