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는 혁명이다
信天함석헌
4·19는 혁명이다!
4월 19일, 그날 수유리 무덤에 갔더니 거기 큰 글자로 써 붙이기를 ‘4·19 의거 희생자 추념’ 이라고 했다.
열 세 곬이 되는 오늘까지 평소에 공으로거나 사로거나 우리가 말을 하는 때면 누구나 다 4·19혁명이라 부르는 것이 사실 아닌가? 그런데 왜 이 공식적으로 기념식을 하는 오늘 이 자리에 그렇게 써 붙였을까?
몰라서 그랬을까?
잊어버려서 그랬을까?
아닐 것이다. 모를 리가 없고 잊었을 리가 없다.
본래 첫번 감격과 흥분이 가라앉은 다음 신문지상에서 이것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하는데 대해 논란이 약간 있었다. 쿠데타냐, 정변이냐, 혁명이냐 하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역사에서는 그 사건도 중요하지만 사건이 지나간 후 그것을 어떻게 규정짓느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거기에 역사 이해가 있기 때문이다. 신중히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한동안 논란이 있은 후 혁명이라는 데 낙착이 됐다 그래서 오늘까지 온 것이다.
4·19는 혁명이다!
생각해 보라, 어떻게 혁명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욕심, 고집, 무쇠같이 속이는 탈을 쓰고 몰록처럼 서서 씨의 피와 땀을 영원히 마시려던 독재자를 혼비백산하여 스스로 물러나 바다 속 외로운 섬에서 울다 죽게 했는데, 그래 그것이 혁명이 아니란 말인가? 네게 이성이 있느냐?
소인의 무리, 간사하고 악독한 당파, 지식 기술을 악용하여 우상을 가운데 세워놓고 나라의 것을 도둑하여 권세와 영화를 누리자던 자유당을 단숨에 밀어 바위에 부딪치는 눈덩어리처럼 부서져 거품으로 떠나가게 했는데, 그래 그것이 혁명이 아니란 말이냐? 네게 양심이 있느냐?
마산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서울로,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대학생에서 교수로, 교수에서 전 민중으로, 들판의 불처럼 번져나가 개인은 없어지고 한 덩어리가 되어 노한 바다처럼 뒤흔들었는데 그것이 혁명이 아니란 말이야? 그러지 않았으면 총칼을 쓰다 말고 항복했겠는가? 전체 민중이 일어선 것 아니라면 그래 그 권력 구조가 무너졌겠는가? 무너진 후에 무엇이 남은 것 있었던가? 죄악의 세력이 밑둥에서부터 꺾어지지 않았나? 그런데 혁명이 아니란 말인가?
전 민중이 노했고, 일어났고, 이겼고, 기뻐했는데 그것이 혁명이 아니라면, 그럼 혁명은 어떤 것이냐?
오천 년 긴 역사를 가지면서도 역사적 민족의 대접을 못받고, 종교, 도덕, 예술의 빛나는 문화를 창조했으면서도 문화 민족의 명예를 누리지 못하던 우리로 하여금 세계만방 앞에 우리도 자유를 사랑하고, 정의를 위해 분개할 줄 알고, 사랑으로 원수를 용서할 줄 아는, 사람다운 사람인 것을 증명하게 하여 전날의 실패와 상처를 도리어 자랑으로 여기고 세계를 향해 어엿한 얼굴을 들 수 있게 했으며, 다른 여러 나라 학생운동에까지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이 이 4·19 운동인데, 그래 이것이 혁명이 아니란 말이냐?
아, 이렇게 분한 일이 어디 있을까?
이렇게 억울한 일이 어디 있을까?
이렇게 슬픈 일이 어디 있을까‘?
“의거”,그렇다 의거다. 옳은 일이다.
그러나 역사에는 스스로 그 역사적 의미를 밝히는 공인된 술어가 있지 않느냐? 폭동인가, 정변인가, 내란인가, 반란인가, 그렇지 않고 혁명인가? 옛날 제(齊)나라의 최저(崔杼)가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도둑질했을 때 그 사건을 최저시기군(崔杼弑其君)이라고 직필(直筆)해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역사를 바로 이해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세 사람의 사관(史官)이 목숨이 끊어져야 했던 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글자면 다 되는 것 아니다. 그것으로 그 사건의 역사적 의미가 밝아지나 흐려지나가 문제다. 그것으로 씨알의 정신이 올라가나 내려가나가 문제다.
“희생자”라 했으니 그런 말을 어디다가 쓰느냐? 죽었으니 희생자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죽음이 다 같은 죽음이냐?
밖엣 사람이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적는 것이라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네가 어찌 밖엣 사람이며 추념식을 하는데 그것이 어찌 하나의 사실 보고냐? 불쌍하다 생각해서 희생자라 했느냐? 참 착한 마음 많다!
우리는 그이들을 죽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산 영으로 우리 속에 모신다. 그이들은 대대로 산 씨 속에 영원히 산다.
그러므로 그이들을 하나의 죽은 자로 대접했을 때 이 씨 전체를 무시한 것이다.
또 그만이냐? 이것은 도리를 무시한 태도다. 하늘도 진리도 인정하지 않는 일이다.
분명히 알아들어라.
4·19에는 개인이 없다.
첨부터 전체다.
전체 그 자체가 일으켰고, 전체 그 자체가 내밀었고, 전체 그 자체가 이겼다.
거기 나섰던 그 개인 개인에는 잘한 일도 있고 잘못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 아니다.
우리가 탑을 세워 기념하는 것은 그 개인의 공적을 나타내자는 것만이 아니다. 전체의 생명을 우리 속에 살리기 위해서다. 그 전체 생명에 들지 못하면 모든 기념행사가 무의미 하다. 하물며 하나의 희생자 대접을 함으로서일까?
다시 말한다.
4·19에는 영웅주의는 없었다. 권력주의는 그 냄새조차도 없다.
그러니, 영웅이 되려다 못됐다면, 또 혹은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 장군이 하나 되려면 만명이나 되는 졸병이 죽어 마른 뼈다귀가 돼야 한다고, 남 권력 잡는 일에 나갔다가 불행히 죽어버린 것이라면 참말 희생자겠지만, 그런 지저분한 것이 하나 없는 이 거룩한 사건에는 희생자란 말은 도리어 모욕이다. 모욕만 아니라 정신을 죽이는 행동이다.
기억해라, 4월은 부활의 달이란다.
4·19는 혁명이다!
4·19는 혁명이다!
천하의 모든 씨알아, 씨알은 아니 죽는다. 죽을 수 없는 것이 씨알이다.
씨알이 한 목소리로 다짐하자.
4·19는 혁명이다!
4·19는 영원한 씨알의 숨이다.
4·19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씨알의소리 1973년 4월 21호
저작집30; 5-181
전집20; 17-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