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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곤 목사(한국순교유적연구회)
노형래 집사는 1923년 충남 서천군 마서면에서 노승우 장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3년 노형래가 10살 되던 해, 초등학교에서 신앙에 맞지 않는다고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부친은 퇴학당하고 돌아온 아들을 끌어안고 “주여! 어린 아들이,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힘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맡기며 격려했다.
노형래 집사는 1940년에 결혼하여 이듬해에 아들 태철이 태어났다. 그리고 해방 후 선친 노승우 장로는 가정에서 예배드리다 1948년 집을 개방하여 한성성결교회를 개척 설립했다. 교회는 노승우. 노형래 부자(父子)의 헌신적인 봉사로 크게 부흥하였다. 해방된 조국은 좌우 사상(思想)의 대결로 국민을 불안하게 하였다. 노형래 집사는 대한민족청년단 서천군 군당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노형래 집사가 이렇게 교회 일과 청년단 일에 분주할 무렵, 1950년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이 일어났다.
▲한성교회 1958년 노승우장로 장립식마치고노승우장로는 노형래 집사의 선친이다.
노승우 장로는 노형래 집사에게 피난 갈 것을 권유했지만 노형래 집사는 민족 청년단의 일은 뒤로 미룰 수 있지만, 교회를 두고 떠나는 것은 신앙 양심에서 용납이 되지 않았다. 예견한 대로 노형래 집사는 아버지 노승우 장로, 동생 학래와 함께 체포되었다.
공산당원들은 3부자의 목에 장작을 올려놓고 양쪽을 발로 밟기, 거꾸로 매달아 놓고 고춧가루 물을 코에 붓기 등 온갖 고문을 하며 회유했지만 이미 순교를 작정한 마음을 돌려놓지 못했다. 노형래 집사는 부친과 아우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혼자서 모든 책임을 지기로 하였다. 그래서 공산당원에게 대한민족청년단 사업은 혼자서 한 일이라고 주장하여 아버지와 동생 학래는 석방이 되었다.
▲노형래 집사의 아들 노태철 목사(중앙)의 가족들.
노형래 집사의 큰아들인 노태철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할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의 추도예배 때마다 말씀하시길 ‘너의 아버지는 예수님처럼 홀로 죽음의 길을 갔다.’ ”고 했다. 이후 노형래 집사는 대전교도소로 이송되었다가 공산군들이 퇴각할 때 교도소에 수감 된 2,857명 반공, 애국지사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이후 전쟁이 끝나면서 지역의 공산당원들이 붙잡혀와, 집 마당에서 공포에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 노승우 장로와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이기화 집사는 가해자들을 사랑방으로 들어오게 한 후 밥을 대접하며 “함께 예수 믿어 구원받고 영생을 얻자!” 전도하며 사랑으로 품었다.
노승우 장로의 둘째 아들 노학래는 경찰이었는데, 전쟁 후 공산 당원 20여 명을 풀어주며 전도하였다. 얼마 전 노태철 목사께서 필자에게 들려주시길 “몇 년 전 고향 한성교회에 부흥회를 갔을 때, 노승우 성자의 후손이 부흥목사로 오셨다며 교회 안 나오시던 동네 분들이 집회에 참석했고, 가해자 가운데 한 분이 집에 초청하여 정중하게 사과하며 할아버지의 용서로 멸망할 가정이 구원 받았다.”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러한 노승우 장로가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의 실천적 사랑은 지역사회에 평화를 가져왔고, 한성교회는 시골 마을 교회이지만 6분의 총회장이 배출되었다. 유족으로는 동생 노붕래 원로목사(해망동교회. 증경총회장), 장남 노태철 원로목사(서울제일성결교회. 증경총회장), 차남 노희석 목사(명일성결교회. 증경총회장), 노평란 사모(화목성결교회 허성활 원로목사)가 있으며, 장손 노윤식 목사(주님앞에 제일성결교회), 손자사위 유경열 목사(미국), 외손자 허상범 목사(예성 총회본부 선교국장), 외손부 양재은 목사(삶을변화시키는교회), 외손자 허대범 목사(신월동교회), 외손부 김안나 목사(영흥교회), 증손녀 노수현 전도사(미국)는 노형래 집사의 순교 정신을 가지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담대히 증거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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