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6년 정월, 누르하치는 군대를 이끌고 요동의 중요거점도시인 寧遠城을 공격했다. 명나라 장수인 袁崇煥은 閩卒(복건성 출신 병사)인 ‘羅立’으로 하여금 3천근에 이르는 홍이포를 쏘게 했다. 대포알은 순환하며 날아가서 만주의 貴人을 죽였다. 현장에서 즉사한 것은 누르하치가 아끼던 장수 火狐狸와 누르하치의 姪孫이었다. 그리고 누르하치가 지휘하던 黃龍帳을 맞혔는데 이로 인하여 누르하치는 중상을 입고 결국은 죽고 말았다.
여기서 왜 하필이면 복건사람이 대포를 쏘았을까?
지리적으로 볼때에 복건성 泉州 刺桐港은 중국동남연해의 중부지역에 있으며, 지금의 대만해협에 연해있다. 원나라때부터 자동항의 해외무역과 경제는 최고로 평가받았다. 1291년 마르코 폴로는 여기서 배를 타고 가서 페르시아만까지 갔다. 이후에는 페르시아의 아랍인들이 계속 들어왔고, 민남사람들과 아랍인들은 결혼하여 자손을 낳았고 이들이 새로운 민남인이 되었다. 마르코 폴로가 떠난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여기를 거쳐서 주로 동남아로 이주했다.
이러한 특색 때문에 민남은 필리핀과 왕래가 빨랐다. 일찍이 명나라 만력2년(1574년)에 해적 林鳳을 토벌하는 사건때에 양측의 관리들이 접촉한 적이 있었다. 당시 필리핀은 스페인의 통치를 받았는데, 물자공급은 주로 중국상선에 의지했다. 화물중에는 생활용품이외에 화약, 탄환등의 군수물자도 있었고, 화약이나 동포를 만드는 원료도 있었다. 당시 마닐라의 민남인들은 수천에서 3~4만명에 이르렀고, 빈번한 왕래는 呂宋大銅砲(여송은 필리핀 루손을 의미함)의 주조법을 중국에 전수시키게 된다.
명나라 만력 31년(1603년)계묘년에 ‘여송참안’이 발생한 이후, 죽음에서 겨우 도망친 마닐라의 민남인들은 강철, 문명, 기술의 무서움을 깨닫는다. 이것들은 칼, 창보다 뛰어나서 그들은 서양인들의 기술을 배워야만이 이런 비극을 다시 겪지 않는다고 여겼다. 근면하며 지혜롭고, 배우기 좋아하는 민남인들은 스페인의 화포를 주조하는 법을 배웠을 뿐 아니라, 중국의 용철기술과 서구의 주동기술을 융합하였다. 미묘한 동(구리)의 용점(1083도)이 철(1583도)보다 낮다는 성질을 이용, 鐵胎(즉 砲管)을 냉각시킨 이후, 다시 진흙 혹은 밀랍으로 동벽을 주조하여 철태를 통과시켜 바깥의 동벽이 응고할 때의 수축력을 이용하여 포신의 압력강도를 강화시켰고, 수천근의 무게에 동철포관을 가진 신형 홍이포를 주조할 수 있었다. 이런 홍이포는 구형화포를 빠르게 대체했다. 구형화포의 탄약이 작고, 사거리도 짧고, 빠르거나 직사가 가능하지 않은 약점과 미약한 대포입구의 발사속도를 극복, 새로운 무기로 자리매김한다. 여기에 민남인들은 스페인의 화포기술을 배워서, 대포의 거리측정, 조준, 각도조정, 화약장전 및 발사요령을 익혀서 전수했다.
전쟁은 무기의 위력과 작용에 대한 역사의 증인이다. 사르후 전투에서 참패한 후, 7년이 지나서 영원대전이 일어난다. 민남인들이 주조한 11문의 홍이포는 성바깥의 연무장에 설치되었다. 이 11문의 홍이포를 둘러싸고 과연 누르하치와 대결할 것인지에 대하여 논쟁이 분분했다. 어떤 이들은 요동전투의 전철을 밟게 될 뿐이라고 겁냈고, 대포가 부서지면 아군만 피해를 볼 것으로 우려했고 어떤이는 홍이포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포구를 메워버리자고도 했다.
火器把總(화기를 다루는 장교의 직위)인 彭簪古와 孫元化는 북경에서 엄격한 훈련을 받은 자들이었고, 이 홍이포의 위력에 자신감이 있었다. 그들은 ‘성을 굳건히 하고, 대포를 사용하면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나립을 위시한 26명의 민남포병은 팽잠고의 전술을 지지했다. 수비장군인 원숭환은 이 11문의 홍이포가 포신이 길고, 두터우며, 사거리가 길어서 밀집한 기병을 포격하는 것이 매우 유용하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급히 성바깥의 홍이포들은 성내로 옮기게 하고, 동, 서, 남, 북의 4곳에 설치한다. 동시에 팽잠고에게 동, 북방의 지휘를, 나립에게는 서, 남방의 지휘를 맡겨 서로 호응하게 한다.
그 결과는 2005년 그 사실이 자세히 기록된 증거로 증명된다. 복건 석사자박물관은 민간에서 수집한 명나라 병부상서 황극찬이 그의 당형 황극립을 위하여 쓴 묘지명을 찾았다. 묘지명이라는 물증과 <明史>의 기록을 보니 두 가지 사실이 정확히 일치했다. 황극립묘지명에서는 영원대첩에서 전공을 세운 민남인은 황극찬이 질손 황주환에 부탁하여 천주에서 모집해온 사람중 하나라는 것이다.
“나(황극찬)는 병부상서로 있으면서, 누르하치가 요양을 공격하여 경사가 크게 놀랐다. 나는 형의 손자인 황주환으로 하여금, 동안(천주부 동안현)에서 여송포(즉 홍이포)를 잘 주조하는 자 14명을 모아서 북경으로 불렀다. 이들은 홍이포 30문을 주조하여 그 중에 6개를 요동으로 보냈고, 원숭환에게 수비하라고 했다. 남경에서 데려온 대포를 사용할 줄 아는 자 30인도 같이 보냈다. 그 중의 한 대포의 무게는 3천근인데 참장 이병성이 가지고 봉집보를 수비했다. 오랑캐장수 화호리가 2만명을 이끌고 성을 공격할 때, 1발로 적 800명을 죽였고 2명의 장수도 죽였는데 바로 화호리와 누르하치의 질손이다.”
이 당시에 누르하치 자신도 나립이 발포한 포가 황룡막장에 명중되어 중상을 입고 죽고 말았다. 연원대첩은 명나라가 무순을 빼앗긴 이래로 거둔 첫 승리였다. 명나라 희종은 매우 기뻐하며, “이 7~8년 이래로 가장 뛰어났다. 그동안 막혔던 가슴이 다 뚫리니 어찌 상쾌하지 않을 쏘냐!”고 했다.
천계6년 3월, 최대의 공을 세운 홍이포는 “안국전군평요정로대장군”에 봉해지고, 팽잠고는 지휘작전의 공로로 도독의 계급을 얻고, 민남병사 나립은 ‘파총’으로 승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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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 글은 중은우시님의 블로그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밝혀둡니다.
첫댓글 따끈따끈~~
아이고, 한자 어렵다....
1발로 800명이 죽은거라면 포환이 조란환이란건가요? 작렬탄으로 800명이 죽을 순 없을거 같네요.
근데 누르하치가 홍이포 맞고 죽었다는 주장에 반박하는 의견도 많더군요. 누르하치는 영원성 전투 이후 약 8개월 후에 죽었는데, 대포의 파편에 맞고 죽었다면 그렇게 오래 걸릴리가 없었다는 말도 있고...
혹시 철독이나 파상풍 같은거땜에 죽어서 그런거 아닐지..
[부상->2차 감염] 요런식으로 가면 8개월이아니라 8년도 갈 수 있습니다-_- 물론 고생을 바가지로 하고 죽는 길입죠.
윗글은 그냥 대포에 죽었다는 식으로 나왔지만, 파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죽었다~는게 더 맞죠.
명나라 내부가 어지럽지 않았다면 청의 성립은 꿈도 못꿨겠네요.
애당초 체급이 달라서요-_-;;
성립이후에도 체급비교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황태극이 즉위 후 수년간 산해관근방과 북경지역까지 줄기차게 공격해댔지만 나중에는 결국 정면대결로 명을 이길 승산이 없다 생각하고 화친을 요청했지요 뭐 결과야 "만력조까지 우리 건주3위에 속해있던놈들이 감히 칭제를 하고 대등한 조건으로 대우해달라는 이런 굴욕적인 화친조약을 들이밀다니!"했던 명나라 조정에 의해 생까임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