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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숙종은 조선 국왕 중 우리나라 역사소설, TV드라마, 영화에 가장 많이 출연한 왕이다. 그런데 숙종은 항상 조연에 불과했다. 주연은 숙종의 부인이었던 인현왕후, 장희빈, 동이로 불리우던 숙빈최씨 여인네들이였다.
이러다 보니 숙종은 마치 여인네들 치마 폭에만 쌓여 여인들과의 사랑싸움 때문에 여러 신하들을 죽이고 환국이나 일으켰던 왕으로 우리에게 기억된다.역사학자들은 숙종의 정치를 '환국정치'라고도 한다.
환국이란 국정주도 세력의 교체 즉 왕이 인위적으로 집권세력을 교체 시키는 것을 말한다. 숙종 때 일어 난 경신, 기사. 갑술 환국이다.
숙종의 환국정치는 숙종 당대에는 강력한 왕권을 만드는데는 도움이 되기는 했다. 그러나 숙종이 너무 자주 단행했다. 또 숙종의 횐국정치는 평화적 정권이양이 아닌 냉혹하고 잔인했다. 숙종은 별 죄없는 신하들과 숙종 자신의 부인을 환국정치에 이용해 자신 왕권유지 차원에서 죽였다.숙종의 이런 냉혹하고 잔인한 환국정치로 인하여 현종대 간신히 맞추어 놓은 붕당정치의 균형이 무너졌다.
또한 숙종이 죽기 직전에 일어난 갑술환국에서 마지막으로 손을 들어 준 서인세력에서 분화 된 노론세력에 의해 남인세력이 거의 제거 되고 만다. 이는 조선이 망할 때까지 노론세상으로 정국이 흘러 가게 해 조선의 균형잡힌 붕당정치가 크게 쇠퇴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런 원인으로 영,정조 때 탕평책등으로 노론세상을 막아 보려 했지만 이미 뿌리 깊게 조선 정계에 자리 잡은 노론 세력을 영,정조도 막지 못했다.
이 노론세력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노론세력 중에서도 안동김씨, 풍양조씨등 가문중심의 세도정치 파행을 겪다가 마침내 조선을 멸망의 길로 들어 서게 한다.
그래서 일부 역사학자들은 숙종의 빈번한 환국정치가 조선멸망 원인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비판을 하고 있다.
숙종이 또 한 가지 크게 비판 받고 있는 것은 숙종의 여성편력이 심했고 잔인하고 냉혹했다는 것이다.
숙종은 한 번 여인을 사랑하면 뜨겁게 사랑했다. 그러나 그 사랑 결과는 아주 냉혹했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내치고 장희빈을 사랑하다 다시 장희빈을 내치고 인현왕후를 복위시켰다가 결국은 장희빈을 비참하게 죽여 버리기까지 한다. 한때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이었고 세자까지 낳아 준 자기 연인을 그럴 수 있다는 게 같은 남자로서도 이해하기 힘들다. 이처럼 숙종의 권력욕은 냉혹하고 무서웠다.
숙종의 여성편력은 미국 드라마 '튜더스'라는 제목으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영국 튜더왕조 헨리 8세와 비교된다.
헨리 8세는 여섯 명의 왕비를 가진 왕이었다.
첫 번째왕비와는 이혼했고, 두 번째 왕비는 간통죄로 죽였으며, 세 번째 왕비는 아이를 낳다 죽었고, 네 번째 왕비는 이상형(?)이 아니라는 이유로 결혼 무효를 선언했고, 다섯 번째 왕비는 정말 간통하다 걸려 죽었으며, 여섯 번째 왕비는 두 번 결혼한 전력의 과부를 맞이했다
이에비해 숙종은 기록상으로만 세 명의 왕비와 여섯 명의 후궁을 두었다.
왕비를 세 명까지 둔 왕은 조선역사에서도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그 정도야 부인 복이 없나 보다고 넘어 갈 수 있다. 여섯 명의 후궁도 역대 왕들의 후궁 수 평균에도 못 미치는 숫자이니 화려한 여성편력이라고 몰아 세우기엔 부족하다.
그런데 숙종이 헨리 8세와 비교 되는 이유는 헨리 8세가 자신 아내들을 처리 했던 방식과 유사하게 숙종도 자신의 아내들을 잔인하고 냉혹하게 처리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그 유명한 장희빈이 있다.
조선 19대 왕 숙종은 금수저 보다도 더 귀한 아주 귀하디 귀한 아들이었다. 왕의 후계자였으니 당연하지 않느냐 하겠지만 숙종은 그보다 더 했다.숙종은 왕 후계자로서는 조선역사상 처음 있는 2대독자이었다.
조선의 역대 왕 중에 독자는 커녕 의외로 적장자(정비출신의 큰아들) 출신의 왕들이 많지 않다. 적장자 출신 왕들의 첫번째가 문종 그리고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여섯 분 밖에 없다.
그런데 대부분 적장자 출신들은 왕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죽는다.
문종은 재위기간이 짧았고, 단종은 삼촌에게 희생당하고, 연산군은 문제가 너무 많아 신하들에게 쫒겨났고, 인종은 1년도 재위 못했고, 현종은 꽤 오래했지만 역사속에 존재감 없는 왕으로 남았다.적장자 출신 왕중에 왕다운 역할을 한 인물은 숙종밖에 없다.
숙종 아버지 현종도 외아들 적장자였지만 현종의 취약성은 국적이었다. 봉림대군이 심양에 인질로 잡혀있던 시절에 심양에서 태어났다. 지금으로 치면 심양 영주권 소지자다. 이처럼 숙종은 적장자이자 2대독자로써 그야말로 완벽한 정통성을 가진 금수저 중 금수저였다.
숙종은 2대독자로, 세조처럼 왕위를 찬탈할 숙부도, 중종처럼 반정을 일으킬 동생도 없었다.
가장 가까운 게 당시로서는 5촌 당숙이던 소현세자의 3남인 경완군과 효종의 동생인 인평동생의 자식들인 삼복군 (복창군, 복평군, 복선군)이었는데 당시 법상 이 사람들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건 역적이나 다름없던 소리였다. 그런 이 들도 환국정치 소용돌이 속에 희생을 당한다.
숙종은 이런 완벽한 정통성을 가지고 45년 재위기간 내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다.
숙종은 7세가 된 1667년 왕세자에 책봉 되었고 14세의 아직도 어린 소년 이었을 때 왕이 되었다.
한편 14세의 어린 왕 숙종은 수렴청정이나 섭정도 받지 않고 막바로 국정을 집행하는 조선 최초 최고책임자가 되었다.
당시는 중종, 인조 반정을 거치고 신하들이 파당을 지어서 임금을 압박하고 정국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왕권의 약해지고 신권이 강했던 시절이었다.
이런 현상 속에서 왕이라도 헛점을 보이거나 신하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을 때에는 신하들이 임금을 압박하고 심하면 임금을 바꾸는 반정도 어렵지 않게 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열네살의 어린 숙종은 만만치 않았다.
소년 왕 숙종은 어려서부터 유약한 부왕 현종보다는 무에 관심이 많았던 조부 효종을 닮았다고 알려졌다. 숙종은 왕세자 시절부터 부왕 현종을 이리치고 저리쳤던 신하들의 행태를 결코 가볍게 보지 않았다.
숙종은 즉위 한 달 후 제일 먼저 아버지 현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신하들에게 행장을 짓게 한다. 하지만 완성된 행장을 본 숙종은 불같이 화를 낸다. 문제가 된 부분은 당대 정치적 거물인 송시열에 관한 것이었다.
14살 숙종과 68살 송시열의 기싸움이 시작되었다. 당시 송시열은 나이가 이미 68세로 정계 원로에 숙종의 증조부인 인조, 효종, 현종 3대에 걸쳐 정계, 사상계 중심에 있었던 정치적, 학문적 거물이었다.
문제가 된 게 현종의 행장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어떤 분이 돌아가시면 그 분의 일대기를 행장으로 쓰게 되는데 국왕도 마찬가지였다. 현종의 행장에 빠질 수 없는 부분이 송시열의 예송논쟁 부분이었다.
행장을 맡은 분이 송시열 제자인 '이단하'였는데 스승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는 쓰지 않으려 했다.
이에 숙종이 몇 차례나 강압적으로 밀어부쳐서 송시열이 예송논쟁에서 예를 잘못 적용했다고 공식적으로 쓰도록 이단하에게 집요하게 요구하여 그렇게 썼다.
그런데 당시는 신권이 셌고 서인집단에서는 대유학자로 우러러 받고 있던 송시열에 대해 아무리 왕명이라고 해도 쓰기가 힘들고 꺼림칙해서 인지 이단하는 행장을 다 쓰고 나서 숙종에게 "송시열의 잘못 된 점을 전하께서 요구해서 어쩔 수 없이 썼다"고 변명했다.
이 말을 듣은 숙종이 정색을 하면서 '스승만 알고 임금은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이단하를 크게 나무란다. 이 기회를 2차 예송논쟁에서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들이 놓칠리 가 없었다.
남인들은 송시열을 파직시키라고 요구하는데 숙종은 망설임없이 아주 쿨하게 남인들의 주장을 받아 들인다.
숙종은 14살의 어린 나이로 할아버지 효종, 아버지 현종도 눈치만 보았던 당시 대유학자 68세의 송시열을 파직시키고 함경도 덕원으로 유배까지 보내 버린다.
이 일에 대해 당시 송시열과 숙종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이때 숙종의 나이가 14살이었다.
'온 조정에서 두려워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당의통략>
북한의 김정은이 숙종을 롤모델로 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숙종은 어린 나이였지만 당찼다.그리고 나서도 대표적인 서인 가문 출신 왕비인 인경왕후 김씨를 무려 2년이나 왕비로 책봉하지 않았다.일이 이렇게 진행되니 남인 입장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서인을 완벽하게 내 칠 좋은 기회로 여겼다.
남인들은 서인의 거두인 송시열과 역시 서인의 대표이자 왕의 국구인 김만기 등을 죄인이라고 부르길 서슴치 않았다. 죄인의 딸이 중전의 자리에 있다고 노골적으로 꼬집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숙종은 서인들을 모조리 내칠 마음은 없었다. 숙종은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을 견제하고 서인과 왕비를 보호한다는 듯이 1676년 숙종 2년에 중전 김씨를 정식 왕비로 책봉했다. 귀양보낸 송시열도 다시 불러 들인다
숙종시절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역사 속에서 눈여겨 볼 인물이 송시열이다. 인조, 효종, 현종, 숙종 시대까지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3,000번이나 등장하는 인물이 우암송시열이다.
2차 예송논쟁으로 현종 말년에 남인이 정권을 잡았지만 서인세력은 송시열을 필두로 건재했다.
송시열이 숙종 즉위 해 어린 숙종에게 한 방 크게 당하고 귀양을 가지만 숙종이 곧 바로 다시 불러 들일 만큼 당시 송시열의 영향력은 무시 할 수 없었다.송시열은 지금도 복합적으로 평가 받는 인물이다.
역사 속 송시열은 '성격은 과격하고 정치적 음모에 능했고 자신이 추구하는 원칙에서 한 발짝도 비키지 않을 만큼 편협하기 짝이 없는 인물' 이었다는 평가와 함께 학문에서는 상당한 수준을 이루었다고 평가 된다.
송시열은 후에 세자문제로 숙종에 반기를 들었다가 숙종에 의해 사사를 당하고 만다.
제 1차 예송논쟁은 효종이 승하하자 그 의붓 엄마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1년 입느냐 3년 입느냐를 당시 최고의 정책 이념으로 새겨두고 별 해괴한 논리를 만들어 내 정권을 바꾸는 환국까지 하면서 몇 십 년간을 싸운 것을 말한다.
물론 그 이면에는 서인과 남인 당파사이에서 왕의 정통성 문제가 걸려있었고 이황, 이이까지 올라가는 성리학의 깊은 사상이 담겨있다. 이 예송논쟁은 당시 상당한 정치적 이해득실이 깔려있었다. 그렇나 문제는 정치적 이해득실 그 소제가 너무 치졸했고 오래 갔다는 것이다.
단지 왕이나 대비가 죽었을 때 그 어머니가 상복을 몇년 입느냐는 것으로 정권을 바꿔가면서 까지 몇 십 년을 싸웠다는 역사적 사실을 솔직히 어디에 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럽다
조선시대 때 백성들을 먼저 생각하는 현실정치가 아닌 그저 가진 자들의 권력싸움인 명분의 정치 면목을 제대로 보여 주는 것이 예송논쟁이다.
숙종은 14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재위기간이 조선 왕들 중 두 번째로 길다. 1위는 조선에서 최장수했던 왕 영조이고 2위 숙종이 45년 10개월이다. 이 재위기간이 길었다는 건 숙종이 그만큼 한 게 많았다는 것이다.
그 긴 재위 기간동안 숙종의 선택은 왕권을 강화 시키기기 위해서 신하들 끼리 서로 견제시키거나 자기부인들이었던 여인들을 권력도구로 이용한 환국정치를 펼쳤다.물론 숙종은 백성들을 위한 선정도 행했었다.대동법이 숙종 대 이르러 거의 전국적으로 실시 된 것이다.
숙종의 환국정치 속에서 희생되었던 여인들이 바로 사극드라마에서 단골손님인 인현왕후와 장희빈 그리고 영조 친어머니 숙빈 최씨이다.
이 세 여인의 이야기가 너무 드라마틱 해 소설, 영화, 드라마의 단골소재가 되었던 것이다.
이들 드라마에서는 숙종이 여인네 치마폭에만 휩싸여 지낸 어리버리한 왕으로 자주 나왔다.
그래서 숙종의 이미지가 로맨틱하고 여린 남자의 이미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동안 드라마 내용과는 달리 역사 속의 숙종은 권력유지에 자기 사랑하는 여인들까지 도구로 이용한 냉혹하고 잔인한 그리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왕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