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에서 만난 남자/ 송덕희
20대 초반이 되어서도 내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살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학교를 얼른 졸업하고 발령 받아 아이들 앞에 서겠다는 기대로 차 있었다. 그러나 운명이 된 만남으로 내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대학 2학년 여름방학을 지루하게 보내던 8월 13일, 고향에서 친구가 왔다. 중·고등학교를 내내 붙어 다닌 사이다. 대학을 가지 못해 일찌감치 고향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다. 언니도 만날 겸 목포로 여행을 가자고 했다. 시내버스를 갈아타고 느긋하게 광주역으로 향했다. 한참을 기다려 목포행 완행열차를 탔다. 비둘기호는 긴 여름 나절을 뚫고 천천히 출발했다. 차창 밖은 는개로 뿌옇고 저 멀리 하늘가엔 날이 개는지 햇살이 비쳤다.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건 처음이라 들떴다.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재잘거렸다. 곧 비가 그치면 어디를 갈지, 내일은 무엇을 할지….
송정역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많이 탔다. 무심히 차창을 바라보던 내 눈에 웬 남자가 들어왔다. 검은 서류 가방을 들고 입구로 걷는다. 한눈에 봐도 말쑥하고 잘 생겼다. 후광이 비친다. 잠시 후에 거짓말처럼 그가 우리 의자 옆으로 다가와 섰다. 사람이 꽉 찼다. 마주 앉은 시골 할머니와 손금을 보며 운세를 점치고 희희덕거린다. 그는 곁눈질하며 웃다가 딴청을 피우다가 했다. 가끔 나와 눈이 마주쳤다. 몽탄역에서 옆자리가 생기자 곧 그가 앉았다. 어색할 틈 없이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에다 피부도 하얗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빛도 선해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서울에서 산다고 했다. 목포에 사는 후배를 만나러 간다고. 목적지가 친구 언니네와 같은 아파트다. “이런 인연이?” 하면서 웃었다. 열차에서 내리며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목포역에서 용해동 가는 버스를 타서 보니, 그 남자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내리는 곳은 당연히 같다. 드디어 남자는 같이 차 한잔하자고 했다. 거절할 만한 이유가 없다. 젊은 혈기로 충천한 데다 호기심도 가득했으리라. 다방으로 따라갔다. 통성명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일은 친구와 여행할 계획인데, 넷이 같이 다니면 어떻겠냐고 한다.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에 소나기가 요란하게 쏟아졌다. 비가 와서 못 만나면 어쩌나? 선잠을 자다 새벽녘에 깼다. 걱정과 다르게 구름이 걷히고 해가 쫙 비쳤다. 내 운명도 맑게 개어 햇살 밝은 날이 펼쳐질 거라는 터무니 없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친구와 함께 가는 발걸음은 무척 가볍다. 두근거린 마음은 진정이 안 되었다. 아마 친구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의 후배는 키가 더 작고 시골 티가 나는 검은 피부색이다. 잘 생기지도 못생기지도 않았지만, 성격은 수더분해 보인다. 스스럼없이 말을 잘 붙였다. 친구와 가까워지면 좋겠다 싶다. 넷이 갓바위 주변 바닷가를 걸었다. 마음 한편에서는 낯선 사람들과 곧 헤어질 거고 거리낄 게 없다는 생각이 일기도 했다. 좁은 방에서 따분하게 지내다 바닷바람을 쐬니 가슴이 뻥 뚫렸다. 모르는 남자들 앞이라 기분이 들떴다. 한껏 뛰고 걸으며 얘기했다. 친구가 어떤 사람이 더 좋은지 내게 물었던가? 나는 마음속으로 그를 점찍었다. 눈치를 보니 친구도 나와 같은 마음인 것 같았다. 벌써 머릿속은 삼각관계로 복잡해진 이야기를 쓰고 있다. 혼자 김칫국을 벌컥거리며 마셨다.
어디를 가고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오후에 우리는 광주로 돌아오는 기차를 탔다. 그도 서울로 가야 했으므로. 송정역이 다가오자 '이대로 헤어지면 끝이겠구나.'하던 차에 “차비가 부족해서 그러는데, 돈 좀 빌려 주시겠어요?” 그가 말한다. 수중에 얼마간 돈이 있던 친구가 내밀었다. 갚으려면 연락처를 알아야 한단다. 친구는 내 주인집 전화번호를 알려주라고 했다. 휴대전화기도 없던 시절이라 그게 유일한 창구였다. 내가 받아서 건네주면 됐다.
헤어진 다음날부터 연락을 기다렸다. 얼굴을 떠올리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뒤숭숭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일주일이 넘어가자 '돈만 떼먹고 연락을 안 하려는가 보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의 말과 행동으로 보아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열흘쯤 지났을까? “학생, 전화 받아.” 주인집 아주머니가 큰소리로 부른다. 두근거리며 뛰어갔다. 그가 만나자고 한다.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이어졌다.
어쩌다 지인들이 내 러브스토리를 듣고 싶어 하면 양념을 쳐가며 여기까지 말한다. 드라마보다 재미있다고 다음을 재촉한다. '여차여차해서 어느 날 부부가 되었다. 기차에서 만난 인연은 길게 이어진다더니 그게 맞을까? 우리는 아직 헤어지지 않고 느리고 길게 살고 있다.'라며 마무리한다. 너무 맥 빠지고 싱겁단다. 나는 결혼에 있어서 만큼은 운명론자라고 덧붙이는 걸 잊지 않는다.
내 첫인상이 어땠는지 딱 한 번 떠본 적이 있다. “작은 눈이 초롱초롱 빛났어. 무척 착해 보였지.” 그때를 회상하며 미소 짓는다. 정말 돈이 부족해서 빌려달라고 한 건지 묻지 않는다. 왕방울 같은 큰 눈에 서글서글한 성격의 친구보다 내가 더 맘에 들었는지도. 누가 먼저 좋아했는지, 따져보지 않는다. 기차를 타려는 그를 보고 심장이 쿵쿵했다고 고백하지 않는다. 같이 삶으로써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안다. 부부는 그렇다.
첫댓글 남편 분 머리 좋은데요. 하하! 선수의 냄새가 폴폴.
그런가요? 제가 순진했던가요? 아깝다, 이제 미룰 수 없어요. 하하하.
인연은 묘하게, 묘한 일로 맺어지나 봐요.
우연은 인연으로, 운명으로 연결되나 봅니다. 참 알 수 없는 일이지요.
와, 진짜 재밌게 읽었습니다.
세상에 신기하고 귀하지 않은 인연이 없는데
부부는 정말.
재미있었다니 성공했습니다. 하하. 부부는 알 수 없는 인연으로 맺어지나 봅니다.
영화 같은 이야기네요. 연애 세포가 거의 없는 저까지 설레게 하는 글입니다. 하하.
젊은 미옥님의 연애 세포가 훨씬 싱싱할 텐데요? 글 읽고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는 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겠지요? 하하하.
정말 인연이네요. 80년대 소설 읽는 줄 알았습니다.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멋진 남자와 결혼까지.
그니까요. 기차에서 만나면, 절대 헤어질 수 없는 질긴 인연으로 연결 된대요. 소설 읽는 재미를 느꼈다면, 괜찮은 인연일까요? 하하하. 고마워요.
드라마를 본 듯 합니다. 멋진 인연 잘 보았습니다.
이런 인연도 드물겠지요? 부러워 마세요. 희연님 사모님 만난 건 정말 행운이던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