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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이션: 1950년 4월, 스탈린은 김일성과 세 번 마주 앉았다. 지난 일 년여 간 스탈린에게 남침허가를 제안한 김일성, 이를 절대 허락하지 않았던 스탈린은 연이은 회담 끝에 남한 선제공격을 허락한다. 1950년 봄 한반도를 바라보는 스탈린의 셈법이 달라져 있었다. 공산주의 진영의 최대 지도자 스탈린의 남침 승인,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시작된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사백 열 다섯 번째 역사저널 그날입니다. 73년전 오늘, 한국전쟁이 발발했죠. 오늘은 좀 특별히 한국전쟁을 스탈린의 시선으로 사건을 따라가 볼까 합니다.
허준/방송인: 사실 스탈린이 겁이 많은 지도자였다 라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을 하세요?
류한수/상명대학교 역사콘텐트학과 교수: 겁이 많다기 보다는 상당히 신중한 사람이죠.
허준: 미국을 절대 무서워해서 비행기를 안타고 자기가 혹시라도 위해를 당할 수 있는 모든 원천을 다 차단하는~
류한수: 의심이 많은~ 돌다리도 두드리고 보고 가는
이시원/배우: 뭔가 떠오르는 이미지는 철의 남자로 무조건 돌진하는 사람으로 봤거든요.
류한수: 스탈린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통념이 있겠죠. 대숙청을 자행하고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긴 사악한 독재자, 그리고 전 세계를 붉은 물결로 물들게 하겠다. 공산화 하겠다. 적화야욕에 불타는 지도자로 볼 수 있겠는데요.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립니다. 그래서 사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서 자국민과 여러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사악한 독재자로서의 측면은 맞는데 그렇다고 해서 스탈린이 전 세계를 공산화하겠다는 야욕을 품고 있었고 이것을 현실화하겠다는 생각을 했던 사람이냐? 여기는 이견이 있습니다. 스탈린의 가장 큰 목표는 미국과 정면대결을 하는 제3차 세계대전을 막겠다는 것이 제일의 목표였어요. 그런 면에서 세계적화 야욕을 가진 그런 결정을 하겠다고 나선 비현실적인 목표를 가진 정치가로서는 볼 수가 없는 것이죠.
최원정: 의외예요, 스탈린하면 미국과 싸워서 전 세계를 적화하겠다. 한국전쟁의 총지휘관이다 이렇게 저희가 제목을 지은 데 있어서 혹시 (정병준 교수를 향해) 교수님의 반발이 예상되는데?
정병준/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아니요, 사실은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여기에 세 가지 언어가 쓰였습니다. 한국어, 두번째는 중국어였고, 세번째는 영어로 쓰여져 있었습니다. 즉, 유엔 지금 미국, 중국, 그 다음에 북한 혹은 한국이 이 휴전회담의 주역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에 시작부터 끝까지 스탈린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리 좀 팁을 드리자면 스탈린이 주연이 아니라 감독이었다.
최원정: 우리가 그 동안 이런 얘기는 잘 하지 않았던 거예요. 근데 제가 알기로는 새로운 연구결과들이 유입이 되면서 오늘 드디어 그 동안 듣지 못했던 얘기를 해주신다고 합니다. 스탈린 전문가 또 한국전쟁을 전공하신 두 양대 산맥을 함께 하는 시간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시원: 엄청 기대됩니다.
정병준: 스탈린은 본인이 생각하기에 아시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제일 중요한 곳은 동유럽, 자신이 확보한 동유럽과 소비에트의 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49년부터 김일성이 계속 반복적으로 강하게 남한에 대한 공격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했습니다. 이유는 차츰 차츰 얘기할 텐데요. 50년 초에 한국전쟁에 스탈린은 당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류한수: 1940년대의 스탈린은 전 세계가 볼 때 그 무시무시한 아돌프 히틀러를 무릎 꿇게 했죠. 위대한 군사압제자 전쟁의 승리자였겠죠. 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현대전의 요체를 이해하게 돼죠. 그래서 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로 쿠르스크 전투가 있을텐데요. 독일에 가있던 전쟁지도불 빼앗아오는 중요한 전쟁이었죠. 동영상: 쿠르스크 전투(1943년): 제2차 세계대전중 소련 쿠르스크 일대에서 벌어진 소련과 나치 독일 간의 전투, 소련군 170만, 야포 1만 9천 문, 전차-자주포 3600대, 항공기 3100대 동원, 사상 최대 기갑전들 가운데 하나, 그에 비해서 한국전쟁의 규모를 살펴보자면 북한군 병력이 10만 명, 전차-자주포가 240대 이렇게 돼죠. 그래서 스탈린이 볼 때 한국전쟁은 규모가 아주 적은 전쟁이었어요. 쿠르스크 전투의 20분의 1에 불과해요.
최태성/한국사 강사: 미니 게임이네요.
류한수: 굉장히 손쉬운 전쟁으로 보였습니다.
허준: 굉장히 작은 규모의 전투였고 김일성이 분명히 치밀하게 우리의 승산은 이렇게 높다 라고분명히 보고를 했을 것이고 그런 여러가지를 얘기했는데도 불구하고 겁쟁이 이기 때문에 허락을 안해 준 거는 미국에게 겁을 먹은 거겠죠.
정병준: 49년 3월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모스크바를 찾아가서 스탈린에게 남한을 무력공격하고 싶다. 스탈린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공격하면 안돼. 왜? 첫번째는 북한군이 남한군보다 숫적으로 열세야. 무기도 열세였어요. 두번째는 남한에는 주한미군이 있어. 미군이 개입하게 될 꺼야. 적대관계가 일어나게 되면 미군과 싸우게 되는데 너 되겠어? 세번째 미소간에 38선에 관한 협정이 있어. 그걸 깨뜨리고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하는 모험을 허락할 수는 없어. 동시에 네 마음은 이해한다. 기다려라, 선제공격은 안돼, 그렇지만 만약에 남한이 도발해서 침공해 온다면 네가 반격하더라도 모두 다 너를 이해할 꺼야. 그러니까 선제공격을 당한 다음에 반격하는 정의의 반격격전은 가능해, 이게 당시 스탈린이 한 말입니다.
최태성: 정의의 반격격전~
정병준: 50년 6월에 만들어진 대남공격 작전계획이 그래서 반격계획입니다.
이시원: 충분히 자율적으로 남한을 한 번 공격할 수 있는 데 왜 꼭 스탈린의 말이 필요했던 걸까요?
최태성: 지금 전쟁을 승인해 달라는 의미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승인해 달라는 의미가 아니에요. 전쟁을 해야 되는 데 자금도 도와 주셔야 되고 군사력도 도와 주셔야 되는데 그래야 우리가 남한을 쓸어버릴 수 있으니 도와 주세요 라는 의미가 되는 거죠.
정병준: 구소련이 붕괴되고서 러시아 문서가 공개되기 전에는 한국전쟁에 개전과 관련해서 온갖 설이 난무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김일성 주도설, 김일성-스탈린 공모설, 심지어는 스탈린 경악설까지 있었습니다.
일동: 스탈린 경악설이 뭐예요?
정병준: 한국전쟁을 스탈린 모르게 김일성이 일으켰다. 근데 이 시기에 스탈린이 허락하지 않은 결정하지 않은 전쟁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아담 울람이라고 하는 하버드대 러시아 연구센터소장이고 소령대외 정책전문가인데 이 분이 누가 주도했느냐 라는 논쟁이 가열됐을 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운동 경기에서 선수가 자세를 낮춰서 준비 자세를 취했다고 해서 경기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경주는 출발이라고 하는 출발신호와 함께 시작된다. 스탈린이 한 일이 바로 이것이다.
최원정: 근데 2년 넘게 김일성의 제안을 계속 거절하다가 1950년 4월에 스탈린이 다른 선택을 해요.
최태성: 그게 키 포인트예요.
내레이션: 1949년 6월, 남북한의 군사적 불균형과 계속되는 북한의 남침 징후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한반도를 떠났다. 간접적인 침투나 교란행위는 벌어져도 소련이나 북한의 전면적인 침략은 없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편 1949년 말 중국의 패권을 둘러싼 전쟁,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여 국민당을 지원하던 미국이 개입을 포기하고 중국 전역이 공산화된다. 달라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스탈린은 이 변화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최태성: 중국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했다는 큰 변수가 생긴 거에요.
최원정: 중국이 공산화가 됐고 북한도 계속해서 뭔가 도발을 유도하고 있는 데 왜 미군이 떠나가나요? 그럴 상황이 아니잖아요.
정병준: 중국 공산화 이전에 1947년 부터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주한미군 철수문제가 가열화됐습니다. 왜냐면 한반도에 두 개 사단 이상을 배치한다고 하는 게 군사전략적인 우선 순위에서 한반도는 그런 우선 순위가 아니라는 거죠. 한반도 남한에 유지 가능한 정부를 수립하고 미군은 철수한다. 처음에는 48년에 철수할려고 했지만 계속 철군 계획이 연기되어 49년 6월에 철군하게 된 것이죠. 그런데 철군하고 보니까 중국도 공산화가 되어 버린 것이죠.
최태성: 정부 수립 전후해 가지고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병력이 무려 7만 7천여 병력이 돼요. 어마 어마하죠. 그런데 1949년 6월 이후가 되면 한반도에 꼴랑 500명이 남아요.
최원정: 500명은 군사라고 할 수 없잖아요, 고문단이잖아요.
허준: 똑똑한 나라 아닙니까? 빼면 문제가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몰랐을까요?
정병준: 미국은 38 이북에 있는 체제의 중심은 김일성이나 북한 정부가 아니라 소련이 핵심이다. 남한에는 군사 고문단이 있고 유엔 한국위원단이 있습니다. 소련은 미국을 상대로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의도나 능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소련이 즉 북한이 남한을 공격한다고 하는 것은 실현 가능성이 있다? 없다 라고 본 것입니다.
류한수: 1949년에서 50년을 넘어가는 사이에 스탈린의 마음이 바뀐거죠. 왜 바뀌었는가를 생각을 해 보면 사실은 스탈린은 그 이전에 중국 국공내전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결할 때 국민당이 미국의 지원을 받았고 세력이 컸다 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공산당은 미약하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죠. 그런데 예상과 달리 공산화된 이유가 국민당이 너무 부패하고 비효율적이어서 패권을 공산당에 넘겼던 것인데 여기에 스탈린이 상당히 고무되었고 그 다음에 미국이 사실은 개입을 해서 국민당을 지원하기 보다는 공산당의 중국 점령을 방조했던 거죠. 그래서 스탈린이 볼 때 미국이 대륙까지도 넘겨 주면서 물러나는 데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개입하겠느냐 이런 판단을 스탈린이 했던 듯 하구요. 또 하나가 (동영상: 소련의 원자폭탄 실험) 1949년 1950년 이라는 해에 스탈린에게 핵무기가 생깁니다 (1949.8.29), 이런 자신감이 생겼겠죠.
이시원: 이거 안 하면 바보죠. 김일성이 이러구 있었을 것 같애요.
정병준: 그래서 사실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0일까지 김일성과 박헌영이 두번째로 스탈린을 만나러 갔습니다.
최태성: 쪼르르 간 거죠.
정병준: 세 차례 회담했다고 하구요. 사실은 러시아가 기록을 공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공식적 기록 無),
최태성: 그러니까 김일성이 스탈린을 만나가지고 얘기를 해보니까 눈치가 빠른 거예요. 어? 우리 형님, 우리 스탈린 형님, 미국이구나, 미국이 이렇게 있었구나. 형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미국은 참전할 리도 없고 틈도 없습니다.
허준: 형, 봐 봐요, 한우를 집어 먹는 데 상관 안해요, 그런데 우리가 비계를 집어 먹는다고 상관을 하겠어요?
최태성: 그렇지~
정병준: 김일성이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주한미군이 아무리 빨리 개입할려고 해도 한 달 이전에는 못 옵니다. 우리는 불과 3일 이내에 서울을 점령하면 전쟁을 끝낼 수 있습니다. 지도부가 붕괴되고 또 남한 내의 공산주의 세력 20만 당원이 봉기하면 우리가 밀고 내려가면 끝이다 이렇게 스탈린에게 얘기했고 그 노회한 스탈린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습니다.
최태성: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거죠.
정병준: 스탈린의 허락이 이렇습니다. 공격 OK! 그래 해도 좋다, 그런데 부대 조건이 있어, 마오쩌둥의 동의를 받아야 돼. 그래서 사실은 김일성과 박헌영이 50년 5월 13일부터 15일까지 베이징을 찾아가서 마어쩌둥과 두 차례 회담을 합니다. 근데 마오는 무척 당황했어요. 갑자기 김일성이 찾아와서 스탈린 따거가 OK 했어요 마오가 믿지를 못 합니다. 그래? 내가 확인해 보지. 그러니까 스탈린이 이렇게 전문을 보냅니다. 국제정세가 변했으므로 남북한 통일사업에 착수하겠다는 북한 동지들의 제안에 동의하였음,
이시원: 동의하였음~,
정병준: 스탈린은 굉장히 단어선택 어휘력이 노회합니다. 전쟁을 개전한다. 공격을 개시한다 이렇게 쓰지 않습니다.
이시원: 북한의 말에 동의하였음~,
정병준: 그러니까 나는 동의하였으니까 네가 동의하면 이 통일과업은 시작되는 거야. 그래서 스탈린은 책임을 누구한테 떠 넘깁니까?
이시원: 중국에게요.
정병준: 중국과 북한의 하기에 전쟁 개시의 책임이 있다고 떠넘긴 것입니다.
최원정: 근데 나는 이미 전쟁을 허락한 상태인데 굳이 마오쩌둥의 허락을 받는다는 것은 이건 최종결정권자가 중국이라는 얘기인가요, 어떻게 봐야 돼죠?
정병준: 바둑으로 얘기하면 스탈린은 몇 수 앞을 내다보는~ 만약에 미국이 개입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우리는 병력을 지원하지는 않겠어! 그건 중국이 할 몫이야 (전쟁에 관한 모든 책임은 중국의 몫), 그러니까 사실은 스탈린은 전쟁을 결정할 권한도 있지만 나중에 책임을 회피할 권한도 그 책임을 중국과 북한에다 넘길 권한도 가졌던 거지요.
이시원: 이거 집안에서도 많이 일어나는 일이잖아요. 아빠 아빠나 이거 하고 싶어 한번 사줘! 아빠는 괜찮은데 엄마한테 물어봐
최태성: 그렇지~ 그렇지
정병준: 또 하나는 아마 마오쩌둥의 충성심을 시험하겠다 라고 하는 의도가 사실은 있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최태성: 스탈린이 여러 포석을 깔았네요.
허준: 그냥 학살자인줄 알았는데 굉장히 치밀한 사람이네요.
류한수: 그렇게 스탈린이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는 따거 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데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겼지만 스탈린이 가장 걱정했던 상황이 뭐냐면 비록 나치 독일이 무너졌지만 독일이 워낙 강력한 나라이기 때문에 또 금방 재기할 것이다. 다시 일어난 독일이 이번엔 미국과 손을 잡고 결탁을 해서 한편이 돼서 소련을 공격하면 막아낼 수 없다고 생각을 했던 거예요. 이런 식의 상황 판단이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스탈린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허준: 그러면 이제 마오의 선택만 남은 경우잖아요. 그러면 마오쩌둥의 같은 경우는 아~ 그래 스탈린 동지의 말은 알아들었어. 그러면 이 얘기는 총칼이 나한테 주어졌고 전쟁개시는 허락을 받았는데 칼을 들고 들어가 근데 책임은 내가 안 질 꺼야. 그러면 전쟁을 이겨야 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결단을 지금 마오쩌둥은 내려야 되는 상황이잖아요.
정병준: 지금 마오의 마음은 복잡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왜냐면 49년에 중국대륙을 평정했다고 하지만 아직 3분의 1이 미해방이 되었구요. 그 다음에 남은 것은 타이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51년에 타이완을 통일 병합한다. 지금 문제된 바로 그 타이완입니다. 그 다음에는 한반도 통일문제를 지원할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해공군이 없었기 때문에 무조건 이런걸 준비해서 타이완 침공을 준비하고 있는데 순간에 난데없이 김일성이 나타나서 스탈린 대형의 명령이에요.
최태성: 거절을 해요, 상황 자체가 안 되는 거예요. 하는 데~ 아 이게 미스테리야, 거절을 한뒤 갑자기 이틀 뒤 참전을 결정합니다.
허준: 거절했다가, 이틀 뒤 그게 뭐 예요?
최태성: 허락해 줄게
최원정: 두령님들이 의기투합했나, 우리 일성이를 몰아 밀어주자~
최태성: 전화 받은 거지
이시원: 스탈린 형님의 명령~
최원정: 어떻게 된 거에요?
정병준: 정확하게는 거절을 한 건 아니고요. 진위를 파악해 보자. 그리고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냈고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 내용을 보면 (TO: 마오쩌둥, 변화된 국제상황에 따라 북한의 통일과업을 개시하겠다는 제안에 동의하였음, 이와 관련, 이 문제는 중국측과 북한측의 공동 합의에 따라 최종 결정되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달았음. FROM: 스탈린), 너희들이 합의하면 전쟁할 수 있어. 그러니까 마오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면 스탈린과 김일성이 합의했으면 전쟁할 수 있어, 마오도 또 그렇게 얘기합니다. 당시에는 스탈린과 마오 간에 한국전쟁에 관한 사전 논의나 합의나 결정은 없었습니다. 마오가 1949년 12월부터 1950년 2월까지 소련을 방문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한국전쟁을 개전하기로 논의하고 합의했을 거라는 추측이 있었지만 그런 논의는 없었습니다. 대신 1950년 1월에 중소우호동맹조약이 체결됩니다. 이건 뭐냐면 스탈린이 얄타회담에서 (얄타회담(1945년)-미국, 영국, 소련 등 연합국 정상들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두고 얄타에서 개최한 회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는 대가를 요구했습니다. 그 대가가 뭐였느냐 러일전쟁 때 빼긴 이권들을 되찿아야 되겠다. 사할린 섬, 그 다음에 쿠릴열도, 그 다음에 만주에 있던 뤼순항 & 다롄항, 그 다음에 철도 부설권 이런 걸 가져와야 되겠다. 연합국이 다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1945년 8월 이권을 획득했고 그것을 장개석 정부로부터 확인을 받았는 데 불과 5년 뒤에 마오가 덜렁덜렁 나타났는데 1949년 12월 스탈린의 70회 생일이었습니다. 70회 생일에 본인도 황제라고 생각하는 마오쩌둥이 모스크바에 나타나서 사회주의 형제국 끼리 이러면 되겠어요? 아니 제국주의 국가도 아니고 이권 활양이라는 게 말이 돼요? 제국주의 국가처럼,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에게 돌려주어야 되는 게 아녜요? 스탈린은 사실 마오쩌둥을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할 말도 없었습니다. 왜냐면 마오의 말이 맞거든요. 아니 네가 제국주의 국가야? 사회주의 형제국가의 총사령관이라면서 어떻게 중국의 주권을 침략하는 이런 이권을 가질 수 있어? 스탈린이 아무 말도 못합니다. 중소우호동맹조약이라는 게 말이 우호조약이지 실제로는 스탈린이 러일전쟁 때 빼앗겼던 이권을 다시 찾았는 데 그걸 마오쩌둥이 낼름 호주머니에 가지고 간 겁니다. 스탈린이 팔짱을 끼고 쳐다 봤습니다.
일동: 참 곤란하구나. (1950년초 중소우호동맹조약 개정으로 중국에 반환된 부동항 뤼순-다롄),
정병준: 제일 궁금한 건 사실 마오쩌둥이 모스크바를 방문해서 우호동맹조약을 체결하는 건 중국과의 관계가 바쁜 와중에 50년 1월 30일에 스탈린이 평양주재 소련대사 시티코프에게 이렇게 전문을 보냅니다. 김일성 접견해 주겠어. 그 친구가 원하는 대로 청신호를 보내 주겠어. 사실 실질적으로 50년 1월 30일에 스탈린의 마음에는 김일성의 대남공격계획을 허락해야지 하는 결심이 섰습니다.
류한수: 가정을 해볼 수 있는 게 만약에 김일성이 남한을 침공해서 한반도를 차지하게 되면 한반도 전체가 소련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기 때문에 다롄이나 뤼순을 대체할 수 있는 중요한 항구라든지 시설들을 한반도에서 구할 수 있다는 거죠.
이시원: 한 수 더 계획이 있었구나.
최태성: 이것도 가능하네
정병준: 그런 일기는 안 썼어요. 그건 우리가 모르는 거죠. 어떤 결심의 동기가 무엇이었고 배경이 무엇이었는지 지금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습니다. 여하튼 간에 마오쩌둥도 굉장히 난감했지만 전략적으로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미국과 한 판 붙게 되어 있다. 만약 한반도에서 북한을 잃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만주라고 하는 전선에서 미국과 상대하게 되고 타이완이라고 하는 전선에서 두 개의 전선에서 미국과 상대해야 된다. 그러니까 사실은 한반도에서 북한이라고 하는 존재를 살려두어야 된다. 이게 사실은 마오쩌둥의 가장 중요한 군사전략적인 판단이었다 라고 생각이 듭니다.
최원정: 다들 고수들이다.
최태성: 상황이 왔어, 마오쩌둥도 일단 받을 건 받았으니까 해줘야 된다는 그런 상황이 온 거에요.
최원정: 지금 한국전쟁 주연, 조연 배우는 다 섭외했고 각본에는 스탈린이 머리를 굴리고 있어요. 스탈린은 과연 어떤 행보를 보였을까요?
------------태상호/군사전문기자: 충성! 군사전문기자 태상호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이라크 등 여러 전장을 누비며 종군기자로 활약), 자~ 여러분, 전쟁을 개시하는 데 여러가지 요소가 있는데 일단은 물리적으로 보면 인력이 있어야죠. 군인과 무기가 갖춰지면 그 다음에 뭐가 있을까요?
이시원: 전략
태상호: 그렇죠, 전략, 어떻게 싸워야 할까, 이게 바로 작전입니다 (전쟁의 요소-군인, 무기, 작전), 그때 바로 소련의 스탈린은 북한에게 이 세 가지 요소를 아낌 없이 지원을 했습니다. 소련이 제공한 무기로 북한군 10개 보병사단이 완편이 되었구요. 그리고 사진에서도 보듯이 전차여단 포병연대 그리고 일종의 특수 부대이지만 모터사이클 연대까지 창설이 돼서 소련의 종심전투를 할 수 있는 강력한 군대가 편성됩니다. 이에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당시 소련에서 20명 가량의 군사고문단을 편성해서 보내주었는데 문제는 이 사람들의 면면입니다. 독소전쟁, 2차 세계대전의 독소전쟁에서 실제 실전경험이 많은 장교들 중에 3년제 군사 아카데미를 졸업한, 우리나라로 치면 연대장, 즉 대령급 장교들을 보낸 준 겁니다.
허준: 지금 여기서 중요한 게요, 진짜 전투를 경험한 사람, 이 사람이 알려주는 실전 경험은 훈련을 백번 하는 것보다 달라집니다.
태상호: 그런데 스탈린이 북한을 지원할 때 대원칙이 하나 있었어요, 뭘까요? 절대 들키지 말 것, 그래서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월 7일, 소련측에서는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허준: 어떤 명령인가요?
태상호: TO: 소련 내각회의 의장, 소련군사고문들은 민간복으로 갈아입고 군부대에서 그들을 특파원으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소련군관들이 부대에서 외출하는 것을 금지할 것입니다. FROM: 북한주재 소련대사. 어떻게 보면 정말 괜찮은 위장입니다. 저 같은 거죠, 전쟁터에 종군기자로 가서
하준: 전장에서 기자로 부르잖아요. 알고 보니 고문단이고
태상호: 전혀 문제가 없는 정말 제대로 된 위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최원정: 탄로나면 큰 일 난다.
태상호: 스탈린의 노력은 이 뿐만이 아닙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기 3일전 그러니까 1950년 6월 22일에 갑자기 북한 주재 소련대사관에 뜻 밖의 교신이 본국에서 날아옵니다. 무엇일까요?
허준: 3일전?
이시원: 갑자기 취소? 이것도 아닌데
태상호: 전보교신 중단, TO: 북한주재 소련대사관, 암호전문의 교신은 바람직하지 못하니 향후 일체의 암호전문을 타전하지 말라
허준: 이제 부터는 연락하지 마!
태상호: 어떻게 보면 통신보안을 유지하자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허준: 어떤 문제요?
태상호: 지금 북한군에는 소련의 군사고문단이 가 있죠. 그러면 스탈린은 그들로부터 보고를 받고 싶고 내가 주최자인데~ 지시를 내리고 싶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런 속임수를 하나 더 써요. 스탈린은 1950년 6월 23일 스티코프 대사에게 이런 기밀문서를 보냅니다. 남조선에서 펼쳐지는 모든 작전에 관련된 암호문건을 오로지 마티로프 자하로프 동지의 기구를 통해서만 전달해라. 이런 내용입니다. 마지막에 문건을 보내는 사람의 이름이 필리포프로 되어 있습니다. 필리포프란 이름은 사실은 스탈린이 1940년대 후반부터 즐겨쓰던 가명입니다.
최원정: 스탈린이 필리포프로?
태상호: 그래서 6.25 관련된 모든 문서에서 스탈린이라는 이름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시원: 아니 필리포프가 무슨 뜻인가 무슨 인물이기에 저런 가명을 썼어요?
태상호: 특별한 뜻은 없구요.
류한수: 러시아에서 가장 흔한 성입니다. 우리나라의 김 이 박씨 처럼,
허준: 저 다음날 미국에서~ 스탈린이 마오쩌둥한테 전문 보냈는데요 하지 않았을까요?
최원정: 군사 전문가들이 나름 문해력이 있을텐데
-------------(동영상: 기밀문서 해제로 밝혀진 필리포프 정체-스탈린)
류한수: 재밋는 사실은 스탈린 이름 자체도 또 가명입니다. 원래 스탈린의 이름이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슈빌리’인데요.
최태성: 러시아 사람들 참 이름 길어요.
류한수: 이게 이름이 주가슈빌리 집안의 비사리온의 아들 요셉이라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러시아 제국 시절에 혁명가로 활동했던 당시의 정치가들은 다 가명을 쓰고 있었습니다. 탄압을 피해서 가명을 쓰는데 레닌 같은 경우는 시베리아에 레나강이 있는 데 레나강에서 온 남자(레닌=레나강에서 온 남자), 스탈린 같은 경우는 스탈이란 말이 러시아어로 강철의 사나이 (스탈린=강철의 사나이), 스탈린의 오른 팔이었던 사람이 (당시 소련 외무상) 몰로토프는 몰로토프=망치입니다.
태상호: 심지어 중국과 북한이 주고 받은 문서에도 스탈린이라는 이름은 전혀 등장하지를 않습니다. 이렇게 스탈린은 가명을 썼고 군사고문단에게는 철저히 위장을 명령하면서 한국전쟁에서 소련의 흔적은 남김없이 지웁니다. 그러면서 스탈린의 목적은 뚜렸했죠. 소련과 한국전쟁은 상관이 없다 (동영상: 한국전쟁 발발)
내레이션: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서쪽의 옹진반도로부터 동쪽으로 개성 포천 춘천 주문진에 이르는 38선 전역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동영상: 6월 28일 서울은 해방됐습니다. 공격 3일 안에 한강 이북의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 하지만 이후 북한군은 3일 동안 그곳에서 지체한다. 북한이 주춤하는 동안 한국군은 전의를 다질 시간이 생겼고 유엔군과 미국 참전 또한 가능해졌다.
류한수: 소련 군사고문단의 계획은 옹진에서 개전을 하고 그 다음에 서울-춘천-강릉을 해방하고 남한군의 주력을 제거한다. 그리고 3단계로 주요 도시와 항만을 장악해서 미군이 들어올 교두보를 아예 없애버리겠다. 이런 것이었는데 이 작전은 원래는 딱 한 달만에 이루어질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서울에서 3일 이상 지체하면서 문제가 생겼던 것이죠.
정병준 독소전쟁을 해본 스탈린으로서는 이 정도 규모의 전쟁이라고 하면 이 정도 병력과 군사역량을 투입하면 어느 정도 끝낼 수 있겠다. 굉장히 쉽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문제는 북한군의 능력이 현저하게 못미쳤다 하는 거죠. 예를 들어서 제일 중요한 게 한강 철교가 파괴되는 걸 방치했습니다. (한강 인도교 폭파(1950.6.28)-북한군의 남침을 제거하기 위해 국군이 한강대교를 폭파한 사건),
최원정: 그러니까요
정병준: 탱크가 있었지만 탱크 운영을 잘못 했습니다. 다리가 끊어졌는데 도하장비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일설에는 술자리를 벌였다. 파티를 벌여서 최용건이 전화를 못 받았다고 합니다. 한국군은 대안에 있던 영등포나 노량진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북한군의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그런 방어전투를 벌릴 수 있게 하는 여력을 얻게 된 거죠.
최원정: 게다가 미국이 빨리 움직였죠.
정병준: 전쟁 발발 직후 유엔 안보리가 바로 한국시간으로 6월 26일이지 미국시간으로 6월 25일 열려서 유엔안보리가 열려서 이틀 만에 한반도에 유엔군을 참전하도록 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킵니다. 전격적인 속도죠. 사실은 미국이 중심이 된 미국의 해외 참전사 역사 가운데서 이렇게 빠른 속도 신속한 대응 그리고 단호한 대응 그리고 결의 이런 건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 이랬느냐 이제 중국이 공산화됐고 그 다음에 한반도를 잃으면 그 다음에는 2차 대전 패전 후 일본인데 일본은 군대도 없어 그러면 우리는 어디야? 오키나와나 필리핀까지 밀려날 수 밖에 없어. 만약에 공산진영이 한 번 더 미국을 자극한다면 본 때를 보여주어야 돼. 이것을 누구의 공격으로 생각했느냐 북한이나 김일성의 공격이 아니라 스탈린과 소비에트의 공격이라고 생각을 했고 그에 상응하는 태도로 개입했습니다.
류한수: 흥미로운 사실은 유엔 파병의 숨은 조력자가 바로 스탈린이라는 것이죠. 1950년 6월 27일 유엔안전보장 이사회에서 유엔군 파병결의가 이루어지는 데 아시겠지만 상임이사국의 한 나라가 소련입니다. 상임이사국의 권리가 5개 나라에서 한 나라라도 거부를 하면 결의가 불가능 하죠.
최원정: 만장일치가 되어야죠.
류한수: 그런데 스탈린의 명령을 받은 소련 대표, 주유엔 소련대표 말리크가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거부권이 행사되었으면~
허준: 미군만 오고 유엔군은 못 오게 되는 거죠.
이시원: 근데 왜 거기서 불참했어요?
류한수: 그것이 바로 수수께끼입니다.
정병준: 다양한 가설이 있습니다. 들어나지 않은 스탈린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인데요. 첫번째는 이런 겁니다. 유엔에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스탈린이 배후에 있다는 게 입증이 됩니다. 스탈린이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입니다. 두번째는 참석했는데 유엔 안보리 거부권 미행사할 경우는 뭡니까? 사회주의 형제국에 대한 배신이야, 배반이야, 참석할 경우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입니다. 그래서 스탈린은 거부권 행사가 거부권 미행사 대신에 보이콧을 했습니다. 스탈린의 판단을 알 수는 없지만 만약에 우리가 참가해서 비토를 하더라도 결국 미국은 파병을 할 테니까 우리는 잠자코 있는 게 낫겠다. 이것이 사실은 스탈린의 속마음이었다 라고 현재는 일반적으로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류한수: 스탈린이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이었던 고트발트에게 보낸 편지가 있는데 이 편지의 내용이 뭔가 하면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이 항의했던 거에요. 왜 거기에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아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느냐 했을 때 거기에 대한 답변을 하죠. 여기에 보면은 미국이 극동문제에 정신이 팔려 유럽에서는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으니 유럽에서 우리가 힘을 키울 수 있는 기회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최원정: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권 나라이니까 우리 유럽에서 공산권 나라끼리 힘을 써보자 미국을 저기에 잡아두고
최태성: 이쯤되면 스탈린은 천재야! 전 세계가 내 손 안에 있다는 애기야.
류한수: 스탈린의 입장에서는 전격적으로 한반도를 공산 진영화하는 것도 좋지만 미국을 끌어들여서 미국이 아주 고생하고 힘들어하는 상황을 만들어 놓으면 이 자체가 소련에게는 득이 된다 이렇게 생각했던 거에요.
최태성: 지금 상황은 벌어졌고 6.25전쟁을 통해서 스탈린은 미국하고 중국을 동시에 누룰 수도 있어요. 게다가 유럽에 까지 더 힘을 키울 수 있는 상황
최원정: 일타쌍피를 할 수 있는 정말 외교계의 타짜! 그렇게 정리가 되겠어요.
---------------(동영상: 1950년 6월 25일):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의 주도로 인천상륙작전 실시, 유엔군 합세로 뒤집힌 전쟁의 판세,
정병준: 스탈린이 냉큼 마오쩌둥 한테 이렇게 애기합니다. 약속한 대로 5개, 6개 사단을 보내, 마오쩌둥이 13일까지 전쟁을 결정할 때까지 스탈린과 마오쩌둥 간에 한국전쟁에 파병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가지고 논란이 벌어집니다. 핵심은 뭐냐 마오는 전략적으로 파견해야 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뭐가 무서워요? 미군의 공군이 무섭습니다. 그리고 무장도 중국은 형편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무기를 달라고 그래요. 공중 엄호가 필요하다. 그리고 무기를 달라. 스탈린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래 주겠어, 그런데 말야. 준비는 두 달 뒤에 되겠는데~
이시원: 또 발을 빼네요.
정병준: 안 도와 주겠다는 게 아니라 주는 데 두 달 걸린다니까
류한수: 스탈린의 제일 목표가 미국과의 정면충돌을 피하는 것이었다고 다시 한번 상기해야 될텐데요. 소련의 연해주에 배치된 비행단이 있었거든요. 제공권이 미국에 있기 때문에 전황이 불리해 지니까 그래 연해주에 있는 소련 항공기 40대를 지원하겠다 라고 결정을 합니다. 그래서 계획대로 라면 1950년 10월 3일에 투입이 돼서 미국과 공중전을 벌여야 되는 상황인데 계획을 실행하기 직전에 취소가 되거든요. 취소되는 이유를 살펴보자면 소련 비행기들이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서로 교신을 해야 될 텐데 당연히 교신을 러시아어로 하겠죠. 러시아어로 이루어지는 교신이 미국에게 잡히면은 여기에 소련이 직접 개입했다는 것이 딱 걸리기 때문에 피한 것입니다.
정병준: 마어쩌둥이 그러면 파병을 안하겠다고 결정을 해요.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이렇게 편지를보냅니다. 중국 동지들이 지원을 안해 주겠대. 너희는 만주로 철수해서 빨치산이나 해야돼. 김일성과 박헌영이 당황망조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스탈린과 마오쩌둥 간에 공군지원과 현대 무기지원을 둘러싼 공방이 오고 가는 순간에 김일성은 어디에 있었을까? 궁금합니다.
최원정: 김일성은 정말 어디에 있었을까요?
이시원: 전쟁 중이었으니까~
정병준: 1950년 10월 10일에 국군 제1사단에 의해서 원산이 점령됩니다. 그리고 10월 14일에 금천이 점령됩니다. 바로 평양 코 앞입니다. 평양 방어가 불가능하니까 10월 15일에 김일성은 최고 사령부는 덕천에 있는 옥천역 인근의 터널에 한 량의 객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였느냐 무전기를 휴대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최원정: 왜요?
정병준: 좋은 질문입니다. 그만큼 당황했습니다.
최원정: 너무 당황해서?
정병준: 10월 15읿부터 19일까지 북한군의 모든 부대와 통신이 두절된 상태가 되었습니다. 북한 주재 소련대사였던 스티코프가 이렇게 썼습니다. 스탈린에게 보고를 했는데 김일성은 신변의 안전위협을 느끼며 안색은 초췌해져서 우수에 젖어 넋이 나간 상태이다. 산에 들어가서 빨치산 활동이나 해야겠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건 사실은 옥천 역에 있는 터널 안에 있는 객차 안에서 어디와도 유무선 연락도 안되고 연락병도 없고 본인은 무전기도 없는 상태에서 5일 동안 사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최태성: 망연자실이었겠네요, 망연자실~
정병준: 그러던 찰나에 마오쩌둥이 결심을 하게 된 것이죠. 공군지원이나 현대전 무기가 없어도 참전하겠다. 10월 13일에 마오의 판단의 핵심은 이겁니다. 압록강까지 미군이 올라오게 되면 중국이 개입하고 싶어도 개입할 기회가 없다. 그러면 우리는 미국하고 싸워야 된다. 그러니까 그 전에 빨리 들어가는 게 중요하다.
내레이션: 1950년 10월 19일, 30여만 명의 중국군이 입국했다. 이들의 이름은 스스로 북한을 돕기 위해서 지원했다는 중국인민지원군, 이제 적의 주력은 북한군이 아닌 중국군이 된다. 한국군의 작전권을 유엔군이 가진 것처럼 북한군의 작전권도 사실상 중국군에게 넘어갔다. 한반도에 내전을 넘어 미중간의 국제전으로 확산한 한국전쟁, 그리고 1950년 11월 소련의 공군까지 합세하며 한국전은 국제전 양상을 굳혀갔다.
최원정: 아까 스탈린이 미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해서 공군지원 안 한다고 했는데 지금 보니까 공군지원 하는데요.
류한수: 그래서 스탈린이 소련공군을 지원을 하긴 했는데 상당히 거기서 몸을 사리죠.
이시원: 또 요?
류한수: 어떻게 해서 보냈는데 소련군 조종사가 아니라 중국 공군의 조종사처럼 위장을 하고요. 중국군복을 입고 교신도 중국어로 했다고 하네요.
이시원: 파일러트가 연기까지 했다고요?
정병준: 많이 죽었습니다. 소련 항공기가 335대 격추되었고요. 조종사 사망이 120명입니다. 중국 대련에 소련군 참전 묘지가 있습니다. 죽어서도 중국 땅에 묻혀있는 거죠.
최태성: 어쨌던 간에 6.25전쟁 과정 속에서 11월 1일이었죠. 사실은 중국군 총공세가 이루어지면서 결국은 맥아더가 1950년 12월 1일 유엔군은 후퇴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정병준: 아군은 중국군에 밀려 1.4후퇴에 38선 이남지역까지 퇴각을 하죠. 위기에 처했다가 유엔군의 반격으로 1951년 3월 14일에 서울 재탈환에 성공했지만 38선 인근에서 교착됐습니다. 이 순간에 51년 봄이 되면 누구도 전쟁에서 일방적으로 승리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 졌습니다. 전선에서는 주로 한국군 병사들이 많이 죽어갔고요. 미군은 제공권을 장악하여 북한군을 폭격해서 하루에도 수만 명씩 수천 명씩 죽었습니다. 산업시설은 붕괴됐고 인명손실은 커졌고 김일성으로서도 빨리 더 이상 승산이 없는 전쟁을 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빨리 종전을 하거나 빨리 휴전을 하거나 끝내기를 바랐습니다.
이시원: 근데도 전쟁이 끝나지 않고 계속 되었잖아요.
정병준: 아까 시작할 때 말씀드렸죠. 감독은 스탈린이고 이제 주인이 바뀌어서 마오쩌둥이 주연이고 김일성은 조연이에요. 스탈린은 전쟁이 싫지 않았습니다. 어찌 되었던 미국이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미국이 이 전쟁에 개입해서 미국의 모든 경제력 군사력이 한반도의 진흙탕에서 딩굴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개입할 때 제일 중요한 전장은 전략적 지역은 유럽입니다. 1951년 4월에 맥아더가 유엔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고 나서 미청문회에서 미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가 한 유명한 말이 있죠. “한국전쟁은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적과의 잘못된 전쟁이다”
최원정: 어떤 전쟁이든 잘 되는 전쟁은 없죠.
정병준: 그러니까요, 스탈린으로서는 이 전쟁이 나쁘지 않다는 거죠. 51년 7월 10일에 본격적으로 휴전회담이 시작되죠. 스탈린은 휴전회담이나 종전을 하고자 하는 김일성에게 뭐라고 얘기하느냐. 북한이 잃을 것은 사람 인명 뿐이 없어. 스탈린은 이 전쟁으로 인해 미국은 피가 거꾸로 솟을 것이다. 북한은 인명 손실 외에는 잃을 것이 없다.
이시원: 진짜 몹쓸 말이다. 지금 어떻게 보면 숱한 수만 명이 죽어나가고 있는데 지금 마오와 스탈린은 자기 이득만 생각하고 있는 거잖아요.
정병준: 마오의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52년 7월에 마오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조선 인민의 희생을 대가로 38선 지역의 입지를 강화하고 북조선과 동북지역은 사수된다” 스탈린이 그 말을 듣고 마오쩌둥 동지의 말이 맞다.
최원정: 맞다고 그래요?
정병준: 맞는 거죠. 마오쩌둥 한테도 이 전쟁이 나쁜 전쟁은 아니었죠. 왜? 중국의 제일목표는 중국혁명을 보위한다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드렸는데 전쟁 개전할 당시에 중국의 3분의 1이 미해방지구였습니다. 그리고 전쟁 중이었습니다. 신해방지구에 토지개혁이 필요했습니다, 제대로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이 참전하게 되자 모든 문제가 사라졌습니다. 내부의 문제는 외부의 강력한 적을 만나서 용해된 것이죠. 항미원조를 내세워서 반혁명분자 그러니까 반공산주의자들을 숙청했습니다. 토지개혁을 완수했습니다. 중국혁명이 항미원조라는 미국과의 전쟁으로 똘똘 뭉치게 되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중국이 100여개 사단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에 60여개 사단을 스탈린이 제공한 신형무기로 무장하고 한반도 전쟁에서 훈련시켰습니다. 중국군 현대화입니다. 그러니까 전쟁을 중단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김일성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게 사실은 한국전쟁 휴전회담이 2년간 더 지연된 중요한 공산측의 동기였습니다.
내레이션: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뇌출혈로 사망했다. 공산주의의 최고 지도자였던 스탈린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스탈린의 죽음은 평행선을 달리던 한국전쟁의 휴전협상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최원정: 갑자기?
이시원: 정말 이때 이야기는 확확 바뀌는 것 같애요.
정병준: 스탈린의 죽음은 비극적 이죠. 스탈린은 뇌출혈로 쓰러져서 사실은 치료 받을 수도 있는 기회가 있었다고 보는데 아무도 무서워서 사실은 침실의 문을 못 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탈린의 해악이 너무 심해서 주치의들도 다 죽이고 그랬기 때문에 독재자는 그렇게 죽게 되는 거죠. 스탈린이 사망하고 난 다음에 양측의 대표가 다 바뀌었습니다. 스탈린이 죽어서 말렌코프가 승계해 소련 지도부가 바뀌었고 미국 쪽에서는 아이젠하워가 신임 대통령이 되어서 대통령 선거전에 구호가 뭐였느냐 한국전쟁을 끝내겠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모두 전쟁에 지쳐있었고 전쟁을 끝내겠다는 지도부가 등장해서 스탈린이 사망하고 나서 2주 뒤인 1953년 3월 19일에 소련 각료회의가 전쟁을 조속하게 끝내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류한수: 공산진영 측에서 휴전을 받아들였을 때 자국 내에서 휴전에 대한 반발이 있었겠죠. 그런데 그 반발을 잠재울 수 있는 명분이 스탈린의 죽음으로 생겼던 것입니다. 당시 스탈린이 적어도 공산진영 내에서는 최고의 지도자 태양이었을 텐데 이러한 인물이 사망했으니 전쟁을 끌고 가는 것은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이런 식의 명분을 내걸어서 전쟁을 끝내는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겠죠.
정병준: 사실은 스탈린이 사망했지만 역시 소비에트 정부가 동일한 태도를 취한 명령이 있습니다. 바로 소련이 한국전쟁에 연루된 것을 철저히 감추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북한군 총참모장인 강건이 1950년 9월 8일에 안동 전선에서 지뢰를 밟아서 폭사합니다. 짚차를 타고 가다가 그런데 누구랑 같이 타고 갔느냐? 소련 군사고문과 같이 타고 가다가 폭사했습니다. 북한군은 난리가 났습니다. 미국도 소련 공군이 참전한 것을 알고 있었고 소련 군사고문단이 참전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일부터 들어 내놓고 떠들지 않았어요. 왜? 이 전쟁을 제한할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최태성: 그렇지
정병준: 우리는 북한과 싸우고 중국과 중국인민지원군과 싸울 뿐이지 소련을 상대로 열전을 벌이고 싶지는 않다.
최원정: 약간 사내 비밀연애 하는 느낌이에요. 누구한테도 걸리면 안 돼, 티 내지 마, 티 내지 마
이시원: 근데 다 알아
최태성: 씁쓸한 강대국 사이의 전쟁, 그런 전쟁 속에서 우리가 받은 피해는 어마 어마 하죠. 자~ 볼까요. 여기 지금 도표를 보시면 3년간 치른 한국전쟁의 피해 엄청났습니다. 일단 지금 한국군의 사상자와 행방불명 62만 명 정도가 되구요. 유엔군의 사상자는 15만여 명에 달합니다. 민간인의 경우는 100만 명에 달한 어마 어마한 숫자가 피해를 본 거죠. 북한 같은 경우는 북한-중국 측 인명 피해는 약 311만 명에 달하는 어마 어마한 숫자를 피해 본 것입니다.
최원정: 오늘 6.25 한국전쟁 73주년 기획으로 준비한 시간인데 특별히 감독급에 소련 스탈린 입장을 우리가 들여다 봤습니다. 근데 과연 이게 누구의 전쟁이었을까요?
정병준: 사실은 이렇게 많은 한반도 역사가 시작된 이래 최단기간에 최다의 희생자가 난 그런 전쟁이었습니다.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세계체제에서 변화된 것도 없었구요. 사실은 미국과 소련이 이 전쟁에 참가했지만 미소간에는 외교관계가 끊기거나 적대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반도는 남북으로 여전히 분단되었고 이 전쟁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할려고 했던 모든 시도들은 다 절멸되었습니다. 미소냉전 체제는 지속되었구요. 한국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53년 7월에 승자도 패자도 없는 휴전협정으로 끝났습니다. 아직도 기술적으로는 전쟁상태가 유지되는 기묘한 전쟁입니다. 전쟁이 이렇게 승패가 없이 득실을 헤아릴 수 없는 상태로 끝난 전쟁은 아마 유래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허준: 스탈린도 마오쩌둥도 미국도 지금 현재 전쟁을 끊은 것에 대해서 크게 손해 보는 것 없잖아 하고 전쟁의 대치 상황이었을 때 딱 한 국가만 우리는 이렇게 전쟁을 끝낼 수 없어 한 치의 땅이라도 더 가져야 돼 라고 하면서 공격했던 나라는 단 한 국가 대한민국 밖에 없었다 라고 저는 알고 있어요. 목숨을 걸고 땅을 밀어 올렸던 국군 장병 여러분들이 있었다 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최원정; 집에 달력이 있는데 6월 달을 보면,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 라는 문구가 있더라구요. 그러니까 평화 대의를 전쟁의 명분으로 찾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그런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415회 6.25 기획, 스탈린의 전쟁, 김일성 남침을 허락받다 에서 정리).
내용 요약
① 1950년 4월, 스탈린은 김일성과 세 번 마주 앉았다. 지난 일 년여 간 스탈린에게 남침허가를 제안한 김일성, 이를 절대 허락하지 않았던 스탈린은 연이은 회담 끝에 남한 선제공격을 허락한다. 1950년 봄, 한반도를 바라보는 스탈린의 셈법이 달라져 있었다. 공산주의 진영의 최대 지도자 스탈린의 남침 승인,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시작된다. 스탈린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통념이 있다. 대숙청을 자행하고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긴 사악한 독재자, 그리고 전 세계를 붉은 물결로 물들게 하겠다. 공산화 하겠다. 적화야욕에 불타는 지도자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린다. 그래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서 자국민과 여러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사악한 독재자로서의 측면은 맞는데 그렇다고 해서 스탈린이 전 세계를 공산화하겠다는 야욕을 품고 있었고 이것을 현실화하겠다는 생각을 했던 사람이냐? 여기는 이견이 있다. 스탈린의 목표는 미국과 정면대결을 하는 제3차 세계대전을 막겠다는 것이 제일의 목표였다. 그런 면에서 세계적화 야욕을 가진 그런 비현실적인 목표를 가진 정치가로서는 볼 수가 없다.
②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여기에 세 가지 언어가 쓰였다. 한국어, 중국어, 영어로 쓰였다. 즉, 유엔 지금 미국, 중국, 북한 혹은 한국이 이 휴전회담의 주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에 시작부터 끝까지 스탈린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스탈린이 주연이 아니라 감독이었다. 스탈린은 본인이 생각하기에 아시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제일 중요한 곳은 동유럽, 자신이 확보한 동유럽과 소비에트의 안정이었다. 그런데 49년부터 김일성이 계속 반복적으로 강하게 남한에 대한 공격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했다. 50년 초에 한국전쟁에 스탈린은 당시 무슨 생각을 했을까? 1940년대의 스탈린은 전 세계가 볼 때 그 무시무시한 아돌프 히틀러를 무릎 꿇게 했다. 위대한 군사압제자 전쟁의 승리자였다. 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현대전의 요체를 이해하게 됐다 그래서 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로 쿠르스크 전투가 있다. 독일에 가있던 전쟁지도불 빼앗아오는 중요한 전쟁이었다. 쿠르스크 전투(1943년)는 제2차 세계대전중 소련 쿠르스크 일대에서 벌어진 소련과 나치 독일 간의 전투, 소련군 170만, 야포 1만 9천 문, 전차-자주포 3600대, 항공기 3100대 동원, 사상 최대 기갑전 가운데 하나, 그에 비해서 한국전쟁의 규모를 살펴보자면 북한군 병력이 10만 명, 전차-자주포가 240대이다. 그래서 스탈린이 볼 때 한국전쟁은 규모가 아주 적은 전쟁이었다. 쿠르스크 전투의 20분의 1에 불과하다. 굉장히 손쉬운 전쟁으로 보였다.
③ 1949년 3월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모스크바를 찾아가서 스탈린에게 남한을 무력공격하고 싶다. 스탈린이 이렇게 이야기 한다. 공격하면 안돼. 왜? 첫번째는 북한군이 남한군보다 숫적으로 열세야. 무기도 열세였다. 두번째는 남한에는 주한미군이 있어. 미군이 개입하게 될 꺼야. 적대관계가 일어나게 되면 미군과 싸우게 되는데 너 되겠어? 세번째 미소간에 38선에 관한 협정이 있어. 그걸 깨뜨리고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하는 모험을 허락할 수는 없어. 동시에 네 마음은 이해한다. 기다려라, 선제공격은 안돼, 그렇지만 만약에 남한이 도발해서 침공해 온다면 네가 반격하더라도 모두 다 너를 이해할 꺼야. 그러니까 선제공격을 당한 다음에 반격하는 정의의 반격격전은 가능해, 이게 당시 스탈린이 한 말이다. 50년 6월에 만들어진 대남공격 작전계획이 그래서 반격계획이다. 지금 전쟁을 승인해 달라는 의미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승인해 달라는 의미가 아니다. 전쟁을 해야 되는 데 자금도 군사력도 도와 주어야 되는데 그래야 우리가 남한을 쓸어버릴 수 있으니 도와 주세요 라는 의미다.
④ 구소련이 붕괴되고서 러시아 문서가 공개되기 전에는 한국전쟁에 개전과 관련해서 온갖 설이 난무했다. 예를 들어서 김일성 주도설, 김일성-스탈린 공모설, 심지어는 스탈린 경악설까지 있었다. 한국전쟁을 스탈린 모르게 김일성이 일으켰다는 게 스탈린 경악설이다. 근데 이 시기에 스탈린이 허락하지 않은 결정하지 않은 전쟁은 있을 수 없었다. 아담 울람이라고 하는 하버드대 러시아 연구센터소장이고 소련 대외정책 전문가인데 이 분이 누가 주도했느냐 라는 논쟁이 가열됐을 때 이렇게 얘기했다. 운동 경기에서 선수가 자세를 낮춰서 준비 자세를 취했다고 해서 경기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경주는 출발이라고 하는 출발신호와 함께 시작된다. 스탈린이 한 일이 바로 이것이다. 근데 2년 넘게 김일성의 제안을 계속 거절하다가 1950년 4월에 스탈린이 다른 선택을 한다. 1949년 6월, 남북한의 군사적 불균형과 계속되는 북한의 남침 징후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한반도를 떠났다. 간접적인 침투나 교란행위는 벌어져도 소련이나 북한의 전면적인 침략은 없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편 1949년 말 중국의 패권을 둘러싼 전쟁,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여 국민당을 지원하던 미국이 개입을 포기하고 중국 전역이 공산화된다. 달라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스탈린은 이 변화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⑤ 중국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했다는 큰 변수가 생긴 거다. 중국 공산화 이전에 1947년 부터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주한미군 철수문제가 가열화됐다. 왜냐면 한반도에 두 개 사단 이상을 배치한다고 하는 게 군사전략적인 우선 순위에서 한반도는 그런 우선 순위가 아니라는 거다. 한반도 남한에 유지 가능한 정부를 수립하고 미군은 철수한다. 처음에는 48년에 철수할려고 했지만 계속 철군 계획이 연기되어 49년 6월에 철군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철군하고 보니까 중국도 공산화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정부 수립 전후해 가지고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병력이 무려 7만 7천여 병력이었다. 어마 어마하다. 그런데 1949년 6월 이후가 되면 꼴랑 500명이 남았다. 미국은 38 이북에 있는 체제의 중심은 김일성이나 북한 정부가 아니라 소련이라고 봤다. 남한에는 군사 고문단이 있고 유엔 한국위원단이 있다. 소련은 미국을 상대로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의도나 능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소련이 즉 북한이 남한을 공격한다고 하는 것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 라고 본 것이다.
⑥ 1949년에서 50년을 넘어가는 사이에 스탈린의 마음이 바뀐다. 왜 바뀌었는가를 생각을 해 보면 사실 스탈린은 그 이전에 중국 국공내전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결할 때 국민당이 미국의 지원을 받았고 세력이 컸다 라고 생각을 하였다. 공산당은 미약하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공산화된 이유가 국민당이 너무 부패하고 비효율적이어서 패권을 공산당에 넘겼던 것인데 여기에 스탈린이 상당히 고무되었고 그 다음에 미국이 사실은 개입을 해서 국민당을 지원하기 보다는 공산당의 중국 점령을 방조했던 거다. 그래서 스탈린이 볼 때 미국이 대륙까지도 넘겨 주면서 물러나는 데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개입하겠느냐 이런 판단을 했던 듯 하다. 또 하나가 소련의 원자폭탄 실험, 1949년 1950년 이라는 해에 스탈린에게 핵무기가 생긴다 (1949.8.29),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0일까지 김일성과 박헌영이 두번째로 스탈린을 만나러 갔다. 세 차례 회담했다고 한다. 사실은 러시아가 기록을 공개하고 있지는 않다. 공식적 기록 無, 김일성이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주한미군이 아무리 빨리 개입할려고 해도 한 달 이전에는 못 온다. 우리는 불과 3일 이내에 서울을 점령하며 전쟁을 끝낼 수 있다. 지도부가 붕괴되고 또 남한 내의 공산주의 세력 20만 당원이 봉기하면 우리가 밀고 내려가면 끝이다 이렇게 스탈린에게 얘기했고 그 노회한 스탈린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스탈린의 허락은 이렇다. 공격 OK! 그래 해도 좋다, 그런데 부대 조건이 있어, 마오쩌둥의 동의를 받아야 돼. 그래서 사실은 김일성과 박헌영이 50년 5월 13일부터 15일까지 베이징을 찾아가서 마어쩌둥과 두 차례 회담을 한다. 근데 마오는 무척 당황했다. 갑자기 김일성이 찾아와서 스탈린 따거가 OK 했다. 마오가 믿지를 못 한다. 그래? 내가 확인해 보지. 그러니까 스탈린이 이렇게 전문을 보냈다. 국제정세가 변했으므로 남북한 통일사업에 착수하겠다는 북한 동지들의 제안에 동의하였음, 스탈린은 굉장히 단어선택 어휘력이 노회하다. 전쟁을 개전한다. 공격을 개시한다 이렇게 쓰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동의하였으니까 네가 동의하면 이 통일과업은 시작되는 거야. 그래서 스탈린은 책임을 누구한테 떠 넘깁니까? 중국이다. 중국과 북한의 하기에 전쟁 개시의 책임이 있다. 바둑으로 얘기하면 스탈린은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만약에 미국이 개입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우리는 병력을 지원하지는 않겠어! 그건 중국이 할 몫이야. 전쟁에 관한 모든 책임은 중국의 몫, 그러니까 스탈린은 전쟁을 결정할 권한도 있지만 나중에 책임을 중국과 북한에다 넘길 권한도 가졌다. 또 하나는 아마 마오쩌둥의 충성심을 시험하겠다. 그렇게 스탈린이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는 따거 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⑧ 스탈린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겼지만 가장 걱정했던 상황은 비록 나치 독일이 무너졌지만 독일이 워낙 강력한 나라이기 때문에 또 금방 재기할 것이다. 다시 일어난 독일이 이번엔 미국과 손을 잡고 결탁을 해서 한편이 돼서 소련을 공격하면 막아낼 수 없다. 이런 식의 상황 판단이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스탈린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러면 이제 마오의 선택만 남았다. 그러면 마오쩌둥의 경우는 스탈린 동지의 말은 알아들었어. 이 얘기는 총칼이 나한테 주어졌고 전쟁개시는 허락을 받았는데 칼을 들고 들어가 근데 책임은 내가 안 질 꺼야. 그러면 전쟁을 이겨야 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결단을 지금 마오쩌둥은 내려야 되는 상황이다. 지금 마오의 마음은 복잡했을 거다. 왜냐면 49년에 중국대륙을 평정했다고 하지만 아직 3분의 1이 미해방이 되었다. 남은 것은 타이완이었다. 51년에 타이완을 통일 병합한다. 지금 문제된 바로 그 타이완이다. 그 다음에는 한반도 통일문제를 지원할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해공군이 없었기 때문에 무조건 이런걸 준비해서 타이완 침공을 준비하고 있는데 순간에 난데없이 김일성이 나타나서 스탈린 대형의 명령이다. 진위를 파악해 보자. 그리고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냈고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 내용을 보면, 너희들이 합의하면 전쟁할 수 있다. 그러니까 마오는 이렇게 얘기한다. 그러면 스탈린과 김일성이 합의했으면 전쟁할 수 있어, 마오도 또 그렇게 얘기한다. 당시에는 스탈린과 마오 간에 한국전쟁에 관한 사전 논의나 합의나 결정은 없었다. 마오가 1949년 12월부터 1950년 2월까지 소련을 방문했다. 그래서 사실은 한국전쟁을 개전하기로 논의하고 합의했을 거라는 추측이 있었지만 그런 논의는 없었다. 대신 1950년 1월에 중소우호동맹조약이 체결된다. 이건 뭐냐면 스탈린이 얄타회담에서, 얄타회담(1945년)은 미국, 영국, 소련 등 연합국 정상들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두고 얄타에서 개최한 회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는 대가를 요구했다. 그 대가가 뭐였느냐 러일전쟁 때 빼긴 이권들을 되찿아야 되겠다. 사할린 섬, 쿠릴열도, 만주에 있던 뤼순항 & 다롄항, 철도 부설권 이런 걸 가져와야 되겠다. 연합국이 다 동의했다. 그래서 1945년 8월 이권을 획득했고 그것을 장개석 정부로부터 확인을 받았는 데 불과 5년 뒤에 마오가 덜렁덜렁 나타났는데 1949년 12월 스탈린의 70회 생일이었다. 70회 생일에 본인도 황제라고 생각하는 마오쩌둥이 모스크바에 나타나서 사회주의 형제국 끼리 이러면 되겠어요? 아니 제국주의 국가도 아니고 이권 활양이라는 게 말이 돼요? 제국주의 국가처럼,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에게 돌려주어야 되는 게 아녜요? 스탈린은 사실 마오쩌둥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할 말도 없었다. 왜냐면 마오의 말이 맞다. 아니 네가 제국주의 국가야? 사회주의 형제국가의 총사령관이라면서 어떻게 중국의 주권을 침략하는 이런 이권을 가질 수 있어? 스탈린이 아무 말도 못했다. 중소우호동맹조약이라는 게 말이 우호조약이지 실제로는 스탈린이 러일전쟁 때 빼앗겼던 이권을 다시 찾았는 데 그걸 마오쩌둥이 낼름 호주머니에 가지고 간 거다. 스탈린이 팔짱을 끼고 쳐다 봤다.
⑨ 제일 궁금한 건 1950년 1월 30일 마오쩌둥이 모스크바를 방문해서 우호동맹조약을 체결하는 중 중국과의 관계가 바쁜 와중에 스탈린이 평양주재 소련대사 시티코프에게 이렇게 전문을 보낸다. 김일성 접견해 주겠어. 그 친구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어. 사실 실질적으로 50년 1월 30일에 스탈린의 마음에는 김일성의 대남공격계획을 허락해야지 하는 결심이 섰다. 여하튼 간에 마오쩌둥도 굉장히 난감했지만 전략적으로 생각하면 언젠가는 미국과 한 판 붙게 되어 있다. 만약 한반도에서 북한을 잃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만주라고 하는 전선에서 미국과 상대하게 되고 타이완이라고 하는 전선에서 미국과 상대해야 된다. 그러니까 한반도에서 북한이라고 하는 존재를 살려두어야 된다. 이게 마오쩌둥의 가장 중요한 군사전략적인 판단이었다. 상황이 왔다, 마오쩌둥도 일단 받을 건 받았으니까 해줘야 된다. 지금 한국전쟁 주연, 조연 배우는 다 섭외했고 각본에는 스탈린이 머리를 굴리고 있다. 스탈린은 과연 어떤 행보를 보였을까?
⑩ 전쟁의 요소는 군인, 무기, 작전, 스탈린은 북한에게 이 세 가지 요소를 아낌 없이 지원을 했다. 소련이 제공한 무기로 북한군 10개 보병사단이 완편이 되었다. 전차여단 포병연대 그리고 일종의 특수 부대이지만 모터사이클 연대까지 창설이 돼서 북한의 종심전투를 할 수 있는 강력한 군대가 편성되었다. 여기에다 당시 소련에서 20명 가량의 군사고문단을 편성해서 보내주었는데 그들은, 2차 세계대전의 독소전쟁에서 실전경험이 많은 장교들 중에 3년제 군사 아카데미를 졸업한, 우리나라로 치면 연대장 즉 대령급 장교들이다. 전투를 경험한 사람이 알려주는 실전 경험은 훈련을 백번 하는 것보다 낫다. 그런데 스탈린이 북한을 지원할 때 대원칙이 하나 있었다, 절대 들키지 말 것, 그래서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월 7일, 소련측에서는 이런 명령을 내린다. 소련군사고문들은 민간복으로 갈아입고 군부대에서 그들을 특파원으로 불러라. 소련군관들이 부대에서 외출하는 것을 금지한다. 정말 괜찮은 위장이다. 전쟁터에 종군기자,
⑪ 스탈린의 노력은 이 뿐만이 아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기 3일전 1950년 6월 22일에 갑자기 북한 주재 소련대사관에 뜻 밖의 교신이 본국에서 날아온다. 전보교신 중단, 수신: 북한주재 소련대사관, 암호전문의 교신은 바람직하지 못하니 향후 일체의 암호전문을 타전하지 말라. 통신보안 유지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지금 북한군에는 소련의 군사고문단이 가 있다. 스탈린은 그들로부터 보고를 받고 싶고, 지시를 내리고 싶다. 그래서 이런 속임수를 하나 더 쓴다. 스탈린은 1950년 6월 23일 스티코프 대사에게 이런 기밀문서를 보낸다. 남조선에서 펼쳐지는 모든 작전에 관련된 암호문건을 오로지 마티로프 자하로프 동지의 기구를 통해서만 전달해라. 이런 내용이다. 마지막에 문건을 보내는 사람의 이름이 필리포프로 되어 있다. 필리포프란 이름은 스탈린이 1940년대 후반부터 즐겨쓰던 가명이다. 6.25와 관련된 모든 문서에서 스탈린이라는 이름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필리포프는 러시아에서 가장 흔한 성이다. 우리나라의 김 이 박씨 처럼, 원래 스탈린의 이름은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슈빌리’다. 이 이름은 주가슈빌리 집안의 비사리온의 아들 요셉이라는 뜻이다. 러시아 제국 시절에 혁명가로 활동했던 당시의 정치가들은 탄압을 피해서 가명을 썼다. 레닌 같은 경우는 시베리아에 레나강이 있는 데 레나강에서 온 남자 (레닌=레나강에서 온 남자), 스탈린 같은 경우는 스탈이란 말이 러시아어로 강철의 사나이 (스탈린=강철의 사나이), 스탈린의 오른 팔이었던 사람인 (당시 소련 외무상) 몰로토프는 몰로토프=망치이다. 심지어 중국과 북한이 주고 받은 문서에도 스탈린이라는 이름은 전혀 등장하지를 않는다. 이렇게 스탈린은 가명을 썼고 군사고문단에게는 철저히 위장을 명령하면서 한국전쟁에서 소련의 흔적은 남김없이 지웠다. 스탈린의 목적은 뚜렸했다. 소련과 한국전쟁은 상관이 없다.
⑫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서쪽의 옹진반도로부터 동쪽으로 개성 포천 춘천 주문진에 이르는 38선 전역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공격 3일 안에 한강 이북의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 하지만 이후 북한군은 3일 동안 그곳에서 지체한다. 북한이 주춤하는 동안 한국군은 전의를 다질 시간이 생겼고 유엔군과 미국 참전 또한 가능해졌다. 소련 군사고문단의 계획은 옹진에서 개전을 하고 서울-춘천-강릉을 해방하고 남한군의 주력을 제거한다. 그리고 3단계로 주요 도시와 항만을 장악해서 미군이 들어올 교두보를 아예 없애버리겠다. 이 작전은 원래는 한 달만에 이루어질 계획이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3일 이상 지체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독소전쟁을 해본 스탈린은 이 정도 규모의 전쟁이라고 하면 이 정도 병력과 군사역량을 투입하면 어느 정도 끝낼 수 있겠다. 굉장히 쉽다고 생각을 했다. 문제는 북한군의 능력이 현저하게 못미쳤다. 예를 들어서 제일 중요한 게 한강 철교가 파괴되는 걸 방치했다. 한강 인도교 폭파(1950.6.28)는 북한군의 남침을 제거하기 위해 국군이 한강대교를 폭파한 사건, 탱크가 있었지만 운영을 잘못 했다. 다리가 끊어졌는데 도하장비가 없었다. 그리고 일설에는 술자리 파티를 벌여서 최용건이 전화를 못 받았다고 한다. 한국군은 대안에 있던 영등포나 노량진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북한군의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방어전투를 벌릴 수 있게 하는 여력을 얻게 되었다. 게다가 미국이 빨리 움직였다.
⑬ 전쟁 발발 직후 유엔 안보리가 바로 한국시간으로 6월 26일이지만 미국시간으로 6월 25일 열려서 이틀 만에 한반도에 유엔군이 참전하도록 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킨다. 전격적인 속도다. 사실 미국이 중심이 된 미국의 해외 참전사 역사 가운데서 이렇게 빠른 속도, 신속한 대응, 단호한 대응, 그리고 결의는 없었다. 왜 이랬느냐? 이제 중국이 공산화됐고 한반도를 잃으면 2차 대전 패전 국 일본은 군대가 없다. 그러면 우리는 오키나와나 필리핀까지 밀려날 수 밖에 없다. 만약에 공산진영이 한 번 더 미국을 자극한다면 본 때를 보여주어야 한다. 미국은 이것을 북한이나 김일성의 공격이 아니라 스탈린과 소비에트의 공격이라고 생각 했고 그에 상응하는 태도로 개입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유엔 파병의 숨은 조력자가 바로 스탈린이다. 1950년 6월 27일 유엔안전보장 이사회에서 유엔군 파병결의가 이루어지는 데 상임이사국의 한 나라가 소련이다. 상임이사국 5개 나라에서 한 나라라도 거부를 하면 결의가 불가능 하다. 만장일치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스탈린의 명령을 받은 주유엔 소련대표 말리크가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 했다. 거기서 거부권이 행사되었으면 미군만 오고 유엔군은 못 오게 된다. 근데 왜 거기서 불참했는지 그것이 바로 수수께끼다. 다양한 가설이 있다. 들어나지 않은 스탈린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다. 첫번째는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스탈린이 배후에 있다는 게 입증이 된다. 스탈린이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이다. 두번째는 참석해서 거부권을 미행사할 경우는 사회주의 형제국에 대한 배신이다. 참석할 경우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이다. 그래서 스탈린은 거부권 보이콧을 했다. 스탈린의 판단을 알 수는 없지만 만약에 우리가 참가해서 비토를 하더라도 결국 미국은 파병을 할 테니까 우리는 잠자코 있는 게 낫다. 이것이 스탈린의 속마음이었다 라고 추정을 하고 있다. 스탈린은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고트발트가 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아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느냐는 항의를 하니까 보낸 답변 편지의 내용에 보면은 미국이 극동문제에 정신이 팔리면 유럽에서는 신경을 쓰지 못하니 유럽에서 우리가 힘을 키울 수 있는 기회다 라는 내용이다.
⑭ 스탈린의 입장에서는 전격적으로 한반도를 공산 진영화하는 것도 좋지만 미국을 끌어들여서 미국이 아주 고생하고 힘들어하는 상황을 만들어 놓으면 이 자체가 소련에게는 득이 된다고 생각했다. 1950년 6월 25일,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의 주도로 인천상륙작전 실시, 유엔군 합세로 뒤집힌 전쟁의 판세, 스탈린이 마오쩌둥 한테 이렇게 얘기한다. 약속한 대로 5~6개 사단을 보내, 마오쩌둥이 13일까지 전쟁을 결정할 때까지 스탈린과 마오쩌둥 간에 한국전쟁에 파병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가지고 논란이 벌어진다. 핵심은 뭐냐? 마오는 전략적으로 파견해야 된다라고 생각했다. 근데 미국의 공군이 무섭다. 그리고 무장도 중국은 형편없었다. 그러니까 무기를 주고 공중 엄호가 필요하다. 스탈린이 얘기한다. 그래 주겠어, 그런데 두 달 뒤에 주겠다. 스탈린의 제일 목표는 미국과의 정면충돌을 피하는 것이다. 소련의 연해주에 배치된 비행단이 있었다. 제공권이 미국에 있기 때문에 전황이 불리해 지니까 연해주에 있는 소련 항공기 40대를 지원하겠다. 그래서 계획대로 라면 1950년 10월 3일에 투입이 돼서 미국과 공중전을 벌여야 되는 상황인데 계획을 실행하기 직전에 취소가 된다. 취소되는 이유를 살펴보자면 소련 비행기들이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서로 교신을 해야 될 텐데 당연히 교신을 러시아어로 한다. 러시아어로 이루어지는 교신이 미국에게 잡히면은 여기에 소련이 직접 개입했다는 것이 딱 걸리기 때문이다.
⑮ 마어쩌둥이 그러면 파병을 안하겠단다.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편지를 보낸다. 중국 동지들이 지원을 안해 주겠대. 너희는 만주로 철수해서 빨치산이나 해야돼. 김일성과 박헌영이 당황망조해서 어쩔 줄을 몰라한다. 스탈린과 마오쩌둥 간에 공군지원과 현대 무기지원을 둘러싼 공방이 오고 가는 순간에 김일성은 전쟁 중에 어디에 있었을까? 1950년 10월 10일에 국군 제1사단에 의해서 원산이 점령된다. 10월 14일에 금천이 점령된다. 바로 평양 코 앞이다. 평양 방어가 불가능하니까 10월 15일에 김일성의 최고 사령부는 덕천에 있는 옥천역 인근의 터널에 한 량의 객차다. 그런데 문제는 무전기를 휴대하고 가지 않았다. 그만큼 당황했다. 10월 15읿부터 19일까지 북한군의 모든 부대와 통신이 두절된 상태가 되었다. 북한 주재 소련대사였던 스티코프가 이렇게 썼다. 스탈린에게 보고를 했는데 김일성은 신변의 안전위협을 느끼며 안색은 초췌해져서 우수에 젖어 넋이 나간 상태이다. 산에 들어가서 빨치산 활동이나 해야겠다는 말을 하고 있다. 김일성은 사실은 옥천 역에 있는 터널 안에 있는 객차 안에서 어디와도 유무선 연락도 안되고 연락병도 없고 본인은 무전기도 없는 상태에서 5일 동안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망연자실이었다. 그러던 찰나에 마오쩌둥이 결심을 한다. 공군지원이나 현대전 무기가 없어도 참전하겠다. 10월 13일에 마오의 판단의 핵심은 이거다. 압록강까지 미군이 올라오게 되면 중국이 개입하고 싶어도 개입할 기회가 없다. 그러면 우리는 미국하고 싸워야 된다. 그러니까 그 전에 빨리 들어가는 게 중요하다.
ⓐ 1950년 10월 19일, 30여만 명의 중국군이 입국했다. 이들의 이름은 스스로 북한을 돕기 위해서 지원했다는 중국인민지원군, 이제 적의 주력은 북한군이 아닌 중국군이 된다. 한국군의 작전권을 유엔군이 가진 것처럼 북한군의 작전권도 중국군에게 넘어갔다. 한반도서 내전을 넘어 미중간의 국제전으로 확산한 한국전쟁, 그리고 1950년 11월 소련의 공군까지 합세하며 한국전은 국제전 양상을 굳혀갔다. 스탈린이 소련공군을 지원을 하긴 했는데 상당히 몸을 사린다. 소련군 조종사가 아니라 중국 공군의 조종사처럼 위장을 하고 중국군복을 입고 교신도 중국어로 했다. 많이 죽었다. 소련 항공기가 335대 격추되었고 조종사 120명이 사망이다. 중국 대련에 소련군 참전 묘지가 있다. 죽어서도 중국 땅에 묻혀있다. 6.25전쟁 과정 속에서 11월 1일 중국군 총공세가 이루어지면서 결국 1950년 12월 1일 맥아더의 유엔군은 후퇴를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아군은 중국군에 밀려 1.4후퇴에 38선 이남지역까지 퇴각한다. 위기에 처했다가 유엔군의 반격으로 1951년 3월 14일에 서울 재탈환에 성공했지만 38선 인근에서 교착됐다. 이 순간에 51년 봄이 되면 누구도 전쟁에서 일방적으로 승리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 졌다. 전선에서는 주로 한국군 병사들이 많이 죽어갔다. 미군은 제공권을 장악하여 북한군을 폭격해서 하루에도 수천 수만 명씩 죽었다. 산업시설은 붕괴됐고 인명손실은 커졌고 김일성으로서도 빨리 더 이상 승산이 없는 전쟁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빨리 종전을 하거나 빨리 휴전을 하거나 끝내기를 바랐다.
ⓑ 감독은 스탈린이고 이제 주인이 바뀌어서 마오쩌둥이 주연이고 김일성은 조연이다. 스탈린은 전쟁이 싫지 않았다. 어찌 되었던 미국이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미국이 이 전쟁에 개입해서 미국의 모든 경제력 군사력이 한반도의 진흙탕에서 딩굴고 있었다. 미국이 개입할 때 제일 중요한 전장은 전략적 지역은 유럽이다. 1951년 4월에 맥아더가 유엔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고 나서 미청문회에서 미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한국전쟁은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적과의 잘못된 전쟁이다” 스탈린으로서는 이 전쟁이 나쁘지 않다. 51년 7월 10일에 본격적으로 휴전회담이 시작된다. 스탈린은 휴전회담이나 종전을 하고자 하는 김일성에게 북한이 잃을 것은 인명 뿐이다. 스탈린은 이 전쟁으로 인해 미국은 피가 거꾸로 솟을 것이다. 북한은 인명 손실 외에는 잃을 것이 없다. 마오의 유명한 얘기가 있다. 52년 7월에 마오가 이렇게 얘기한다. “조선 인민의 희생을 대가로 38선 지역의 입지를 강화하고 북조선과 동북지역은 사수된다” 스탈린이 그 말을 듣고 마오쩌둥 동지의 말이 맞다고 한다. 마오쩌둥 한테도 이 전쟁이 나쁜 전쟁은 아니었다. 왜? 중국의 제일목표는 중국혁명을 보위한다는 게 중요하다. 전쟁 개전할 당시에 중국의 3분의 1이 미해방지구였다. 그리고 전쟁 중이었다. 신해방지구에 토지개혁이 필요했다,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이 참전하게 되자 모든 문제가 사라졌다. 내부의 문제는 외부의 강력한 적을 만나서 용해된 것이다. 항미원조를 내세워서 반혁명분자 그러니까 반공산주의자들을 숙청했다. 토지개혁을 완수했다. 중국혁명이 항미원조라는 미국과의 전쟁으로 똘똘 뭉치게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중국이 100여개 사단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에 60여개 사단을 스탈린이 제공한 신형무기로 무장하고 한반도 전쟁에서 훈련시켰다. 중국군 현대화다. 그러니까 전쟁을 중단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김일성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게 한국전쟁 휴전회담이 2년간 더 지연된 중요한 공산측의 동기였다.
ⓒ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뇌출혈로 사망했다. 공산주의의 최고 지도자였던 스탈린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스탈린의 죽음은 평행선을 달리던 한국전쟁의 휴전협상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스탈린의 죽음은 비극적 이다. 스탈린은 뇌출혈로 쓰러져서 치료 받을 수도 있는 기회가 있었다고 보는데 그가 너무 무서워서 아무도 침실의 문을 못 열었다고 한다. 그리고 스탈린의 해악이 너무 심해서 주치의들도 다 죽이고 그랬기 때문에 독재자는 그렇게 죽게 되는 것이다. 스탈린이 사망하고 난 다음에 양측의 대표가 다 바뀌었다. 스탈린이 죽어서 말렌코프가 승계했고 미국에서는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 선거전 구호가 한국전쟁 종전이다. 그래서 사실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모두 전쟁에 지쳐있었고 전쟁을 끝내겠다는 지도부가 등장해서 스탈린이 사망하고 나서 2주 뒤인 1953년 3월 19일에 소련 각료회의가 전쟁을 조속하게 끝내기로 결정하게 된다.
ⓓ 공산진영 측에서 휴전을 받아들였을 때 자국 내에서 휴전에 대한 반발이 있었겠다. 그런데 그 반발을 잠재울 수 있는 명분이 스탈린의 죽음으로 생겼다. 당시 스탈린이 적어도 공산진영 내에서는 최고의 지도자 태양이었을 텐데 이러한 인물이 사망했으니 전쟁을 끌고 가는 것은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이런 식의 명분을 내걸어서 전쟁을 끝내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사실 스탈린이 사망했지만 역시 소비에트 정부가 동일한 태도를 취한 명령이 있다. 바로 소련이 한국전쟁에 연루된 것을 철저히 감추려는 것이었다. 실제로 북한군 총참모장인 강건이 1950년 9월 8일에 안동 전선에서 지뢰를 밟아서 폭사한다. 소련 군사고문과 같이 짚차를 타고 가다가 폭사했다. 북한군은 난리가 났다. 미국도 소련 공군이 참전한 것을 알고 있었고 소련 군사고문단이 참전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일부터 들어 내놓고 떠들지 않았다. 왜? 이 전쟁을 제한할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북한과 싸우고 중국과 중국인민지원군과 싸울 뿐이지 소련을 상대로 열전을 벌이고 싶지는 않다.
ⓔ 씁쓸한 강대국 사이의 전쟁, 그런 전쟁 속에서 우리가 받은 피해는 어마 어마 하다. 3년간 치른 한국전쟁의 피해 엄청났다. 일단 지금 한국군의 사상자와 행방불명 62만 명 정도가 되었다. 유엔군의 사상자는 15만여 명에 달했다. 민간인의 경우는 100만 명에 달한 어마 어마한 숫자가 피해를 봤다. 북한의 경우는 북한-중국 측 인명 피해는 약 311만 명에 달하는 어마 어마한 숫자를 피해 봤다. 6.25 한국전쟁 73주년 기획으로 특별히 감독급에 소련 스탈린 입장을 들여다 봤다. 사실은 이렇게 많은 한반도 역사가 시작된 이래 최단기간에 최다의 희생자가 난 그런 전쟁이었다.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 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세계체제에서 변화된 것도 없었다. 사실은 미국과 소련이 이 전쟁에 참가했지만 미소간에는 외교관계가 끊기거나 적대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반도는 남북으로 여전히 분단되었고 이 전쟁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할려고 했던 모든 시도들은 다 절멸되었다. 미소냉전 체제는 지속되었다. 한국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53년 7월에 승자도 패자도 없는 휴전협정으로 끝났다. 아직도 기술적으로는 전쟁상태가 유지되는 기묘한 전쟁이다. 전쟁이 이렇게 승패가 없이 득실을 헤아릴 수 없는 상태로 끝난 전쟁은 아마 유래가 없다. 스탈린도 마오쩌둥도 미국도 지금 현재 전쟁을 끊은 것에 대해서 크게 손해 보는 것 없잖아 하고 전쟁의 대치 상황이었을 때 한 국가만 우리는 이렇게 전쟁을 끝낼 수 없어 한 치의 땅이라도 더 가져야 돼 라고 하면서 공격했던 나라는 단 한 국가 대한민국 밖에 없었다. 목숨을 걸고 땅을 밀어 올렸던 국군 장병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 6월 달 달력에,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 라는 문구가 있다. 평화 대의를 전쟁의 명분으로 찾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