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31] 정수원(鄭壽源) - 소명하신 뜻길 따라 1. 미리 정하신 신앙 가운데서 자라나 - 2
9 조모는 1935년 10월에 총독부 종무과의 허가를 얻어 성주교단(聖主敎圍)을 세워서 본격적인 전도사업에 들어갔다. 교세는 날로 뻗어 나가 정주(定州), 안주(安州), 숙천(肅川), 평양(平壤), 원산(元山), 해주(海州), 서울 등으로 자리잡아 나갔다.
10 이러한 환경속에서 태어난 나는 신앙의 냄새가 몸에 배어 있을 정도였다. 어린시절에는 친척과 동네사람들로부터 ‘새 주(主)새끼’로 불리웠고 고기를 먹으면 정욕이 생겨 탈선하기 쉬우니 고기를 먹지 말라는 지시에 따라 고기도 먹을 수 없었다.
11 하루는 성주교단의 은혜받은 청년이 고등계 형사인 줄 모르고 어떤 사람을 전도하다가 “일본은 앞으로 망하고, 한국은 새 주님을 중심하고 세계 1등국이 된다”는 등의 말을 하자,
12 고등계 형사는 우리 집에서 며칠을 묵으면서 성주교단의 내용을 파악하고는 돌아가서 도경(道警)에 연락하여 1943년 10월에 조모와 부친, 그리고 숙부가 투옥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시다가 100일만에 출옥했지만 조모는 이듬해 4월 1일 62세를 일기로 타계하고 말았다. 그러나 조모의 뜻을 이어 받아 집에서는 신념을 가지고 예배를 보며 지냈다.
13 해방후 이남으로 내려와서도 성주교단의 이름으로 우리 집에서 예배를 보면서 조모가 주장하시던 뜻은 나의 부친대가 아니면 내대에 와서 이루어지며 만일 그렇지 않을 때는 내 후손대에라도 기필코 이루워진다고 우리는 확신하며 생활하였다. 14 1950년 6·25가 터지자 대구에서 중학교(6년제) 졸업을 앞두고 있던 나는 학도병에 지원하여 소대장이 되어서 일선에 배치되었다. 적의 진지를 향하여 공격하다가 포탄이 터지는 바람에 10여 명의 부하가 희생 당하는 비운을 맛보기도 했고, 다리가 절단된 부하가 나를 부를 때는 데리고 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몸부림치기도 했다. 15 나는 숙부가 준 작은 성경책을 항상 가슴에 품고 다녔다. 밤에는 보초근무(步哨勤務)를 순시(巡視)한 후 조용한 시간을 이용하여 뚜껑 없는 참호(塹壕)에서 기도하고 성경을 보기도 하였다. 휴전이 되자 육군본부(陸軍本部) 작국(作戰局) 교재창(敎材廠)에 근무하게 되어 집에서 출퇴근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