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비추어서 사물을 본다는 뜻으로, 하늘(道, 자연)에서 사물을 본다는 말이다.
照 : 비출 조(灬/9)
之 : 갈지(丿/3)
於 : 어조사 어(方/4)
天 : 하늘 천(大/1)
출전 :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모든 사물에는 저것 아닌 것도 없으며, 이것 아닌 것도 없다.
物无非彼, 物无非是。
저편에서 보면 보이지 않지만, 자기가 보면 안다.
自彼則不見, 自知則知之。
그러므로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도 또한 저것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으니, 이는 곧 저것과 이것은 잇달아 생긴다는 것이다.
故曰; 彼出於是, 是亦因彼。彼是方生之說也。
그러나 잇달아 생기자 잇달아 죽고, 잇달아 죽자 잇달아 생기며, 옮음이 있으면 옳지 않음이 있고, 옳지 않음이 있자 곧 옮음이 있으며, 옳다면 우기면 옳지 않은 게 되고, 옳지 않다면 우기면 옳은 게 된다.
雖然, 方生方死, 方死方生; 方可方不可, 方不可方可; 因是因非, 因非因是。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이런 고리의 안을 떠나 순수한 하늘(道, 자연)의 조명에 비추어 본다. 이것이야 말로 크나 큰 긍정이다.
是以聖人不由, 而照之於天。亦因是也。
이것이 곧 저것이요, 저것이 곧 이것이다. 저것에 또한 하나의 옳고 그름이 있고 이것에도 옳고 그름이 있는 것이다.
是亦彼也, 彼亦是也。
彼亦一是非, 此亦一是非。
과연 저것과 이것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저것과 이것은 없는 것일까?
果且有彼是乎哉?
果且无彼是乎哉?
저것과 이것의 대립이 그치는 것을 지도리(樞)라 일컫는다. 지도리라야 비로소 수레바퀴가 굴러 무궁한 변화를 제어할 수 있다.
彼是莫得其偶, 謂之道樞。
樞始得其環中, 以應无窮。
옳음도 하나의 무궁한 변화이고, 틀림도 또한 하나의 무궁이기 때문에 본연의 밝음에 비춰 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
是亦一无窮, 非亦一无窮也。
故曰莫若以明。
손가락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 아님을 밝히는 것은, 손가락 아닌 것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 아님을 밝히는 것만 못하고,
以指喻指之非指, 不若以非指喻指之非指也;
말[馬]을 가지고 말이 말 아님을 밝히는 것은, 말이 아닌 것을 가지고 말이 말 아님을 밝히는 것만 못하다.
以馬喻馬之非馬, 不若以非馬喻馬之非馬也。
천지(天地)도 한 개의 손가락이고, 만물(萬物)도 한 마리의 말이다.
天地, 一指也; 萬物, 一馬也。
(그런데 세속의 사람들은) 나에게 가(可)한 것을 가(可)하다고 하고, 나에게 불가(不可)한 것을 불가(不可)라 고집한다.
可乎可, 不可乎不可。
(莊子/齊物論)
여기서 장자는 '하나도 같은 것이 없는 사물이지만 서로에 대한 존재 가치는 같다'는 만물제동(萬物齊同)의 사상을 피력하고 있다. 즉 모든 사물은 저것과 이것으로 구분되어 서로 대립하고 배척한다.
그러나 유한을 초월한 자연의 이법에 비추어 보면 모두 대립되는 것에 의해 존재하는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모든 사물은 단독적,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면 온갖 분쟁과 갈등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 방생방사 방사방생(方生方死 方死方生)
삶(죽음)이 있기에 죽음(삶)이 있다
유가에서는 시비곡직(是非曲直)을 잘 가려내는 것이 지혜의 표상이다. 맹자에 따르면 시비지심(是非之心), 즉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마음'은 사단(四端)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지혜의 단서가 된다고 했다.
그러나 장자는 이 같은 공맹(孔孟)이 강조하는 절대주의적 철학에 동의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 굽고 곧음은 상대적 개념으로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선하거나 악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상대주의적 세계관이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을 들여다 보자.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다. 옳음(可)이 있기에 그름(不可)이 있고 그름이 있기에 옳음이 있다. 그러므로 성인은 일방적 방법에 의지하지 않고 (전체를 동시에 볼 수 있는) 하늘의 빛에 비추어보는 것이다(照之於天).
이것은 동시에 저것이고, 저것은 동시에 이것이다. 성인의 저것에는 옳고 그름이 동시에 있고, 이것에도 옳고 그름이 동시에 있다. 저것과 이것이 상대적 대립 관계를 넘어서서 없어지는 경지를 일컬어 도의 지도리(道樞도추)라고 한다.
한마디로 이분법적 사고방식의 결과인 편견을 버리라는 뜻이다. 사물을 한쪽에서만 보는 편견을 버리고 전체적으로 보면, 동일한 사물이 이것도 되면서, 저것도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세의 사상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가 말한 양극의 조화가 이루어진, 대립을 초월한 세계에서 사물을 보자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대립하고 모순되는 것 같은 개념들이 결국 독립한 절대 개념이 아니라 빙글빙글 돌며 어울려 서로 의존하는 상관 개념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세상을 보는 눈이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
삶과 죽음, 옳음과 그름 외에 도덕경에 나오는 선악, 미추, 고저, 장단의 개념들도 같은 맥락이다.
작금의 우리 사회는 이분법적 분열로 신음하고 있다. 남과 북, 서울과 지방, 영남과 호남, 보수와 진보, 부자와 서민, 정규직과 비정규직, 남과 여, 부모세대와 자식세대…
서로 내 편이 아니면 네 편으로 간주하며 극한 대립상을 보이고 있다.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더불어 살아가려는 관용의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 여의주와 말똥구슬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낭환집서(蜋丸集序)에서 진정지견(眞正之見)을 말하면서 든 얘기다. “말똥구리는 제 말똥구슬을 아껴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고, 용 또한 여의주를 가졌다 하여 말똥구리의 말똥구슬을 비웃지 않는다.”
진정지견(眞正之見), 즉 사물을 제대로 보는 것은 쉽지 않다. 규범적 판단이 너무 앞서거나 택일적 가치판단의 틀에 갇히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 어렵다. 우열의 척도를 접어두면 사물을 좀 더 제대로 볼 수 있을 텐데.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이런 얘기가 있다. “사람은 습한 데서 자면 허리병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죽게 되지만, 미꾸라지도 그런가? 사람은 나무 위에 있으면 벌벌 떨지만, 원숭이도 그런가? 셋 가운데 누가 진정한 처소를 아는 것일까? 사람은 가축을 먹고, 사슴은 풀을 뜯어 먹고, 지네는 뱀을 달게 먹고, 부엉이 까마귀는 쥐를 즐겨 먹는다. 넷 가운데 누가 진정한 맛을 아는 것일까?”
미색(美色)은 어떤가. “원숭이는 원숭이와 짝을 짓고, 고라니는 사슴과 사귀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노닌다. 모장과 여희를 보고 사람들이 아름답다 하지만, 물고기가 보면 물속 깊이 숨고, 새가 보면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고라니와 사슴이 보면 결사적으로 달아난다. 넷 가운데 누가 천하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아는 것일까?”
저마다 사는 곳이 다르고, 저마다 먹는 것이 다르다. 저마다 개성과 호감이 있다. 하나의 절대적 기준만으로 재단하고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오직 내 입장에서만 바라본다면(自我觀之) 인식의 한계가 분명하다. 인식 주체는 나일 수밖에 없지만, 인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다른 존재의 입장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장자(莊子)는 하늘에 비추어 보라고(照之於天) 했다. 실학자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도 의산문답(醫山問答)에서 말했다. “사람의 입장에서 물(物)을 보면 사람이 귀하고 물이 천하며, 물의 입장에서 사람을 보면 물이 귀하고 사람이 천하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보면 사람과 물 모두 균등한 것이다.”
저마다의 존재와 개성을 인정하는 것은 공존과 평화의 논리다. 서구 근대는 인종과 민족의 우열을 따졌다. 지배와 폭력의 논리다. 식민지 지식인 가운데는 자강(自彊)과 극복을 주장하다가 나중엔 강자에 복속하고 부역자로 전락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자기 비하와 부정, 오만과 멸시는 한 뿌리에서 나온다. 내 것을 아끼되 자만할 것 없다. 남의 것을 쓸데없이 부러워할 것도, 비웃을 것도 없다. 여의주를 부러워하랴, 말똥구슬을 비웃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