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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년 봄에 관산(冠山)의 위치운 용규(魏穉雲 龍奎)가 나를 따라서 벽산서사(碧山書舍)를 유람했다
기본정보
· 유형분류 고서-집부-별집류
· 내용분류 교육/문화-문학/저술-문집
· 작성주체 편저자 : 정의림(鄭義林)
· 간사년 丁卯 [1927]
· 간사지
· 형태사항 29.9 x 19.4 / 『일신재집(日新齋集)』
· 소장처 미상 / 국립중앙도서관
정의
1927년에 간행한 조선 말기의 학자 정의림의 시문집.
해제
『일신재집(日新齋集)』 해제
1. 정의림(鄭義林)의 생애
『일신재집』의 저자는 정의림(鄭義林)이다. 자(字)는 계방(季方)이며, 일신재(日新齋)는 그의 족대부인 김석구가 지어준 호이다. 그리하여 당시 사람들이 일신선생(日新先生)이라고 불렀다. 대곡 김석구(大谷 金錫龜, 1835-1885), 노백헌 정재규(老柏軒 鄭載圭)와 함께 노사 기정진의 3대 제자로 꼽혔다. 그는 1845년(헌종 11) 11월 7일에 능주의 대덕동(大德洞, 현 전남 화순군 이양면 초방2리)에서 태어났다. 증조 정채(鄭埰) 때 낭주(朗州)로 옮겼고 조부 정가석(鄭加錫)은 금릉(金陵, 지금의 강진)으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정제현(鄭濟玄)이고 어머니는 진원 박씨로 박치성(朴致聖) 딸이다. 그의 어머니는 달이 품 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명민하여 서당의 학생들이 ?소학? 읽는 소리를 듣고 그 의미를 대강 알았고, 어른들이 존화양이(華夷尊攘)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는 '사람에게도 화이(華夷)가 있는데 아름다운 것은 화이고, 악한 것은 이(夷)이니 사람들은 마땅히 자기 몸에서부터 존화양이(尊華攘夷) 해야 한다.'고 말하여 사람들이 놀랬다고 한다.
10세 때(1854년,철종 5)에 명촌 황기현(明村 黃紀顯) 에게 『소학』을 배웠고 14세 때 사서를 섭렵했다.
20세에(1864년,고종 1)에 할아버지와 함께 과거 시험을 보려고 서울로 갔었는데 당시 사대부들이 줄지어 고관이나 세력가 집에 드나들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는 세태를 보고 과거에 대한 생각을 끊어버렸다. 이후 부여에 사는 족대부 석당 정구석(石塘 鄭龜錫)에게 가 경전과 사학(史學)을 배웠다. 정구석은 정의림의 총민함과 학술이 순정한 것을 보고 "정씨 집안이 장차 세상에 크게 이름이 나겠구나."라고 하면서 선대(先代)와 관련된 일, 가문의 장래 계획 등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정의림이 돌아갈 때 '일신재(日新齋)'라는 세 글자를 써 주면서 노사 기정진에게 나아가 배우기를 권하였다.
24세 때(1868년,고종 5)에 진원(珍原, 현재의 장성)의 하사(下沙)에 있던 노사 기정진에게 가 문하생이 되었다. 기정진은 그를 보고 "사미(沙彌)가 와 병든 중의 집 사립문을 두드렸다."고 하며 기뻐했다. 정의림도 "비록 낙민(洛閩) 지역에 태어나지 못해 정자와 주자를 직접 보지 못했지만, 다행이 동방에서 노사를 받들게 되었다. 노사는 곧 정자와 주자와 같다."고 할 정도로 기정진에게 존숭의 마음을 다하였다. 기정진은 그와 김석구, 정재규를 학문의 후계자로 여겼고 죽기 직전 그 동안 성리설(性理說)에 대해 저술해 두었던 「납량사의(納凉私議)」를 세 사람에게 보여주었고, 기우만과 함께 강론하기도 하였다.
정의림은 기정진의 학문을 수호할 것을 다짐했다. 1902년 ?노사집? 제 3간(刊)을 위해 영남 산청의 신안정사(新安精舍)에 간소(刊所)를 차렸다. 이 때 기정진이 저술한 「납량사의」, 「외필(猥筆)」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 글은 주리적(主理的) 성향을 띠고 있었는데 권봉희(權鳳熙)와 최동민(崔東敏) 등은 율곡의 논의를 범했다고 하면서 ?노사집? 출간을 저지하였다. 이 일로 기호학파 내에서 「납량사의」 「외필」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게 일어났고 심지어 ?노사집? 목판본을 불태워야한다는 논의도 생겨났다.
정의림은 기정진의 학설을 지키는 데에 앞장섰다. 그는 '지금 세상에는 주기(主氣)에 대한 논의가 다양한데 그것들은 모두 기(氣)를 중시하는 데로 귀착된다. 그리하여 기(氣)가 리(理)의 자리를 빼앗게 되는데 이러하면 신하가 임금의 자리를 빼앗고, 소인이 군자 자리를 빼앗으며, 이적(夷狄)이 화하(華夏) 자리를 뺏는 게 된다.'고 하면서 기정진은 이런 것을 염려한 것이어서 주리적 주장을 한 것이라고 했다. 또 기정진이 율곡을 돈독하게 존숭한 것은 문집의 곳곳에서 볼 수 있으므로 율곡을 범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이런 취지를 담은 글을 영남의 유학자들에게 보내어 알리기도 했다. 또 당시 전우(田愚)가 쓴 「납량사의변(納凉私議辨)」에 대해 반론을 펼쳤다. 이런 것들은 모두 스승인 기정진의 학문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었고, 1879년(고종 6) 기정진이 죽었을 때 그는 부모상(父母喪)을 치르듯이 하였다.
1882년(고종 19)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대덕으로부터 품평(品坪), 묵곡(墨谷, 화순군 이양면 묵곡리) 성동(星洞) 가산(佳山) 등으로 옮겨 살았다.
1887년(43세, 고종 24) 때 문봉환(文鳳煥, 양규환(梁奎煥), 김규원(金奎源), 이병섭(李秉燮), 이태환(李泰煥), 이인환(李仁煥), 문송규(文頌奎), 오장섭(吳長燮), 오문섭(吳文燮) 등과 함께 서석산을 유람하였다. 그때 유산(遊山)의 체험을 10수 시에 담았다.
1891년(47세, 고종 28)에는 정시림(鄭時林), 정재규, 최숙민, 정면규(鄭冕圭) 등과 함께 종산(鍾山)에서 설강하였고, 이후 일 년에 한 번씩 강회를 열자고 했지만 더 이상 시행하지 못했다. 그 대신 서석산을 함께 유람했던 이들과 뜻을 합하여 영귀정(詠歸亭, 현재 전남 화순군 춘양면 회송리 칠송 마을에 있다.)을 지었다. 1892년에 터를 닦고 1893년 12월에 완성했다. 여기에 5성(聖) 4현(賢)의 진영을 봉안하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으며 강학 장소로 삼았다. 이 이름은 그의 문생이었던 문송규(文頌奎)가 서석산 유람 후 유람 명칭을 '영귀(詠歸)'로 하자고 제의했고 그 명칭을 따온 것이다. 그는 '사람이 되는 도를 구하려면 학문을 해야하고 학문을 하려면 스승과 벗이 있어야 한다. 학문을 하려면 학교가 있어야 하니 학교는 곧 명륜(明倫)과 입교(立敎 )의 바탕이 된다.'라고 하면서 강학 장소를 마련했던 것이다.
1894년 갑오 농민 혁명 때 동학도들이 영귀정을 점거하자 통곡하면서 영평(永平) 등으로 피했다가 1895년에 돌아와 석채례(釋菜禮)를 지냈는데 '사설(邪說)이 무성하여 유학이 땅에 떨어졌다.'고 탄식하였다. 그 만큼 영귀정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였다.
1895년(51세, 고종 32) 8월 명성황후가 일본군에 의해 시해되고 개화파와 일본의 주도로 단발령(斷髮令)이 발표되자 '시사(時事)가 이에 이르렀으니 죽는 일 하나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1896년(52세, 건양 1) 기우만이 의병을 일으켜 격문을 보내고 나주 금성관에 있을 때 '온전한 기왓장이 되느니 차라리 부서진 옥이 되는 게 낫다. 물고기를 욕심내는 것이 맛난 곰발바닥 요리와 같으랴.'고 하면서 뜻을 같이 했다. 이에 나주까지 찾아가 방략을 논의했고, 광산관(光山館)으로 갔을 때에도 찾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고종의 선유(宣諭)로 의병을 해산했기 때문에 가지 못했다.
1905년(61세, 광무9)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하면서 을사오적(乙巳五賊)과 일본을 통렬히 물리쳐야 한다는 취지로 소(疏)를 작성했다. 그러나 유생의 상소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는 원고를 태워 버렸다. 그리고 최익현과 정재규가 의병에 관한 논의하려고 궐리(闕里, 충남 논산시 노성면)에 모인다는 말을 듣고 함게 하고자 하였으나 그것조차 성사되지 못하자 울분이 쌓여 병이 될 지경이었다. '병인년(1866년, 고종 3) 양요(洋擾) 때에 노사(蘆沙)가 올린 소는 대의가 삼엄하였고 만약 그 때 제안했던 정책을 서너 개만 썼어도 사직이 이처럼 기울었을까?'라며 울분을 토했다. 그리고 두문불출하며 자정(自靖)의 길을 가고자 하였다.
1910년(66세, 순종 4) 8월 한일합병 되어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눈물을 흘리며 '옛날에 나라가 망하면 신하가 죽는 것이 의리이고 사람과 동물이 다르니 사람이고서 죽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문을 닫아 걸고 우리 옷을 입고 우리의 상투를 보호하여 우리 도를 지켜 자정할 수밖에 없겠구나.'라고 했다. 그러나 문하생들에게는 여전히 엄격한 스승이었다. 문하생들이 오면 책을 읽고 공부하는지 물으면서 '공부를 잊어서는 안되며 석과(碩果)의 소식(消息)이 우리로부터 나오지 않으면 누구에게 맡기겠느냐?'면서 권면했다. 10월 10일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치관(緇冠)을 쓰고 반듯하게 누워 생을 마쳤다. 66세를 일기로 가천(佳川)의 우사에서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그는 민치환(閔致煥) 딸과 결혼하였으며 아들은 정상묵(鄭尙黙)인데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딸은 셋이고 이진휴(李進休), 송광수(宋光壽), 박경동(朴敬東) 등이 사위이다. 손자는 정헌규(鄭憲圭), 정범규(鄭範圭)이다. 신산(莘山)에 묻혔고, 1983년 고산서원(高山書院)에 추배되었다. 또 칠송사(七松祠), 화순의 삼산사(三山祠)와 용산사(龍山祠), 동산단(東山壇), 담양의 금곡사(金谷祠) 등에 배향되었다.주 1)
그의 교유관계는 호남, 영남, 기호지역까지 광범위했다. 호남에서는 노사 기정진 문하생들과 교유했고 그 중 대곡 김석구(大谷 金錫龜), 애산 정재규(艾山 鄭載圭)와 가장 친하였으며 특히 정재규와의 인연은 기정진이 '기우(奇遇)'라고 할 만큼 절친했다. 또 경기 및 충청 지역의 문인 가운데에는 김평묵, 최익현 등 주로 화서학파 문인들과 교유했다. 한편 영남의 문인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졌는데 이들은 주로 기정진 문하에서 공부했던 이들이다. 정시림, 조성가(趙性家), 최숙민(崔琡民) 등과 강학도 같이 할 만큼 학문적으로 친분이 두터웠다. 더구나 ?노사집? 제3간(刊)의 간소가 산청 신안정사에 있었으므로 영남의 노사학파 문인들과는 왕래가 잦은 편이었다.
그는 반 나절동안 책을 읽고 반나절은 정좌(靜坐)하여 읽었던 내용의 글자 및 글자의 뜻, 구의(句義)에 대해 반복하여 깊이 생각했으며 제자들에게도 '조용한 곳에서 독서하라.'고 권하였다. 그리고 '학문의 본령은 뜻에 있고 뜻이 한결같아 기(氣)가 따라오면 천하에 어려운 일이 없으므로 학문을 하고자 한다면 우선 뜻을 정립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또 공부하는 데에 있어서 중간에 끊기는 것이 가장 병통이라고 하면서 '일신(日新)' 두 글자를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일찍이 꿈에서 한 시구를 지었다고 하는데 "江山古態春猶在 日月新精又更晴"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의 품성이 온유하고 명확하며 학술이 순수함을 보여주는 내용이라고 칭송 받기도 하였다.
기정진은 자신의 학문을 계승할 만한 제자를 꼽으며 "경범(景範, 김석구) 첫째이며 정의림과 정재규를 다음으로 삼는다."라고 말했다. 평소 술을 좋아하여 친구들을 맞아 시로 창화할 때 술잔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마셨지만 술이 취하면 곧바로 그만 마셨을 정도로 절제를 잘하였다고 한다. 「신종록」 발문을 쓴 오준선에 의하면 노사 기정진으로부터 다른 제자들은 들어보지 못한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변론이 매우 정밀하고 명확하여 노사 문인들도 감탄했다고 한다.
2. ?일신재집? 편찬 체제 및 내용
?일신재집?은 문집 간기(刊記)나 발문, 서문 등이 없어 간행 경위나 간행년대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일신재집? 말미에 있는 '신종록'의 서문과 발문은 1927년에 쓰여졌는데 그에 의하면 '송사 기우만이 쓴 행장이 늦게 이루어져 ?일신재집? 원집의 부록으로 넣지 못했다.'고 하였다. 또 '이미 그 유문(遺文) 간행하여 펴뜨렸고 이제 또 동문들의 성명을 모아서 한 책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정의림 행장은 1912년에 완성되었고 이것을 원집에 붙이지 못하고 1927년에야 붙였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본다면 ?일신재집? 원집은 정의림이 사망한 직후 편찬, 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1927년 원집 말미에 '신종록' 및 행장, 언행록을 덧붙여 간행한 것이다.
?일신재집?은 총 21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은 시, 권2부터 권10까지는 서(書), 권11부터 권13에는 잡설(雜說), 서(序)가 있으며, 권14는 기(記), 권15는 발(拔), 명(銘), 사(辭), 찬(贊), 축문(祝文)이 실려 있다. 권16에는 제문, 비(碑), 묘갈명(墓碣銘)이 있으며, 권17에는 묘지명(墓誌銘), 묘표(墓表)가 있다. 권18은 행장(行狀)이 있고 권 19에는 행장과 전(傳)이 있다. 권 20과 권 21은 유사(遺事)를 실었다.
이 뒤에는 양회낙(梁會洛)이 쓴 「일신재신종록서(日新齋信從錄序)」, 기우만이 쓴 「행장」, 박준기(朴準基)가 쓴 「일신재선생언행록(日新齋先生言行錄)」, 「일신재신종록(日新齋信從錄)-종유편(從遊編), 문인편(門人編)」, 오준선(吳駿善)이 1927년에 쓴 발문, 홍승환(洪承渙)이 1927년에 쓴 「신종록후소지(信從錄後小識)」 등을 덧붙였다.
권 수
문 체
편수
권1
시(詩)
169제 188수
권2-권10
서(書)
507편
권11-권13
잡설(雜說)
서(序)
120편
說 40편
書 38편
通文 2편
答通文 1편
錄 2편
辨 2편
序 34편
醮辭 1편
권14
기(記)
69편
권15
발(拔), 명(銘),
사(辭), 찬(贊),
상량문
축문(祝文)
36편
拔 11편
銘 2편
字銘 12편
辭 2편
贊 3편
상량문 3편
축문 3편
권 16
제문, 비(碑),
묘갈명(墓碣銘)
52편
제문 40편
碑 1편
묘갈명 11편
권17
묘지명(墓誌銘), 묘표(墓表)
47편
묘지명 35편
묘표 12편
권18
행장(行狀)
25편
권19
행장과 전(傳)
27편
행장 15편
傳 12편
권20-권21
유사(遺事)
50편
권1에는 169제 188수의 시가 있다. 형식별로 보면 5언시 5제 5수, 5언 율시 4제 4수, 5언 절구 20제 20수, 7언 율시 68제 74수, 7언 절구 72제 85수이다. 내용이나 시 창작의 동기에서 볼 때 차운 및 화답시, 누정시, 만시, 증별시, 친구와 함께 한 유람시, 제자들에게 주는 시, 자신을 경계하는 시 등 매우 다양한 내용이 실려 있다.
「재거유감(齋居有感)」은 모두 6수이다. 이 시는 도학의 연원과 맥락에 대해 읊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천지가 개벽한 이후 성인들이 잇달아 나왔는데 주나라가 쇠락한 이후부터 세상의 도가 희미해졌다고 했다. 그런데 공자가 세상에 태어나 사물(四勿)의 심법 즉 "비례물시 비례물청 비례물언 비례물동(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을 가르치고 그것을 손자인 증자가 이었다고 하였다. 이후 당나라의 한유(韓愈)가 유학을 드러냈고 송나라에 들어와 정호와 정이, 소옹 등이 뒤를 이었고 주자가 집대성하고 왕백(王栢), 김이상(金履祥), 허겸(許謙) 등이 계승하였다고 했다. 그리하여 유학과 성리학의 연원과 도맥(道脈)을 밝혔고 한편으로 육상산(陸象山)과 양명학(陽明學)의 폐해가 심했다고 비판하였다. 이는 당시 유학 및 성리학이 조선에 유입된 서양 학문과 충돌하면서 사람들이 서양 학문을 '새로운 것'으로 알고, 성리학을 돌아보지 않는 세태를 염려한 때문이다.
「서회(書懷)」에서는 '부자와 귀한 이들은 더 부귀(富貴)해지려 하고 빈천한 이들도 부귀해지려고 다투는 세상'을 비판한다. 「상시우제(傷時偶題」) 7수는 당시 나라 형세를 우려하는 내용을 담았다. '재앙의 씨앗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오랜 연원이 있는 세가(世家)의 자제들이 원수들에게 나라를 열어주는 공훈'을 받았다고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이는 당시 개화파들이 나라를 개방하자고 주장하면서 서양 열강 및 일본과 조약을 맺어 통상을 허용했던 상황을 비판한 것이다. 병인양요가 발생했을 때 유학자들이 '위정척사' '외세 배척'의 기치를 내걸고 상소를 올릴 때에 전재 임헌회(全齋 任憲晦)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집가지 않은 처녀가 시집 일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의림은 '입 다물면서 시집가지 않은 여자라고 칭한 이는 누구인가'라고 하면서 서양 열강의 침탈에 대해 침묵했던 임헌회를 정면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병인양요 때에 상소했던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이 대의를 행하였다고 칭송하였다. 또한 당시 조선의 상황을 그대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아. 오늘이 어떤 날인가 嗚呼今日是何日
많은 생령 목숨 끊어지는 때구나 萬萬生靈絶命辰
바다에 둘러 싸인 아득한 천리 땅에 環海茫茫千里地
어찌하여 장부 한 사람 없는지胡無一箇丈夫人
앞에는 긴 뱀 뒤에는 사나운 호랑이 前有長蛇後猛虎
어린 아이 어미 잃고 울어대는데 孩兒失母泣呱呱
믿을 데는 오직 하늘 위에 있으니 所恃只惟天在上
누가 장차 하늘에 애원할까 雖將哀怨訴淸都
예부터 나라 잃은 일 어찌 오늘과 같으랴 自古喪邦孰若今
하늘 땅이 뒤집히고 해와 별도 빛 잃었네天飜地覆日星沈
오직 문닫고 자정할 터이니惟有杜門自靖計
서산 동해 찾아가지 않으리西山東海不須尋
「자경(自警)」은 정의림이 30세에 지었다. 30년 동안 학문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농삿일이나 기술도 익히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주위 사람들의 기대와 자기가 이루어 놓은 성과가 부합하지 못함을 자책하면서 더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다짐하는 시이다.
내가 30년 사는 동안 娥生三十歲
무엇을 했는가 물어본다 問爲何事哉
농사를 짓지도 않았고 不治農圃業
궁검의 재주도 못 배웠으며 不學弓劍才
다만 문자의 일로 只以文字事
해를 보내고 또 보냈네 經世又經世
안에는 부형의 바람이 있고 內有父兄責
밖에는 스승과 친구의 어짊이 있네 外有師友賢
나아감이 마땅히 얕지 않으니 所就宜不淺
또 무얼 바쁘게 하는지 復何倥倥爲
돌려 비춰 스스로 점검하니 回光自點檢
그 돌아갈 데 알기 어렵지 않네 其歸不難知
공명은 가히 힘쓸만 하다 하며 功名謂可辦
벼슬 사이로 바삐 달려가네 奔走槐棘間
열심히 항아리 구르기 계산하느라 營營筭甕轉
몇 번이나 꿈에서 돌아왔는지 幾自槐安還
산과 물 좋은 곳 택하니 擬占好山水
지팡이와 신이 잠시도 쉴 새 없네 笻鞋不暫休
사람 만나 풍토를 묻고 逢人問風土
손님 대하여 산과 시내를 논하네 對客談峙流
때로는 술 갖고 꽃 아래로 가 時將花下酒
맘껏 취해 삼촌을 보내네 荒醉度三春
가련하구나 황대의 저녁 可憐荒臺夕
끊어지지 않은 몽혼 빈번하네 未斷夢魂頻
장기와 바둑 두며 놀던 곳 博奕遊戲地
옛 생각 문득 다시 떠오르네 舊念輒復全
남령취미 너무 좋아해 偏嗜南靈臭
때도 없이 흡연하여 無時不吸煙
이어지고 이어져 한가할 틈 없이 牽連無暇隙
온갖 시름 공격하누나 攻之千百端
먼지 낀 거울로 비추기를 구하고 垢鑑索照求
의사를 피하면 병 고치기 어렵네諱醫療疾難
척연히 생각지 말고 寧不惕然念
하나하나 자신에게 되돌려 보네 一一反諸身
공명과 산수의 뜻은 功名山水志
모두 만나는 때에 부치네 全付所遇辰
주색은 각반의 욕심이니 酒色各般欲
호되게 없애 싹트지 않게 해야하지 痛剗訾不萌
오두막에서 학문을 닦으니 修息蓬蓽裏
날마다 나아갈 길 어둡기만 하네 闇然日就程
주경은 추축 같고 主敬如樞軸
입지는 척량일세 立志是脊梁
공부 길에 오르기를 주저하지 말게나 登程莫躊躇
이를 써서 길 잃음을 경계하네 著此警迷方
「교자(敎子)」는 아들에게 준 시이다. 자식의 무심함은 곧 부모의 책임임을 강조하며 자식에게 공부하기를 권면한다.
자식이 무식함은 누구 책임인가 子而無識爲誰責
가르쳐도 듣지 않으니 걱정이구나 敎且不廳是我憂
세도와 인륜이 관계됨이 무거우니 世道人倫斯繫重
다만 소학을 가장 먼저 해야 한다 特書小學最初頭
「중과보림사견사폐이구유감이작(重過寶林寺見寺廢已久有感而作)」은 보림사를 다시 방문하면서 옛날을 회상하고 쇠락한 절의 모습을 그렸다.
옛날 아버지 모시고 운림을 지나가고 曾陪先考過雲林
흰 머리로 거듭 오니 변함이 심하네 白首重來桑海沈
갔던 길 추억하나 기억 없는 곳에 追想經行無記處
석양 속 흐르는 물 소리만 보내오네 夕陽流水送餘音
「관서유감(觀書有感)」은 책 읽기의 기쁨을 말하였다. 천만 개의 물줄기는 같지 않지만 그 근원은 한가지라고 하면서 그것을 독서로 알 수 있다고 하였다.
한편 그는 정해년(1887, 고종24, 43세)에 서석산(瑞石山, 곧 無等山)을 유람하고 시를 남겼다. 함께 쓴 서문은 유산기(遊山記)의 성격을 지닌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정해년(1887, 고종24, 43세) 중추 기망 다음 날 내가 벽지에서 출발해서 단양을 지나오면서 조카 이기호와 함께 하여 칠송 안국정 집에 이르러 서석산에 가려고 했다. 문봉환, 양구환, 김규원, 이병섭, 이태환, 이인환 문송규, 오장섭, 오문섭 등이 먼저 와 앉아 있었다. 그래서 출발하여 2,3리 쯤 갔는데 그 때 이승우가 뒤따라 출발하였다. 화순 유촌점에 이르러 시를 지으며 잤다. 그 다음 날 빙치(氷峙)를 넘어 수촌점(水村店)에 이르니 문용환, 김경원이 어제 천천히 길을 돌아 여기에 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좋은 기분은 무슨 말로 다 해야할지. 오직 김장석이 끝내 오지 않으니 이 유람의 기대를 저버림이 매우 심했다.
몇 리쯤 가니 창주동이 있는데 산을 빙 둘러 싼 절벽에 단풍과 붉은 넝쿨이 햇살을 받아 빛나는데 앞뒤가 진실로 비단 같은 강산이었다. 이평중을 찾아 갔고 오후에 평중이 길을 인도하여 마을 뒤로 올라갔다. 거기에 석굴이 있는데 수백 명이나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넓었다. 그 안에 작은 굴이 있는데 맑은 샘이 굴의 돌틈 사이에서 솟아 돌아솟구쳤다. 위에 노은곡이 있으니 대개 특별한 곳이었다. 땅이 기름지고 샘물 맛도 달았으며 밭도 있어 그 곳에 집을 짓고 살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는 곳이었다.
평중과 헤어지고 영신(永新)에 이르러서 이방언씨 집에 들어가 잤다. 다음 날 주인이 밥과 나물을 싸주니 등산할 때 요기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길을 가르쳐 주겠다는 뜻을 비치기에 함께 하였다. 모두 도원동에 이르러 술 한 병을 사 뒤에 찼다. 농암에 이르러 조금 쉬다가 광석대(廣石臺)에 도착했다. 광석대는 산 허리에 있고 옛 절터가 있었다. 그 안에 돌 부뚜막이 있고 그 부뚜막 위에 아주 넓고 평평하게 생긴 바위가 있는데 네모 반듯하여 사람 백여 명이 앉을 만하였다.
광석대 사방에 층암 기이한 돌들이 있는데 세로로 서 있는 것은 마치 병풍 같고, 누워 있는 것은 마치 다리 같고, 둥근 것은 항아리 같고 네모진 것은 마치 우리(새장)같았다. 깎고 직립한 것은 마치 기둥인 듯, 빼어나 날개달린 것은 마치 모자인 듯, 위쪽이 휘어진 것은 마치 집과 같고 고요한 것은 마치 방과 같았다. 주위를 빙 둘러쳐진 것은 마치 담장과 같았다. 또 나이 든 이에게 절하고 읍하는 것과 같은 것도 있고 무릎 꿇은 것도 있고 단정히 받드는 모양인 것도 있고 응립하는 것들이 있어 이 모든 것이 빙 둘러 서 있고 겹겹이 쌓여 있었다. 마치 신령이 깎고 귀신이 잘 깎아 다듬어 놓은 들아니 마음이 즐거워지고 훤해지는 듯했다.
풍혈대가 있는데 대 가운데 큰 빈 곳이 있어 마치 조개 껍데기 같았다. 안에서 돌아 위로 솟아 올랐다. 대 위에 앉으니 그 위 아래 높이가 수백 척이나 되어 가슴이 떨려 오래 있을 수 없었다. 내려와 광석대에 앉아 술을 돌려 마시면서 노래도 부르고 시도 읊었다. 진실로 유한한 흥취가 만연했고 안기생이나 적송자 같은 이가 오로 청운과 자하의 사이에 노는 것과 같았다.
점심으로 요기하고 산을 돌아 오른쪽으로 가 석문에 도착했다. 석문 안에 석실(石室)이 있고 붉은 넝쿨이 빙빙 돌려 올라 있었으며 그 바깥 편에 한 떨기 꽃같은 방이 석실의 서쪽에 있었다. 모두 돌을 쌓은 것이고 물이 돌 사이로 흘렀다. 길이 있는데 마치 물 건너 가는 곳과 같았다. 걸음을 내딛어 발을 내려 보니 평평한 돌이었다. 돌길을 따라서 가니 옛 절터가 있었다. 절터에는 돌들을 마치 붙인 듯이 하여 계단을 만들어 놨는데 사람 힘으로는 할 수 없을 듯하였다. 빙 둘러 쳐진 담이 아직도 의연하여 아직도 그대로 있었지만 이끼가 오래 되었고 돌들도 오래 되어 가히 자취를 찾을 길이 없었다. 배회하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비감이 들어 어느 덧 탄식하게 되었다. 개벽한 이래로 이 산이 있었고 이 사이에 필시 신선이나 중들이 집들을 경영하여 벌여 놓아 융성하게 하여 한 때에 자랑한 적이 있었을 터인데 연기도 사라지고 구름조차 없어져 또 그 사이에 몇 십 년이나 흘렀는지 모르게 되었구나.
조금 가다보니 돌길이 홀연히 끊겼다. 나무하는 이에게 길을 물어 목백이 자자한 가운데 이르니 바위가 곧바로 서서 마치 휘날릴 듯했다. 절정에 올라 천황봉(天皇峯), 지황봉(地皇峯)이 있는데 안계가 툭 트이고 뭇 산들이 여기저리 흩어져 있는데 모두 언덕인 양 했다. 동쪽으로는 지리산, 북쪽으로는 계룡산에 이르고 남쪽과 서쪽은 대해가 있어 붉은 구름이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이 산이 한 지방의 으뜸이었다. 안계가 먼 것이 이와 같은 데 하물며 한 나라 안에서 가장 높은 곳은 어떠할 것이며 천하에서 가장 높은 데는 어떠할까. 사람의 기량과 식견의 높고 낮음, 덕을 체득한 것의 후박을 가히 볼 수 있으니 감격스럽구나.
북쪽 산기슭의 입석(立石)에 이르니 돌들이 모두 사각, 육각, 팔각, 십이각 진 것들이었다. 마치 자로 재어 평평하게 만든 듯, 줄로써 세워놓은 기둥 같고, 쌓아 놓은 것은 삼과 같았다. 기둥 위에 또 기둥을 올려 놓은 듯, 마 위에 또 마를엮어 올린 듯했다. 높은 것은 천여 길, 낮은 것도 백척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혹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울타리를 세운 듯 늘어서 있고, 층층이 쌓여 계단 같으니 진실로 천하의 절묘한 곳이었다.
대개 이 산에서 가시들이 생겨나지 않고 곤충이나 뱀들이 나지 않으며 돌들이 뾰족하지 않고 봉우리가 기울어지지 않은 것은 천지간의 정기(正氣)가 모인 부류들이 모두 입석에 지난 것들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이별하고 증심사로(澄心寺)로 내려와 잤다. 다음 날 절을 구경하는 데에 반나절이나 걸렸다. 화순에 이르러 관여(寬汝)를 따라 단암서실로 들어갔다. 그 다음날은 곧 23일이었다. 교촌에 이르러 만화루에 올라 잠시 쉬고 만연사에 이르렀는데 집이 모두 훼손되고 쓰러질 지경이었고 풀들만 무성하게 하늘을 향해 있었다. 선정암에 이르러 점심 먹으니 마음이 통창해져 시를 읊기를 오래 했다. 저녁에 하동서실에 이르렀는데 조인환 조동환, 조병길, 조영환 등이 모두 와서 서로 만났다. 밤새도록 강론하며 새벽 닭이 울 때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능저(綾邸)로 가 영벽정에 오르니 강물이 불어나 넘실거렸고 온 산에 빛이 가득했다. 난간에서 바람 맞으며 시 몇 수를 실컷 읊고 보고 음강에 이르러서 술 한 병을 사 가지고 속금봉에 오르니 석양이 산에 걸려 풍광이 사람으로 하여금 술 한 잔 마시고 시 한 수 읊도록 하기에 마땅했다. 실컷 즐긴 후에 떠났다.
무릇 서석산은 남쪽 지방의 승경지이며 친구들은 한 지방의 선사들이다. 평상 동안 좋은 친구들과 교유하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다. 그런데 유람하는 날이 길일이고 날씨도 맑고 기운도 맑았다. 다닐 때에는 지체되는 걱정도 없었고, 길도 어려움이 없었다. 길을 다닐 때 서로 마음이 맞아 앞서고 뒤로 물러서는 데에도 절도가 있었고, 번다했지만 혼잡하지는 않았고, 마음을 서로 맞추며 다른 데로 흐르지 않게 했다. 천천히 걸어서 가고 유유하게 왔다.
친구들이여 돌아가 각각 힘쓰시길. 그래서 큰 덕과 무거운 명망이 이 산 같아 우러를 터이다. 그러면 우리들의 오늘 유람이 영원히 말로 이어질 터이고 한 곳의 서석 또한 남쪽의 황량한 지방 사이에 빛을 더하게 되어 응당 길이길이 적막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유람 노정(路程)을 보면, 중추 기망 다음 날 벽지에서 출발해서 칠송의 안국정 집에서 문봉환, 양구환, 김규원, 이병섭, 이태환, 이인환 문송규, 오장섭, 오문섭 등과 합류하였다. 10여 명이 함께 유람했다. 그 여정은 빙치(氷峙)→수촌점(水村店)→창주동의 석굴→영신(永新)→광석대(廣石臺)→ 풍혈대(風穴臺)석문(石門)→입석대→ 산정상→ 징심사(澄心寺)→ 만연사(萬淵寺)→능주 영벽정(綾州 映碧亭) 등이다. 특히 입석대를 자세히 묘사하면서 '북쪽 산기슭의 입석(立石)에 이르니 돌들이 모두 사각, 육각, 팔각, 십이각진 것들이었다. 마치 자로 재어 평평하게 만든 듯, 줄로써 세워놓은 기둥 같고, 쌓아 놓은 것은 삼과 같았다. 기둥 위에 또 기둥을 올려 놓은 듯, 마 위에 또 마를 엮어 올린 듯했다. 높은 것은 천여 길, 낮은 것도 백척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혹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울타리를 세운 듯 늘어서 있고, 층층이 쌓여 계단 같으니 진실로 천하의 절묘한 곳이었다.'라고 찬탄했다.
「영남 귀로 증 박경립 홍사증 민자경 삼군(嶺南歸路贈朴景立洪士拯閔子敬三君 )」에서는 '원유(遠游)'를 하여 널리 배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고요한 가운데 독서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충고한다. 「회갑일 술회(回甲日述懷)」는 회갑을 맞으면서 썼다. 제자들이 수연(壽宴)을 열어 축수해주었는데 그 때 부모님을 그리워하면서 '앞 을사년에 적자(赤子)였던 몸 뒤 을사년에는 백발이 되었네. 백발이 다시 나도 어린애 같은데 당에 올라서면 우리 부모님 뵈지 않네'라고 하였다. 부모님이 안 계신 비감(悲感)을 토로한 시이다.
권2부터 권10에 실린 서(書)는 352명과 주고 받은 편지 507편이다. 답황경함(答黃景涵) 18편, 「여박경립(與朴景立)」12편, 「여양처중(與梁處中)」11편, 「답정후윤(答鄭厚允)」8편, 「상노사선생(上蘆沙先生)」 「여기회일(與奇會一)」6편, 「답홍사증(答洪士拯)」7편,「답이광빈(答李光彬)」 7편, 「답오여주(答吳汝周)」6편, 답정사정(答鄭士正) 5편, 「상면암최장(上勉庵崔丈)」4편, 답문자성(答文子惺)4편, 「답조중직(答曺仲直)」 4편, ,「여박학중(與朴學中)」4편, 「여박직천(與朴直天)」3편, 답권범회(答權範晦)」3편, 「답박문화(答朴文華)」 3편, 「답안경백(答安慶伯)」3편,「답홍문영(答洪文寧 )」3편, 「답문계원(答文啓元)」3편, 「답양순집(答梁順集)」3편, 「답안순현(答安舜見)」3편, 「답오영지(答吳永之)」3편 등은 한 사람과 한 편 이상을 주고 받은 것이며 그 외에는 거의 1인 1편의 편지를 실었다. 「與」와 같은 형태의 보낸 편지보다는 「答□□」와 같이 정의림이 답장한 편지 수가 훨씬 많다.
권2 맨 첫 편지는 정의림이 기정진에게 올린 편지이다. 모두 6편인데 안부를 묻는 본 편지, 성리학 일반에 관해 묻는 별지, 정의림의 질문에 대해 기정진이 답장해 준 편지를 덧붙이는 형태로 실었다. 태극에 관하여 김석구와 토론하다가 '위허리실(位虛理實)'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기쁘기도 하지만 노하기도 하면 그것은 칠정(七情)의 어디에 속하는지, 칠정 이외의 것은 없는지 등 주로 성리학의 주제인 태극, 심성과 관련한 것들을 질문했다.
「답애일당김장(答愛日堂金丈)」은 공부 방법을 말하면서 '방심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고 충고하였다. 「상중암김장(上重菴金丈)」은 김평묵에게 쓴 편지다. 김평묵은 신지도로 귀양오면서 호남에 이항로 학설을 전파하여 호남의 화서학파를 형성하기도 했고 노사학파 문인들과도 친교를 맺었다. 이 편지에서 정의림은 요즘 학문이 훈고에만 치우친 경향이 있고 성리학이 다기화(多岐化)하여 여러 설들이 분분하다고 하면서 기정진의 「답문편(答問編)」은 도를 잘 밝혀 놓았다고 설명하였다.
「상성재유장(上省齋柳丈)」은 유중교(柳重敎)에게 쓴 것이다. 정의림과 유중교는 몇 차례 학문을 논한 편지를 주고 받았다. 이 편지는 1891년 9월 3일에 유중교가 쓴 편지를 받고 쓴 글이다. 유중교는 편지에서 '저는 늦게 화서선생(華西先生) 문하로 나와 얻어 들은 것 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대개 학문을 논할 때면 주리(主理)를 대종지로 삼았고, 시의를 논하자면 척양(斥洋)을 제일로 삼았습니다. 옛 성인이 다시 와도 이를 바꾸지는 않겠지만 요즘 세상에서 구해보면 주저하며 부합할 이가 적습니다. 오직 당신의 선생이신 노사(蘆沙)의 말씀이 대지(大旨)에 있어서 서로 잘 맞아 마음으로 흠모해왔습니다. 우리 유학은 진실로 그 추향이 바름을 얻는 일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그 바름을 얻은 즉 반드시 학문의 진도를 절도에 맞게 두루 다 하여 치우침이 없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정의림은 이 말이 진실로 중요한 말이며 당시의 학문 추세를 교정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주리(主理)'라는 두 글자는 자신도 노사선생으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이에 유중교가 말한 '심기야 비리야 물야 비칙야(心氣也 非理也 物也 非則也)'는 주기론(主氣論)적 성향이 있는데 이 말을 쓴 의도를 묻기도 했다.
「상면암최장(上勉菴崔丈)」은 최익현(崔益鉉)에게 올린 편지이다. 최익현은 화서 이항로 제자이다. 이항로가 주기론을 물리친 것과 위정척사(衛正斥邪)를 강조한 것은 기정진의 학문 및 생각과 같다고 하면서 친밀감을 드러내었다.
「상민초토사(上閔招討使)」은 민종렬(민종렬)에게 쓴 편지다. 이 편지는 1895년 동학 농민 항쟁이 발발했던 때 쓴 것으로 보인다. 민종렬은 동학도 진압을 위해 호남에 파견되었다. 정의림은 동학 교리가 '요괴하고 망탄하며 비루하고 흉악하고 패역스럽다.'라고 비판하면서 이런 가르침은 있어 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동학을 사교(邪敎)라고 칭하며 동학도들은 범상(犯上)의 죄를 짓는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동학 농민 항쟁을 진압하는 일은 '어지러움에서 구하고 포악한 이들을 죽이는 것'이며 '사설(邪說)'을 물리치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당시 사대부 지배층의 입장에서 동학 농민 항쟁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여최원칙(與崔元則)」은 최숙민(崔琡民)에게 부친 편지다. 최숙민과 정의림은 ?노사집? 간행일로 왕래가 있었다. 정의림이 ?노사집? 간행을 계기로 영남에 갔을 때 신안사(新安社)을 비롯하여 뇌용정(雷龍亭), 산천재(山天齋) 등 영남의 산수를 유람하였는데 그 때 최숙민이 함께 해준 데 대한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고 있다.
「여정후윤(與鄭厚允)」은 정재규(鄭載圭,1843-1911)에게 쓴 편지로 모두 8편이다. 정재규는 경상도 합천 사람으로 노사 학설을 영남에 전파하는 데에 공이 컸고, 정의림과 함께 기정진 유문 정리 사업에도 적극 참여했다. 정의림은 정재규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답문유편」 편찬 및 배포에 관한 일, 영남에서 유람하고 「영행록(嶺行錄」을 쓴 일, 종산(鍾山)에서 강학한 후 「종산강록(鍾山講錄)」을 쓴 일 등을 이야기 하였다. 또 유중교(柳重敎,1832-1893)가 논한 '심설(心說)'을 비판하면서, 심(心)과 이기(理氣)의 관계, 기질(氣質) 등에 관해 논하면서 '주기지설(主氣之說)'의 폐단이 심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노사 기정진, 화서 이항로, 한주 이진상(寒洲 李震相)만이 심설을 확연하게 발휘했다고 하였다.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에게 보낸 편지(與奇會一)는 모두 6편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보낸 편지에서는 최익현이 노성 권리에서 의병 거의를 논의한 것이 잘 성사되었는지 궁금해 했다. 당시 국제적 정세 속에서 조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조선은 바다에 치우쳐 있어 사방의 나라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땅이며 그 가운데서 특히 일본이 심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일본, 청나라, 러시아 등이 조선 땅에 철로를 놓고 자본을 투자하는 것이 단순히 통상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주 왕래하면서 병합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 을사조약 이후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이 서울 다녀온 일도 묻고, 전우(田愚)가 상소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지난 날에는 아직 시집 안 간 여자라고 하더니 지금은 이미 시집 간 부녀가 된 것인지'라고 비꼬기도 했다.
「답양처중(答梁處中)」은 양회락(梁會洛)이 질문한 내용에 대해 답변한 편지로 모두 11편이 실려 있다. 이 편지들에는 성리학의 기본 개념들. 리(理) 기(氣), 리(理)의 주재(主宰), 심성(心性), 미발(未發) 기발(已發) 일분수(一分殊) 허령(虛靈) 신명(神明) 등에 관한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 내용들이 있다.
「여박경립(與朴景立)」은 박기준(朴基準)에게 준 답장이며 모두 12편이다. 안부 내용과 함께 각 질문에 대해 답변하였다. 질문의 내용을 쓰고 그에 대한 답변을 옆에 부기(付記)하는 방식으로 기록하였다. 질문은 한 글자만큼 내려 썼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답변하는 편지들은 대체로 '질문-답변'을 짝지어 기록함으로써 질문한 명제나 주제에 대한 정의림의 견해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아들 정상묵(鄭尙黙)과 손자 정헌규(鄭憲圭)에게 부친 편지가 각각 2편, 4편이 있다. 아들에게는 공부를 권면하면서 '경사(敬肆)' 곧 조심함과 방자함 이 두 글자가 중요하다고 하였다. 조심과 방자함에 따라 군자와 소인이 나뉘고, 흥망이 갈리며 치란과 길흉, 화와 복이 달라진다고 하였다. 또 선세(先世) 때에는 대대로 벼슬을 하여 다른 사대부 집안에 뒤지지 않았는데 후대로 올수록 집안이 기울었다고 하면서, 증조부가 낭주로 이사하고 조부가 금릉으로 옮겨 살았으며 아버지 대에 와서 능주로 옮겨 와 살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가 선대의 일을 편지의 첫 머리로 삼은 것은 아들을 훈계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들을 일방적으로 꾸짖지 않는다. 우선 자신에 대해 반성하는 내용을 썼다. 그의 아버지가 열심히 노력하여 겨우 집안을 일으켜 세워 놓았으나 자신을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학문적인 것은 물론 집안 가장으로서 이루어 놓은 것이 없어 처자들과 함께 떠돌며 사는 신세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들에게 자식으로서, 가장으로서 살아갈 방도를 궁리하라고 타이른다. 술을 좋아하고 충고하는 말을 싫어하는 아들에게 온화한 성품을 가지라고 당부한다. 태만한 것은 악의 근원이고 부지런한 것을 보배라고 하면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내는 아들에게 자포자기하는 생활을 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 편지는 아들 정상묵의 나이 40세 즈음에 쓴 편지다. 40여 년간 아들의 생활을 지켜보면서 앞으로 자식으로서, 가장으로서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다.
손자에게는 집안 일을 돌보는 데에 힘쓰는 것을 격려하고 고마워하면서 한편으로 손자의 성격이 온화함이 적어 사람을 대할 때에 온화하지 못함을 걱정한다. 천지의 생물들이 따뜻함을 좋아하고 차가움을 싫어하듯이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이를 항상 마음에 새겨두라고 당부한다. 또한 부귀는 운명에 따른 것이므로 억지로 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도록 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의 성(性)과 분수를 따르며 행실을 잘 닦는 데에 있다.'고 경계한다. 그리하여 항상 겸손하고 다른 이를 업신여기지 말며, 자신을 꾸짖는 데에 힘써야 하고 남을 꾸짖어서는 안 된다고 타이르기도 한다. 손자가 잘 처신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고 비웃음 당하지 않도록 기원하는 마음을 보이는 편지이다.
권11부터 권13은 '잡저(雜著)'로 서(書), 설(說), 서(序)등을 실었다. 설은 40편이며 '사칠설(四七說)' '입각설(立脚說)'을 제외한 38편이 자설(字說)이다. 서(書)는 서증(書贈) , 증(記贈), 증(贈), 제증(題贈) 증문(贈文)등의 제목을 달고 있으며 모두 36이고, 통문 2편, 답통문 1편, 록(錄) 2편, 변(辨) 2편이 있다.
권11에는 「변 전우소저 노사선생 납량사의기의(辨田愚所著蘆沙先生納凉私議記疑)」와 「변 전우소저 노사선생 외필변(辨田愚所著蘆沙先生猥筆辨)」 두 편만이 실려 있다. 이는 기정진이 쓴 「납량사의」 「외필」에 대해 전우가 조목조목 따지며 비판한 것에 대한 반론이다.
일찍이 기정진은 이일분수(理一分殊)와 이기론(理氣論) 관해 자신의 학설을 세워 「납량사의(納凉私議)」와 「외필(猥筆)」을 저술했다. 여기서 그는 율곡 이이가 말한 '기틀이 스스로 그러할 뿐 시키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機自爾 非有使之)'라는 말은 유행변설(流行邊說)이라고 비판하면서 기(氣)에 대한 리(理)의 주재성(主宰性)을 강조하였다.주 2)
그러나 그는 이 글을 공개하지 않았고 죽기 직전에 김석구, 정의림, 정재규 등 몇몇 제자들에게만 보여주었다. 이후 신안정사에서 ?노사집?을 간행하는 과정에서 이 글이 세상에 알려지자 율곡을 비판했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전우는 「외필」 「납량사의」에 대해 따지면서 다른 학자들도 이 논의에 뛰어들었다. 이 때 정의림은 정재규와 함께 스승 기정진의 학설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고 정의림은 이 두 편의 글을 통해 스승에 대한 세상의 오해를 풀고자 하였다.
「변 전우소저 노사선생 납량사의기의(辨田愚所著蘆沙先生納凉私議記疑)」에서는 전우가 차별의 원인을 기(氣)로 한정한 것에 반박하였다. 기의 맑고 탁함, 순수하고 잡스러움(淸濁粹駁)은 우연성에 기초해으나 만물이 생길 때의 분(分)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현상의 다양한 존재들이 '전(全)과 대(大)를 같이한 연후에 발현하여 비로소 하늘이 되고 사람이 되고, 개나 소가 된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다고 반박한다.주 3)
「변 전우소저 노사선생 외필변(辨田愚所著蘆沙先生猥筆辨)」에서 그는 전우가 '조작'과 '동정(動靜)'을 같다고 여긴 데 대해 그것을 구분하면서 리(理) 동정을 곧 조작이나 작용으로 간주하는 것이 가한가. 동정(動靜)은 두 기(氣)의 양능(良能)이니 어찌 조작이나 자용이 기력을 범하고 배치를 쓰는 것과 비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리가 이와 같으므로 기 또한 이와 같고, 리가 저와 같으므로 기 또한 저와 같으니 기가 움직이고 고요하며 운행하고, 모양을 이루고 자취를 드러내는 것은 모두 리(理)가 하는 바이다. 이것이 무위지위(無爲之爲)이고 불사지사(不使之使)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기(氣)의 움직임, 변화 등이 리(理)의 주재하에 있음을 강조하였다.주 4)
권12와 권13에는 「서시제동지(書示諸同志)」 「호상기우록(湖上奇遇錄)」「열기우록유감이기(閱奇遇錄有感而記)」 「일지록(日誌錄」 「손아 헌규 친영시 초사(孫兒憲圭親迎時醮辭)」 등을 비롯하여 서증류(書贈類)와 자설(字說) 그리고 서(序)가 실려 있다.
「서시제동지(書示諸同志)」는 「납량사의」 「외필」과 관련하여 논란이 분분할 때 기정진의 학설에 동의하는 이들에게 쓴 글이다. 그는 '태극은 천지의 조종(祖宗)이고 조화의 주재(主宰), 인사(人事)의 준칙'이라고 하면서 세상의 치란, 사람의 현명함과 그렇지 못함. 일의 성공과 쇠퇴 등이 모두 이 도리의 밝음 및 밝지 않음에 달려 있다고 한다. 그리고 기정진이 이런 것들을 잘 밝혀 내기 위해 「납량사의」 「외필」을 저술했다고 강조하였다.
「호상기우록(湖上奇遇錄)」은 정의림과 정재규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이다. 두 사람은 기정진 문하생이었다. 기정진은 일찍이 말하기를 '두 사람은 성씨(姓氏)가 같고 나이도 거의 비슷하며 재주와 품성도 서로 닮았고 사는 곳의 명칭도 또한 다르지 않다. 심히 우연이 아니구나.'라고 했다. 또 1875년 정의림이 기정전을 뵈러 사상(沙上)에 갔는데 정재규가 3일 먼저 와 있었고, 그 다음해인 1876년 4월 진원으로 뵈러 갔는데 정재규가 또 3일 먼저 와 있었다. 기정진이 이를 보고 '세상에 기이한 일이니(曠世奇絶事) 각각 기록하여 후세에 보여줌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정의림은 스승의 말을 듣고 이에 사동설(四同說)을 담은 기우록(奇遇錄)을 쓴 것이다. 「열기우록유감이기(閱奇遇錄有感而記)」는 17년 전에 쓴 「호상기우록(湖上奇遇錄)」을 읽은 후 그 소감을 쓴 글이다. 글의 처음에 '공자 제자들이 훌륭한 스승을 얻고 어진 친구를 얻어 스승 앞에서 강을 하거나 질문을 하고 친구들에게 강을 하는 일 등은 매우 즐거운 일'이라고 한 뒤 스승을 만나고 정재규, 김석구 같은 친구를 만남은 천백 년이 지나도 절대 없을 일'이라면서 서운해하였다. 그 감상을 쓴 것이다.주 5)
「일지록(日誌錄」은 학문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단편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44세 되던 때부터 기록하였는데 날이 갈수록 기억이 희미해지므로 적어두었다가 취정(就正) 자료로 삼겠다고 하였면서 모두 39개를 적었다. 몇 가지 살펴보면,
주자의 태극도설은 유행변역(流行變易)을 주로해서 말한 것인데 변역(變易)의 기(氣)는 대대(對待)하여 교역(交易)하는 기(氣)이다.
사사로운 욕심을 깨끗하게 하면 생리(生理)가 온전해져서 미발(未發)일 때에는 천지와 동체(同體)가 되고, 이발(已發)하면 천지와 동류(同流)한다.
태극은 한 개의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하늘에 있으면 만리(萬理)의 총명(總名)이 되고, 사람에게 있으면 온갖 선(善)의 통체(統體)가 된다.
음양 양단은 비록 만가지로 변하지만 생리(生理)에 두루 유행하지 않음이 없다.
사(邪)를 막으면 성(誠)은 저절로 존재한다. 사(邪)를 막는 것 외에 다른 곳에 성(誠)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극기복례(克己復禮) 또한 그렇다. 대개 마음에 발하는 것인 즉 천리와 인욕 두가지 길 뿐이다. 천리가 아니면 인욕이고 인욕이 아니면 천리이니 두 개가 서로 대치함이 없기 때문이다. 일에 응대하는 것인 즉 선(善)한 것도 있고 과(過)한 것도 있어 만 가지가 다 같지 않다.
기축년 봄에 관산(冠山)의 위치운 용규(魏穉雲 龍奎)가 나를 따라서 벽산서사(碧山書舍)를 유람했다. 어느 날 강(講)을 하는데 부부유별지의(夫婦有別之義)에 관한 것이었다. 치운이 말하기를 "옛날에 남파 이장(南坡 李丈, 이희석李僖錫, 1804-1889)과 노사 선생이 이에 대해 논하였다. 남파가 '한 부부가 안에 살고 밖에 산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노사 선생이 아니라고 하면서 '이는 사람마다 부부는 그 정해진 짝이 있어 어지럽게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로써 부부가 유별(有別)한 이후에 부자가 친하다는 말이 있게 된 것이다.'라고 했다." 또 (남파가)말하기를 "금수는 그 어미가 있는 줄은 알지만 아비가 있는 줄을 모르니 그 무별(無別)한 것이다."라고 했다. 내가 종래에 유별(有別)이라는 뜻을 이해하기를 또한 남파의 견해와 같았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는 황연히 깨닫게 되었다. 만약 한 부부가 서로 함께한다는 의미로 말한다면 반드시 '부부의 은(恩)이 있다.'라고 말하며 부부가 유별함이 있다라고 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의 부부는 각각 정해진 배우자가 있어 어지럽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야말로 바른 뜻이다. 한 부부가 안에서 살고 밖에서 산다는 것은 다만 아주 작은 조리에 맞는 것이다.
먼저 일용(日用)하는 사물에 나아가 위로 다 살펴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얻고, 눈 앞 가까이에 있는 것에서 천리가 유행하는 것을 본 연후에야 근거로 삼아 지킬 데가 있게 된다.
사(邪)와 정(正)은 본래 나란히 설 수 없다. 공(公)과 사(私)는 본래 나란히 행할 수 없다. 날마다 크게 공정하고 지극히 바른 이치를 보며 달마다 크게 공정하고 지극히 바른 곳으로 나가면 구구하고 사사(邪私)로훈 것은 자연히 들일 데가 없게 된다.
용체(容體)를 바르게 한 연후에 에의가 행해지니 노하는 데로 가지 않는 것은 용체를 바르게 하는데서부터 시작된다.
불성무물(不誠無物-정성스럽지 않으면 물(物)이 없다) 이 네 글자는 마땅히 자세하게 음미하고 탐구해야 한다.
사의(私意)가 소화(消化)하면 곧 움직이고 고요하고 말하고 침묵하는 것이 모두 천기(天機)이니 장자가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심하지만 천기(天機)에 대해서는 얕다.'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 뜻이다.
사람이 태허와 음양의 기(氣)에 근본하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에 근본하고, 나무가 땅에 근본하여 그 움직이고 쉬고 호흡하는 것이 한 순간이라도 끊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마음이 씩씩하면 소리가 굉대하고 마음이 조화로우면 소리가 평온하다. 정밀한 것을 강구하는 것이 정밀하면 그 말의 조리가 통창하게 되고 존양(存養)함이 익숙해지면 그 말이 진중하게 된다.
만물을 생성하는 데에 그 덕이 천지(天地)보다 큰 것은 없다. 그러나 천지가 일찍이 교만하고 자부하는 마음이 있었던가? 한 세상을 잘 다스려 교화하는 그 공으로는 성인의 공보다 더 성(盛)한 것은 없다. 하지만 성인 또한 언제 일찍이 만족하는 뜻이 있었던가? 효성이 순임금만큼 크다고 해도 또한 사람의 자식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본분이다. 학문이 공자와 같더라도 또한 배우는 사람들이 당연히 해야할 본분이다. 그러니 어찌 교만하고 자부함이 있겠는가? 사람으로서 교만하고 자부하며 만족하는 자는 다만 마음이 좁아서 그런 것이다.
「통고영남열음장보문(通告嶺南列邑章甫文」은 두 편이다. 이는 1902년 기정진이 저술한 「납량사의」 「외필」 내용이 율곡의 학설을 비판했다는 논의가 분분할 때 11월, 12월에 정의림이 영남 학자들에게 쓴 편지이다. 이 통문에서 정의림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노사는) 멀리 사수(泗洙-공자를 말함)와 낙민(洛閩-정자와 주자를 의미)을 근본으로 삼았고, 가까이는 동방의 여러 현인들을 본받았다. 그리고 율곡선생에대해서는 더욱 돈독하게 믿었다. 그 리(理)를 논하는 데에는 율곡이 말한 바 '리통기국(理通氣局)'을 종지로 삼았고, 성정(性情)을 논하는 데에 있어서는 율곡이 말했던 '만가지 정(情)은 모두 리(理)에서 발한다.(萬般之情 皆發於理)'를 확론으로 삼았다.
즉 기정진은 결코 율곡을 저버리거나 율곡의 학설에 대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기정진이 이것을 쓴 것은 '주기(主氣)의 학설이 성행하여 태극과 천명의 본체가 가리워지고 밝혀지지 않았던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손아 헌규 친영시 초사(孫兒憲圭親迎時醮辭)」는 손자가 친영하러 갈 때 써 준 초사(醮辭)이다. 첫 머리에서 옛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여 '가서 너를 도울 사람을 맞아 우리 집안의 일을 이어라. 힘써서 공경함으로 이끌게 되면 떳떳함이 있게 되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경(敬)의 의리가 무한하다.'고 하면서 이에 대해 설명한다. 즉 '경이라는 것은 한 몸의 기틀이고 모든 선(善)의 근본이며 사람이 살아가면서 모든 일에 일용한다고 하니 이로부터 말미암지 않고 능히 행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하물며 부부는 천륜이며 큰 윤리임에랴. 부부란 군자의 도가 나아가는 단서이며 친영이란 부부의 도가 나아가는 단초이다.'라고 하였다. 혼인을 앞둔 손자에게 부부의 도리를 가르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편 증서류(贈書類)와 자설(字說)은 주로 제자들에게 준 글이다. 증서류에서는 학문하는 자세와 관련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테면 '배우지 않으면 그만이거니와 배우고자 한다면 먼저 성인의 뜻을 구해야한다.'(書示嗊士拯), '배우는 데에는 다만 뜻을 굳세게 세워야 한다.'(題贈閔子直), '재주가 출중하여 부모와 친구들의 기대와 촉망을 받았지만 날이 갈수록 점차 평범하게 되는 경우가 많으니 배움에 대한 의지를 독실하게 하여야 한다.'(書贈金叔見) 등과 같은 내용이 있다.
또 「서증안량립(書贈安良立)」에서는 안양립 아버지가 독서를 열심히 하면서 한편으로 온갖 고생을 하여 집안을 잘 일구어 놓은 일을 서술하면서 아버지의 근면과 학문의 열정을 계승하기를 부탁한다.
자설(字說)은 자(字)의 의미를 풀이하는 글이다. 자(字)는 각자의 성향, 특성을 살피고 그 사람에 대한 기대의 내용을 담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자설은 훈계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서증류(書贈類)와 성격이 비슷하다. 정의림은 자설을 통해 삶의 태도, 학문하는 자세, 마음 수양 등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보면
사람의 정이란 단점을 싫어하고 장점을 좋아하니 마음을 다하여 장점으로 옮겨가는 데에 힘을 다하여야 한다.(吳永之字說).
배우는 일은 집을 짓는 일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므로 배우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 기본을 먼저 잘 세워야 한다.(朴景立字說).
인(仁)이란 천지가 물(物)을 낳은 마음이니 사람이 이를 얻어 태어나는 것이다. 그 자상(慈祥)함과 측달(惻怛)을 체득하면 한오라기 털도 보배롭지 않은 것이 없다. 그 쓰임은 커서 모든 것을 포함하고 덮어주니 한 물(物)이라도 이에 상관되지 않는 것이 없다. 이는 주역에서 말한 '군자가 인(仁)을 체득하니 그로써 사람들의 어른 노릇하기에 족하다.'라고 하였다.(李仁父字說).
서(序)는 34편인데 문집에 부친 서문 외에 「산남김공진의록서(山南金公振義錄序)」 및 각종 모임의 취지를 담은 글에 쓴 서문 등이 있다.
「산남김공진의록서(山南金公振義錄序)」은 산남 김인기(山南 金仁基, 1817-1876)에 관한 기록이다. 김인기의 자는 태형(泰亨)이며 아버지는 김지익(金之熤), 어머니는 홍낙우(洪樂禹) 딸이며 부인은 이유성(李儒誠) 딸이다.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가 공격당했다는 말을 듣고 의병을 모았는데 프랑스 군대가 물러갔다고 하여 전투를 하지 못했다. 정의림은 이 글에서 김인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산남 김공은 우리 고장의 선진(先進)이다. 키는 9척이나 되었고 힘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강개(慷慨)하고 마음이 넓어 천만 명이라도 가서 대적할 만한 기운이 있었다. 학문에 대해 속유(俗儒)들이 암송하는 습속에 구애받지 않았고 물리(物理)에 해박했으며 세상 일에 대해서도 두루 통달했다. 산수, 말타고 활쏘기 진을 치고 행군하는 법 등에 관해 정통했다.
김인기가 특히 군대에 관한 일을 잘 알았던 것을 부각하기도 했다. 비록 그가 전공(戰功)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그의 의로운 마음과 행적만은 꼭 후대에 전해야한다고 하였다. 기우만도 「산남김공묘지명」을 써 그의 행적을 드러냈다.
「영귀회안서「詠歸會案序)」는 1887년 서석산을 다녀온 후 쓴 글이다. 유람했던 이들이 논의하기를 '서로 사는 곳이 멀지 않고 정(情)도 두터운데 헤어지고 나서는 선을 귄하거나 강학을 하거나 한 적이 없어 서운하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친구들의 모임을 정례화하여 향약처럼 강학을 하고, 백록동 서원의 학규를 본떠 수시로 모여 강학을 하자고 한였다. 그리하여 영귀회(詠歸會)를 조직한 계기를 밝히고 있다.
「오상회안서(五常會案序)」는 장흥의 방촌(芳村)에 사는 문욱 강의형(文郁 姜義馨)이 만든 오상회에 대한 글이다. 정의림이 장흥 방촌에 가서 강의형을 만났을 때 강의형이 부탁하였다. 강의형은 네 형제인데 이름이 각각 인형(仁馨), 예형(禮馨), 의형, 지형(智馨)이었다. 오상(五常) 중 각가가 하나씩 이름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신(信)이 빠져 있으므로 '강신회(講信會)'를 만들어 오상을 모두 채우려고 하였다. 정의림은 이러한 사정을 자세히 서술하면서 그들의 마음이나 행실이 송나라 때 서안국(徐安國) 집안의 일락당(一樂堂)에 뒤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가승동 동안서(佳勝洞洞案序)」는 부춘(富春)에 사는 김경원(金景源)과 김권회(金權晦)이 1909년에 옛 순박한 풍속을 되찾고자하는 의도을 갖고 마을의 어른들에게 고하고, 이전에 있었던 동안(洞案)을 시의(時宜)와 토속(土俗) 합당하도록 새로 다듬어 준행하고자 했던 일에 대해 쓴 글이다. 그들의 실천에 대해 칭찬하면서 정의림은 '옛 유풍이 우리 고장에서 행해지는 것을 보는 것이 소원이다.'라는 바람을 내비쳤다.
「보성오씨보의회안서(寶城吳氏輔誼會案序)」는 정의림의 친구인 송봉(松峰)이 금릉에서 족인들과 함께 모여 살면서 서로 어려울 때 도와주고 강학도 하려고 조직한 보의회에 대해 써 준 글이다.
「흥학회안서(興學會案序)」는 완도(莞島)의 김석욱(金錫旭)이 흥학회를 조직하여 공자묘를 세우고 강학을 하면서 풍속을 크게 변화한 일을 칭송한 글이다. 이 글은 김영엽(金泳燁)이 요청하여 작성하였다. 정의림은 '요즘은 이설(異說), 이교(異敎)가 풍미하는 시대인데 바닷가 선비들이 공자묘를 세워 흥학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였다.
「풍욕회안서(風浴會案序)」는 바람을 쐬고 목욕하여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는 취지로 만든 모임에 관한 글이다. 정의림은 1887년, 1905년 서석산을 유람하였다. 제1차 유람 후 친구들과 친목 및 강학을 위한 목적으로 모임을 만들고자 하였지만 지속되지 못했고 1905년 유람 후 모임을 다시 만들었던 것이다. 이 글은 그에 관해 서술하였다.
「자학회안서(資學會案序)」는 학교 운영비에 관한 내용을 보여준다. 학교를 운영하려면 각종 비용이 드는데 정기현(鄭基鉉), 김권준(金權俊), 김덕희(金德熙) 세 사람이 힘을 합하여 계를 결성하였다. 정의림에게 그 모임 이름을 지어달라고 하자 자학회라고 지어주었던 것이다.
「향약안서(鄕約案序)」는 풍속을 순화하기 위해 향약을 설치한 일을 설명한 글이다. 향약 설치의 타다성을 설명하면서 '자기의 몸을 잘 닦고, 집안에서는 잘 다스리며 이웃을 잘 교화하며 마을에서는 그 마을을 바르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여씨 향약의 규례를 본받아 향약 규례를 정하고 매월 모이거나 향음례, 향사례 등을 행하는 날에 그 규례를 목청 높여 읽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처럼 ?일신재집? 속의 서문들은 문집 서문이 대다수를 차지하기는 하지만 각종 회안(會案) 서문들도 싣고 있어 당시 향당의 회합, 친족 회합 양상이나 향약 결성 모습 등을 볼 수 있고 「손아 헌규 친영시 초사(孫兒憲圭親迎時醮辭)」를 통해 혼례를 위한 글의 내용도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권14에는 기(記) 69편이 실려 있는데 누정기(樓亭記), 정려기(旌閭記), 중수기(重修記) 등이다.
「영귀정기(詠歸亭記)」는 영귀정 건립과 관련한 내용이다. 1887년 서석산을 다녀와 봄 가을에 강학하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영귀정을 지었다. 1892년에 터를 닦고 집을 짓기 시작하여 1893년 12월에 완공하였다. 그리고 이 곳을 강학 장소로 삼기로 했음을 서술하였다. 그리고 영귀정 시를 짓기도 했다.
부춘의 산수가 정령을 잘 들이니 富春山水毓精靈
많은 선비 모여와 강당이 맑구나 多士蹌蹌講宇淸
봉황이 천 길 나는 기상 알려면 欲識鳳飛千仞像
비파줄로 여음을 잘 다루어야 하네 須將瑤瑟理餘聲
「우인당기(愚忍堂記)」는 박학중(朴學中) 1887년에 지은 당에 부쳐준 기문이며 「우헌기(愚軒記)」는 윤상린(尹相麟)의 아버지가 천태산에에 살면서 자신의 당호에 대한 이름을 지어달라고 요청하여 써 준 글이다. 「송봉기(松峰記)」는 정의림의 친구인 송봉이 오봉산에 사는 집에 부쳐 준 글인데 당시 송봉의 나이 52세였다.
권 15에는 발(拔) 11편, 명(銘) 2편, 자명(字銘) 12편, 사(辭) 2편, 찬(贊) 3편, 상량문 3편, 축문(祝文) 3편이 있다. 「노사선생 답문류편발(蘆沙先生答問類編拔)」는 기정진이 문답했던 내용들을 정리한 글에 부친 발문이며, 「진상자찬(眞像自贊)」은 정의림이 65세 되던 때 자신의 사진에 부친 찬(贊)으로 그의 자아인식을 살필 수 있는 글이다.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해 놓은 일 무엇이 있는지. 네 모습 정말 가증스럽고 네 생애가 참으로 측은하다.'라고 하여 자신의 평생을 이루어 놓은 것 없는 늙은이로 표현하였다.
「서하동정씨쌍효정려기(書河東鄭氏雙孝旌閭記)」는 같은 고장 신기리(新機里)에 사는 정씨 집안 효자 형제의 정려기 뒤에 쓴 글이다. 이 글에서 그는 말세에 인륜과 풍속이 점차 예스럽지 못하게 된 것은 탄식하면서 정씨 효자를 칭송하였다. 「서만회옹전후(書晩悔翁傳後)」는 만회옹 최승현(崔勝鉉,1820-1883)의 전 뒤에 부친 글이다. 최승현의 자는 덕윤(德胤)이다. 1874년 면암 최익현이 제주도로 귀양갈 때 사림들과 부녀들이 길거리로 나와 구경하였다. 이 때 최승현은 최익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힘 닿는 대로 식량을 사서 주었다. 또 제주도까지 따라가 모셨으며 최익현이 흑산도로 이배되었을 때에도 따라갔다. 최익현은 그를 위해 전(傳)을 지어 주었다. 최승현의 아들 최영호(崔永皓)가 그 글을 가지고 와 발문 써 주기를 요청하여 쓴 글이다.
「침수정찬((枕漱亭贊)」은 화순 춘양면에 있는 정자에 부친 찬이다. 이 누정은 홍경고가 경영했던 건물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하늘과 땅 사이에 하나의 맑고 높으며 기이한 기운이 산으로 흘러와 명산이 되고 호수(好水)가 되었다. 그 기운이 배태하여 뛰어난 사람과 달사(達士)가 되었다. 이 뛰어난 사람과 달사가 명산 호수를 만나면 그 취미에 부합하여 비록 관중과 포숙아가 맺은 계라고 할지라도 그 의취를 깨우치지 못할 것이다. 이 때문에 만나고자 한다면 반드시 (산에)올라야 한다. 산에 오르기가 부족하다면 배회라도 해야 한다. 배회하기가 부족하다면 반드시 그 곳에 나아가 누정을 지어 종신토록 지내려고 해야 한다.
호남 남쪽의 금오산(金鰲山)은 남쪽 지방에서는 경치가 뛰어난 산구릉이다. 그 가운데에 고장의 선생 팔우(八愚) 홍공이 일직이 여기서 살았다. 선생은 일찍이 경세의 포부를 지녔지만 끝내 등용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 한 곳의 수석을 얻게 된 것이다. 지극한 정은 무정함에 있고 지극한 맛은 무미(無味)한 데에 있으니 베고 양치질하는 삶을 살다가 생을 마쳤다.
홍경고가 세상에 등용되지 못하여 이 곳에 와서 누정을 경영하고 살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1909년 홍경고의 6대손 홍채주(洪埰周)의 요청에 의해 이 글을 써 주었다고 하였다.
축문으로는 영귀정(詠歸亭)에 부친 것으로 영귀정을 지을 때 쓴 「영귀정개기축문(詠歸亭開基祝文)」 영귀정에서 강학을 시작할 때 지었던 「영귀정 개강시 고선성선사문(詠歸亭開講時告先聖先師文)」이 있다.
권16에는 제문 40편, 비(碑) 1편, 묘갈명 11편이 있다. 제문 맨 첫 작품은 「제노사선생문(祭蘆沙先生文)」으로 스승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존경심을 드러냈다. 「제족대부석당선생문(族大父石塘先生文)」은 자신에게 학문의 길을 알려준 스승의 죽음으로 사문(斯文)과 세도(世道)에 대한 우려가 늘어났다는 우려를 표현하였다. 「제중암김장문(祭重庵金丈文묘)」 「제면암최장문(祭勉庵崔丈文)」은 국가가 위난(危難)한 가운데 충정을 다했던 인물의 부재를 애달파하는 마음을 토로하였다. 이 외에 제문들은 스승, 존경하던 지우, 절친했던 친구, 제자들을 대상으로 한 작품들 위주로 실렸다. 이들은 모두 남성을 대상으로 한 제문이다.
갈명(碣銘)의 대상도 거의 남성들인데 「유인 이씨 묘갈명(孺人李氏墓碣銘)」과 같은 여성에게 준 글도 있다. 이 글은 이원형(李元衡) 딸이며 문세정(文世禎)의 처를 대상하였다. 정의림은 이씨가 항상 후사가 없는 친정 걱정하면서 죽을 때 아들에게 외가 제사에도 소홀히 하지 말라고 유언했던 일을 부각하였다.
권17에는 묘지명 35편, 묘표 12편을 실었다. 남성 대상 42편, 여성 대상 5편으로서 「유인 이씨 묘지명(孺人李氏墓誌銘)」 「숙인 강씨 묘지명(淑人姜氏墓誌銘)」 「유인 이씨 묘표(孺人李氏墓表)」 「유인 문씨 묘표(孺人文氏墓表)」 등이 그것이다.
권 18에는 행장 25편, 권 19에는 행장 15편과 전(傳) 12편이 실려 있다. 행장은 할아버지 행장을 맨 앞에 배치하고 큰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순서로 나열했다.
「선고 부호군 부군 행장(先考副護軍府君行狀)」은 아버지 정제현(鄭濟玄,1803-1883)의 행장이다. 정의림에게 기정진을 사사하게 한 일, 항상 아침 일찍 일어났던 일, 아들 정한용(鄭翰龍 )과 정상림(鄭祥林)을 잃었던 일 등을 서술했다.
「선비 유인 박씨 행장(先妣孺人朴氏行狀)」 어머니 생애를 쓴 글이다. 어머니는 박치성(朴致聖) 딸이며 17세에 정제현의 후처가 되었다. 결혼 전 과부가 된 언니를 보호했던 일, 전처 자식을 잘 길렀던 일, 정의림이 시장에서 바늘을 사다 주자 '이것은 남자의 일이 아니며 책을 사야한다.'고 꾸짖었던 일, 철마다 스승에게 인사하게 한 일, 과거보러 갈 때 여비를 항상 넉넉하게 챙겨주던 일 등을 서술했다. 특히 정의림이 아들 둘을 낳아 한 명은 유업(儒業)을 하게 하고 한 명은 농사를 짓게 하려고 하자 박씨는 '농사를 지어 부자가 되는 것보다 차라리 유업(儒業)을 하여 가난한 것이 좋고, 무식하면서 좋은 옷 입고 좋은 음식 먹는 것보다는 유식하면서 안 좋은 옷과 음식으로 사는 게 더 낫다.'고 말하였다. 이렇게 정의림은 자식에게 농사보다는 유업(儒業)을 하도록 독려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부각하여 서술했다.
「이조정랑 죽림 황공 행장(吏曹正郎竹林黃公行狀)」은 황처원(黃處源, 1817-1879)의 행장이다. 그의 초명은 기한(起漢)이며 자는 응조(應肇), 호는 죽림이다. 자기 집안이 청백리로 살았던 데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던 일, 사람들이 산업(産業)하기를 권하자 '산업이 청백리로 사는 자손을 위한 계책인가?'라며 거절했던 일, 청탁하는 사람들에게 '관직에 있을 때도 청탁을 안 들어줬는데 벼슬하지 않은 데 들어 줄 수 있겠는가?'라며 거절했던 일 등을 썼다. 그리하여 황처원을 '청백리(淸白吏)'로 그려내었다.
「숙부인 구씨 행장(淑夫人具氏行狀)」은 구상윤(具相允) 딸이며 이지호(李贄鎬) 처 행장이다. 어려서 언문 소학을 읽었고 결혼해서 병든 시어머니를 잘 모셨다. 집이 넉넉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놀리는 말을 하면 '농사를 업으로 삼는 집들은 그 아내들이 배부르게 지내는데 유학을 업으로 삼는 집의 부인들은 배고픈 것이 보통이니 뭐가 이상한 것인가?'라며 당당하게 대응했다. 말년에 집안이 조금 기울어 자식들이 걱정하자 선비 집안이 가난한 것은 일상사라며 자식을 꾸짖었다. 정의림은 구씨의 행적 중 구씨가 선비 집안 사람이라는 자긍심이 높았던 부분을 특히 부각하여 서술했다.
「송암오공행장(松庵吳公行狀)」은 오수화(吳壽華, 1835-1895)의 행장이다. 형제가 재산을 분배하여 따로 분가하여 살았지만 형에게만 경제적 부담을 지게 하지 않았다. 특히 부모님 모시는 일에 대해 맏형에게만 전적으로 맡기지 않고 한 달 중 15일은 자신이 봉양하고 나머지 15일 동안은 삼형제가 5일씩 나누어 봉양하자는 의견을 내어 실천했다. 이웃집이 불에 타 없어지자 힘껏 보태주어 집을 지어 살도록 하였다. 1895년 동학 농민 항쟁이 일어났을 때 자제와 족인들에게 범하지 말도록 경계하기도 하였다. 이 행장은 오수화가 재물을 아끼지 않고 베풀었던 일화를 중심으로 서술했다.
「만취헌정공행장(晩翠軒鄭公行狀)」은 정기현(鄭奇鉉,1844-1908)에 대한 글이다. 어렸을 때 땔감 지고 가는 노인을 보고 불쌍히 여겨 노인에게 돈을 주어 생활 밑천으로 삼게 했던 일, 한겨울 눈 오는 날에 옷을 얇게 입고 옷 족인에게 습의(襲衣)를 선뜻 내주던 일 등을 서술했다. 또 중년에 여러 사람이 서울에 갔는데 한 명이 아파 위독해지자 다른 사람들은 먼저 돌려보내고 혼자 남아 아픈 사람을 간호했었는데 그 때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범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사람들이 먼저 돌아가라고 했지만 아픈 사람을 두고 갈 수 없다면서 태연하게 대처했다. 한 여자 아이가 옆집으로 도망와 숨었는데 이유를 알아보니 양가(良家)의 딸인데 집이 가난하여 딸을 여종으로 팔았던 것이다. 여종 주인에게 여자아이를 팔도록 설득하여 속량해주었다. 1895년 동학도들의 기세가 확산되었을 때 의리와 화복의 이야기로 설득하여 그 마을 사람들이 동학에 물들지 않도록 하였다. 동약(洞約)을 제정하여 예속(禮俗)을 밝혔다. 또 자식들에게 과거 문장을 마음에 두지 말고 최익현, 기우만, 정재규 등의 문하로 가서 공부하라고 타일렀으며 특히 부랑(浮浪)한 자들과 사귀지 말라고 하면서 분화한 곳에 가지 않도록 가르쳤다. 이 행장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도와주었던 행적을 위주로 서술하였다.
권 19 후반부에는 전(傳)이 실려 있다. 하동 정씨 십충전(河東鄭氏十忠傳)」은 정씨 집안 사람 중 충(忠)을 실천한 사람들의 열전이다. 정열(鄭悅,1575-1629)은 임진왜란 때 최충의에게 나아가 도왔고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양위남(梁渭南) 및 배경생(裵慶生)과 함께 의병을 모아 싸웠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완산까지 갔다가 적이 후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정칙(鄭恜)은 정열의 사촌이다. 문장이 부섬하여 명성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의 막하에 활동하다가 왜군에 잡혔지만 굴복하지 않았고 예교(曳橋), 첨산(尖山), 노량(露梁), 안치(鴈峙) 등의 전투에서 적들을 무찔렀다.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종형과 함께 의병으로 출정했었다. 정인기(鄭仁紀)는 정열의 사종제(四從弟)이다. 충의(忠義) 두 글자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이괄의 난 때 선전관이 되어 장만(張晩)의 막하에 들어갔는데 탄환에 맞아 죽었다. 정문익(鄭文翊)은 정칙(鄭恜)의 아들로서 정묘호란 때 부모님 모시다가 의병으로 나갔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안문강공 막하에서 활동하였다. 鄭文熊(鄭文熊)은 정열(鄭悅)의 아들로서 효행과 학행을 겸비했다. 정문리(鄭文鯉)은 정열의 조카로서 기의(氣義)을 좋아하고 방략이 풍부하였다. 이괄의 난 때 의병으로 나아갔고 병자호란 때 문강공을 따라다녔다. 이처럼 정씨 집안의 형제, 부자, 삼촌과 조카, 할아버지와 손자 등이 기의(起義)한 것이 10여 명이었다. 이에 대해 정의림은 '정씨의 한 집안 안에서 어찌하여 이리도 충신(忠信)한 의사(義士)가 믾은가.'라고 칭송하였다.
「대곡처사김공경범전(大谷處士金公景範傳)」은 정의림과 절친이었던 김석구(金錫龜)을 입전한 글이다. 학숙(學塾)에서 ?소학? 읽는 소리를 듣고 집으로 돌아와 실천했던 일, 노사 기정진에게 와서 배움을 청하던 일, 집이 가난하여 낮에는 농사짓고 학숙으로 와서는 공부하던 일, 기정진이 죽었을 때 정재규와 함께 상례를 잘 치르고 삼년의 복을 입었고 스승의 학설이 쇠잔해지지 않도록 노력했던 일 등을 중심으로 서술했다. 정의림은 논찬에서 노사 기정진이 훌륭한 스승인데다 김석구와 같은 제자가 있어 학설이 전해질 수 있다고 하면서 이야말로 천재기우(千載奇遇)이고, 광세신회(曠世神會)라고 극찬하였다.
「열부 양씨전(烈婦梁氏傳)」은 양상룡(梁相龍) 딸로 박서진(朴瑞鎭)과 결혼했다.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의 병이 위독해졌을 때 손가락을 베어 피를 흘려 넣어 잠시 깨어나게 했다. 그러나 결국 남편은 죽었고 남편 따라 죽으려고 음식을 먹지도 않았다. 시부모와 집안 사람들이 잘 달래자 시집 올 때 가지고 왔던 옷과 패물을 팔아 상례 및 장례 치르는 비용을 충당했다. 시부모가 있을 때에는 슬퍼하는 기색을 나타내지도 않았고 잘 봉양했다. 조카를 후사로 삼아 가르쳐 명사로 만들었다. 어느 날 병이 심해지자 목욕하고 새옷으로 갈아 입은 다음 아들을 불러 유언하고 죽었다. 정의림은 논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일찍이 노사선생을 모시고 있을 때 '송나라의 문산 문천상이 죽지 않은 사실에 대해 물었다. 노사선생이 말씀하기를 "충신과 열부는 그 의리가 하나이다. 부인이 그 남편을 잃고 그 궤전(饋奠)을 받들고, 상례와 장례를 잘 주관하며, 아들을 두었다면 잘 기르고 가르치며, 아들이 없으면 후사(後嗣)를 들여 잇게 하여 가르쳐서 성취하게 함으로써 그 후사를 전하고 집안을 존속하게 한다면 어찌 다만 남편을 따라 죽는 일만을 열(烈)하다고 할 수 있으랴. 아. 내가 일직이 그 말을 들었는데 지금 그 사람을 보았다.
「열부 설씨전(烈婦薛氏傳)」은 설응룡(薛應龍) 딸이다. 19세에 정선진(鄭縉縉)과 결혼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편이 금산의 전투에 나갔고 금산 전투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결하고자 했지만 시어머니가 구하였다. 이후 남편이 살아 돌아왔다. 정유재란 때 남편이 의병이 되어 대동강을 방어하게 되었고 시어머니와 재종숙모인 정씨 및 김씨, 여종 몽란이와 함께 산골짜기로 피했다. 왜군이 들이닥쳐 시어머니를 죽이고 설씨를 겁박하자 설씨는 높은 바위에 앉아 큰소리로 꾸짖고 바위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재종숙모들도 뒤따라 떨어져 죽었다. 여종 몽란이도 시신을 끌어 안고 울다가 돌에 부딪혀 죽었다. 남편 정진진도 남쪽으로 와 이충무공을 따라 노량진 전투에서 싸우다 죽었다.
「김효자전(金孝子傳)」은 김기원(金基源)의 효행을 입전했다. 아버지가 일찍 죽자 산나물을 캐거나 물고기를 잡아 어머니를 봉양했다. 어머니 병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흘려 넣어 잠시 소생시키기도 했다. 사촌 동생이 몰래 땅을 다 팔아버리자 그 어머니까 들을까봐 숨기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어머니가 그 일을 듣고 상을 마주하고서도 밥을 먹지 않자 몰래 빚을 얻어 땅을 다시 사 어머니에게 알리면서 "지난 날 땅을 몰래 팔았다는 말을 낭언(浪言)입니다."라고 했다. 또 표형이 집에서 기르는 소를 가져가자 어머니가 밥을 안 먹으니 그가 따라가 형에게 값을 치르고 소를 끌고 돌아와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렸다. 그러나 돈을 꾸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정의림은 김기원을 두고 '어려운 가운데에서 생장했지만 부모를 섬기는 데에 있어서 효심으로써 순종하는 자식이 되었고 형제들 사이에서 처신하는 데에 돈독하고 화목한 사람이 되었고, 향당에 있어서는 충신(忠信)한 사람이 되었으니 사람은 지금 사람이지만 옛 사람 같다고 할 수 있다."고 칭찬하였다.
이처럼 ?일신재집? 권 18, 권19는 행장과 전을 실었고 여성의 이야기들은 열부의 이야기, 남성의 경우 효자를 대상으로 입전했다.
권 20과 권21은 유사(遺事) 50편을 실었다. 유사(遺事)는 한 인물 평생의 행적을 기록한 글이다. ?일신재집?에 실린 유사의 내용을 서술 순서로 보면, '公姓□ 諱□□ 字□□ 호□□ □□人'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뒤이어 세계(世系)를 기록하고, 고인의 생년(生年)을 쓰고 연령의 순서에 따른 고인의 행적, 고인의 몰년(沒年), 부인에 대한 정보, 자식 및 후손에 대한 정보를 기록하는 방식을 썼다. 이는 행장, 묘지명, 묘표 등의 서술 방식과 거의 흡사하다. 따라서 유사에 실린 글은 행장, 묘지명 등을 쓰기 위해 고인의 행적을 수집, 서술한 성격을 지닌다. 서술 대상은 거의 남성이며 열효부 정씨, 유인 임씨 등과 같이 여성에 대해서 쓴 것도 몇 편 보인다.
「열효부 정씨 유사(烈孝婦鄭氏遺事)」는 이문욱(李文郁)의 아내 이야기로 대강 이렇다.
내가 옛날에 노사 선생을 모시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문천상이 나라가 망했던 날 죽지 않고 잡혀가 연옥(燕獄)에 삼년 동안 있다가 죽음을 당했으니 왜 그러했을까요?"라고 물었다. 선생께서
"옛날에는 개가(改嫁)하는 일이 있었을 때 개가하지 않는 것을 열(烈)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법에는 개가하는 것이 없어서 남편을 따라 죽는 일을 열(烈)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 시부모를 모시고 뒤이을 자식을 길러 그 집안을 존속하게 하는 일을 열(烈)이라고 하는 것과 같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마음에 깨닫는 것이 있어 평상시에도 잊지 않고 있었다. 지금 열효부(烈孝婦) 정씨 행장 한 편을 보니 과연 그 사람을 알겠다.
정씨는 사인 이문욱의 처이다. 친영(親迎)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죽으니 남편을 따라 죽기로 결심하여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시부모가 온갖 말로 너그럽게 말하니 정씨가 생각을 바꾸고 일어나
"부모를 봉야하는 것이 아마 남편의 마음일 터이다."라고 말하면서 억지로 죽이라도 앞으로 끌어다 마셨다. 곡하고 읍하고 가슴을 치는 등 상례를 치르는 일을 예에 맞게 하였다. 부드러운 음성과 웃는 기색으로 시부모를 섬기니 그 받들고 따르는 것을 극진하게 했다. 음식을 깨끗하게 하여 그 충심으로 봉양했다. 병 시중을 옆에서 들고 약을 구하여 다스리는 일 등에 있어서 효성으로써 감응하는 것들이 매우 많았다. 방적을 부지런히 하여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고 모든 일을 조처하는 데에 느긋하게 하였다. 조카 익무(翊茂)를 데려다 후사로 삼아 널리 배우도록 했고 의로운 방법을 다하여 가르쳐 마침내 성취할 수 있게 하였다.
아. 필부의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으로 삼았으니 하종하는 것보다 현명하기가 멀지 않구나. 이 고장 사람들과 사림들의 추천이 속속 이어지니 하나가 아니었다.
부인은 하동의 저명한 성씨로 충의공 정지준(忠毅公 鄭之俊)의 후손이며 효자 정준(鄭浚) 딸이다. 법도 있는 집안에서 생장하였으니 그 환경에 물들어 성품으로 이루어진 것이 어찌 저절로 된 바가 없겠는가.
「유인 임씨 유사(孺人林氏遺事)」는 정의림의 친구 조익제(趙翼濟) 부인의 행적을 서술하였다. 그녀는 임준원(林俊源) 딸이다. 그녀는 1849년(철종 즉위)에 태어났고 16살에 조익제와 결혼했다. 시부모를 정성을 다해 모셔다. 시할머니 조씨가 오랫동안 아팠는데 10여 년이 될 때가지도 걱정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그리하여 이슬을 맞아가며 하늘에 기도했고 약도 맛보면서 주야로 떠나지 않았다. 온화하고 공경하는 태도로 남편을 섬겼다. 자손들을 가르칠 때에도 의로운 방법으로 했고 비루한 놀이를 하지 않도록 타일렀으며 화려한 복식을 엄금했다. 자손들이 배울 나이가 되었을 때 어진 스승과 어른을 반드시 택하여 보냈다. 매번 술과 음식을 드리도록 하여 그 정성을 다하였다. 친족이나 친척, 이웃 사람들에게 은혜로운 마음을 두루 폈다. 흉년이나 기근이 들 때에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더하여 구활하는 데에 힘썼다. 1899년(광무 3)에 남편이 병 들어 매우 위독하였을 때 매일 밤마다 기도하고 남편 대신 자신이 아프게 해달라고 빌었다. 남편의 병이 조금 차도가 있게 되자 그녀가 병에 걸렸다. 임종할 때 자식들을 불러 "네 아버지가 차도가 있고 내가 죽게 되었으니 무슨 한이 있겠느냐.'고 했다. 또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있게 지내라, 배우는 일을 부지런히 하여 가업을 다른 것으로 대신하지 말아라."라고 했다. 그녀는 1900년에 죽었다. 그녀의 전(傳) 말미에 정의림은 "부인의 아름답고 의로운 규범은 옛날 훌륭한 여자들과 비교해 보아도 부끄러울 게 없다. 이는 조씨 집안이 아름다운 명성이 향리에 자자하게 퍼진 연유이기도 하다."라고 하였다.
한편, 말미에 붙은 행장과 「신종록」은 ?일신재집?이 편찬된 후 그의 제자들이 정의림의 가르침이 후대에 전해지도록 원집에 덧붙이자고 제안하여 덧붙이게 된 것이다. 행장의 경우 기우만이 찬술했지만 뒤늦게 완성되는 바람에 ?일신재집?에 싣지 못했으므로 추가로 덧붙힌 것이다. 「신종록」은 '종유편'과 '문인편'으로 구성되었다. '종유편'에는 김평묵(金平默), 최익현(崔益鉉), 조성가(趙性家), 김록휴(金祿休), 김치희(金致熙), 정하원(鄭河源), 조의곤(曺毅坤), 기양연(奇陽衍), 김석구(金錫龜), 안인환(安仁煥), 최숙민(崔琡民), 정시림(鄭時林), 정재규(鄭載圭), 기우만(奇宇萬), 이승규(李承奎), 오계수(吳繼洙), 오준선(吳駿善), 민치량(閔致亮), 기재(奇宰), 고광선(高光善), 이승학(李承鶴), 등을 포함하여 모두 175명이 올라 있다. 이들은 대체로 기정진 문하생들이며, 당시 항일 의병 또는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들이 많았다.
'문인편'에는 이승우(李承愚), 양회락(梁會洛), 박준기(朴準基), 민관호(閔寬鎬), 김동현(金東炫), 양회택(梁會澤), 홍승환(洪承渙)등을 포함하여 264명의 이름을 올렸다. 그의 직전 제자들은 능주(73명), 남평(7명), 나주(3명), 화순(2명), 장흥(2명), 강진(1명), 영암(1명) 등에 분포되어 있어 주로 능주를 중심으로 학문적 영향을 끼쳤다.주 6) 「신종록」은 박문준(朴文準)이 주도하여 엮었고 정의림의 족인인 정병해(鄭炳海)가 부탁하여 1927년에 오준선(吳駿善)이 발문을 썼다.
3. ?일신재집?의 가치와 의의
?일신재집?은 노사 기정진 관련 글을 각 항목의 맨 앞에 배치했다. 권1 시에서는 「관불암배노사기선생(觀佛菴拜蘆沙奇先生)」, 권2 서(書)에서는 「상노사선생(上蘆沙先生)」 6편, 권11 잡저에서는 기정진의 「납량사의」 「외필」과 관련하여 정의림이 변론한 글만 별도로 배치했다. 권15의 발(拔)에서는 「노사선생답문류편발(蘆沙先生答問類編拔)」, 권16의 제문에서는 「제노사선생문(祭蘆沙先生文)」을 맨 앞에 배치하였다. 정의림은 기정진의 수제자였고 특히 기정진 사후 「납량사의」「외필」에 대해 논의가 분분할 때 앞장서서 스승을 위해 변론할 만큼 둘 사이의 관계는 남달랐다. ?일신재집?에서 기정진 관련 글을 맨 앞에 배치함으로써 스승을 존숭하는 뜻을 보이는 한편 정의림을 노사 문하의 제일 제자로 추앙하려는 의도를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의림은 기정진의 3대 제자인 만큼 노사 학설을 수호 및 전파하고, 노사의 유문 간행 사업에 적극 참여했다. 그 과정들이 친우와 주고 받은 편지에 상세하게 들어 있다. 이를 테면 정재규, 기우만 등에게 쓴 편지 등에서는 「답문유편」의 편찬과 간행, 배포 그리고 그와 관련한 송사 기우만의 입장 등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일신재집?은 기정진 문하 제자들이 스승의 유문 간행을 어떻게 했고, 그 학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살피는 데에 매우 긴요한 자료라는 의의를 갖는다.
또한 제자들에게 쓴 편지는 거의 답장에 속한다. 즉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내용이다. 질문의 주제나 범위는 성리학 전반에 걸쳐 있으며 특히 당시 주된 논제였던 심설(心說), 성(性), 심(心), 칠정(七情)과 관련한 미발, 기발 등이었다. 정의림은 각 질문 항목마다 하나씩 짚어가면서 답변하였다. 정의림은 성리학에 관해 자신만의 학설을 정립하거나 본격적인 저술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한 이 편지들은 그의 학문 및 사상 내용과 특성, 성향 등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로서 기능한다. 특히 황철원(黃澈源)에게 준 편지인 「답황경함(答黃景涵)」18편, 박준기에게 답한 「여박경립(與朴景立)」12편, 양회락에게 준 「여양처중(與梁處中)」11편 등은 다양한 주제에 관한 질문과 답변으로 이루어져 있고 한 편 편지 분량도 다른 이에게 준 분량에 비해 훨씬 많다. 그리하여 정의림의 제자를 비롯한 유생들의 학문적 관심의 향방을 가늠하는 자료로서 의미가 크다.
정의림이 살던 시대는 국내외 상황이 매우 혼란하였다. 서양 열강의 통상 요구와 일본의 주권 침탈 사건이 발생하고, 학문적으로 사상적으로 기존의 유학-성리학이 도전을 받았다. 유교적 윤리의 절대적 영향력도 줄어들었고 경제적 가치를 중시하는 인식들이 생겨났다. 향촌에 거주하던 유학자들은 향약, 동계 등을 결성하거나, 향음례 등을 시행하여 향촌의 풍속을 순화하고자 했다. ?일신재집? 속에 있는 각종 모임 관련 서문들 곧 「가승동 동안서(佳勝洞洞案序)」 「오상회안서(五常會案序)」 「흥학회안서(興學會案序)」 「풍욕회안서(風浴會案序)」 「자학회안서(資學會案序)」 등은 향촌 사람들의 결속을 위한 장치, 모임 목적의 변화 등 향촌 사회의 변화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서 기능하고 있다.
한편, ?일신재집?에 실린 누정기는 주로 영호남 지역의 누정에 부친 기문들이다. 누정은 각 지역의 중요한 문화유산이며 그 장소성은 지역 문화 특성을 재구축하는 데에도 기여하는 바가 크다. 따라서 ?일신재집?의 누정기는 영호남의 누정을 중심으로 지역 문화 컨텐츠를 조직하는 데에 활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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