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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인의 진도문화읽기
「강송대 명인의 남도민요」
강산이 들뜨고 사람이 ‘가세 가세’와서 안기는 소리
추사는 그 위대함에 비해 참 인색한 예술 비평가였다. 당대를 살았던 원교 이광사의 작품에 대해 동국진체의 진수를 외면하며 제주 유배가는 길에서도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편액을 뜯어내리라고 주문했다. 그야말로 안하무인 금강안(金剛眼) 혹리수(酷吏手)를 내 보였다. 그러나 왜 유독히 소치에게는 무한애정을 내보였는지 때로 의아스럽기도 하다. 추사는 해배되어 돌아올 때 그 글씨를 다시 걸어놓으라고 했다던가.
남도잡가라는 용어는 참 어색하다. 옹색하다. 노래라는 것이 시대의 풍(風)을 알리는 역할을 통해 당대 사람들에게 스며들고 그 바람을 타고 널리 또는 시간의 고개를 넘어 이어져 왔다고 한다. 국풍(國風)은 80년대 한국 신군부 퍄쇼정권의 삼색통치 방식보다 2천년을 넘어 춘추시대의 문화 시와 노래의 조류를 지칭하고 골라 마침내 산동성 출신 공자는 시경(詩經)을 짓게 하였다. 우리는 80년대를 장식했던 가수 이용의 ‘바람이려오’로 광주의 민주화운동을 지워버리고자하는 허문도 작품 ‘국풍 81’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조선시대 후반 특히 호남지역에서는 구중궁궐에서 연행되는 국악(正樂)과 달리 판소리가 민중들은 물론 양반들 사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조선시대는 500년 동안 민란의 시대였다. 민란은 민요가 앞서거나 민중의 갈증이 비결을 운율을 터져나와 소리가 되어 강과 산을 넘었다. 신분계층과 백두대간 호서, 삼한관경을 구분없이 함경도까지 서북풍을 불게 하였다.
민요가 가장 번성한 곳이 전라도이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넓은 벌판을 바탕으로 협업이 필수적인 농업이 발달된 것과 그와 반해 정치적으로 소외적인 현상이 다양한 민요, 노동요가 발돨되었을 것으로 본다. 동학의 녹두꽃이 그 대표적이었다. 노래는 민심의 곳간 역할을 한다.
진도는 또한 삼별초의 본거지였다. 지금도 저항과 한민족 자존심의 상징으로 읽힌다. 명량대첩의 강강술래 의병(疑兵)전술을 펼친 진도 아낙네들의 정신은 더욱 극적이다. 시인 김승희의 말을 옮긴다. “진도 아리랑은 생명과 욕망의 리비도를 마음껏 발산한다. 정선 아리랑이 멜랑콜리의 노래라면 진도 아리랑은 '카르페디엠(carpe diem.현재를 붙잡아라)'의 노래다. 겉으로는 욕망 예찬인 것 같아도 속으로는 소멸과 시간에 대한 슬픈 저항을 담는다.”고 설파했다. 절망보다는 풍자를 통해 현실을 극복하려는 여인들의 심정은 시어머니와 시아버지에 대한 거침없는 달짝한 비난을 담는다. 그저 밀당이나 하는 연애담 정서만을 기대했다가는 콧등에 자갈밭 돌이 날아온다.
시엄씨 죽으라고 빌었더니 친정엄매 돌아가셨다는 부고가 왔다는 가사말은 자책과 현실한계를 토로하지만 바로 그 시엄씨보고 ‘느그네 아들 염념하면 내가 밤마실을 돌겠느냐’고 들리지 않는 구박을 내지른다. 이 대담함은 얼쩍없는 노동력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서 지며/ 날 두고 가는 님은 가고 깊어서 가나“
"세월아 네월아 오고 가지를 마라/ 아까운 이내 청춘 다 늙어 간다"와 같이 시간에 대한 성찰과 시간에 맞서 쾌락을 원하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고 정곡을 찌른다. 또 "십오야 밝은 달은 구름 속에서 놀고/ 명기명창 화중선이는 장고 복판에 논다"와 같이 '오늘 놀아라'라는 대담한 열락의 태도를 보인다.“면서 "살다 보면 살아진다"가 아니라 '오늘 살아라'라는 빛의 명령이라는 단호한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카르페 디엠보다 진도의 민속 민요는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가 늘 깔려 있는 삶을 부정하지도 벗어나지도 않는다. 오래 동안 섬이라는 유배지에서 남성들은 어설프게 시문을 읊거나 한량 숭내를 하는 동안 진도 여인들은 구기자 밭고랑을 진돗개와 함께 기어가며 잡풀을 매고 그 징한, 오줌싸는 자갈을 한나절 동안 골랐다. 삶과 죽음이 밭고랑 한 줄 사이거나 씻김굿 질베 위에 같은 무게로 얹혀지는 곳.
진도아리랑은 철저하게 여성의 노래이다. 남정네들은 곁가지에 불과하다. 이게 과연 잡가인가? 나훈아의 잡초인가. 서봉수명인의 잡초류인가? 강송대 선생의 노래는 잡가가 아니다. 우리 시대 주권민중의 정악이다. 본가 타령이다. 왕이라는 특정인을 위한 노래(보렴. 국태민안)가 아니었다.
이번에 나온 진도문화원 발간 ‘남도잡가 에능보유자 「강송대의 남도민요」 진도명인예술가 열전 기록화 사업 발간집을 잠시 열어본다.
“저 멀리 바다에는 아낙네들이 조개를 줍고
우리 고장 뭍에서는 큰 애기들이 동백을 따네.”(강송대 명인 채록 ‘동백타령’(중모리) 중에서)
“빨간 동백 따다가는 님 계신 방에 꽂안놓고
하얀 동백을 따다가는 부모님 방에 꽂아주세.”
진도 사내들은 “동백 따는 큰애기야 큰애기야/ 동백만 따지 말고 이 총각 마음도/ 살짝쿵 따다가 오순도순 사랑 맺세.”라며 연정을 붉게 내 비친다.
「들국화」 -동살풀이-에선
“산들바람 부는 가을 하늘 높고 물 맑은데
고요한 산기슭에 들국화가 피었구나
연분홍 보랏빛은 두메골 처녀인 양
힌빛깔 맑은 자태 산중처사 닮았는가 닮았는가.” 에서는 안도현이나 섬진강의 김용택 등 현대시인의 자유시를 바로 옮겨놓은 듯한 서정의 극치와 자연교감이 풍부한 사유를 내보인다. 민요는 한 사람의 자작시가 아닌 수많은 사람들이 심회를 담아 엮은 떼창이 아니겠는가.
2001년 제34호 남도잡가 예능보유자 인정
진도문화원은 재작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81호 진도다시래기 명인 강준섭옹에 이어 올 해는 남도잡가 예능보유자인 강송대 선생 의 남도민요를 김현숙(문화인류학 박사) 국립국악원 학예연구사가 대표집필하여 발간하였다. 강송대선생은 97년 제15회 강진 전국국악경연대회 판소리명창부 대상을 받았으며 그 해부터 지금까지 진도군립민속예술단 성악부 단원 및 지도위원이며 99년 진도읍에 강송대국악연구소를 개설한다. 2001년에는 전남 무형문화재 제34호 남도잡가 예능보유자로 인정받는다. 현재는 남도잡가보존회 회장을 맡고 있다. 2017년 18년 국민대통합아리랑 공연, 웰컴투 코리아 “대장금과 한국요리”9도쿄, 후쿠시마 등 국외공연 2회), 2005년에는 진도무형문화예술시리즈1: 진도의 혼 남도잡가 녹음(국립남도국악원) 국악방송 새음원시리즈 <김오현의 소포걸군농악> ‘진도북춤’구음 녹음을 하였다. 사라져가는 구음에 대해서는 오직 강송대 선생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박주언 진도문화원장은 이번 ‘강송대의 남도민요’ 발간사에서 “옛날사람들뿐 아니라 지금도 많은 민족문화예술인들이 서로 이웃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 곳이 진도”라고 밝히면서 그러나 과거 수많은 진도예술인들이 그들의 훌륭한 예능과 함께 살다가 예능을 가지고 세상을 떠나버린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기록의 아쉬움을 내비치기도 했다. 한국 대금의 국수로 일컫는 박종기 선생(부친 박덕인 명인),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 초대 예능보유자였던 김대례 선생, 진도북춤의 귀재 무송 박병천 선생 등을 저절로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물론 고 허화자 진도홍주 기능보유자. 남도들노래 예능보유자였던 조공례 선생 등도 마찬가지다. 다행히 진도다시래기의 김귀봉씨는 국립남도국악원에서 평전을 냈다.
이어 박주언 원장은 “민요는 민중의 소리이자 우리 삶의 흥그레”이며 강송대 명인은 인간 감정의 가장 아름다운 대변인으로 어려서부터 평생을 남도민요와 함께 살아왔으며 공연무대의 꽃인가 하면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는 호랑이 선생으로서 소리의 맑고 깨끗함과 높고 낮음의 스스로움, 타고난 음악성은 도저한 경지에 이른 분으로 칭송하였다.
강송대 선생의 어머니는 이화중선을 스승으로 하였으며, 강숙자 명창의 제자이며 어머니 이근녀씨, 외손녀(남도잡가 전수조교 노부희)와 함께 10여 년 전 3대 진도아리랑 CD를 제작 발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요즘 뜨는 트롯분야에도 강송대류 창법 돋보여
최근 한국 트롯의 대세로 떠오른 송가인씨도 강송대 명인으로부터 창을 배웠다. 지난 2019년 여름 진도 무형문화재전수관에서 촬영한 프로그램에서 당시 조선TV는 두 스승과 제자의 극적인 해후를 조명해 방송해 내기도 했다. 나도 그 자리에 취재차 찾아가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강 선생은 늘 여여하다. 진도에서의 생활 자체에 아쉬움을 갖지 않는다. 이제 79세에 이르렀다. 평생 삶 자체가 무대였으며 공연의 연장이었다. 진도의 명인들은 대부분 튼실한 젖줄을 갖고 있다. 강송대 선생은 물론 조오환 닻배노래 예능보유자 어머니 박색구(1909~1992)씨, 남도들노래 예능보유자 박동매(어머니 조공례)씨 등이 그렇다. 조공례 선생은 곽재구 시인의 절창으로 그 입술의 떨림이 ‘짖이겨진 꽃잎’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분이다. 강송대 명인은 제자 송가인과 또 다른 남도트롯의 진수를 이윤선 교수가 진행하는 ‘얼시구당’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제대로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녀는 남도민요 레퍼토리를 첫째로 육자배기, 흥타령, 보렴, 화초사거리, 새타령, 진도아리랑, 뱃노래(구), 둥덩이타령, 물레타령 등으로 꼽았다. 박주언 문화원장은 이번 작업에 소리채록과 악보작성 및 라이프 스토리까지 정리한 강 명인의 제자 김현숙 전남도 문화재위원, 영상제작을 맡은 조대완 대표, 촬영에 협조한 제자들, 이동진 군수를 비롯 진도군 관계자들에게 특별한 감사를 드렸다.
일반인에 좀 생소한 노래 등 무려 36곡의 남도민요를 꼼꼼히 채록한 김현숙 저자는 채보와 함께 절절한 구술 생애담을 정리해 넣어 강송대선생의 진면목을 자세히 알 수 있도록 하여 진도 예술계는 물론 전국 국악 민요 분야에서 후학들의 뜻깊은 교재를 길이 남는 혼신의 열정을 담아냈다. 이번 책자 발행에 이동진 군수는 “강송대 명인께서는 의신면 향교리에서 태어나 강숙자 명창으로부터 춘향가, 강한수 선생에게 판소리를 사사받아 44세 제3회 경주 한국판소리경연대회 민요부문 우수상, 제2회 남도민요 전국 경창대회 명창부 대상(대통령상)을 수상, 2001년 전남 무형문화재 제34호 남도잡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고 알렸다. 제자이기도 한 김현숙씨는 머리말에서 “강송대 명창의 노래는 판소리꾼이 부르는 노래하고는 차이가 있다.”면서 패기성음보다 민요는 서정성 강한 노래로 강 명인은 ‘민요를 민요답게’ 부르는데 탁월한 능력을 갖추었으며 이 책의 1장에서는 강송대의 소리인생 70년을 정리하고, 2장은 남도민요 사설 총정리, 3장은 따라배우기 채보한 오선악보로 엮었다고 설명했다.
진도는 국악계에서 귀명창이 많은 곳으로 깊이 인식되어 있다. 가야금 산조 및 병창으로 인간문화재가 된 ‘천하의 안숙선’도 진도 무대에 오를 때는 은근히 가슴이 떨린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남도민요에 대해서는 독보적인 경지에 이른 강송대 명인 등이 예향 진도를 굳건히 지키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긴장을 놓칠 수 없다면서 특히 진도의 관객들이 갖춘 추임새와 판소리면 판소리, 민요 북놀이 육자배기 등 소리읽기의 탁월한 감성을 가진 교감능력에 부응해야 하는 부담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억지소리를 내지르거나 허술하니 박자에 빈틈을 내보이다가는 아직 덜된 ‘아랫 것’으로 치부되어 외면당하고 만다. 강송대 선생은 그 부친이 한학에도 조예가 깊었음을 크게 자부심으로 삼고 있다. 늘 현역 정신을 고수하며 공부를 그치지 않고 제자양성에 몰두하는 남도 국악계의 큰어른으로 자리잡고 있다. 팔순을 앞둔 나이에도 청량한 음색을 잃지 않는 강송대. 그녀의 소리는 마치 남종화의 간결한 필선의 공간성이 풍부한 수묵산수화를 떠올리게 한다. 화려한 기교를 절제하며 오히려 한국의 산사 새벽종소리같은 맥놀이가 대를 이어 옥주고을에서 영산강 섬진강을 건너 퍼져나갈 것을 확신해본다.
다음번 진도예술명인 열전 후보는 어떤 분이실까? 국립남도국악원과 함께 이제 단지 전설이 아닌 문화예술의 실질적인 지평과 가치를 넓고 높게 펼치는 작업이 계속되기를 기원한다. 민속문화예술특구 본향 진도에서 이제 우리 곁에 왔던 명인들에 대한 기록의 진수를 보여주는 진화와 품격을 내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박종호 예향진도신문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