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
“모두 흙으로 이루어졌고 흙으로 되돌아간다.”(코헬 3,20)는 말씀처럼 우리도 흙에서 만들어졌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군위 가톨릭 묘원을 찾았다. 모든 이가 한 줌의 가루가 되어 흙을 구워 만든 질그릇에 담겨 묻히니 흙으로 돌아간 것이다.
내가 속한 한 법인의 이사장님께서 선종하시어 대주교님 집전으로 장례미사를 치렀다. 고인은 평소에 건강한 모습으로 늘 웃음과 농담으로 우리를 기쁘게 대하셨다. 또 긍정적이며 화내는 일이 없는 신앙인의 표상이 된 분이라 비보를 접한 순간 더욱 슬픔으로 다가왔다. 고인은 우리 교구의 평신도회장으로서 온갖 일을 다 하셨고 가톨릭 학술원을 이끄셨으며 여기회를 이끄신 분이다.
또한 그분은 1966년 오스트리아에 유학하면서 오상의 비오 신부님을 알게 되었다. 어떤 수도자로부터 비오 신부님에 대한 책자를 건너 받아 그 책을 읽고 가톨릭에 눈을 떴다고 한다. 비오 신부님을 직접 만나게 되었고 그분의 영성에 깊은 감명과 깨우침을 얻었다고 한다.
그 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세상의 윤리도덕과 상식선에 따라 산 삶이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인은 <오상을 받은 우리 시대의 형제>와 <비오 신부의 삶과 영성> 등 10여 권의 책을 번역하여 비오 신부님을 세상에 알렸다. 또 지역의 Y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여기회 상임위원은 군위 묘원까지 고인이 마지막 가는 길을 밟았다. 우리는 미리 길을 재촉하여 김수환 추기경의 생가를 둘러보았다. 생가 입구에 옹기 굽는 가마가 있었
다. 추기경님의 조부님 때부터 박해를 피해 이곳에 왔으며 부모님께서 옹기장수를 하시며 생계를 유지하셨다.
그곳은 생가와 더불어 경당과 추모공원, 기념관, 청소년수련원이 조성되어 있다. 기념관에 들어가니 추기경님의 일대기를 접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 “이 세상에는 옹기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라는 글귀를 볼 수 있었다. 옹기는 박해와 신앙의 상징이다. 박해 시대에 신앙인이 피신하여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한티 공동체가 그러하였고 추기경의 부모님도 옹기장수를 하며 삶을 살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어린 시절 부모님의 그런 모습을 보며 자랐기에 ‘옹기’를 아호로 삼았다고 한다. 옹기는 음식도 담고, 더러운 오물도 담는 그릇이 아닌가. 추기경은 그런 뜻을 품었기에 세상을 너그럽게 품을 수 있었으며 그 삶은 옹기를 닮은 삶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항상 약자의 벗이 되어 함께 하신 분이다. 도시 빈민과 사회적 약자와 눈높이를 맞추는 삶이었다. 옹기가 좋은 것만 담는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것도 담았듯이 말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하느님은 사랑과 진실 그 자체인 걸 알면서도 마음 깊이 깨닫지 못했다.”며 자신을 바보라고 했다. 그 후 세상은 바보 추기경이라고 불렀다. 바보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함과 옹기 같은 모든 것을 담아내는 낮은 자세의 삶을 상징하는 대명사이다.
오후 4시가 되어 고인을 앞세운 차량이 왔다. 곧바로 납골당으로 모셨다. 작은 옹기에 담긴 고인은 흙으로 빚은 데로 돌아갔으니 영원한 고향으로 가셨다. 영원한 하느님 나라에 드셨으니 기쁨과 영광이 늘 하시기를 빌면서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고인은 옹기가 가마 속에서 단련되듯이 비오 신부님이나 김수환 추기경의 영성을 닮은 옹기 같은 삶을 사셨다. 우리도 세상 삶에서 단련하여 고인처럼 ‘질그릇에 담긴 보물’을 상기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