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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잠(梅花簪) * 매죽잠(梅竹簪)
비녀는 수식품(首飾品)의 일종으로 ‘잠(簪)’, ‘계(笄)’, ‘차(釵)’ 등으로 불린다.
쪽진 머리나 관(冠) 등 머리 형태를 고정하거나 장식하기 위해 꽂는 도구이다.
옥매화잠(玉梅花簪)
산호매화잠(珊瑚梅花簪)
(上):매화잠(梅花簪) (下):매죽잠(梅竹簪)
절개의 상징인 매화를 비녀에 새긴 것이 매화잠(梅花簪)이고
매화와 댓잎을 함께 새긴 것을 매죽잠(梅竹簪)이라하며
머리에 꽂아 일부종사의 미덕을 언제나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축일에 부녀자가 머리에 매화를 장식(梅花粧)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영칭왕비 산호매화잠(英親王妃 珊瑚梅花簪)
홍산호의 자연스러운 줄기를 그대로 이용, 매화나무에 만개한 매화를 양각하였다. 길이 33.2cm.
비녀 자체의 전체적인 형태는 매화나무와 같은 모양으로 하였으나, 비녀머리는 용머리같은
조형을 이루고 있다. 산호 아랫부분에는 금도금한 꽂이부분을 연결하였다.
은칠보봉황잠(銀七寶鳳凰簪 ): 비녀머리 부분
옥매화잠(玉梅花簪) 산호매화잠(珊瑚梅花簪)
매죽잠(梅竹簪) 매화잠(梅花簪)
미인이 머리 빗는 노래 (美人梳頭歌)-이하(李賀:唐 詩人791~817)
서시효몽초장한 西施曉夢綃帳寒 : 서시가 새벽꿈을 꾸는 비단장막은 차갑기만 하고
향환타계반침단 香鬟墮髻半沈檀 : 향기로운 머리카락은 늘어져서 반이나 단향에 잠긴다.
록로이아전명옥 轆轤咿啞轉鳴玉 : 옥두레박 삐걱거리는 소리가 까마귀 우는 것 같아서
경기부용수신족 驚起芙蓉腄新足 : 놀라서 깬 연꽃같은 미녀가 기지개를 켠다.
쌍난개경추수광 雙鸞開鏡秋水光 : 한 쌍 경대를 여니 거울이 가을 물빛처럼 빛나고
해환임경입상상 解鬟臨鏡立象牀 : 상아 침상 위에서 거울 마주하며 머리를 푼다.
일편향사운살지 一編香絲雲撒地 : 한 가닥 향기로운 머리카락 구름같이 바닥에 흘러내려
옥비락처무성니 玉鎞落處無聲膩 : 옥비녀가 떨어져도 소리 없이 매끄럽네.
섬수각반노아색 繊手却盤老鴉色 : 섬섬옥수로 새카만 머리를 다시 틀어 올리고
취골보차잠불득 翠滑寶 Ꟃ簪不得 : 비녀를 꽂으려해도 검은 머리 매끄러워 꽂지를 못하네.
춘풍난만뇌교용 春風爛慢惱嬌慵 : 봄바람이 무르녹아 미녀는 수심에 잠겨서
십팔환다무기력 十八鬟多無氣力 : 열여덟 머리숱 까만 아가씨 기운이 없구나.
장성권추의불사 粧成鬈鬌欹不斜 : 화장을 마치고 머리를 가지런히 빗고서
운거수보답안사 雲裾數步踏雁沙 : 구름 옷소매 하늘하늘 얌전히도 걷는구나.
배인불어향하처 背人不語向何處 : 말없이 돌아서서 어디로 향하는가
하계자절앵도화 下階自折櫻桃花 : 섬돌에 내려서 앵도꽃 꺾어드네.
- 비녀에 대하여 공부합시다-
비녀를 표현하는 한자어로 잠(簪)·계(筓)·차(釵)가 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단군이 나라 사람들에게 머리털을 땋고 머리를 가리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와 같이 머리털을 정리하게 되면서 머리를 고정시키기 위한 비녀도 발달하게 되었을 것이다.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성인이 되면 남자는 대개 상투였으며, 여자는 얹은머리·쪽찐머리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머리모양을 하였다. 따라서 정리한 머리가 풀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비녀의 사용이 더욱 많아졌을 것이다. 부여에서 발견된 백제의 은비녀는 한 끝이 고리모양으로 구부러져 있어 당시 비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신라에서는 진골녀(眞骨女)는 장식비녀[釵]에 글씨나 그림을 새기거나[鏤刻], 구슬을 다는[綴珠]것을 금하였다. 육두품녀(六頭品女)는 순금 사용을 금하고 은에 누각하거나 철주하는 것을 금하였다. 오두품녀는 백은을 사용하게 하였고, 사두품녀에게도 누각·철주와 순금 사용을 금하였다. 그리고 평인녀(平人女)에게는 놋쇠[鍮石]를 사용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삼국사기≫ 신라 흥덕왕 복식금제에 나오고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그 당시 비녀가 다양하게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녀자의 머리모양은 고대 이후 고려시대까지 별다름이 없어 고려의 여인들도 머리에 작은 비녀를 꽂았다. 조선 중기에는 가체에 의한 얹은머리가 유행하였다. 얹은머리(둘러머리)는 본머리[本髮]와 다리를 합쳐 땋아서 위로 둥글게 둘러 얹은머리모양이다. 다리를 본체에 고정시키는 데 비녀가 사용되었다. 궁중 의식용인 큰머리[巨頭味, 일명 떠구지머리]·대수(大首), 궁중 및 양반 집안의 예장용인 어여머리[於由味]등에도 비녀를 사용하여 가체를 고정시켰다. 얹은머리는 이에 소요되는 다리의 값이 너무 고가였고 장식을 위한 금옥주패(金玉珠貝)의 사치가 날로 심해졌다. 또 그에 따른 폐단이 많게 되자, 영조·정조 때의 발제개혁(髮制改革)과 더불어 이에 대한 금령이 여러 차례 있었다. 순조 중엽에 와서는 얹은머리 대신 쪽찐머리가 일반화되면서 다양하게 발전되었다. 쪽머리는, 대개는 머리를 땋아 아래 뒤통수에서 둥글게 서리고 쪽이 풀어지지 않게 비녀를 꽂았다. 얹은머리의 가체에 치중하였던 사치가 점차 비녀로 옮겨지면서 그 종류가 다양해졌고 기교도 발달하여 당시의 공예미술을 대표하는 것의 하나가 되었다. 이 밖에 비녀는 관을 고정시키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남자의 경우에는 면류관에 꽂는 옥잠도(玉簪導) 또는 금잠도(金簪導), 조신(朝臣)의 양관(梁冠)에 꽂는 각잠(角簪, 일명 木箴) 등이 있었다. 여자의 경우에는 화관에 비녀를 꽂아서 관을 고정시켰다. 부녀자의 수발용 비녀는 그 재료와 잠두(簪頭)의 수식에 따라 명칭이 달랐다. 재료에 따라 금비녀·은비녀·백동비녀·놋비녀·진주비녀·영락비녀·옥비녀·비취비녀·산호비녀·목비녀·죽비녀·각비녀·골비녀 등으로 나누어진다. 잠두의 수식에 따라서는 봉잠(鳳簪)·용잠(龍簪)·원앙잠(鴛鴦簪)·조두잠(鳥頭簪)·어두잠(魚頭簪)·매죽잠(梅竹簪)·매조잠(梅鳥簪)·죽잠(竹簪)·죽절잠(竹節簪)·목련잠(木蓮簪)·모란잠(牡丹簪)·석류잠(石榴簪)·가란잠(加蘭簪)·국화잠(菊花簪)·화엽잠(花葉簪)·초롱잠(草籠簪)·호도잠(胡桃簪)·심잠(蕈簪)·두잠(豆簪)·완두잠(豌豆簪)·민잠(珉簪)·말뚝잠·조리잠·연봉잠 등으로 구분된다. 이미 흥덕왕 복식금제에서도 그 일단을 보았듯이 계급사회에서는 존비·귀천·상하의 차별이 심하였으므로 금은·주옥 등 귀중한 재료로 만든 비녀는 상류계급에서 사용하였다. 서민계급의 부녀자는 나무[木]·뿔[角]·뼈[骨] 등으로 만든 비녀를 사용하였다. 또한 잠두의 수식에 있어서도 크게 차이가 있었다. 잠두의 수식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그 형태가 대부분 길상적(吉祥的)인 것으로 부귀·장수·다남(富貴;長壽;多男)을 기원하는 것들이다. 그 중에서 봉잠·용잠은 왕비나 세자빈이 예장할 때 다리를 드린 큰 낭자쪽에 꽂았다. 일반 부녀자는 혼례 때에 봉잠을 사용하였다. 그밖에 일종의 보조비녀로 두 가닥으로 된 차(釵)가 있다. 이것은 가체 또는 족두리,·떠구지 등을 머리에 고정시키기 위하여 보이지 않게 꽂았던 것으로 은으로 만들었다. |
재료는 위쪽부터 금도금, 나무, 청동, 놋쇠, 백동, 옥이며
비녀머리의 수식에 따라 도금용두잠, 흑각민잠, 칠보매죽장, 화엽장, 죽절잠, 조리잠 등으로 부른다.
아래서 두 번째 청동제 죽절잠은 고려시대 것으로 잠두는 음양각하여 촘촘한 대나무 마디를 나타내었다.
<한양대 박물관에서>
백동 죽절비녀(竹節蠶)
주석 칠보비녀
칠보비녀(칠보용잠, 칠보봉잠. 칠보매죽잠 외)
비녀의 종류
봉잠(鳳簪) - 비녀 머리에 봉황이 앉아 있다. 상당히 화려하며 섬세한 투각기법이 돋보이는데 왕세자비가 주로 꽂았다
용잠(龍簪) - 비녀 머리를 용으로 장식한 것으로 왕비가 주로 사용했고 사대부집에서도 예장용으로 큰 머리에 용잠을 꽂는
경우가 많았으며, 서민은 혼례에만 꽂을 수 있었다.
매죽잠(梅竹簪) - 사군자에 속하는 매화와 대나무는 정절을 상징하는데 조선조 여인들은 절개를 최고의 미덕으로 여겼던
까닭에 매죽잠을 즐겨 사용했다.
파란잠(七寶簪) - ‘비녀머리’만 ‘파란(칠보를 말하는데, 칠보는 일본식 명칭으로 우리말은 '파란'이다)’으로 만들고
형태를 쌍봉(雙鳳), 매죽, 파란봉잠 등으로 구분하여 제작했다. 외명부가 궁중 의식을 치를 때,
큰 머리를 하였을 때 꽂았다. ‘파란’은 유리 성질의 물질인데, 쇠로 된 그릇을 꾸미거나 녹을 방지하기
위해 그 표면에 발라 굽는 것으로 산화염, 붕사 및 유리가루로 만들었다.
옥호도잠(玉胡桃簪) - 옥으로 만든 호도모양의 비녀로, 사대부집 안방마님들이 좋아했던 비녀다.
민잠(珉簪) - 백동 또는 은에 파란을 입힌 비녀로 서민들이 사용했다.
흑각죽잠(黑角竹簪) - 무소의 검은 뿔을 대나무처럼 깎아 긴 비녀로 만든 것으로 중인 계급의 아녀자가 많이 사용했다.
옥비녀(玉簪) - 젊은 아녀자들이 많이 사용하였으며, 백옥비녀를 꽂은 여인은 장도(은장도)를 찬 경우가 많아 남자들이
치근거리지 않았다고 한다.
옥비녀
은비녀
첫댓글 비녀가 단군시대부터 기록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습니다.
공부 많이 했습니다. ^^
고맙습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