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화폐 신권 초상화에 관한 소고
지난 7월 3일 자로 일본의 화폐 초상화가 바뀌었다.
일만엔 권은 일본 경제(자본주의)의 아버지 시부사와 에이이치로, 5000엔 권은 일본 여성 교육의 선구자 쓰다 우메코로, 1000엔 권은 일본 세균학의 아버지 기타사토 시바사부로로 바뀌었다.
모두 메이지 유신 시대에 활동했던 인물들로 일본 근대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들이다.
화폐를 바꿀 때는 거기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이유에는 일본 사회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담길 것이다. 일본 사람이라면, 1000엔 권을 사용할 때마다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과학, 그것도 생명과학의 중요성을 느낄 것이다.
더군다나 바로 전 1000엔 권의 초상화 주인공이었던 노구치 히데요시가 기타사토 시바사부로의 스승이었음을 알게 되면서 일본 사람으로서는 과학, 특히 생명과학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의식이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쓰다 우메코는 일본 최초의 여성 도미(渡美) 유학생이었다.
일본 사람이라면, 5000엔 권을 사용할 때마다,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여성', '교육', '도전', '개척' 등의 단어를 떠올릴 것이다.
일본 사회의 성평등 의식과 다양성을 키우는 일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일본 제일은행의 소유주였고, 대한제국 당시 1902년부터 1904년까지 1원, 5원, 10원권 화페에 모두 그의 초상화가 담겼었다.
『논어와 주판』이라는 명저를 남겼다. 관료이자 정치인이자 기업인이었다. 피터 드러커가 “나는 경영의 본질을 시부사와 에이이치에게 배웠다”고 할 정도다.
일본 사람이라면, 10000엔 권을 쓸 때마다, 일본 경제를 재건해야 하는 사명감을 되새길 것 같다.
거기다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성공시켰을 때처럼, 현 일본을 혁신해야겠다는 다짐도 할 것 같다.
한국에서는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조선 경제 침탈의 주범이라며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나는 이제는 그런 수준의 비판은 그만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10000엔 권 지폐의 초상화가 후쿠자와 유키치였음도 부러웠지만, 시부사와 에이이치로 바꾸는 일본의 저력도 부럽다. 부러운 정도가 아니라, 많이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배워야 한다. 국가의 발전은 “혁신해야 할 시점에 혁신”하느냐 못하느냐가 결정한다. 막부(幕府)에서 메이지로 넘어간 일본은 혁신해야 할 시점에 혁신하였다.
조선은 혁신을 알지도 못했고, 하지도 못했다. 혁신한 일본이 혁신 못 한 조선을 식민지화 한 것이다.
지폐의 초상화를 바꾼 이번의 일도 내 눈에는 일본의 국가 경영 저력이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우리 대한민국 현재의 지폐를 보자.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와 세종대왕과 신사임당이다.
모두 조선 시대 인물들이다.
대한민국 지폐가 한 장도 예외 없이 모두 조선 시대 인물들로 되어 있다.
이건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가지고, 조선 시대의 메시지, 조선 시대의 비전을 산다는 뜻이다.
퇴계든 율곡이든 중국의 공자나 주자를 추종하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오죽하면, 퇴계를 해동주자(海東朱子)라 했을까?
해동은 중국을 중심에 놓고 동쪽 바다 건너에 있는 조선을 일컫던 말이다. 우리도 심지어는 우리 자신을 해동이라 불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신사임당의 사임(師任)은 중국 고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사표로 삼고 따르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한 집안에서 아들(율곡)과 어머니(신사임당)가 모두 지폐의 초상화로 등장한다.
그 집안이 지금 대한민국의 핵심 정신인가?
계속 중국을 추종하고 살자는 말인가? 대한민국의 여성들을 모두 신사임당처럼 살게 하자는 것인가? 주자학을 잊지 말자는 말인가?
일이 이 지경인데,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경제 침탈의 주범이라고 비판하는 것이 진실하게 들릴 수 있을까?
노영민 주중대사가 신임장을 받는 자리에서 천자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미로 선조가 바위에 새겼던 '만절필동(萬折必東)'을 방명록에 쓰고, 문재인 대통령이 중국에 가서 우리나라는 작은 봉우리로, 중국은 큰 봉우리로 표현하는 것이 큰 문제 없이 지나가고, 시진핑 주석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국은 원래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했다는 보도가 나가도 그 흔한 데모 한 번이 안 일어난다. 중국에서 한국의 영토를 탐내도, 역사를 탐내도, 문화를 탐내도 반응은 미지근하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아직 “반일”에만 집중하고 있다.
“한국은 원래 일본 것이었다.”는 말을 일본 수상이 미국 대통령에게 말했다고 해보자.
우리나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일상에서 매일 쓰는 지폐의 초상화를 조선 시대 인물로 채우고 있는 한, 우리의 정서적인 시대는 조선 시대일 수밖에 없다.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의 혁신도 아직 해내지 못한 우리이다.
(이글은 최진석 교수의 페북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