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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5장
1. 형제에게 하듯 하고(1-2)
1-2절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하고,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하라.”
늙은이와 젊은이, 늙은 여자와 젊은 여자와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인데, 이것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마치 인간관계에 있어서,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본문이 젊은 사람은 연로한 분을 아버지처럼, 공경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물론 성도는 연로한 분에 대해 공경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어른 공경은, 무조건 떠받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약 성경이 그러한 예의범절을 가르치고 있다면, 굳이 교회에 나올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도 예의범절은 잘 가르치고 있으니까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감동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렇다면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하며”라는 말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생각이 듭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굳이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하며’라는 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성령의 감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까? 길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어봐도, 다들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은 문장의 뜻을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령과 상관없이도, 문장의 뜻은 얼마든지 풀이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뜻과 생각과 마음입니다.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과 생각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감동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뜻과 마음과 생각을 담은 말씀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과 같은 내용에서 ‘예의범절’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곧 성령과 상관없는 인간의 지식에 의한 이해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에 의해 말씀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말씀에서 예의범절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마음과 그 생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노인 공경, 또는 예의범절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의 관계 역시, 우리에게 있는 윤리적인 시각으로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곧 성도의 관계는 서로 싸움이 없고, 친하게 지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친한 것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성도의 관계가 바르게 된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가 서로 친하게 지낸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성경이 말하는 형제 관계로는 이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이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 역시, 세상의 친목 단체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모습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겨우 그런 것을 가르치려고, 우리를 한 자리에 모이게 해서 말씀하고 계시겠습니까?
성도의 관계는 친분을 쌓고, 유지하는 관계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관계는 작은 문제만 발생해도, 금이 가고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겉으로는 친분을 쌓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자기 유익을 구하는 존재로 만나기 때문입니다.
먼저 성도의 관계부터 바르게 이해를 해야 합니다. 성도의 관계는 같은 교회를 다니는 모임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도의 관계는 주 안에서 주님에 의해 새롭게 된 관계를 의미합니다. 주 안에서 새롭게 된 관계란 무엇일까요?
마 12:48절에 보면, 예수님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에 대해서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세상에서 가장 가깝다고 하는, 혈족관계를 무너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계는, 혈족이라는 인간의 피를 중심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새로운 관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혈통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새롭게 된 관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기존의 가족 관계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족 관계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맺어진 새로운 관계가, 영원하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서는, 가문이나 집안에 대한 자랑이 허용이 안되는 것입니다. 모두 무너질 관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한다는 것은, 자신의 뜻을 포기했음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뜻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뜻은 온통 악을 행하고자 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아버지의 뜻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임을 알았을 때 가능합니다.
곧 내 뜻대로 되어지는 것은 나에게 악한 것이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되어지는 것이야말로 나를 살리는 것임을 앎으로써,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뜻을 포기한다는 것은, 나의 결단과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한다는 것은, 함께 성령 안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들이 곧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가족은 인간의 뜻이나 생각과 의지가, 조금도 개입되지 않는 관계입니다. 창세전에 미리 아시고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인해서 형성된 관계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족으로 만나는 교회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은 자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성도를 대할 때는,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나를 이 관계에 집어넣었다’는 것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가족관계로 몸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사랑과 은혜가 우리를 이러한 관계에 있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고 의지며 열심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관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러한 새로운 관계를 통해서, 무엇을 하고자 하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성도의 관계를 통해서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단지 친하게 지내는 것으로, 교회답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늙은 남자와 젊은 남자, 늙은 여자와 젊은 여자가 함께 모이게 하십니다. 그런데 늙은이와 젊은이는 사실 함께 하기가 어려운 관계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대차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못마땅해 하는 것입니다. 늙은이에게는 젊은이가 마음에 들지 않고, 젊은이에게는 늙은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이 곧 은혜와 사랑이 바탕이 된 관계가 아니란 것입니다. 물론 은혜와 사랑이 증거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어떤 관계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간섭받으며 살아가고 있음을 증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늙은이 젊은이가 함께한 교회라는 관계에서는 행동하는 것, 말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랑이라는 것은 친분관계가 아니라, 사랑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나타나는 사랑이 되어야 하고, 불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은혜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불평이 나오고,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원망이 나온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바라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항상 나에게 있습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늙은이가 잘못하고, 젊은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나를 살리신 은혜와 사랑을 바라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늙은이를 꾸짖지 말라는 것은, 늙어서 힘없는 쓸모없는 존재로 보지 말고,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귀한 하나님의 백성이며, 주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누가 누구를 꾸짖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하듯하라는 것은, 늙은이를 그만큼 존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의해 났기 때문입니다. 늙은 자도 이런 마음으로 젊은이를 바라본다면, 못마땅한 감정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을 입은 형제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늙은 여자를 어머니에게 하듯하라는 것도, 어머니와 같이 존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난, 새로운 생명이기에 존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는 누구든,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세상은 힘으로 살아가기에, 힘없는 자에 대해서는 함부로 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된 자를 업신여기며, 함부로 대할 때, 하나님이 복수하신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고, 십자가의 은혜를 알며,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안다면,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함께 한다면, 그 관계에서 증거되는 것은 은혜와 사랑일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증거되는 것, 그것이 곧 성령으로 모이는 교회입니다.
2. 참과부(3-12)
3절을 보면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과부를 존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교회는 과부를 존대해야 할까요? 그것은 과부를 존대함으로써, 교회가 무엇인가를 세상에 증거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참 과부’라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참 과부’라는 말을 하는 것은, 과부이면서도 과부로 볼 수 없는 여인도 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과부는,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사는 여인을 말합니다.
하지만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산다고 해서, 모두를 과부로 여길 수 없다는 것이, ‘참 과부’라는 말을 하는 의도인 것입니다. 결국 사도가 말하는 과부란, 단순히 남편과 사별한 여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5절을 보면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라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을 근거하여 생각해 본다면, 사도가 말하는 참 과부는, ‘외로운 자’라는 답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외로운 자는 다 참 과부라는 것입니까? 남편과 사별하고 외로이 홀로 지내는 것이, 사도가 말하는 참 과부인 것입니까? 사도는 그러한 조건적인 의미에서, 참 과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롭다는 것은 누구든 느낄 수 있는 인간적 감정입니다. 남편이 있다고 해서 외롭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남편이 있어도 얼마든지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여인들이 아닙니까? 하지만 사도는 그처럼 인간적 감정과 느낌으로서의 외로움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가 말하는 외로운 자라는 것은, 세상에 의지할 대상이 전혀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이나 친척, 친구 등의 인간관계가 전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러한 인간관계조차도 의지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참 과부는 의지할 대상이 전혀 없는, 외로운 자를 일컫는 말이며, 성경은 이들을 가리켜서 ‘약자’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말하는 참 과부는, 남편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과부’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성도에게 있어서 참된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신랑이라는 것을, 단지 비유와 상징적인 의미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다시 오심으로 이루어질,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서 계속되어질 관계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에서의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육신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잠시 주어진 관계에 불과할 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참 과부는, 세상에 의지할 것이 전혀 없는 자로 살아가는 여인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남편과 사별했다고 해도, 세상에 의지할 것을 두고 산다면, 그는 과부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 사도의 시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참 과부를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과부에게서만 볼 수 있는, 귀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주야로 항상 기도와 간구를 한다는 것은, 세상에 의지할 것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의지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기도와 간구를 한다는 것도,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라보며 살아감을 뜻합니다.
따라서 세상에 의지할 것을 두고 사는 사람은, 기도와 간구를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기도한다면, 그것은 더 소유하고 싶어서, 하나님을 찾는 수준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의지할 것이 없는 외로운 자라면, 자연히 소망을 하나님께 둘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간절히 구할 뿐입니다. 이들이 바로 사도가 말하는 참 과부인 것입니다.
참 과부의 이러한 모습이, 이 땅에 의지할 것을 많이 두고 살아가고, 또 의지할 것을 두기를 원하는, 욕망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참 과부의 모습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세상의 것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을 책망하고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로,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는 참 과부의 모습들이, 세상의 것으로 염려하고 근심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을 책망하고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과부를 존대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시각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세상의 모든 것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도, 세상이 아닌 다른 시각과 가치관으로 판단하고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과 다른 시각과 가치관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교회만이 나타내고 증거 할 수 있는 독특한 모습을 상실한 채, 단지 종교적 모임으로 전락해 버릴 뿐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기를 소원한다면, 그는 항상 말씀에 의해서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예수님이 가신 길에서 벗어나 있는, 우리의 현실을 낱낱이 파헤치고 책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라면 그 책망을 기뻐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어둠의 길에서 끌어내어, 빛의 길로 이끌어 가기 위해, 책망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로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되는 것을, 최고의 유익으로 여긴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세우신 모든 지체가, 오직 존대할 대상으로만 보여지게 됩니다. 설사 자신을 미워하는 자라고 해도, 그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은, 그러한 자를 통해서 나에게 깨닫게 하고자 하시는, 유익이 있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세상에 의지할 것이 없이, 하나님만을 소망하면서 날마다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참 과부가 있을 때, 그를 통해서 깨닫게 되고 책망을 받게 되는 유익이 없겠습니까? 그러니 성도라면 자신의 잘못됨을 바라보게 하고, 자신의 믿음 없음을 알게 하는, 커다란 유익을 끼치는 참 과부를, 존대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는 어떻다고 할 수 있습니까? 참 과부와 같은 지체가 있기를 원하지도 않고, 그러한 지체를 존귀히 여기지도 않고, 왜 참 과부와 같은 지체가 존귀한지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한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교회로부터 참 과부가 존대를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교회가 하나님을 소망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성도의 삶에 관심이 없음을 뜻합니다.
오히려 세상에 힘을 두고 있는 자들이 존대를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 그것은 교회가 힘을 가지고자 하는, 욕망에 빠져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곧 스스로 교회 아님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교회에 외로운 참 과부를 있게 하신다면, 그것을 그를 통해서 ‘네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아가느냐?’를 확인하시기 위함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와서 유익을 얻는 것이 있습니까? 교회는 주일되면 성경책 가지고 와서,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돌아가면, 신앙생활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생활일 뿐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로 모이는 우리가, 모두 함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마음에 두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자로 모인다면, 서로에게 나타낼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 교회로서 서로에게 증거하고 나타낼 유익이 있기 마련인데, 그 유익이 없다면, 십자가와 멀어진 마음으로, 다만 종교 단체로서의 교회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4절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만한 것이니라.”
이 말에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단지 어려운 사람을 돕는 자선단체가 아닙니다. 세상이 교회에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유익이 아니라, 단지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교회를 달리 말합니다.
만약 과부에게 자녀가 손자가 있거든, 교회가 그 과부를 돕기 이전에, 자녀나 손자로 하여금 효를 행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과부를 돕는다면, 그 과부는 물질적인 면에서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효를 행하지 않는 자녀나 손자는, 하나님 앞에 악한 자로 존재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효’는 유교적인 의미에서의 효가 아닙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해야 할 이유는, 부모는 하나님이 세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곧 성도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부모를 세우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순종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과부를 돕는 것보다는, 자녀로 하여금 효를 행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 교회가 줄 수 있는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교회가 ‘저 과부가 불쌍하니까 도와주자’라는 명목으로 구제를 해버린다면, 결국 과부를 돌아보지 않는 자녀와 손자는, 하나님 앞에서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로 방치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곧 무엇이 진정한 유익인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9-10절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로서,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것이요.”
이것은 신앙의 삶이 타인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과부의 명부에 올리라는 것입니다. 곧 이들이 참 과부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들을 구제함으로써 존대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구제는 불쌍하니까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존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젊은 과부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합니까?
11-12절 “젊은 과부는 올리지 말지니,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
젊은 과부는 항상 자신의 인생을 고쳐볼 정욕으로 살아갑니다. 자기 인생을 위해, 남편을 구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의 삶이 십자가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고쳐볼 생각으로, 예수님을 찾는 것이, 곧 젊은 과부와 같은 사고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거절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도 자신의 교회를 세상에 내 놓을만한 번듯한 교회로 만들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 역시 젊은 과부의 사고방식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임을, 젊은 과부를 거절함으로써 증거해야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유익을 나누고, 십자가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고 모여야 합니다. 하나님만 소망할 수밖에 없는, 외로운 자로 모여야 합니다. 이러한 교회에서는, 참 과부가 존대를 받게 됩니다. 오직 믿음이 존귀히 여김 받는 분위기가, 교회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인 것입니다.
3. 젊은 과부(11-16)
성도는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다스림과 간섭을 받으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의 모습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홀로 살아갑니다. 간섭 받는 것이 없이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결정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처럼 홀로 살고자 하는 것이, 현대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군가에게 간섭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간섭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어른이나 높은 자와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간섭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간섭 받는 것은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대인의 특징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하되, 간섭은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는 나오되, 자신의 세계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을 본문에서는 ‘젊은 과부’로 표현을 하여 말합니다. 과부는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사는 여인을 의미합니다. 남편이 없이 홀로 산다는 것은, 말 그대로 간섭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참 과부’는 다릅니다. 참 과부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기도를 열심히 하는 과부가 참되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의지할 것이 없이, 하나님만 바라보는 과부가 참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힘이 없어서 막연하게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을 기대하고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시와 간섭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참 과부는 육신은 의지할 남편이 없이 홀로된 존재를 뜻하는 것이지만, 그 영혼은 여전히 하나님의 간섭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과부에게서는 어떤 모습이 보여집니까? 10절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것이요.” 참과부에게는 이런 신앙의 모습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당시 남편이 없는 과부는 사회적 약자입니다. 지금은 여자가 홀로 산다고 해도, 직장을 가지고 돈을 벌면서 살아갈 수 있지만, 당시에 여자는 그런 위치에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여인에게 남편이 없다는 것 자체가 약자를 뜻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약자이면서도, 나그네를 대접하고, 환난 당한 자를 구제하고, 선한 일을 행하며, 성도들의 발을 씻겨주는 섬김을 보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곧 자신의 형편과 환경을 핑계 삼아, 나그네를 대접하고 환난 당한 자를 구제하는 것 등을, 자신의 소관이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형편과 환경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과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하는 젊은 과부는 다릅니다. 과부는 과부이지만, 참 과부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젊은 과부라고 하면, 젊은 나이에 홀로된 여인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되겠지만, 성경은 단순히 그런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지금 젊은 과부를 내세워서, 어떤 사람이 구원 받은 자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11절에서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고 말합니다. 곧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할 자는, 젊은 과부와 같은 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젊은 과부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 시집가고자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과부가 결혼하다고 해서 잘못입니까? 과부가 결혼 했다고 해서, 그것을 그리스도를 배반한 것으로 말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과부의 결혼 여부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목표로 살아가야 하는가?’입니다. 곧 젊은 과부의 결혼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목표가 아니라, 자기 인생을 목표로 하고 살아가는 것은, 구원 받은 자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인생을 목표로 하고 살아가게 되면, 항상 내 인생에 유리한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인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 유리하는가를 기준으로 선택하기에, 설사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말씀을 거절하고, 간섭을 뿌리치는 것이라고 해도, 개의치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젊은 과부를 거절하라는 것입니다.
13-14절 “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 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이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벗어난 채 살아가는 젊의 과부의 삶이, 결국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닌다고 하는데, 집집에 돌아다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돌아다니면서 쓸데없는 말을 하고 일만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말은 인간이 좋아하는 것 중 하나입니다. 타인을 비판하고 욕하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악함이 하나님에 의해 다스림을 받지 않기에, 가는 곳곳마다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곧 이것이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는, 젊은 과부가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과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함께 한다면, 그것은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젊은 과부가 모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과 지시를 받고 있는 참 과부가 모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간섭과 지시를 받으며 살아가는 성도의 모임에서, 쓸데없는 말이나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있겠습니까?
타인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비판과 판단을 받아야 할 자신을 보며, 이를 악한 것임을 생각하고 다스림을 받는다면, 분명 비판과 판단은 삼가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성도의 모임인 것입니다.
결국 성도가 모인 자리에서 쓸데없는 말이 나타나지 않고, 비판과 판단이 보이지 않고, 예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모습이 있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간섭을 받고 있는 증거인 것입니다.
젊은 과부에 대해서 15절에서는 사탄에게 돌아간 자라고까지 말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결혼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인생의 목표인가의 문제입니다. 인생의 목표를 자신에게 두고 사는 것이, 곧 사탄에 돌아간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간섭에 붙들려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과연 우리가 그러한 삶에 부지런합니까, 아니면 게으릅니까? 자신을 항상 말씀에 두려고 해야 합니다. 성도는 이 일에 부지런해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만 말씀을 생각하는 척 할 것이 아니라, 평소 살아가는 모든 삶이 말씀과의 관계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교회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항상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흔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모여, 찬송하고 말씀을 듣는 것을 보면, 모두가 성도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교회 밖을 나가면 말씀과 상관없이, 우리의 본래 습성대로 살아가버립니다. 그러면서 말씀의 간섭에서 벗어나 있는 자신에 대해, 고민하지도 않고 근심하지도 않은 채 덤덤하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투성인 인간이 자기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 역시 귀한 줄을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언제나 인생을 자기 것으로 바라보면서, 자신을 위해, 자기에게 유리한 인생으로 끌어가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젊은 과부입니다.
하나님께 다스림 받는 것이 싫습니까? 싫을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이끄는 것이 내가 죽는 길인데, 그것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우리의 본성이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다스려지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한 길에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사람으로 다스려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입니다.
여러분이 깊은 마음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십자가에서 기쁨과 감사를 맛보게 될 때, 여러분의 삶에서는 참 과부의 모습이 증거 될 것입니다.
4. 잘 다스리는 장로(17-20)
성도가 복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사망에 처한 나에게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소식을 가지고 찾아온 복음이 귀하지 않다면, 그 사람은 아마 그리스도보다는 다른 관심에 붙들려 있다고 여겨도 될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에게 복음이 귀하다면, 그 귀한 복음 때문에 나타나는 모습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성도는 자신이 진심으로, 복음을 귀히 여기는 자인가를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복음을 귀하게 여긴다’는 자기 생각으로, 쉽게 자신에 대한 결론을 내릴 것이 아니라, 복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나의 마음이라면, 그러한 나의 마음에 의해 나타나는 열매로써, 자신이 진심으로 복음을 귀하게 여기는 자인가를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방향으로 생각해 봐야 할 내용입니다. 본문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목사에 대한 대우 문제로 이해하게 될 위험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이 장로에 대한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존경하고 보수를 지급하고, 장로에 대한 고발을 함부로 하지 말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7절에서 말하는 ‘잘 다스리는 장로’는, 지금으로는 목사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는 지금처럼 말씀을 전하고 치리하는 목사와, 치리만을 하는 장로로 구분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장로, 곧 목사만 존재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라고 말합니다. 곧 잘 다스리는 목사를 배나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부흥시키고 성도들을 잘 관리하는, 그런 목사를 존경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목사로서 교회를 잘 다스리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목사가 교회를 잘 다스리는 것은,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 있도록, 그리스도께로 인도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사의 역할입니다. 한마디로 목사는 이런 역할에만 충실할 때, 그래서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순종할 수 있도록 도울 때, 잘 다스리는 장로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교회는 목사의 말에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와 목사가 그런 관계에 있다면,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 있는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성도를 다스릴 수 있도록, 처음부터 끝까지 내 이익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 있도록, 그리스도가 누구시고, 말씀이 무엇인가를, 부지런히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교회는 자연히 말씀의 다스림을 받게 되는 것이고, 목사가 말씀을 전할 때 그 말씀에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 다스리는 장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장로를 배나 존경할 자로 알라는 것입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는 교회에서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자칫 목사가 목사의 일을 잘 하면, 교회는 그 목사를 존경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초점은, 목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있습니다. 곧 목사다운 목사를 존경하라는 말을 하려고 하기보다는, ‘진심으로 복음을 귀하게 여기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잘 다스리는 장로는, 성도들에게 생명이신 그리스도만을 선포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귀히 여기는 성도에게 잘 다스리는 장로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자신에게 필요한 자이고, 귀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귀하다기보다는 그가 하는 역할, 그리고 그가 하고 있는 일로 말미암아,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그리스도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큰 도움을 얻기에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잘 다스리는 장로인데도 불구하고, 존경을 받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본문의 내용대로 한다면, 그 교회가 복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복음만을 증거하고 그리스도만을 전하고자 하는 목사 역시 귀하지 않는 것입니다.
18절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이렇게 말하는 것도 단순히 목사에 대한 보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 소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소가 없이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소가 귀하기에 소를 잘 관리하게 되는 것이 농사꾼인데, 소를 이용하여 일을 하고자 하면서도, 소가 먹을 것을 주지 않고 입에 망을 씌운다면, 그 사람은 소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소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힘을 쓸 수 없고, 소가 힘을 쓰지 못하면 농사일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소가 일하는 것이 자신에게 필요하고 없으면 안된다는 것을 안다면, 소의 입에 망을 씌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내용 역시 목사의 보수 문제를 다룬다기보다는, 복음에 대한 관심 여부를 다루는 내용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당시 말씀을 전하는 장로는, 교회로부터 보수를 받았습니다. 교회가 장로의 생활을 책임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말씀을 전하는 장로에게 보수를 지급하면서, 그 생활을 책임지는 것도 말씀을 향한 관심과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고와와 과부를 돌아볼 것을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고아와 과부를 돕기 위한 목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은 자로 살아가는가를 확인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애굽에서 종 되었던 자신들을 구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가에 대한 증거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세우신, 고아와 과부를 멸시하지 않고 돕는 것으로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약한 자를 돕는다는 것은, 자신의 약함을 바라본다는 것이고, 자신의 약함을 바라보는 것에서, 현재의 복이 모두 하나님으로 인한 것임을 생각하고, 은혜에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세우신 고아와 과부가, 멸시를 받고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증거이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서 쫓겨남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한 대로 잘 다스리는 장로를 배나 존경하라는 말씀도, 이러한 흐름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보수를 받지를 못하고 생활에 곤란을 가져온다면, 그것은 결국 교회가 복음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돈을 사랑하고 있는 흔적이라는 것입니다.
19절에서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라는 말씀도, 장로는 범죄해도 교회가 함부로 고발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고발이 장로에 대한 감정적인 문제로 흘러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목사와 성도는 인간적 관계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 때문에 맺어진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워, 목사를 고발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말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감정에 치우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목사에 대한 이 모든 내용은, 잘 다스리는 장로에 대한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목사가 말씀을 바르게 선포함으로써, 성도로 하여금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일에, 그 역할을 하지 않을 때, 다만 목사로서의 욕망을 앞세워, 그리스도가 아닌 교회를 붙들고자 할 때, 그러한 목사를 거절하는 것도,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귀히 여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굳이 목사에 대한 얘기만이 아닙니다. 말씀이 귀하기에 말씀을 전하는 자를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교회에서 어떤 형제가 말씀에 순종하면서,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교회는 그를 존경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분위기여야 합니다.
돈 많은 사람이 교회에 많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분명 말씀이 아닌 돈을 사랑한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말씀을 귀하게 여긴다면, 자연히 믿음의 형제를 존귀히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말씀으로 모이는 교회입니다.
5. 네 자신을 지키라(21-25)
성도는 복음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곧 생명임을 알기에, 자연히 복음을 귀하게 여길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귀하게 여기는 성도는, 복음을 전하는 장로를 배나 존경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장로의 인품 때문이 아니라 복음 때문입니다.
곧 복음을 귀하게 여긴다고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장로를 존경하지 않는다면, 결국 복음이 귀하다는 것은, 그저 자기 생각일 뿐이라는 것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야기의 중심은 장로, 곧 목사를 존경하라는 것이 아니라, ‘나는 과연 복음을 귀하게 여기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21절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불공평하게 하지 말며”
사도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천사들 앞에서, 엄히 명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천사들을 빙자해서, 엄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디모데가 누구인가를 강조하고자 하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천사는 세상에 속해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해있습니다. 따라서 사도가 하늘에 속한 분들 앞에서, 엄히 명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 사도도 하늘에 속한 자로 명하는 것이고, 사도의 말을 듣는 디모데도 하늘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속한 자에게 명령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하늘에 속한 사람에게만 명령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순종하고자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아는 것처럼, 하늘에 속한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다면, 그것은 ‘너희들은 내게 속한 자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명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기 전에, 우리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시는가에 대한 생각부터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명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21절 마지막 부분을 보면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불공평하게 하지 말며”라는 말을 합니다. 편견이나 불공평이라는 것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는, 항상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특정한 인물이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인간관계에서 모든 사람들을, 공평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습니까?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동일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취미나 성격, 사고방식 등등, 여러 가지의 여건에 의해서, 내 마음에 드는 특정한 사람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평소 활발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조용한 사람보다는 활발한 사람이 더 마음에 들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을 향한 사람의 마음은, 자신이 선호하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편견이고 불공평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늘에 속한 사람에게는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에게 기준은, 내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대하시는가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로 대하십니다. 긍휼과 자비로서 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 안에서, 모든 사람은 동일합니다. 그의 성격이나 기질과 상관없이,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합니다. 이런 마음이 있을 때, 편견과 불공평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심으로 나를 용서하신 복음이 귀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복음이 귀함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용서를 안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용서를 진심으로 아는 성도라면, 형제를 나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용서에 있는 자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에게서 편견과 불공평이 나온다면, 그것은 곧 내가 복음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내용도 사람을 편견과 불공평으로 대하지 말 것을 실천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너희는 과연 복음을 귀하게 여기는가?’를 묻는 말씀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이, 곧 하나님의 용서 안에서 형제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복음을 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2절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이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안수하는 것은 직분자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직분자를 세울 때, 대개 무엇을 보게 될까요? 많은 목사들은 직분자를 세우고자 할 때, 목사인 자신을 잘 도와줄 사람을 세우려고 하게 됩니다.
목사의 일에 방해가 되고, 시비를 걸만한 사람은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 목사의 생각입니다. 한마디로 내 편이 되어줄 사람, 교회 운영에 도움이 될 사람이 누구인가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에 관심이 없는 자들의 생각입니다.
복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직분자를 세우는 것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이라고 해도, 복음을 사랑하는 자로서, 복음의 모습을 증거 할 사람인가에 관심을 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복음을 향한 관심은, 안수하는 일에서도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곧 경솔히 안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는 말씀도, 과연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를 묻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에도 안수받기 위해서, 직분자 되기 위해서, 다스리는 장로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것에 흔들리지 말고, 하늘에 속한 자로서, 오직 복음에만 관심을 두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는 말씀도, 복음에 대한 관심과 연결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는 것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서 쉽게 보이는 것은,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처럼 죄를 짓지 않았다’는 생각이, 자신을 의로운 자의 자리에 세우게 되고, 결국 ‘나는 너보다 낫다’는 정당성을 앞세운 채,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간섭하고 책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죄를 보지 않음으로 나타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입술로는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죄는 보지 않는, 외식적인 고백으로 일관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 속한 자는 자신의 주관자가 없습니다. 주관자가 따로 존재함으로써 주관자로부터 책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 책망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자신을 책망할 때는, 항상 자기 합리화가 앞서게 됩니다. ‘이것은 잘못이다’라고 하면서도, 그런 잘못을 행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조건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그렇지 않은데, 상황이 나를 잘못을 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런 마음도, 다른 사람의 죄를 바라볼 때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간섭과 책망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에 속한 성도라면, 자신이 자신을 책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책망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구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말합니다. 복음은 우리를 사정없이 책망함으로서,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주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귀하게 여기는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는 형제에게 죄가 보일 때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살아가는 형제로서, 그로 하여금 천국을 소망하는 자로 살아가도록, 주님의 은혜만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도록, 권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을 소망하기를 원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23절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이 말씀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 있었던, 금욕적인 율례와 연관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곧 포도주를 마시지 않음으로, 자신의 정결을 지키려고 하는 금욕적인 율례가 있었고, 디모데가 그러한 율례의 영향을 받아서, 몸에 병이 있는데도 물만 마시고, 포도주는 마시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디모데의 위장이 좋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연약함에서도, 디모데는 자기 정결을 위해, 자신의 병에 도움이 되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물만 마신 것입니다.
이러한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말하는 것은, 술을 마셔도 괜찮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디모데의 몸은 디모데의 것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도구이니 만큼, 건강을 잃으면서까지 자기 정결을 지키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중요한 것은 자신의 정결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24-25절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따르나니,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때가 되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었는가가 밝히 드러나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현대의 성도에게 있어서 힘든 것은, 도대체 무엇이 진리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말하면 이것이 맞은 것 같고, 저기서 저 말하면 저것이 맞은 것 같은, 헷갈림 때문에 난감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선과 악이 밝히 드러날 때를 바라보면서, 하늘에 속한 자로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흔들리지 말고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흔들리지 말고, 세상에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이 세우진 복음의 증거물답게, 복음에 모든 관심이 향하기를 소원하면서, 복음을 증거하는 성도로만 살기를 소원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행은 결국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떻게 명하시는지, 누가 나를 주관하시고 붙들고 계시는지, 그리고 그 주관자께서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는지를 분명히 안다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을 지키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지키는 것은 결국 복음에 마음을 두고,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