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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침체가 찾아올 때
욥 3:1-10
1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2 욥이 입을 열어 이르되
3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4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5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였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더라면, 흑암이 그 날을 덮었더라면,
6 그 밤이 캄캄한 어둠에 잡혔더라면, 해의 날 수와 달의 수에 들지 않았더라면,
7 그 밤에 자식을 배지 못하였더라면, 그 밤에 즐거운 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8 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이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
9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10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여 내 눈으로 환난을 보게 하였음이로구나
욥 3:1-10 / [이렇게 살바에야] 마침내 욥이 입을 열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하면서 자기가 태어난 날을 이렇게 저주하였다. 3) 내가 태어난 날이 차라리 멸망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4) 그날이 차라리 캄캄한 어둠에 휩싸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나님이 하늘에서 굽어보지 않으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그 어떤 빛도 비추지 않았더라면 참 좋았겠구나. 5) 어둠이, 깜깜한 어둠이 뒤덮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구름이 뒤덮였더라면 해가 아예 없어지기라도 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6) 그 밤을 차라리 깊은 어둠이 집어삼켰더라면 일년 날 수 가운데 하루로 계산 되지나 말았더라면 다달의 숫자에도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7) 그 밤이 아이 낳지 못하는 밤, 기쁨의 환호성 들리지 않는 밤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8) 날을 저주하던 자들, 곧 마술사들이 그날을 저주하였더라면 큰 악어 리워야단을 마음대로 요동시킬 줄 알던 그 마술사들이 그날을 차라리 저주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9) 그 밤에 새벽별도 빛을 잃었더라면 그 밤에 빛이 환하게 비치기를 아예 바라지도 못하고 아무런 빛도 비치지 않았더라면 새벽이 아예 밝아오지도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10) 그 밤이 내 어미 아기집 문을 닫지 않았기 때문이라. 이것이 고통과 괴로움 다 당하도록 막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본문의 욥의 모습은 1장과 2장에서 보여주었던 위대한 신앙고백과는 너무나도 대조되기에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욥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 후에(1) 본문은 ‘그 후에’라는 표현으로 시작됩니다. 욥은 1장과 2장을 통해 사탄의 공격을 받습니다. 그는 전혀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반응했지만, 포기할 줄 모르는 사탄의 공격으로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욥의 가족들이 죽음을 당하고, 그의 재산은 잿더미가 되었고 그의 부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욥은 주권자 되신 하나님에 대한 굽히지 않는 믿음으로 대응했습니다(1:20-21). 그러자 사탄은 욥의 몸을 유린합니다. 머리부터 발꿈치까지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큰 믿음으로 대응합니다(2:10). 친구들이 찾아왔지만 욥인 줄 알기 어려울 만큼 무너진 욥의 환경을 보면서 그들 또한 아무 말도 못합니다. 이후 7일 동안을 아무 말도 없이 낙심의 나날을 보내던 욥에게 찾아 온 것은 영적 침체였습니다. 그는 고통스런 경험 대신 죽음을 원할 만큼 절망의 무게에 짖눌려 있습니다. 이것이 3장에서 보이는 욥의 모습입니다.
순수한 믿음의 소유자라고 하더라도 심하게 낙심하고 영적 침체에까지 이르게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예외일수 없습니다. 영적 침체는 누구에게나 자주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욥의 고백처럼 삶을 끝내고 천국에 이르기를 소망할 만큼 크게 무너져 내릴 수 있습니다. 죽음이 오히려 구원이라고 토해 놓을 만큼 마음을 지키기가 어려워 질 때가 있습니다. 욥도 우리와 같이 그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2-10) 슬픔과 혼란이 너무나 극심한 욥은 자신이 결코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하고 바랍니다. “욥이 입을 열어 이르되”라는 2절의 표현은 “욥이 그의 짓눌린 마음을 열고 대답하여 말하되”라는 의미입니다. 욥은 7일 동안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이제 그는 그의 짓눌린 마음을 열고 아픈 가슴을 토해 놓습니다. 계속되는 욥의 탄식은 자신의 태어남에 대한 비통함이었습니다. 그는 그가 태어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그 날에 빛도 비추지 말았더라면, 그 날이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 어둠이나 검은 구름으로 뒤덮인 날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탄식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씀은 아무리 믿음이 강한 자라도 낙심할 수 있다는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분명한 진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적 침체가 찾아 올 때가 분명히 있음을 기억하며 감당할 수 있기를 구해야겠습니다.
적 용 : 나에게 영적 침체가 찾아 온 적은 언제? 그때를 돌아보며 이기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욥의 생일저주와 탄식을 통해 보듯이 우리 인생들은 때로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서 그의 정의를 의심하고 절망 속에서 탄식할 수도 있었습니다. 너무도 많은 신앙과 현실의 차이 속에 매몰된 채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에도 여전히 세상을 다루고 계십니다. 우리는 삶과 자연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다 이해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다 알지 못하지만 그 분이 알려 주시는 만큼을 믿으며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 설 교 >
괴로운 세상과 영원한 세상
욥기 3:1-19
우리는 그 동안 욥기 1장과 2장을 생각하면서 욥의 위대함을 보았습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잘 참았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5장 11절에는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어떻 게 그처럼 욥과 같이 인내할 수 있을까 하며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3장 말씀을 보게 될 때 아하, 욥도 역시 인간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성경은 그래서 성경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생애를 기록한 책을 보면 그 사람의 장점을 과장해 서 기록하고 약점은 가려 버리는 것이 통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장점은 장점대로, 약점은 약점대로 거울같이 내놓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와 같은 약점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경고를 합니다. 지난 시간에 생각한 대로 욥 의 친구들이 그를 찾아와 7일 동안을 앉아 있으면서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으로서는 그 이상 어려움을 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고난의 심연에 빠져 있는 욥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생각도 나지 않았을 뿐더러 말을 한다고 해도 욥에게 들릴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말을 하면 오히려 욥에게 번민만 더해 줄 것이기 때문에 한마디 말을 건네는 친구가 없었습니다.
만일 친구 중에 누가 무슨 말을 하게 되면 오히려 고난 속에 있는 욥이 불쾌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었 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욥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좋은 일은 말해도 상관없지만 사실 우리 마음에 좋지 않은 일은 말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 약하기 때문에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일, 마음이 상한 일, 섭섭한 일, 괴로운 일을 쏟아 놓기가 쉽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욥은 그의 생일을 저주했습니다.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기를 원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해마다 돌아오는 생일을 기쁘게 맞이합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할머니들 경우는 몇 달 전부터 자기 생일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준비를 합니다. 어르신네 생일에 참예하게 되면 대개 하시는 말씀이 비슷합니다. 아니, 나는 생일을 그만 두자고 그러는데 이 애들이 그냥 있습니까? 이렇게 준비하고 야단들이니 원 이라고 하시지만, 그 말씀은 조금도 자식들을 원망하는 말씀이 아니라 기뻐하고 만족스러워 그러시는 말씀입니다. 할머니들은 대개 당신의 생신 때 너무 기쁘고 좋아서 며칠 전부터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준비합니다.
그런데 사실 자녀들은 부모님의 심정을 잘 모릅니다.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기쁜 생일을 욥은 가장 불행한 날로 여겼습니다.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 하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욥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정말 참기가 어려웠으면 그랬을까 하는 짐작이 갑니다. 이것은 욥뿐만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도 그가 재앙을 받을 때 이와 비슷했습니다. 예레미야 15 장 10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모친이여 모친이 나를 온 세계에서 다툼과 침을 당할 자로 낳으셨도다.”
예레미야 20장 14절 이하에는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나의 아비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네가 생남하였다 하여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 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 보내는고” 했습니다. 얼마나 고통이 심하고 견디기가 어려웠으면 세상에 난 것을 후회하고 저주까지 하겠습니까? 아마 욥이 형통하고 건강하던 때는 그의 생일이 되면 10남매 자녀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온 집안이 함께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렸을 것이고, 온 가족이 함께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욥은 세상에 태어난 날을 저주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고통을 당한다고 하여 출 생한 것을 저주하는 것은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며, 인간의 존귀와 영화를 무시하는 것이고, 우리 자신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살 지만 처해 있는 조건과 환경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환경이나 조건 속에서라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으며 우리에게는 그 구원의 역사를 위해 일하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욥도 사람이므로 약하고 어리석어서 하나님 앞에서 그 입으로 생일을 저주하는 어리석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 자신이 약 하기 때문에 마음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의 간증을 들어보세요.
로마서 7장 15절 이하에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 이제는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 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 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그럽니다. 인간이 순전하고 완전하다는 것이 이 정도인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은 실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유명한 설교가 브룩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돼지는 스스로 진창 속에 뒹굴지만 양은 실수해서 진창 속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우리 가운데 그를 정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잘못을 범할 가능성이 다 있으며 실제로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간음하다가 붙잡혀 온 여인을 돌로 치겠다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어 이 여인을 치라 말씀하실 때 양심의 가책을 받아 모두가 물러났던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세상에 의인이 없나니, 곧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 보아야 할 것은 욥이 이런 잘못을 범했다고 하더라도 사단의 계 획에는 맞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욥이 이런 고통 속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을 저주하고 원망할 줄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욥이 자신의 생일은 저주하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저 주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욥이 인내에 있어서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욥이 그의 입으로 이렇게 생일을 저주하기는 했지만, 그 는 그 이전과 그 이후에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크게 복종하고 따르려는 뜻을 나타냈고 자기가 참을성 없이 한 말을 후회한 것을 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유무과리요? 사람 치고 실수 없는 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고 고치면 됩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그가 주님의 수난 앞에서 가슴에 불이 붙을 정도로 저는 절대로 주님을 부인하지 않습니다라고 몇 번이고 다짐하였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시고 주변 환경이 다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 붙이고 돌아서니 베드로는 단순히 겁이 나고 두려워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닭이 울 때 그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밖에 나가 울며 통곡했습니다. 사람이 약하기 때문에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만 은 달라지지 않아야 합니다. 더구나 잘못했을 때는 깨닫는 대로 돌아서서 바로 고치면 됩니다. 욥은 그가 입으로 생을 저주한 데 대해서 스스로 정죄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욥을 정죄 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자기를 정죄하는 사람을 절대로 정죄하지 아니하십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을 사람이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다만 그런 죄를 범하지 않도록 스스로 살피고 조심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욥이 그의 생일을 저주하는 데 사용한 표현들은 시적이고 상상력을 가지고 격앙된 감정으로 표현한 것들이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말해서 문제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상세하게 연구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보십시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그 날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 그 밤이 심한 어두움에 잡혔었더라면 해의 날 수 가운데 기쁨이 되지 말았었더라면 달의 수에 들지 말았었더라면 그 밤이 적막하였었더라면 그 가운데서 즐거운 소리가 일어나지 말았었더라면 그 밤을 저주하였었더라면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었더라면 이처럼 온갖 저주가 그의 생일에 있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런데 욥이 출생한 낮이나 밤과 더불어 다투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가 너무 어려워서입니다. 그러면서 11절 이하에서는 살아 있는 것까지 원망합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 에 매우 큰 재앙이 임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누가복음 23장 29절에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고 했습니다. 환난이 이처럼 견디기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환난이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환난을 잘 이용하는 것은 큰 축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흔히 생명은 축복이요 사망은 저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욥은 여기서 생명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사망과 음부를 가장 훌륭하고 가장 바람직한 축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욥은 지금 죽지 않은 것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다른 짐승이나 곤충과 달리 이 세 상에 태어날 때 얼마나 약하고, 무력하고 그 생명의 줄이 가냘픕니까! 다른 피조물과 사람은 달 라서 우리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무릎이 우리를 받지 않았다면 우리는 곧 음부에 떨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빠는 젖이 없었다면, 신선한 영양분을 공급해 주지 않았다면 생명의 등불은 처음 켜지자마자 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왔을 때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자상하게 돌보아 주십니까? 우리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않고, 우리 어미가 낳을 때 우리가 숨지지 아니하였던 것이 그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우리가 태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사실 사람처럼 무기력한 상태로 이 세상에 오는 피조물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은 우리의 손의 힘 때문이 아니라 우 리의 연약한 생명을 부축하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섭리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박탈당할 생 명을 남겨 두고 자라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인내입니다. 무릎이 우리를 받았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인생에게 얼마나 많은 어려움 그리고 그로 인한 번민이 찾아옵니까? 정말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캄캄하고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인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없다면 태에서 죽어 나왔기를 바라는 강한 유혹을 받을 것입니다. 욥은 그가 태어나자마자 죽어 버리고 태에서 음부로 옮겨지기만 했다면 그의 처지는 좋았을 것이라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14절 말씀에 자기를 위하여 거친 터를 수축한 세상 임금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했습니다. 세상의 임금이 권력 있고 화려하게 지냈다 하더라도 그를 사망에서 건져내지 못하며 음부에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또한 음부 속에서 그들의 몸이 모든 티끌로부터 구별되게 할 수도 없습니다. 많은 금을 가지고 있던 임금들도 죽음의 사자가 명령을 받고 왔을 때 뇌물을 주어 자신을 빼놓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집이 은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 은 모든 것을 남겨 두고 떠나지 않을 수 없고,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준비해 놓고 쌓아 놓고 채워 두었던 것은 아무 소용이 없이 되고 맙니다. 죽음은 만민에게 평등 하게 임합니다. 무덤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함께 만납니다. 지금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자들은 거기서 고난이 벗어질 것입니다.
17절 말씀 이하에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 치며 거기서는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으며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나 큰 자나 일반으로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했습니다. 더 이상 박해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미움과 시기도 사라질 것입니다. 헤롯이 교회를 괴롭히나 그가 구더기 밥이 되었을 때는 더 이상 교회를 괴롭힐 수가 없었습니다. 핍박당하던 사람들이 죽을 때 그들은 더 이상 괴로움을 당할 염려가 없게 됩니다. 욥이 그의 무덤에서 쉬고 있었다면 스바 사람이나 갈대아 사람들의 침입을 받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가 많으나 거기서는 모든 수고가 끝나게 됩니다. 거기서는 곤비한 사람이 평강을 얻게 됩니 다. 천국은 성도들에게 휴식 이상의 것을 주는데, 무덤은 그들의 육신에 대해서 휴식을 줍니다. 인생의 순례의 길은 정말 험하고 고됩니다. 우리는 죄와 세상에 시달려야 하며 쉴 날이 없습니 다. 그러나 거기에는 참으로 쉬는 곳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사로잡힌 자들이 놓임을 받습니다. 감독자들의 소리를 듣지 않게 됩니다. 종이 상전에게서 놓임을 받고 큰 자나 작은 자가 일반입니다. 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까? 여기보다 거기가 더 좋기 때문입니다.
레슬리 웨더헤드가 쓴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령 어머니 뱃속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있다고 합시다. 누가 그 태아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시다. 너는 지금 네가 살고 있는 이 상태에서 죽을 것이다. 그 걸 우리 인생에서는 태어난다고 한단다. 이 태아는 이렇게 항의할는지 모릅니다. 싫어요. 전 여 기가 좋아요. 먹을 것 있지요, 따뜻하지요, 사랑 받지요, 보호 받지요, 너무 좋고 너무 편해요. 여기서 나는 죽든지 태어나든지 하는 건 싫어요. 그러나 변화는 불가피하고 태아는 자궁 속에서 예정된 시간을 끝내고 태어나는 순간이 다가옵니다. 그러면 아기는 아름다운 엄마의 사랑스런 두 눈이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의 품에 안겨 여러 가지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기는 자기가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울든지 낑낑거리면 된다는 것을 곧 알게 됩니 다. 모두 아기를 사랑하고 돌봐 줍니다. 그래서 아기는 곧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 참 좋구나. 이 세상이 태가 태어나기 전 그곳보다 훨씬 좋구나! 여기가 거기보다 더 개선되었어. 이렇게 해서 행복한 유년 시절은 흘러가고 청년이 되어 보람차고 의욕적인 젊은 시절로 돌입했습니 다. 성숙한 단계로 들어갑니다. 결혼을 하고 이번에는 그의 자식들이 부모와 가족에게서 얻는 기쁨을 맛봅니다. 성취감을 맛보고 어려움 뒤에 얻는 보상을 경험하며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고 인생의 눈물과 웃음을 맛봅니다. 그러다 나이를 먹게 되고 마침내 늙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의 위협을 받 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다시 듣게 됩니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에 나는 더 있을 수 없어. 곧 사라질 거야. 나는 죽을 거야. 그러나 난 죽고 싶지 않아. 여기가 오랜 내 고향이 었는 걸.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 편리함,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놓고 죽고 싶지 않아. 그러나 자연은 또 다시 그 과정을 거칩니다. 그는 죽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죽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의 눈앞에는 어머니보다 더 아름다운 얼굴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 리고 사랑의 품에 안아 주십니다. 세상의 수고는 다 잊게 되고 흘린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낮 빛보다 더 밝은 천국이 있습니다. 토마스 에디슨의 부인은 남편이 임종시에 무슨 말인가 몹시 하고 싶어하더라고 했습니다. 의사였던 부인은 귀를 갖다 대고 이 대과학자가 하는 말을 똑똑히 들었습니다. 저기 저 곳은 너무 아름답소. 에디슨은 보지 못하는 것을 절대 인정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저기 그 집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괴로운 세상에서 저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집시다. 저기 저 곳은 너무 아름답고 좋은 곳입니다.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쉬일 곳 아주 없네 걱정과 고생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