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기 2558년 부처님 오신날 봉축 법회 (2014. 5. 6) http://cafe.daum.net/bodydhamma/JBSw/167
"더 좋은 삶, 더 좋은 사회" 오늘은 뭐 굳이 입에 올릴 필요도 없이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은 부처님의 뜻을 실천하는 날입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실천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 뜻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오늘이에요. 부처님 뜻의 실천을 모여서 결의하는 날이기도 하지요.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부처님 오신날을 그것을 기념해서 감사하는 법회를 하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사실은 굳이 모여서 법회 할 필요도 없죠. 각자가 부처님 뜻을 실천하면 될 터인데. 그렇지만 우리는 현실세계에 살기 때문에 현실세계에서는 이러한 것도 실천하는 하나의 방식이죠. 오늘의 주제는 「더 좋은 삶, 더 좋은 사회」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주제이고 부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 또한 이것입니다. 더 좋은 삶, 더 좋은 사회. 부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고통 받는 중생을 위해서다. 이 땅에 고통 받는 중생이 없었다면 나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셨죠. 이 땅에서 고통 받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더 좋은 삶과 더 좋은 사회가 부족한 것을 말하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탄생게誕生偈에서 이렇게 이야기 하시죠. “신들의 세계에서나 인간들의 세계에서 나 홀로 존귀하니 天上天下 唯我獨尊 고통 받는 모든 생명을 내가 구원하여 마땅히 편안케 하리라 三界皆苦 我當安之 ” 부처님께서 태어나서 하셨다고 하는 말씀이에요. 실제적인 이 말씀은 부처님께서 성도하시고 하신 말씀이시죠. 물론 어느 경전에서는 부처님이 탄생하시면서 했다고도 해요. 부처님이 탄생하시면서 했든, 부처님 입장에서 보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또 다른 탄생이죠. 어머니 자궁에서 세상에 던져진 순간만이 탄생은 아니에요,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하시고 하셨다고 하는 “신들의 세계에서나 인간들의 세계에서 나 홀로 존귀하니 고통 받는 모든 생명을 내가 구원하여 마땅히 편안케 하리라" 하신 이 선언이 탄생게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죠. 여기서 부처님께서 이야기 하시고자 하는 것이 뭐냐. 더 좋은 삶, 그리고 더 좋은 사회예요. 그것은 무슨 말이냐고 하면 부처님이 말하시는 더 좋은 삶과 더 좋은 사회는 뭘까? 적어도 부처님께서 그동안 경험했던 그 시대의 경험의 세계는 아니에요. 그 시대의 현실의 세계는 아니에요. 분명히 그 세계가 아닌 그 세계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 세계를 뜻하죠. 그렇지 않다면 굳이 그런 말씀을 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더 좋은 삶과 더 좋은 사회. 그것이 2500년 전에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해 주신 길이고 우리에게 그 길을 걸으라고 하신 겁니다. 그 이야기는 뭐냐면 불교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단순해요. 바로 이 명제예요. 더 좋은 삶과 더 좋은 사회. 이 명제를 벗어나지 않아요. 2500년 동안 더 좋은 삶과 더 좋은 사회를 구성하는데 아직 도달하지 못했을 뿐이지 우리는 그 길 위에 있는 거예요. 왜 그럼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을까? 적어도 그 동안의 불교는 더 좋은 삶에는 도달했지만 더 좋은 사회로는 나아가지 못했어요. 냉정하게 이야기 하자면, 더 좋은 삶에까지는 이르렀다고는 할 수 있지만 더 좋은 사회로 나아가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물론 실패라고 할 수는 없어요. 사실 나는 실패라는 말을 잘 쓰지 않아요. 왜 그러나면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실패라는 것은 없다. 왜 실패라는 것이 없느냐? 다만 내 기대에 부응되지 않은 것뿐이지. 뭐 이런 거예요. 예를 들자면 오늘이 결혼기념일이죠. 그래서 아내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퇴근하고 나면 남편이 멋진 선물을 주겠지.' 그리고 퇴근 했는데 남편이 이렇게 이야기 하죠. "우리 결혼기념일인데 우아한 곳에서 좋은 음악 들으며 스테이크나 썰까?" 그날 선물은 밥 먹자는 거죠. 그런데 뒤집어 놓고 생각하면 나만 먹나? 저도 먹지. 그럼 밥 먹자고 하는 것은 선물일 수가 없는 거예요. 냉정하게 이야기 하자면. 근데 이정도면 그래도 내가 눈감아 주려고 했지. 근데 이런 것도 싹 빼버리고 키스하면서 "사랑해. 고마워." 그리고 그냥 끝났어. 다음날 눈뜨고 뭔가 깜짝 이벤트가 있는가? 찾아봐도 아무것도 없어. 어제 그 한마디로 끝낸 거야. 이래서는 기분이 별로 안 좋지. '이 남자 뭐야. 20년 전에 무릎꿇고 결혼해 달라고 애걸복걸 하는걸 내가 할 수 없이 데리고 살아 줬더니 그새 그 은혜를 잊은 거야?' 이렇게 되는 거지. 이렇게 되면 서운하죠. 그러나 냉정하게 보면 이렇습니다. 기대가 너무 컸던 거죠. 그 때 남편은 선물해주고 이벤트 해 줄만한 경제적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거야. 그래서 그것을 못하고 지나간 거지. 하지만 자기가 그 때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 거야. 저녁도 샀고 사랑한다는 말도 했으니까. 단지 내 기대치에 부응하지 않은 것뿐이에요. 내 기대치가 임계치라면 거기서 부응된 것은 절반밖에 안되었던 거지. 그것과 똑같아요. 내 기대치가 높았던 것이지 내가 무엇을 했는데 그 한 것만큼의 기대가 부응하지 않았다고 해서 실패한 건 없어요. 왜? 우리는 그 지점에서 다른 것을 시도하니까. 우리가 사는 세계는 경험의 세계예요. 그렇기 때문에 경험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어요. 경험이 지혜야. 내 기대가 부응되지 않은 그 지점에서 내 경험이 다음의 선택을 돕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실패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2500년 동안의 그 경험을 기초로 이야기 하는 거죠. 적어도 그 동안의 불교는 더 좋은 삶에는 도착했지만 더 좋은 사회까지는 나아가지 못한 것은 분명해요.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부처님이 그 당시의 현실세계를 더 좋은 삶 더 좋은 사회라 이야기 하셨을 리는 없어요. 만약에 그렇다면 여기서 '더' 라는 말은 쓸 필요가 없어요. '더' 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내가 이번에 순례길에서 우리 선우님들께 편지를 보내면서 그런 표현을 썼죠. 더 좋은 삶과 더 좋은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종교가 없는 사회. 종교가 없는 사회가 가장 좋은 사회예요. 불교가 없고 기독교가 없고 이슬람교가 없는 사회가 가장 좋은 사회. 왜 그런 줄 아세요? 우리도 여기도 부처님 이름하에 모여 있는데 왜 종교가 없는 사회가 가장 좋은 사회일까? 그건 이런 거예요. 종교는 기본적으로 구원을 이야기해요. 뭐 불교도 마찬가지예요. 불교도 기본적으로 구원을 이야기해요. 그 이야기는 뭐냐면 더 이상 아무도 구원을 기대하지 않고 더 이상 구원해야 할 사람이 없는 세계. 우리 입장에서 보면 구원을 기대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죠? 그런데 더 이상 구원을 기대하는 사람이 없어. 왜? 다 구원을 받았으니까. 더 이상 구원 해야 할 사람이 없어. 부처님 입장에서 보면 더 이상 구원해야 할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뭐예요? 더 이상 구원을 기대하는 사람도 없고, 더 이상 구원할 사람도 없는 세계. 그 세계가 불국토 예요. 거기에는 고통 받는 자도 없죠. 이미 모두가 다 구원받았으니까. 모두가 구원받은 세계에 종교라고 하는 것이 존재할 필요가 없지. 왜? 구원을 기대하는 사람도 없고 구원 해야 할 사람도 없는데 거기에 왜 종교가 있나. 종교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구원을 기대하는 사람이 있고 구원해야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해요. 아직 더 좋은 삶과 더 좋은 사회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뜻하죠. 그래서 부처님께서 성도하시고 했던 일성이 뭐였냐면 「낡은 믿음을 버려라」는 거였어요. 낡은 믿음이라는 것이 뭐냐 면은 그 당시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가치와 신념의 기준을 말하는 거였어요. 바로 그 의식을 말하는 거였어요. 그걸 버리라는 거죠. 왜? 그것을 버려야 만이 더 좋은 삶과 더 좋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 2500년 동안 기도하지 않고 명상하지 않아서 더 좋은 사회가 구성되지 못한 것은 아니에요. 그럼 왜 못했을까. 거기에서 그쳤기 때문인 거죠. 본질을 바꾸려고 하는 노력은 않고 현상만 끊임없이 좇았던 거지요. 현상만 좇는 한 그 본질은 바뀌지 않죠. 그러기 때문에 더 좋은 사회와 더 좋은 삶을 위해서는 전제되어야 되는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뭘까? 그 사회를 이루려고 하는 그 사회 구성을 만들려고 하는 전제적인 노력이 있어야 하죠.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이 뭔 줄 아세요? "노력하라."예요. 이게 부처님 마지막 단어야. "노력하라. 쉬지 말고." 즉 멈추지 말고 나아가란 말씀이죠.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읽어야 되는 것이 뭐냐면 자타카예요. 자타가라는 것은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을 읽어야 해요. 사실 불교의 교리라고 하는 것은 몰라도 되요. 사성제 ,12인연, 오온 18계...이런 거 몰라도 아무 관계없어. 왜? 그걸 모르더라도 더 좋은 삶과 더 좋은 사회를 구성하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어. 그런데 자타카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자체가 불가능해져요. 부처님의 자타카는 뭐냐면 서원의 행이거든요. 서원행이라고 하는 것이 자타카 540여편 되는 것이 다 서원행이예요. 그 이야기가 뭐냐면 이런 류의 이야기죠. 내가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매에게 쫓기는 비둘기를 대신해서 매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전생의 붓다가 저울위로 올라가죠. 여기에는 분명한 것이 하나 있어요. 비둘기의 이익도 배제하지 않고 비둘기를 잡아 먹으려는 매의 이익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우리는 이분법적이에요. 비둘기는 좋고 매는 나쁘지. 왜? 매가 비둘기를 잡아먹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분명한 것은 하나예요. 매는 비둘기를 먹어야 생존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경험의 현실세계이니까. 내가 도 닦는다고 육식 안하고 채식 할 수는 없는 거예요. 냉정하게 이야기 하자고.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죠. 채식을 하는 것은 자비롭고 육식을 하는 것은 자비롭지 않다고. 냉정하게 이야기 하면 이건 단세포적 사고예요. 배추한테 가서 물어봐. 배추가 그 말에 동의할까? 무가 그 말에 동의할까? 배추가 소금에 절여져서 김치가 되기 위해 크는 것은 아니잖아요. 배추 스스로도 자신의 생명보존을 위해서 크는 거예요. 그리고 그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 2세를 만들고 꽃을 피우고. 동물이 되었든 채소가 되었든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에요. 동일해. 뭐 걸어 다니는 생명은 존귀하고 걸어 다니지 않는 초목은 존귀하지 않은가. 그런 거 아니거든요. 내가 풀을 먹는다고 그래서 자비로운 것도 아니고 풀을 먹는다고 그래서 그 본성이 바뀌었다고도 할 수 없는 거예요. 왜? 풀을 먹든 고기를 먹든 본질적으로는 다른 생명체를 내가 앗아서 먹는 거예요. 우리는 그 존재 위에 존재하죠. 그 세계위에 존재한다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비둘기는 선하고 매는 나쁘다고 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아요. 그렇기에 전생의 붓다가 비둘기를 대신해서 저울위에 올라가서 자신을 매에게 주지요. 여기에는 매의 이익과 비둘기의 이익이 균형을 이루죠. 어느 하나도 손해 보는 사람이 없어. 물론 저울위에 올라간 전생의 붓다도 손해 본 것이 없어. 왜 손해 보지 않았느냐? 그것이 바로 그의 서원의 행이거든. 그가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비둘기를 대신해서 저울위에 올라가기 위해서 그는 존재하는 존재야. 그렇기에 비둘기도 매도 저울위에 올라가는 전생의 붓다도 그 이익이 균일해. 어느 누구도 손해 본 자는 없어. 이것이 바로 서원행이다. 그 서원의 행이 더 좋은 삶과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겁니다. 한사람이 하면 그것이 서원의 행이 되죠. 그런데 모든 사람이 행하면 그것은 일상의 일일 뿐이야. 모든 사람이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지 한사람이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야. 우리가 여기서 중요한 것이 뭐냐면, 지금 내가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서원의 행을 하면 돼. 모든 것은 나에게서 시작하니까. 모든 것은 너에게서 시작되는 게 아니에요. 나에게서 시작되는 거죠. 이 우주도 나에게서 시작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없는 우주는 의미가 없어요. 내가 존재할 때만 이 우주는 의미를 갖지. 그것을 이기주의라고 생각하면 안돼요. 왜? 우리는 현실의 세계에서 사는 거야. 그게 현실이야. 그러기 때문에 더 좋은 삶과 더 좋은 사회를 구성해야 되는 거죠. 그러기 위해서 하는 것이 서원의 행이야. 바로 오늘 부처님 오신날은 그 서원의 행을 다시 다짐하는 날이야, 그 실천을. 그동안 불교는 서원의 행을 잃어버렸어요,. 자타카의 정신을 잃어버린 거예요.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이거예요. 부처님의 말의 계승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뜻의 계승자가 되어야지. 누가 부처님의 계승자이냐? 뜻을 계승하는 자. 그 자가 바로 부처님의 계승자이지.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 아난다 존자가 후계자를 누구로 지명할 것이냐고 물었지만 부처님은 답하지 않지요. 왜? 그 뜻을 계승하는 자가 나의 후계자니까. 오늘 어르신들을 모시고 점심을 대접하는 것도 오늘 부처님 오신날의 법회예요. 그것이 서원행의 시작이기도 하죠. 서원행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나를 위해서 저울 위에 올라가지만 그 나타나는 현상은 모두가 이익을 누린다고 하는 거죠. 그래서 서원의 행이야. 그렇지 않으면 서원의 행일 수가 없지. 그래서 서원의 행이야. 우리가 더 좋은 삶과 더 좋은 사회를 위해서 각자가 그 자리에서 서원의 행을 하는 것 이게 중요해요. 명상하고 뭘 한다고 뇌의 전기 화학적 신호를 탐하기 때문에 불교가 세계를 바꾸는 데 성공하지 못한 거예요. 실패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성공하지는 못한 거예요. 거기에서 나아가지 못한 거예요.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여기 까지는 강론이고.
요거는 이제 내가 겨울에 이야기 했던 건데, 따뜻한 봄이 되면 우리 선우님들이 한번 자연휴양림에 가서 캠핑하면서 아파마나 수행을 해보자, 내가 그렇게 이야기 했었는데. 결국 서원의 행을 하려면 의식을 바꾸어 줘야 해요. 다른 표현으로 하면 마음을 재구성 해야 돼요. 낡은 의식가지고는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그래서 서원의 실천행과 의식을 변화시키는 아파마나 수행이 같이 이루어져야 돼요. 이번에 6월 쯤 그걸 해보자는 거예요. 내가 그걸 겨울에 제안한 건데 6월에 자연휴양림에 텐트 있는 사람은 텐트를 들고 와서 데크 있는 곳에 텐트를 치고, 뭐 텐트가 없는 사람은 빌려오면 좋고, 그것이 없는 사람은 자연휴양림 산막이 있으니까 산막을 예약해서 해도 되요. 꼭 텐트 속에 들어가야 한다. 이런 생각은 할 필요가 없어요. 산막에 가족들이 와서 같이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이들은 아이들 따로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민지 양을 초청해서 맡기고 어른들은 한가롭게 그저 그 숲에서 걷기 명상도 하고 오감 명상도 하면서. 단순하게 보면 휴식을 하는데 폼나게 휴식 좀 해보자는 거예요. 폼나게 휴식하자. 휴식하는 데 폼나게 하자. 내 저번에 작년 금원산 휴양림에 있어보니까 3일 내도록 이 땅의 술을 없애려고 기를 쓰는 분들이 있더만, 그분들은 3일 내도록 계곡도 안가. 오직 부었어. 어머니의 양수가 그리웠는지. 나는 그 행위라고 보지. 그렇게 사람들이 퍼마시는 것은 어머니의 양수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래서 좀 폼나게 휴식다운 휴식을 해보자. 이왕이면 우리 선우님들이 가족과 함께. 장기적으로는 아파마나 캠프 명상 프로그램을 한번 자연휴양림에서 없는 시설 만들 필요 없고 데크위에 노숙해도 괜찮아. 비닐치고 들어가도 되고, 그것도 없으면 데크 밑에 들어가도 누가 뭐라 하겠어. 밑에 들어가려면 뱀은 조심해야겠지만. 그것을 6월에 우리 선우님들이 한번 준비 해보세요. 청안, 문혜, 석두, 도연, 금련, 법화, 석용 선우 그리고 금강지님 청연님이 팀을 만들어서 그것을 한번 구상해 보세요. 그리고 이 프로그램에서 나는 지도만 하지 다른 것은 안해요. 프로그램을 짜고 진행하는 것은 우리 선우님들이 연구해요. 그리고 이것은 뭔가 해본 사람은 해야 하기에 석용이 간사를 맡아요. 그리고 석용이 이번 프로그램의 진행자야. 이건 진행자가 있어야 되요. 그것을 어떻게 할 거냐. 걷기는 걷기 명상도 있고, 1박 2일은 짧아서 좀 그렇기는 한데 오감명상도 있고.. 그런 것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기본적으로 그걸 추진하고 어느 장소가 좋을지 알아보고 그건 상의하면서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그건 석용이 진행자와 팀장을 해요.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면 지원팀이 있어야 되요. 내 이번에 화쟁코리아 순례에 가보니까 야 너무 편해. 걷기만 하면 밥 먹여주지, 재워주지. 왜냐하면 지원팀이 있어서 다 해주니까. 그런데 내가 나머지를 혼자 걸어보니까 속된 표현으로 개고생이야. 저녁에 가다 축객당해서 밤새 걸어야지. 그다음에 어딜 가려면 20리고 30리고 어디 있는데 가야되지 않겠어. 아무집이나 두드렸다 경찰한테 잡혀가려고? 그야말로 그 팀에 있다 떨어져서 혼자 걸으려니까 정말 개고생이야. 먹는 것이 뭐가 돼. 잠자리가 돼? 축객 당해 가지고 벚꽃 길을 걸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만. 야. 이게 왠 떡이야. 축객당한 덕분에 달밤에 벚꽃구경 한다고. 이런 거는 반드시 지원팀이 있어야 해요. 지원팀은 금강지과 청연선우가 지원팀을 만들어 가지고 유기적으로 상의해서 6월 언제 할지는 선우님들이 정하면 되고. 내가 내일부터 길 위에 나서는데 이번에 보니까 길 위에서 사는 것도 크게 나쁘지는 않더라고. 하여간 모든 것은 우리 선우님들께 맡길 테니까. 내가 분명히 밝히지만 나는 보리도량의 손님일 뿐이야. 주인은 우리 선우님들이야. 나는 손님으로서 우리 보리도량에 머무는 거예요. 그리고 이런 이야기도 하는 거고. 그것은 조금 전에 이야기 했듯이 석용이 간사가 되어 준비를 하세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지금부터 제일 중요한 것은 어르신들께 식사를 대접하는 거예요. 다함께 합장하시죠. 우러러 온 법계에 충만하신 부처님 오늘 부처님 오신날을 맞이해서 형제들이 함께 이 자리에 모였사옵니다. 부처님께서 이 자리에 모인 형제들에게 서원의 행을 하는데 어려움이 없이 축복해 주시고 그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 격려 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 부처님 오신날에 세월호에 희생된 그분들이 영원한 진리의 생명을 얻기를 기원합니다. 싸두 싸두 싸두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보리도량 http://cafe.daum.net/bodydhamma
원불사근본불교대학源佛寺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