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군학’이 아니고 ‘안양
해창’이다”
全南道가 추진해온 <水軍再建路 표지판>사업에 묵과할 수 없는, 큰 문제점이
있다. 忠武公이 ‘장흥 會鎭’으로 오면서 들린 ‘군영(軍營)구미’를 ‘보성 群鶴’으로 잘못 표시하고 있다. 관산 방촌유물관 앞을
비롯하여 장흥 관내에는 ‘보성 群鶴’으로 오기한 4개 표지판이 있다. 나아가 그 표지판 사업을 뒷받침한 어떤 연구원은 ‘군학 ~회진
향선(鄕船) 移動說’을 입론하고 있다. “보성 群鶴에서 陸路가 아닌 海路로 장흥 會鎭으로 뱃길 이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 주장에 따르면,
‘~안양 ~용산~ 관산~회진’등 ‘장흥 구간’은 水軍 再建路와 아예 무관하다는 것. 장흥 사람들은 그간에 ‘水軍 再建의 이순신 길, 水軍
재건의 장소’ 장흥 땅에 큰 자부심을 느껴왔다. 14박 15일의 대장정을 마친 忠武公이 ‘장흥 회녕포’에서 朝鮮 水軍을 마침내 재건 했기
때문이다. 1597년 8월19일, ‘장흥 회녕포’에서 ‘삼도수군통제사’에 취임했던 것.
그 한 달 전에 ‘원균’의 칠천량 패전이
있었고, 다시 그 水軍 再建 달 후에 ‘명량 대첩’이 있었다. 장흥 땅 會鎭에서 배와 전열을 정비하였고, 장흥 사람들은 명량 바다에서 아낌없이
목숨을 바쳤다. 그런 장흥 땅, 장흥 사람들에게 全南道의 <표지판> 처사와 ‘鄕船 移動說’은 날벼락 같은 것들이다. 더구나
‘보성 군학’에 수군재건 대장정 陸路종착지를 상징하는 조형물을 세우겠다는 것이다. 참으로 얼척이 없다.
살펴본다. 忠武公 이순신이
‘장흥 會鎭’에 도착하기 직전에 들린 ‘군영(軍營)구미’는 어디인가? 全南道와 보성군, ‘노기욱, 이훈’ 등 일부 논자들 주장대로 과연 ‘보성
群鶴’ 마을인가? (그런데 현재의 행정관할을 기준하다보니, ‘보성 군학’이라 지칭하는 것 뿐이다.
당시는 ‘장흥 회녕방
群鶴’인데, 1914년 행정개편으로 ‘보성 회천면’으로 이속되고 말았다) 이에 忠武公의 水軍再建路에 관하여 필자 의견을 기왕에 다시
개진해본다. 지난 <이순신 연구논총 제9호,2008>,<장흥문화 제30호,2008>에 그 논지를
밝혔었다.
작년 8월경에는 인천고 동문으로 구성된 ‘백의종군,수군재건로 답사팀’의 장흥 구간에 참여하였다. 그때 인천고 동문팀에게
격려의 ‘문수헌’ 자리를 마련해준 ‘장흥향토사회팀’에게 감사드린다.
첫째 논점은 ‘군영구미에 오기 직전에 들린 백사정(白沙汀)'이
어디인가’라는 것이다. 그간의 통설은 ‘白沙汀’ 위치에 관하여 ‘장흥읍 원도리 벽사驛’으로 풀이하고 있었다. 이에 필자는 ‘白沙汀’이 ‘그 무렵
장흥 바닷가에 따로 존재한다’는 사정을 究明하였다. ‘白沙汀’이 나오는, ‘영천 신잠,반곡 정경달,송호 백진남’ 詩文과 <장흥
정묘지>를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벽사驛’으로 추정해오던 ‘노산 이은상’의 誤譯이 상당부분 시정되는 계기가 되었다.(물론 아직도 그렇게
‘장흥 원도리 벽사驛’으로 옮기는 일부 책자들이 남아있긴 하다)
둘째 논점은 “忠武公이 康津 쪽과 장흥반도 서쪽을 돌아 ‘會鎭’에
온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당시 대부분 책자들은 ‘이은상’의 誤譯에 터 잡아 그런 식으로 이해해 오고 있었다. 일부 전문가들도 그런 식의
<水軍 재건로 도면>을 제시하고 있었다. 심지어 康津의 일부 鄕土史家들은 강진만 쪽에 ‘군영구미,백사정’이 존재한다고 주장했었다.
강진 대구면의 ‘구수리, 또는 군학리’가 忠武公이 들린 ‘군영구미’라는 식이었다. 그러나 忠武公 일행이 康津 쪽, 장흥반도 西쪽으로 돌아서
‘장흥 회녕포’로 도착하신 것이 아니다. ‘군영구미’에서 ‘회진’까지 걸리는 시간과 거리를 종합하면, ‘안양,용산,관산’을 거쳐셨음이 합당하다.
水軍 재건에 일분일초가 급한데, 바보스럽게 康津灣 해변길로 빙 돌아서 ‘會鎭’으로 오셨겠는가?
셋째 논점은 바로
‘군영(軍營)구미(仇未,龜尾)’ 문제였다. 오늘 글의 첫 쟁점이다. 지난번에도 필자는 ‘보성 群鶴’에 반대하고, ‘안양 海倉’으로
비정하였다.(<2014년도, 장흥문화 제38호>에서 마침 ‘위성 방촌유물관 명예관장’도 동일 論旨를 펴고 있다. ‘위성’
관장한테서 <표지판>실상과 문제점을 제언 받은 것을 계기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全南道가 저지르고 있는 잘못에 관련하여 “과연
‘군영(軍營)구미’가 어디인가”에 대해 살펴본다. ‘군영구미’는 <난중일기 초고>에 '軍營仇未'로,
<이충무공전서>에‘軍營龜尾’로 되어 있다.
1)먼저, 그 첫 번 째 근거는 <난중일기> 기록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 <日記>에는 ‘쌀 도둑질하는 장흥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군영구미 현장에 도착하니 長興의 軍糧監官과 色吏가
軍糧을 훔쳐가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보성 群鶴’에는 그럴 일이 발생할만한 여지가 없다. 거기에는 忠武公이 그 도둑질을 목격한 ‘監官,
色吏’가 있을만한 곳이 아니었다. ‘軍營’도 없었고, 軍糧 창고도 없었고, 어떤 倉庫 시설지가 확인된 바도 없다.
반면에 ‘안양
海倉’은 ‘倉庫, 船所, 人員’이 존재하는 ‘漕運倉’으로 일정 역할이 부여되어 있다. <1872년도 古地圖>에는 ‘안양 海倉’에
‘軍營’ 표시까지 되어 있다. (또 ‘백사정’에 충무공 일행이 왔는데도 ‘장흥 監色’이 그 가까운 인근에서 멍청하게 쌀을 훔친단
말인가? 앞의 ‘쌀 도둑질’ 일화는 ‘백사정’에서 ‘군영구미’가 상당히 떨어져 있음을 말해준다할 것.)
2)돌이켜, ‘보성
群鶴’ 마을의 歷史的 성격도 살펴야 한다. ‘보성 群鶴’은 단지 ‘舊 회령진 폐진터’일 뿐이고, 당시는 평범한 마을에 불과했다.
1490년(성종20년)에 설치된 ‘群鶴 회녕포’는 이미 1554년(명종9년)에 ‘會鎭 회녕포’로 옮겨졌다. 水軍 萬戶鎭 자체가 ‘群鶴’에서 ‘현
장흥 會鎭’으로 그 ‘회녕포’ 명칭과 더불어 移設된 것이다. 그러니 그 43년 후 ‘群鶴’은 폐진(廢鎭) 지역에 불과하였고,’軍營, 官吏’자체가
없었다. 전쟁 발발 전에 忠武公이 그 대비태세를 갖추면서 관내 초도순시를 한 곳도 아니었다. 그만큼 전략적 가치가 없는 장소이며, ‘群鶴’이
달리 <난중일기>에 따로 등장한 바도 없다. 요컨대, ‘보성 群鶴’은 ‘쌀 도둑질을 할만한 監官,色吏가 있을 상황’의 장소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논거 제시 없이 ‘군영구미’를 ‘群鶴으로 비정했다. 단지 ‘군학’과 ‘군영구미’의
‘군’자가 같다는 정도의 인식 수준에 불과한 것 아닌가 싶다. 그들은 “예전에 舊회령포, 水軍萬戶鎭이 ‘群鶴’에 있었다.”는 정도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말단 적 옛 사정만으로 ‘군영구미’라고 쉽게 단정할 수는 없을 터. 당시 ‘群鶴’ 마을을 관장하던 ‘장흥’의
<장흥읍지>기록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장흥읍지, 정묘지>에 ‘회녕방 群鶴’ 마을은 나오지만, ‘軍營,군영구미’ 설명은
전혀 없다. 그런대 寶城 사람들과 ‘노기욱’은 ‘群鶴’ 지명이 1914년에야 등장하는 것으로 왜곡하고 있다. <장흥읍지>기록을 아예
모르거나, 알고서도 은폐하는 태도인 것이다. 한편, ‘群鶴’ 지명은 ‘백사장 뒷편 松林에 鶴들이 많이 찾아온데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있다.
3) 논란되는 現場의 地形的 事情에도 유념하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말 ‘구미(仇未)’를 잘 이해해야 한다. ‘구미’는
‘안으로 구멍 진곳, 움푹 들어간 곳, 패여 굽어진 곳, 굼, 굽이’를 의미하는 말이다. ‘바깥으로 길게 돌출한 곶(串), 고지, 꼬치,
구지’와 相反된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구미’와 ‘곶(串)’은 전국적으로 바닷가 물가에 아주 많은 사례가 보인다.
또한 길쭉하게
돌출한 부분을 두고 ‘거북꼬리, 龜尾’라 부르기도 하니, 혼동을 피하여야 한다. <난중일기>에는 도합 네 곳 ‘구미’ 명칭이
나오는데, 한결 같이 배가 오고가는 ‘접안 浦口’이다. ‘군영구미, 이목구미, 원두구미, 화준구미’등으로 ‘움푹 들어간 浦口’가 전제된
개념이다. 예전의 ‘안양 海倉’을 보자. ‘안양 海倉’은 전형적으로 ‘움푹 들어간 굼, 구미’ 지형으로 태풍 등을 피할 수 있다. 장흥 지방에서
나오는 세미를 집하 운송하기 편리한 장소이다. 득량만 內海에서, 다시 ‘안양 지천’ 방향으로 움푹 패이 듯 깊숙하게 들어가 있다. ‘구미
浦口’로서 ‘안양 海倉’의 지형적 특징은 모든 옛 地圖에서 명확하다. 그런데, 後代의 간척사업으로 인하여 원래의 ‘海倉’ 浦口가 없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外地人들은 상전벽해(桑田碧海) 平野를 보고서 ‘안양 해창’을 아예 모르게 된 것.
반면에, ‘보성 群鶴’은
‘움푹 패인 포구’로서의 ‘구미’ 지형이 전혀 아니다. 古地圖는 물론이고 現地圖에서 확인되 듯, 그저 직선형 바닷가 해안의 밋밋한 포구일
뿐이다. 태풍을 피할 만한 접안 대피시설이 예전에도 전무하였을 지형에 불과하다. 필자는 지난 2008년경에 ‘白沙汀 터’와 ‘群鶴’ 마을을 현지
답사하였다. 한편, 그들은 ‘群鶴’ 마을의 ‘구미 영성(營城)머리’를 핑계삼는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우는 ‘구미영성머리’ 거북(龜)머리처럼
돌출하였을 뿐, 浦口가 아니었다. 그 ‘群鶴’의 ‘구미영성’은 '龜尾營城'으로 표기하며, ‘옛 성터 진지’정도로 추정된다. ‘구미영성머리’
지역은 포구 시설과 아무 관련이 없었고, 무슨 쌀 倉庫가 있을 곳도 아니었다. 한편, ‘노기욱’은 <1789년 호구총수>에 나오는
‘揮里, 仇未里’를 그 근거로 언급한다. 그러나 그 부분은 오히려 ‘揮里’와 ‘仇未里’가 별개 마을로 따로 존재한다는 사정을 알려준다.
‘揮里’는 군 지휘부가 있었던, 옛 회녕진 본부 정도에 상응할련지 모를 일이다. ‘仇未里’는 현재의 ‘群鶴’을 지나 전일방조제
뒤편 간척지 공간의 안쪽에나 해당될 별개 마을이다. 우리의<1747년 장흥읍지>에도 이미 ‘群鶴里, 揮里,龜亭里’등이 별개 마을로
기재되어 있다. 그럼에도 ‘노기욱’은 ‘揮里, 仇未里,群鶴里’를 한 마을로 묶어 ‘群鶴 군영구미’로 바로 결부시켰다. 그 지역이
나오는 古地圖를 보면, ‘群鶴’을 특별한 浦口 지역으로 표시하지 않고 있다. (앞서의 지적대로, 현 ‘군학’의 ‘구미영성머리’는 ‘구미’ 浦口가
아니라, ‘龜尾’ 돌출지형에 불과하다. 또 ‘군학’ 마을 안쪽까지 올라가 보면, 단지 바다를 끼고 있을 뿐, 내륙형 농촌 특징이
두드러진다)
4)앞 사정과 연관되지만, ‘옛 조선 후기 地圖’ 내역도 그 유력한 반증 자료가 된다. ‘漕運倉’이 있었던 ‘안양
海倉’은 거의 모든 地圖에 표시되며, ‘船所’까지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보성 群鶴’쪽은 대부분의 地圖에 어떤 浦口 표시조차 없다.
<해동여지도.1777~1787>, <청구도,1834>,<대동여지도,1861>, <장흥도호부지
지도,1871>, <전남의 옛 지도,1994> 등에도 한결같이 그러하다.
5)우리 <장흥읍지
정묘지,1747년>에서도 근거기록 여부를 검토할 수 있다. 앞서 말한대로 ‘안양 海倉’은 물론이고 ‘보성 群鶴’ 역시 원래는 長興府
관할이었다. <정묘지 장흥읍지>에도 ‘안양방 海倉’과 ‘회녕방 群鶴’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안양방 海倉’에는 ‘倉庫,
兵船, 船所, 人員’등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곡(稅穀) 수송이라는 국가적 사무를 위한 ‘漕運倉’이니 ‘시설’과 ‘관리’가 없을 수가
없다. 그러나 당시 ‘회녕방 群鶴’쪽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으며, 그저 보통 마을에 불과했다. 혹자가 왜곡하는 식으로 <장흥 정묘지>에
‘群鶴 = 군영구미’라고 기재된 내용은 전혀 없다.
6)또한 ‘논란되는 해당 지역의 口傳 傳承’ 여부도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群鶴’이 '’군영구미’라면, 거기에서 1泊을 하신 忠武公에 관한 어떤 傳說이라도 남았을 것. 그러나 ‘보성 群鶴'’ 마을에 ‘忠武公이 하룻밤
잠을 주무신 곳’이라는 口傳 전승도 전혀 없다. (이 지적을 듣고 이제 곧 보성 사람들이 그런 장소를 또 만들어낼지 모르겠다) 2008년에
‘群鶴’ 현지를 방문하여 보니, 그들 주민들은 ‘충무공 忠자’도 못 들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보성군지>등 寶城쪽 기록에도 그런
사정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寶城人들 스스로 ‘群鶴’을 ‘군영구미’라고 불러 본 일이 없고, 그런 기록도 없다.
7)나아가 <난중일기> 내용과 해당 現場 간에 地理的 사정의 부합 여부를 따져야 한다. 忠武公이 그에 앞서 먼저 들린
‘白沙汀’에서 ‘보성 群鶴’ 마을은 아주 가깝다. 갈 길 바쁜 忠武公께서 굳이 가까운 옆 마을 ‘群鶴’에 더 들릴 필요가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白沙汀’에 그대로 머무르면서 ‘群鶴’쪽에 사람을 보내거나 불러 살피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안양 海倉’은 ‘白沙汀’에서 꽤
떨어져 있는 거리이다. 또 거기에는 ‘漕運倉’이 있으니, ‘軍糧 확보’ 차원에서 필히 직접 확인해야만 하는 곳이리라. 그런데
<日記>에는 ‘당시의 시간적 공간적 거리와 상황을 시사해주는 부분’이 남아 있다. “군영구미에서 출발하여 ‘늦은 아침(晩朝)’에
‘회녕포’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 만약 ‘보성 群鶴’을 ‘군영구미’ 출발지로 전제하면, 몇시간 안에 ‘장흥 회진’에 이르기는 불가능하다.
반면에 ‘안양 海倉’에서 말을 타고 가는 길이면 아침 늦게라도 ‘장흥 회진’에 충분히 도착 가능하다. 제반사정을 종합해보면, ‘안양 海倉’은
당시의 상황맥락에 부합하지만 ‘보성 群鶴’은 전부 배치된다.
오늘 글의 첫 쟁점,’군영구미’ 부분에 대한 결론이다. 忠武公께서
‘장흥 會鎭’에 오기 직전에 들린 ‘군영구미’는 ‘보성 群鶴’이 아니고,’안양 海倉’이다. 그 당시에 ‘群鶴’에는 ‘軍營, 倉庫, 監色’등이
없었으며, ‘구미 浦口’ 지형도 아니었다. 반면에 ‘안양 海倉’은 ‘軍營, 倉庫, 監色’등이 있었으며, ‘구미 浦口’ 지형에
해당한다.
‘장흥의 감관 색리가 창고에서 쌀 도둑질을 할 상황’이 ‘안양 海倉’은 가능하나 ‘보성 群’은
불가능하다.<난중일기>에 나오는 ‘軍營仇未’ 포구 지칭과 ‘보성 群鶴’의 ‘구미영성(龜尾營城)머리’는 부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노기욱’은 ‘휘리, 구미리, 군학리’ 여러 마을을 함께 싸잡아 ‘群鶴 軍營구미’를 따로 만들어냈다. ‘노기욱, 이훈’ 등 논자들은 ‘안양
海倉’에 전적으로 무지했거나, 아니면 ‘안양 海倉’을 일부러 외면하였다.
忠武公의 水軍再建路는 ‘~백사정 ~ 안양 海倉
~(용산,관산)~ 會鎭 회녕포'로 정리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니 <水軍再建路 표지판>의 ‘군영구미’는 ‘보성 群鶴’에서 ‘장흥 안양
海倉’으로 고쳐야 백번 옳다. 네번째 논점, 이번에 새롭게 유발된 쟁점, ‘향선(鄕船) 移動說’을 검토한다. 오늘 글의 두 번 째
쟁점이다. ‘노기욱, 이훈’ 등이 주장하는, ‘群鶴 ~회녕포(회진) 향선 移動說’을 살펴본다. 그들이 ‘군영구미’로 '’보성 群鶴’을
고집하다보니, 급기야는 ‘鄕船 移動說’로 비화되고 말았다. 그들은 <난중일기>와 그 日記를 남긴 ‘忠武公 당신'’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1)우선, 그들은 <난중일기> 原文 記錄에 충실한 해석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忠武公 당신께서 “배를
타고 회녕포(會鎭)으로 이동했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난중일기> 原文 記錄 자체에는 ‘海路’ 여정 또는 ‘鄕船’언급 자체가
없다. 그럼에도 “배를 타고 장흥 會鎭에 도착했다”고 ‘노기욱, 이훈’등이 함부로 비약 단정할 수 있을 일인가? 忠武公은 평소
세심하다할 정도로 꼼꼼한, ‘자기 방어적 記錄을 남긴 남자’이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당했기에 자신의 처신 행적에 관하여 기록을 남기는 일이
체질화되었던 분이다. (<난중일기>를 다시 확인하시라, 최고지휘관에 걸맞지 않게 소심 세심한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그러니
‘군학~회진 鄕船 移動’이 실제의 事實이라면 忠武公께서 그 기록을 안 남길 리 없다. 자신이 직접 승선하여 이동한 ‘鄕船의 海上義兵 신원, 동행
鄕船 규모’까지 남겨 두었을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忠武公의 행적은 <난중일기>라는 1차 史料 原文에 충실하게 해석하여야
한다. ‘배를 타고 이동했다’는 당시 기록이 없는데, 어찌 ‘배를 타고 갔다’고 훗날에 확단한다는 말인가? 참 다행스럽게도, 忠武公은 그
반박거리 하나를 <日記>에 남겨두었다. ‘白沙汀에서 말을 쉬게 하였던 일’, ‘到白沙汀 歇馬(헐마)’ 표현을 해 놓으신 것이다. 바로
‘그 휴식을 취한 歇馬 軍馬’를 타고 忠武公은 신속하게 ‘장흥 회진’으로 이동하셨던 것이리라.
2)백번 양보하여, 鄕船이
있었을지언정 忠武公께서 먼저 승선 거부하였을 것이다. 약속된 ‘배설’의 水軍 전함이 도착을 아니 하였는데, 최고지휘관이 私船 鄕船에 쉽게 오를
수 있겠는가? 총체적 戰況 파악이 아직 안되었는데, 최고지휘관이 무모하게 漁村 鄕船에 탈 수 있다는 말인가? 최고지휘관이 鄕船 한척 덜렁 얻어
타고 이동하다가 기습을 당하거나 사고가 나면 어찌 되는가? (당시 ‘배설’이 약속을 어기고 배를 대지 아니한 까닭에는 倭船의 기습 염려도 포함될
것이다. ‘배설’이 칠천량 패전에서 도망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안쪽 바다 깊숙이 안 들어갔기 때문이다.) 또, 설령 10여척 鄕船이 왔더라도
忠武公은 “빨리 큰 바다로 빠져 나가라”고 지시했을 것이다. 항아리 병목으로 막혀있는, 득량만 內海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엔
倭軍 위치가 어디인지도 전혀 모르고, ‘피난 쓰나미’ 현상으로 위급한 시점이었다. 나중에 ‘장흥 회녕포(會鎭)'’에 가서도 “바다가 협소하다”는
이유로 사흘 만에 떠났던 것 아닌가?
3)또한 忠武公의 水軍再建 旅程에 비추어 보면, ‘보성 群鶴’에 10여척 鄕船이 모일 리도
만무하다. 忠武公은 그 전날 오후에 ‘군영구미’에 도착하여 1泊을 하고 다음날 아침에 일찍 그 곳을 떠났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맞추어 鄕船
10척이 득량만 內海 ‘보성 群鶴’에 모일 수 있다는 말인가? (10여척이 일시에 ‘군학’에 모일 정도인데도, 앞서의 ‘장흥 감색’이 감히 쌀을
훔치려 했겠는가?) 가까운 安養 출신의 ‘마하수’ 父子야 그렇다쳐도, 다른 鄕船들은 ‘회녕포’에서 기다리면 될 일 아닌가? 현실적으로
長興이나 인근 鄕船들은 ‘장흥 회진 회녕포’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또한 '’노기욱’이 ‘群鶴 군영구미’에 모였다고 제시하는
‘鄕船 참여자’들은 차후 명단에 불과하다. 차후 後代에 작성된 2차 기록 <호남절의록>등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하다. 나아가
그 참여자 명단 의미를 제대로 가감하여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백진남’이 장흥사람 입장에서 장흥 땅 장흥 바다에서 忠武公을
바로 만난 것이 아니다. 그는 海南 옥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海南사람이며, 단지 그 부친 ‘백광훈’이 長興 안양 출신일 뿐이다.
‘백진남’은 海南 땅에서 忠武公 이순신의 측근 참모 역할을 하면서 보좌했던 것이다.(‘백광훈, 백진남’을 두고 장흥 쪽은 장흥사람으로, 해남
쪽은 해남사람으로 취급하는 기록이 많다.)
4)그렇다면 그들 ‘노기욱, 이훈’은 왜 갑자기 ‘향선(鄕船) 移動설’을 들고 나온
것일까? 그 까닭은 ‘보성 群鶴’과 ‘장흥 會鎭’간의 시, 공간적 거리의 불일치를 그들도 눈치 챘기 때문이다. ‘群鶴’에서 출발하면
<난중일기>에 적힌 대로, 늦은 아침(晩朝)에 ‘會鎭, 회녕포’에 도착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궁여지책 편법으로 ‘鄕船 移動설’을
들고 나온 것이다. ‘群鶴’에서 뱃길이라면 불과 몇 시간 안에 ‘會鎭’에 도착할 수 있다는 논리를 찾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보성 群鶴’쪽을 ‘군영구미’로 고집하다가 유발된, 그들의 넌센스에 불과하다. 그들은 추가적으로 그 옆 浦口, ‘안양 海倉’에 유념하여 그
가능성 여부를 더 살펴보아야 옳았다. ‘안양 海倉’이라면 ‘쉬고 난 軍馬’를 부지런히 달려, 늦은 아침이면 ‘장흥 회진’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다. /다음호에 계속 그럼에도 그들 주장에는 ‘안양 海倉’을 지목하여 진지하게 검토한 흔적이 전혀 안 보인다.
‘노기욱, 이훈’에게 물어본다, 도대체 水軍 再建의 뜻이 무엇인가? 軍糧과 軍器, 兵力, 兵船 등을 우선적으로 수습해야 하는 것이 水軍 再建의
첫 일 아닌가? 그런 水軍 再建길에 나선 忠武公이 ‘軍糧이 있는 안양 海倉 漕運倉’을 외면하며 지나칠 리 있겠는가? 기실 ‘배설’을
‘군영구미’로 오도록 약속한 까닭 하나도 ‘안양 海倉’의 軍糧을 확보할 의도였을 것이다.
5)<日記>原文 해석상의 작은
부분 하나를 노파심에서 조언한다. 그들은 혹 “晩朝 直會寧浦” 문구에 집착하여 ‘군학’에서 ‘회녕포’로 直行했다고 비약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때 ‘直’은 ‘다른 데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忠武公은 ‘보성 열선루’에서 ‘白沙汀’에 갈 때도 “直到 長興地
白沙汀”이라고 표현하였었다. 忠武公은 ‘안양 海倉 군영구미’에서 출발하여 다른 곳을 안 들리고 바로 “直會寧浦”했던 것이다. ‘장흥읍 장흥부사
관아, 장흥읍 벽사역’ 등으로 안 빠지고 바로 ‘장흥 회녕포’로 南行했다는 뜻이다.
이제 마무리한다. ‘보성 群鶴’을 ‘군영구미’로
간주하는 것은 객관적 事實, 史實과 상관없는 억측에 불과하다. ‘보성 群鶴’에서 향선을 타고 '’장흥 會鎭’으로 뱃길 直行을 했다는 것은 가히
코미디 수준이다. 매사에 ‘公私의 합리적 분별과 기록 정신에 투철했던 忠武公의 성격’을 그들은 몰라도 한참 모른다. 忠武公이 水軍再建 여정에
들리신 ‘군영구미’에 이미 폐진된, ‘群鶴’은 결코 해당될 수 없다. 조선시대의 ‘漕運倉’으로 운영되던 '’안양 海倉’이 가장 적격이고
<日記>내용에 합당하다. “장흥 監官 色吏가 쌀 도둑질을 하고 있더라.”는 <日記>상황에 ‘海倉’이 일치하는 것이다.
‘당시의 행군旅程, <장흥 정묘지>,地理的 사정, 관련된 地圖, 語源 고찰’ 등에 비추어봐도 그렇다.
다만, 안타깝다.
장흥사람들은 잘 알고 있듯, 간척사업으로 그 ‘안양 海倉’ 포구기능이 통째로 사라져 버렸던 것. 이른바 ‘鄕船 移動說’을 작출한 ‘노기욱’ 등은
아마 ‘안양 海倉,漕運倉’ 자체를 몰랐을 것으로 판단된다.
1914년에 ‘회녕면, 천포면, 웅치면’이 장흥군에서 보성군으로 일괄
이속되었다. 장흥의 ‘안상, 안하면’은 ‘安養面’이 되었으며, 그 무렵 안양면 소재지가 바로 ‘안양 海倉’이었다. 또한 일본의 헌병파견소가 바로
海倉里에 들어설 정도로 역사적으로 비중이 있는 포구였다. 그 ‘안양 海倉’ 浦口가 없어지고, 그 일부가 육지 마을로 남아 있는 오늘 현실인
것이다.
한 가지 첨언한다. ‘이순신 熱風’이 거센지라 ‘전공에 무관한 官給 프로젝트’라도 그 나름 열정으로 일할 수 있겠다.
出版 市場의 ‘이순신 매니아들’을 겨냥하여 오늘도 많은 책들이 부언허언하며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鄕土史 鄕土現場이 얽힌 문제라면, 外地人들은
모름지기 더 신중하게 접근하여야 한다. 現地 실정을 제대로 모르고서 자신의 눈썰미에 의지하는 外地人 전문가들이 범하는 실수가 꽤 잦다. 어느 날
책 몇 권을 읽었다고, 어느 날 현지답사 한번을 한다고 , 마치 신내림을 받듯 해결할 수는 없다. 그들은 과연 ‘반곡 정경달’과 長興의 義兵,
海上義兵들을 어느 정도로 알고 있을까? “선산부사와 함양부사를 지낸 ‘정경달’은 이순신에게 寶城하면 떠오르는 인물이다”고 말할
정도다.
“전령을 받고 ‘마하수, 백진남, 정명열, 김안방, 김성원, 문영개, 정경달’ 등이 배를 몰고 왔다”고 말할 정도이다.
‘장흥’ 개념이 없는, 그들의 몽매함과 단순함과 뻔뻔함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아울러 늘 뺏기고 밀려다니면서도 먹고사는 데만 바쁜, 이 못난
장흥후손으로서 참으로 면목이 없다.
‘반곡 정경달, 마하수 부자, 초계 변씨 12형제들’을 비롯한 여러 장흥 선조 분들께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우리 고향 장흥 분들에게 제안 드려봅니다. '’안양 해창’에는 ‘水軍再建路 표지석, 안양 海倉 유래’을
무식하지 않게 품위 있게 정성껏 만들어봅시다. ‘장흥 회녕포 회진’에는 ‘三道水軍統制使 취임상징물’과 ‘상유십이 미신불사(尙有十二 微臣不死)
기념석’, ‘장흥海上義兵 추모 명단석’ 등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더 나아가, ‘장흥과 보성’ ‘장흥과 강진’에 관하여 ‘가칭
문화교류접촉사’ 세미나를 열어보면 어떨까요? <지난호에 이어서>그럼에도 그들 주장에는 ‘안양 海倉’을 지목하여 진지하게 검토한
흔적이 전혀 안 보인다. ‘노기욱, 이훈’에게 물어본다, 도대체 水軍 再建의 뜻이 무엇인가? 軍糧과 軍器, 兵力, 兵船 등을 우선적으로
수습해야 하는 것이 水軍 再建의 첫 일 아닌가? 그런 水軍 再建길에 나선 忠武公이 ‘軍糧이 있는 안양 海倉 漕運倉’을 외면하며 지나칠 리
있겠는가? 기실 ‘배설’을 ‘군영구미’로 오도록 약속한 까닭 하나도 ‘안양 海倉’의 軍糧을 확보할 의도였을
것이다. 5)<日記>原文 해석상의 작은 부분 하나를 노파심에서 조언한다. 그들은 혹 “晩朝 直會寧浦” 문구에 집착하여
‘군학’에서 ‘회녕포’로 直行했다고 비약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때 ‘直’은 ‘다른 데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忠武公은
‘보성 열선루’에서 ‘白沙汀’에 갈 때도 “直到 長興地 白沙汀”이라고 표현하였었다. 忠武公은 ‘안양 海倉 군영구미’에서 출발하여 다른
곳을 안 들리고 바로 “直會寧浦”했던 것이다. ‘장흥읍 장흥부사 관아, 장흥읍 벽사역’ 등으로 안 빠지고 바로 ‘장흥 회녕포’로 南行했다는
뜻이다. 이제 마무리한다. ‘보성 群鶴’을 ‘군영구미’로 간주하는 것은 객관적 事實, 史實과 상관없는 억측에 불과하다. ‘보성 群鶴’에서
향선을 타고 '’장흥 會鎭’으로 뱃길 直行을 했다는 것은 가히 코미디 수준이다. 매사에 ‘公私의 합리적 분별과 기록 정신에 투철했던 忠武公의
성격’을 그들은 몰라도 한참 모른다. 忠武公이 水軍再建 여정에 들리신 ‘군영구미’에 이미 폐진된, ‘群鶴’은 결코 해당될 수 없다. 조선시대의
‘漕運倉’으로 운영되던 '’안양 海倉’이 가장 적격이고 <日記>내용에 합당하다. “장흥 監官 色吏가 쌀 도둑질을 하고 있더라.”는
<日記>상황에 ‘海倉’이 일치하는 것이다. ‘당시의 행군旅程, <장흥 정묘지>,地理的 사정, 관련된 地圖, 語源 고찰’
등에 비추어봐도 그렇다. 다만, 안타깝다. 장흥사람들은 잘 알고 있듯, 간척사업으로 그 ‘안양 海倉’ 포구기능이 통째로 사라져 버렸던
것. 이른바 ‘鄕船 移動說’을 작출한 ‘노기욱’ 등은 아마 ‘안양 海倉,漕運倉’ 자체를 몰랐을 것으로 판단된다. 1914년에 ‘회녕면,
천포면, 웅치면’이 장흥군에서 보성군으로 일괄 이속되었다. 장흥의 ‘안상, 안하면’은 ‘安養面’이 되었으며, 그 무렵 안양면 소재지가 바로
‘안양 海倉’이었다. 또한 일본의 헌병파견소가 바로 海倉里에 들어설 정도로 역사적으로 비중이 있는 포구였다. 그 ‘안양 海倉’ 浦口가 없어지고,
그 일부가 육지 마을로 남아 있는 오늘 현실인 것이다. 한 가지 첨언한다. ‘이순신 熱風’이 거센지라 ‘전공에 무관한 官給 프로젝트’라도
그 나름 열정으로 일할 수 있겠다. 出版 市場의 ‘이순신 매니아들’을 겨냥하여 오늘도 많은 책들이 부언허언하며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鄕土史
鄕土現場이 얽힌 문제라면, 外地人들은 모름지기 더 신중하게 접근하여야 한다. 現地 실정을 제대로 모르고서 자신의 눈썰미에 의지하는 外地人
전문가들이 범하는 실수가 꽤 잦다. 어느 날 책 몇 권을 읽었다고, 어느 날 현지답사 한번을 한다고 , 마치 신내림을 받듯 해결할 수는 없다.
그들은 과연 ‘반곡 정경달’과 長興의 義兵, 海上義兵들을 어느 정도로 알고 있을까? “선산부사와 함양부사를 지낸 ‘정경달’은 이순신에게 寶城하면
떠오르는 인물이다”고 말할 정도다. “전령을 받고 ‘마하수, 백진남, 정명열, 김안방, 김성원, 문영개, 정경달’ 등이 배를 몰고 왔다”고
말할 정도이다. ‘장흥’ 개념이 없는, 그들의 몽매함과 단순함과 뻔뻔함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아울러 늘 뺏기고 밀려다니면서도 먹고사는
데만 바쁜, 이 못난 장흥후손으로서 참으로 면목이 없다. ‘반곡 정경달, 마하수 부자, 초계 변씨 12형제들’을 비롯한 여러 장흥 선조
분들께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우리 고향 장흥 분들에게 제안 드려봅니다. '’안양 해창’에는 ‘水軍再建路 표지석, 안양 海倉
유래’을 무식하지 않게 품위 있게 정성껏 만들어봅시다. ‘장흥 회녕포 회진’에는 ‘三道水軍統制使 취임상징물’과 ‘상유십이 미신불사(尙有十二
微臣不死) 기념석’, ‘장흥海上義兵 추모 명단석’ 등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더 나아가, ‘장흥과 보성’ ‘장흥과 강진’에 관하여 ‘가칭
문화교류접촉사’ 세미나를 열어보면 어떨까요? |
<장흥신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