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보가 대 답하기를,
"자네가 어찌 알아. 원수 구라 하는 글자 군자호구란 짝 구(逑)자와 통용하니
어떠한 미인으로 내 짝 갚는다는 말이로세."
놀보 가속이 들어보니
이런 죽을 말이 있나. 못 할말을 연해 하여,
"만일 그러하다면 바람 풍자는 웬일인가."
"바람 풍자는 더 좋지.
태호 복희씨는 풍(風)자 성으로 왕 하시고,
순임금은 오현금으로 <남풍시>를 노래하고,
문왕 무왕은 장한 덕화로 태평한 시대를 만들었으며,
주공은 성인이라 <빈풍시>를 지으시고,
한태조는 수수풍,
광무황제는 곤양풍,
와룡선생은 적벽풍,
대풍이 세 번 한나라를 도왔으니 장하다 하려니와,
백이숙제 고절풍,
엄자릉의 선생풍,
도정절의 북창풍이 만고에 맑았으니,
그도 아니 좋을손가.
우리도 이 박을 심어 솔솔 부는 봄바람에 입묘하여 사월 남풍 점점 자라,
우순풍조 호시절에 꽃이 피고 박이 열려,
팔월고풍 따서 켜면 보물이 풍풍 나와 집안이 풍덩풍덩,
근래 풍속 좋은 호사 갑사 풍차 금패 풍잠 학슬 풍 안경을 떡 고이고,
은 장식한 백마 높이 타고 봄바람에 달려,
풍호무운하여 보고,
구름은 엷고 바람 가벼운데 오천이 가까운 데에 방화수류하여 보고,
풍류스런 사람 좋은 팔자 밤낮 풍악으로 지낼 적에,
네 귀에 풍경 단 집 방안에 병풍 치고,
풍로에 차관 얹고,
풍석 없는 자네 배를 선풍도골 내가 타고,
풍편에 가끔 들리는 방아찧는 소리 풍풍 찧었으면
경수에 바람은 없는데 물결 스스로 일어나 잘금잘금 날 것이니,
그만하면 풍족하지 잔말 말고 심어 보세."
책력을 펴놓고 씨뿌릴 날 가려내어 사당 앞을 급히 파고 못자리 할 거름을 모두 게다 퍼 쟁이고,
단단이 심었더니, 아침에 심은 것이 오후가 겨우 되어 솟아난 큰 박순이 수종난 놈 다리만큼 자라났다.
☆☆☆
놀보 아내 깜짝 놀라,
"여보시오, 아기 아버지 이것을 급히 빼 버리시오.
은나라의 나쁜 조짐으로, 아침에 났던 것이 저녁 때 큰 아람져서,
요물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정녕 재변이요."
놀보가 장담하여,
"나물이 되려는 것은 떡잎부터 알 것이니,
네다섯 달이 지나가면 억만금 세간살이 그 넝쿨에 날 터이니 일찍 아니 잡아 쥐지 않겠나."
이 박의 크는 법이 달마다 갑절씩이 더럭더럭 크는구나.
옆에서 순이 나고 순이 나고, 한 순이 커지기를 한 아름이 넘는구나.
어디가 턱 걸치면 모두 다 무너질 때 사당에 걸치더니 사당이 무너져 신주가 깨어지고,
곳간에 걸치더니 곳간이 무너지고,
왼 동내 집집마다 부지불각 턱 걸치면 무너지고,
무너지면 값을 물고 무너지면 값을 물어,
그렁저렁 이렇게 든 돈이 삼사천 냥 넘었으니, 놀보가 벌써부터 박의 해를 보는구나.
꽃이 피어 박 맺을 때에, 첫 번 바로 북통만씩,
십여 일이 지내더니 나루에 거루선만하고, 한 달이 되더니 조창 세곡선만 하고,
여섯통이 열렸거든 놀보가 좋아하며 가르키며 국량하여,
"저 통 색이 노란 수가 속에 정녕 금이 들었지.
황금 적금이라니 은도 누르겠다. 어느 통에 미인이 있노,
그 통을 똑 알면 포장으로 둘러 두게."
한참 이리 걱정할 때,
허망이라 하는 놈이 성명을 듣고 행사 보면 이름이 헛되지 않음을 알겠구나.
동네 사람 앉으며는 놀보 공론하는구나.
"놀보같이 약은 놈이 박에다가 쓰는 돈은 아끼지 않고 써내니,
무슨 꾀로 돈 천이나 쓰게 할꼬."
허망이가 장담하여,
"나밖에 할 이 없지." 하고,
놀보 집에 건너가서,
"여보소 놀보씨, 박통 일을 알 수 없어 걱정을 하신다니 나를 어이 안 찾는가?"
☆☆☆
놀보가 반겨 물어,
"자네가 알겠는가?"
허망이 대답하기를,
"모수가 자천 하는 말을 남은 암만 웃더라도 노형이야 속이겠나.
값 정하여 주었다가 박 타 보아 안 맞거든 그 돈 도로 찾아가소."
"그리 하기로 하세."
맞추면 천 냥 절가, 3백 냥 선금 내시고 박 속의 일을 알려 할 때,
허망이가 지닌 재주는 오행으로 점을 치는 복구분법이었다.
박통 노인 묏자리 복구분법으로 보아가니, 신통히 맞추거든.
첫통 보고하는 말이,
"모두 다 생금인데 누가 혹 가져갈까 노인 한 분이 수직한다. "
둘째 통을 한참 보다가,
"사람이 많이 들었구나."
놀보가 옆에 앉아 손수 장담하는 것이 더 우스웠다.
"집 지을 장인들과 종들이 들었나보이."
셋째 통 또 보더니,
"애겨 계집이 많이 있다. "
"서시가 나오는데 계집종들 따라오나,"
넷째 통을 또 보더니,
"풍류 기계가 많이 있다."
"내가 두고 행락하라고."
다섯째 통 가리키며,
"그 가마 아주 길다."
"나하고 서시 둘이 타라고."
여섯째 통 가리키며,
"그 말 아주 좋다."
"타고도 다닐 테요. 밧줄. 늘여 매어 두지."
"대강만 볼지라도 들 것 다 들었으니 어서 타고 보는 수일세."
책력을 펴놓고 길일을 가려내어 박통을 타려할 때,
섬 술 빛고, 섬 밥 짖고, 소 잡히고, 개 잡혀서 음식을 차린 후에,
팔 힘세고 소리 좋은 건장한 역꾼들을 질끈 먹고 댓 냥 삯에 30명을 얻어다가 생금통 먼저 탈 때,
놀보가 좋아하며 제가 소리 메기는데,
똑 금이 나올 줄로 알고 금으로 메긴다.
"여보소 세상 사람 금 내력 들어보소. 운남성 여수에 생겨나고,
흙 속에 묻히어서 전국 논객 소진은 구변으로 많이 얻어 실어 오고,
곽거는 효성으로 묻힌 황금솥을 파내었네."
"어기여라 톱질이야."
"오행의 가운데요, 팔음의 머리로다. 범아부를 이간시키기로 진평은 흩었는데,
고인이 주는 것을 양진은 어이 마다했는고."
"어기여라 톱질이야."
"나는 제비를 살렸더니 금 박통씨 얻었으니,
이 통을 어서 타서 금이 많이 나오며는 석숭을 부러워할까. 이 동네가 금록되리."
"어기여라 톱질이야."
"서시와 왕소군을 앉히도록 황금집을 지어 볼까.
자류청총 말을 달리게 황금채찍을 만들고저."
"어기여라 톱질이야."
슬근슬근 거의 타니 박통 속에 우군우군 글 읽는 소리가 난다.
"맹자 견양혜왕 하신대 왕왈 수불원천리 이래하시니 역장유이리 오국호잇까?
마상에 봉한식하니 도중에 늦은 봄을 보내는구나.
가련 놀보 망하니, 상전이라 할 자가 뵈지를 않는구나?"
☆☆☆
놀보가 듣고 하는 말이,
"어디 그게 박 속이냐? 정녕한 서당이지. 글귀는 당음인데,
강포가 놀보 되고, 낙교가 상전되러 그것은 웬일인고."
한참 의심하는 중에 박통 문을 반만 열고 노인 한 사람이 나오는 데,
차린 복색이 제법이었다.
헐고 헌 체뿔관에 빈대 알이 따닥따닥 붙고,
생마포 적삼 위에 개가죽 묵은 배자가 무릎 아래 털렁털렁하고,
구멍 뻥뻥 헌 중치막은 아랫단에 황토 뭍고,
대대로 물려받은 묵은 바지는 오줌 싸서 얼룩지고, 석 자 가옷 홑베 주머니는 일가산 을 넣어 차고,
따닥따닥 기운 버선 네날 초혜 들메 신고, 곱돌 조대 중동 쥐고 개털 부채로 얼굴 가리고,
놀보의 안방으로 제 집같이 들어가니, 놀보가 보고 장담하여,
"흥보는 첫 통 탈 때 동자가 왔다더니,
내 박은 첫 통에서 노인이 나오더니 그로만 볼 지라도 관동지분이 있고,
저 주머니 속에 든 게 모두 다 선약이지."
바삐 바삐 따라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토깽이같은 낮에 빈대 코가 맵시 있다. 뱁새 눈 병어 입에 목소리는 아주 커서,
"이놈 놀보야, 옛 상전을 모르느냐? 네 할아비 덜렁쇠,
네 할미 허튼덕이, 네 아비 껄덕놈이, 네 어미 허천례,
다 모두 댁 종이라. 병자 팔월일에 과거 보러 서울 가고,
댁 사랑이 비었을 때 성질이 흉악한 네 아비놈이
가산 모두 도적하여 부지거처 도망하니 여러 해를 탐지하되,
종적 아직 모르더니 조선 왔던 제비 편에 자세히 들어보니
너희 놈들 이곳에 있어 부자로 산다기로, 불원천리하고 나왔으니
네 처자, 네 세간을 박통 속에 급히 담아 강남 가서 고공살이를 하라."
☆☆☆
놀보가 들어보니 정신이 캄캄하여 아무렇게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라 하자 한들 삼대나 되었으니 증인 설 사람이 없고,
싸워나 보자 해도 이 양반 생긴 것이 불에 넣어도 안 타게 생긴데다,
송사를 하자 하니 좋지 않은 그 근본을 읍촌이 다 알 것이니,
어찌 하면 무사할까. 저 혼자 궁리할 때,
저 양반의 호령 소리가 갈수록 무서웠다.
"이놈 놀보야, 옛 상전이 와 계신데 네 계집, 네 자식이
문안을 아니 하니 이런 변이 있단 말이냐. 이리 오너라."
박통 속이 관문 같이,
"예."
범강·장달·허저같은 힘세고 무섭게 생긴 여러 놈이 몽치를 들고,
올바를 들고 꾸역꾸역 퍼나오니, 놀보가 이 광경을 보니 죽을밖에 수가 없었다.
엎디려 애걸한다.
"여보시오, 상전님, 이 동네가 반촌이오.
아비의 가세 부요키로 관을 쓰고 지내오니
이 고을 통경내에 모모한 양반 댁이 다 모두 사돈이요.
이 소문이 나게 되면 소인은 고사하고 그 양반들 우세오니,
자라는 초똑목 꺽지 않는다는 말을 생각하여
아무 말씀 마옵시고 속전으로 바치옵게 속량하여 주옵소서."
"그 사이에 여러 십년 네 놈의 아비 어미,
네 놈과 계집자식 고공살이 아니 하였으니 공돈은 어찌할꼬?"
"분부대로 하오리다. "
"네 놈 죄상을 생각하면 기어이 잡아다가 주야 악역 시키면서
만일 조금만 잘못하면 초당 앞의 말말뚝에 거꾸로 매어 달고
대추나무 방망이로 두 발목 복숭아뼈 꽝꽝 때려가며 부려먹자 하였더니,
네 말이 그러하니 또한 사람으로 좋게 대접하지. 공돈 속돈 바칠테면 지체 말고 썩 들여라."
☆☆☆
놀보가 물어,
"몇 냥이나 바치올지."
"너만한 놈을 데리고서 돈 다소를 다투겠나."
조그마한 주머니를 허리에서 끌러주며,
"아무 것이든지 여기만 채워 오라."
놀보놈이 제 소견에 저 양반 저 억지에 많이 달라 하게 되면 이일을 어찌할꼬,
잔뜩 염려하였다가, 이 주머니 채우자면 얼마 아니들겠거든, 아주 좋아 못 견디어,
"그리 하오리다. "
주머니를 가지고서 제 방으로 들어가서 돈 열 냥을 풀어놓고,
한 줌 넣고 두 줌 넣어 열 줌이 넘어가되 아무 동정도 없었다.
푼돈이라 그러한가. 양돈으로 넣어 보아, 닷 냥 열 냥 스무 냥을 암만 넣어도 간데 없다.
묶음으로 넣어 볼까, 스무 냥씩 묶은 묶음, 백 묶음이 넘어가도 형적이 없다.
이 주머니 생긴 품이 무엇을 넣으려 하면 주둥이를 떡 벌려서 산덩이도 들어갈 듯,
넣고 보면 딱 오무려 전과 도로 같아진다.
"어허 이것 어찌 할꼬."
돈 천 냥 잠근 궤를 궤째 모두 밀어 넣어도 어디 간지 알 수 없다.
이대로 하다가는 묵은 상전 고사하고 자신을 팔아 버려 새 상전 생기겠다.
부피가 많기로 곡식을 넣어보자.
쌀 백 석을 넣어 보아, 2백 석 3백 석을 곧 넣어도 그만이라.
벼 천 석 쌓은 노적 나무벼늘, 짚벼늘, 심지어 뒷간 거름 모두 다 쓸어 넣어도 발심도 아니 한다.
놀보가 겁을 내어 주머니를 들고 보아,
"이게 어디 구멍 났나?"
혼술 밑을 다 보아도 가죽으로 만든 것이 바늘 찌를 틈이 없다.
"애겨 이것 어찌할꼬. 사람 죽일 것이구나."
주머니를 가지고서 양반 앞에 다시 빌어,
"여보시오, 상전님, 이게 무슨 주머니오?"
"네 이놈, 왜 묻느냐?"
"아무 것이라도 들어가면 간데 없소."
"에라, 이놈 간사하다. 그럴 리가 왜 있으리.
조그마한 주머니를 채워 오라 하였더니,
아무 것도 아니 넣고 이 소리가 웬 소린고.
이리 오너라. 네 저놈 매를 때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