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선물 / 김삼순
목련꽃 피는 4월이면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천리포 수목원이었다. 몇 년 전 고규홍 저 <천리포의 사계>를 읽은 후부터이다.
수목원의 설립자인 민병갈(칼 페리스 밀러: 1921-2002)은 1945년 미군 정보 장교로 이 땅을 밟았다. 그는 한국의 산하와 풍속에 매료되어 귀화했으며, 천리포 황무지에 나무를 심고 자식처럼 돌보았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으로 나무의 가지치기나 인간의 손길을 최대한 배제하고 생김새대로 가꾸었다. 나무가 행복한 숲이 그의 꿈이었기에 지난 2000년 국제수목학회에서 세계 12번째,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인증을 받았다 한다.
코로나19로 인한 거리두기가 3년 만에 완화되자 바로 밀러 가든 내의 게스트 하우스를 예약하였다. 한옥을 사랑했던 설립자는 수목원을 조성하면서부터 여러 채의 한옥을 지어 자신과 직원, 교육생, 후원회원들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그 후 2009년 밀러 가든이 일반에게 공개되자 게스트 하우스로 역할이 바뀐 것이다.
4월 25일, 오후에 예약한 호랑가시나무 집에 도착했다. 대문 쪽 울타리는 새잎이 꽃처럼 붉은 홍가시나무이고 앞쪽은 완도호랑가시나무 울타리이다. 마침 목련축제 마지막 날이라 정원 사잇길에는 인파가 넘치는데 집안은 고즈넉하였다. 거실 앞의 툇마루에서도 초록의 나무와 화사한 꽃들이 보였다. 휴식을 취한 후 봄볕도 기울어 집을 나섰다.
관람객들이 썰물처럼 떠난 정원은 호젓하였다.
이름도 생소한 여러 나무들과 꽃들과 눈 맞추며 걷는다. 민병갈기념관, 습지원을 지나 큰연못정원에 이른다. 연못가에 노랑수선화들이 장관이다. 지중해연안이 고향인 수선화는 에코와 나르키소스의 신화를 불러온다. 사랑이란 그렇게 얄궂고 죽음에까지 이르는 열병인가! 신화는 애달프나 푸름 속의 노랑수선화들은 마치 소풍 나온 유치원 아이들 같다.
수선화들이 부르는 봄노래를 들으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빅버사큰별목련부터 찾아보았다. 책에서 본 대로 큰연못 가장자리에 나무 밑동까지 마음껏 가지를 뻗고 크게 자란 나무였다. 그러나 꽃은 이미 시들어 연두색 잎들과 함께 가지에 달려있다. 다행히 가지 끝에 서너 송이 피어 있어 반가웠다. 꽃잎 안쪽은 흰색, 바깥쪽은 옅은 분홍색이 배어났다. 만개한 빅버사큰별목련꽃은 마치 연분홍 꽃구름처럼 아름답고 장관이었을 것이다. 가느다란 꽃잎이 여러 개 모여서 피어나는 종류를 ‘별목련’이라고 부른다.
큰별목련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만병초가 사로잡는다. 진달래과인 만병초는 가지 끝에 20-30송이가 모여서 둥글게 핀다. 꽃은 흰색부터 붉은 색까지 다양하며 스미스만병초는 붉은 장미꽃처럼 화려하였다. 만병초 잎에는 통증을 멎게 하는 효능이 있어 예부터 소염제, 진통제, 해열제로 쓰였다니 이름값을 하는 나무이다.
큰연못정원 포토 존에 몇 사람이 멋진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우리도 차례를 기다리며 가지마다 수많은 붉은 등불을 매단 불꽃목련을 감상하였다. 품종 명 벌컨(Vulcan)은 화산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왔으며 솟구치는 화산처럼 화려하였다.
남이섬수재원, 암석원, 어린이 정원을 지나 노을 쉼터로 향했다.
쉼터 편안한 의자에 앉아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본다. 날씨가 흐려 하늘과 바다가 온통 붉게 물드는 서해의 노을은 불 수 없었다. 대신 낭새들의 서식처였던 낭새섬이 보인다. 낭새는 낭떠러지에 집을 짓고 살아 ‘낭새’라고 불리는 바다직박구리의 다른 이름이다. 해안을 따라 난 노을길 산책로를 걸었다. 노을로 물든 바다를 보며 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도 공기가 좋아 이렇게 걸을 수 있으니 감사하다. 둥글 게 보였던 낭새섬이 위쪽으로 갈수록 새처럼 보인다. 노을쉼터에서는 보이지 않던 목 부분과 머리 부분이 보여서인가 보다. 갯벌이 드러나 섬으로 건너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 숙소 앞 정원에서 난생 처음 황색목련을 만났다. 마음껏 뻗은 가지들마다 꽃봉오리들로 환하다. 다른 목련은 지고 있는데, 이제 피기 시작하는 연노랑 꽃봉오리들이 비상하려는 새처럼 보였다. 천리포 수목원을 대표하는 나무가 목련이라고 한다. 목련과의 다양한 품종을 수집하여 400여 종의 목련을 감상할 수 있다. 1997 년 이곳에서 국제목련학회 총회가 열렸다는 말이 실감났다.
저녁에는 이곳의 향토음식인 박속연포탕을 끓였다. 근처 맛 집에서 사온 재료에는, 납작 납작하게 썬 덜 여문 박속과 생물낙지가 여러 마리 있어 국물이 시원하였다. 오랜만에 따뜻한 방바닥에 요를 깔고 단잠을 잤다.
아침, 창밖의 새소리에 잠이 깼다. 우리는 식전에 수목원 숲을 돌아보기로 했다. 집에서 나와 윗길로 오르며 걸으니 연못정원 주변과 달리 나무들이 많이 자란다. 새들의 노래를 들으며 숲길을 걷다가 심장이 떨리는 아름다운 꽃을 만났다. 누군가 붉은 꽃잎에 진노랑 수술의 몬지수레드 동백꽃 수십 송이를 주워서 피운 하트모양의 꽃이었다. 시들지 않고 툭툭 떨어진 동백꽃이 안타깝고 처연해서였을까? 가슴 저미는 사랑을 혼자 감당해야할 사람의 손길이었을까?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여주인공 비올레타도 떠오르고... 아직도 피고 지는 동백이 더러 있었다. 이곳에서는 300여종의 동백나무가 자라며 4월에 목련과 함께 핀다고 한다.
벚나무집을 지나 멸종위기 식물 전시온실에 가보았다. 습도와 온도가 높아서인지 후텁지근하였다. 식물을 진지하게 둘러보는 남편을 뒤로 하고 온실을 나왔다. 홀로 수련과 붓꽃이 자라는 연못가를 걸었다. 억새원이 가까이 있어 가을에는 하얀 억새들이 볼만하겠다. 멸종위기 식물들에 대해 설명해주는 남편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오르막 숲길을 걸었다. 수종도 외국명이고 키가 큰 나무들이 대부분이다. 외국의 숲속에 온 듯하다. 우드랜드를 키 큰 나무들처럼 성큼성큼 걸어 바닷가 노을길 산책로에 다다른다. 서해전망대에 이르니 낭새섬이 눈앞 500여 미터 거리에 있다. 어제는 썰물로 해안에서 섬까지 갯벌이 드러났는데 아침에는 바닷물이 들어와 다시 섬이 되었다. 낭새섬은 80년 대 초부터 호랑가시나무 등 자생 상록활엽수를 심어 생태계 복원을 시도하고 있다고 한다. 낭새들이 다시 돌아온 섬을 상상하며 바닷가 산책로를 걸었다.
4월 아침, 수목원의 새, 나무, 꽃 들이 생명의 찬가를 부르고 있었 다. 우리도 그들의 일부가 된 듯 삶의 환희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이 는 민병갈님이 남긴 아름다운 선물이리라.
[김삼순] 수필가. 《문예사조》 등단
전북수필. 전북여류문학회원
* 수필집 《사랑의 인사》
* 전북수필문학상 수상
선생님을 뵌 적 없지만, 지면으로 글을 만날 때마다 적이 감동을 받습니다.
꽃, 나무, 새들이 행복할 그들의 세상, ‘천리포 수목원’을 다녀오셨군요. 더불어 그곳에 들어 그들과 함께 숨 쉬고 거닐며 새 힘을 얻어오는 곳이죠. 아무나 흉내내기 힘든 일을 해내신 민병갈 님이 새삼 존경스럽습니다.
수선화들의 봄노래를 들으며 숙박까지 하고 오셨다니 부럽습니다. 다녀온 그곳이 새삼 눈에 선하네요.
첫댓글 코로나로 발이 묶이기 한참 전에 다녀온 곳입니다. 많은 감동을 안고 왔던 곳인데 누구는 이렇게 예쁜 글로 남기고 저는 다른 사람의 글을 읽으며 희미해진 추억이나 회상합니다.^^ 감사합니다.
선물이 아주 많군요....
어제 저는 선물로 아내를 소재 삼아
시를 지었습니다.
음악, 꽃, 친구 모두 선물입니다
아름다운 선물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