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리스트 '위안' 3번
나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당신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밖에 모릅니다.
시작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우리의 모든 것은 끝났습니다.
제대로 안아주지도 못했던 내 첫 아이, 헝가리의 제 1왕녀는 차가운 감옥에서 죽었다.
신성한 왕관을 머리에 얹는 것만으로 모두가 행복해지길 바라지는 않았다.
예리한 칼 두 개를 하나의 칼집에 꽂을 수는 없는 법.
나는 끝까지 싸웠고, 당신은 이겼습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제 아비의 죄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은 패배자는,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
어떤 말로 포장하려 해도, 내가 형을 죽게 만들고 조카를 내쫓은 찬탈자임은 변함없다.
내가 일생을 바쳐 얻은 진실은, 당신이었습니다.
이젠 진짜 말에 오르십시오. 약탈자들의 손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구하러...
모든 것을 믿었기에, 모든 것을 견뎌낸 그도 내 손을 놓고 천국으로 떠났다.
우리가 쏜 모든 화살들이 빗나간 것이라면, 함께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곁에 있겠다는 말만 남기고.
"궁상맞게 거기 서서 뭐하냐? 누가 보면 전쟁 다 말아먹은 줄 알겠네."
그의 빈 자리엔 감상에 빠질 시간 따윈 허락하지 않는, 시끄러운 놈이 서 있다.
"그냥, 별을 보니까 어린것이 생각나서."
"흠... 우리 글리터후프는 잘 있나 모르겠네. 화살이라도 맞고 죽을까봐 안 데려왔다. 말은 역시 독일산이라니까."
"뭐라는 거야... 모자란 놈이."
"내가 이따위 허튼 소릴 하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지 않겠냐?"
내가 본 세 명의 카즈메르는 모두 판에 박은 듯 닮아 있다.
누구도 그 앞에서 혈통에 대해 왈가왈부 못할 만큼.
"아세르가 저지른 짓은, 내가 대신 사죄하마.
내가 공범이니까. 그리고, 이젠 네놈의 공범이지."
다음에 만날 때는, 너나 나나 왕의 모습을 하고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싸움은 이제 시작이고,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네 탓이 아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맘이 놓이는군. 그런데, 그 으리번쩍한 도끼는 좀 내려놔... 무섭다고."
정말 내가 도끼로 머리라도 내리찍을 줄 알았는지, 놈의 손은 부자연스럽게 떨리고 있었다.
확실히 예전만큼의 생기는 찾을 수 없다. 그저 젊을 때 몸을 함부로 굴려서 벌을 받는 중이라고만 했다.
"바꿀래?"
"뭘?"
"네 왕관하고 내 왕관 말이야."
"도끼자루로 얻어맞기 싫으면 말 똑바로 해라. 무슨 뜻인지."
'너는 내 어머니의 배에서 나왔지만, 내 아버지의 자식이 아니다.'
"몰랐냐? 우리 영감탱이는 나보다 널 훨씬 좋아했거든."
내 존재를 부정하던 가혹한 말들 위로, 열 살짜리 아이같은 그의 푸념이 덧씌워졌다.
아무 대답이 없으니, 그가 한 마디를 덧붙인다. '나도 우리 영감탱이보다 네 아버지가 훨씬 맘에 들어. 흥...'
나는 막돼먹은 내 손자놈이, 결국은 마음을 돌이켜 바른 왕이 될 것이라고 믿소.
그는 칼보다는 저울로 나라를 다스리도록 선택되었으니까. 그 저울은 정직할 것이오.
참된 벗과, 복된 아들을 먼저 보내고도 살아가야 하는 내게... 아직 남은 단 하나의 바람을 전하리다.
그 놈을 도와주시오. 나를 죽을 자리에서 건져냈듯이, 끝까지 저버리지 말고...
그대가 정당한 권리를 되찾는 날, 이 편지를 기억해주길.
오래된 편지를 건네받아 읽은 그는, 다시는 잊을 수 없을 만큼 크게 소리쳐 울었다.
망할 영감탱이! 저런 말은 뒤지기 전에 해줬어야지. 내 눈을 보면서 말이야! 이제와 다 무슨 소용이야. 지옥에나 가버려!
가혹할 운명에 맞설 우리의 무기는, 사람 대 사람으로 서로를 꼭 품어주는 온기.
"야, 바줄 아르파도비치."
다 울고 난 그가 천연스런 목소리로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
"너 약탈 토글 켤 줄 알지? 그거 내 외손자한테 똑바로 가르쳐줘라. 난 죽었다 깨어나도 마자르인이 될 수 없거든."
"미친 놈..."
아들은 아비를 기억하고,
또 아들의 아들이 그 아비를 기억하며,
그들의 피는 이야기나 노래보다는 조금 더 오래 흐르리라.
"딩동댕~ 난 미친 놈이고, 얼마 못 가 뒤질 놈이야. 근데, 네놈은 이대로 죽긴 아까운 캐릭터니까 제발 오래 살아줘라."
"한 번만 더 그런 소리하면, 내 손으로 죽여버린다."
"살려만 다오."
슬프다. 저 지독한 위악이. 얼마 남지 않은 생명조차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1231년의 봄이 찾아오고, 전쟁은 끝났습니다. 그의 형 엔드레는 여전히 크로아티아를 공격하고 있지만, 이 쪽도 곧 결판이 날 겁니다.
바줄이 크로아티아 왕위를 먹으려고 하지 않으니, 여태 기사단에 몸을 숨겼던 다른 놈이 와서 채가려는 꼴은 솔직히 보기 안 좋습니다만...
동로마 제국조차 쿠만족의 손에 넘어가버린 지금, 그가 거둔 첫 승리는 엄청난 무게를 갖습니다.
"너희는 황제를 뭐라고 부르나?"
"체사시(Cesarz)... 입에 잘 안 붙네. 쓸 일이 없었으니까."
"차사르(Császár). 우리 마자르인도, 너희 폴란인도, 가져본 적 없는 이름이지.
죽는다는 소리 같은 건 집어치우고, 네 앞에 무엇이 올지 기대해라.
우리가 언제 이 왕같은 광대 놀음을 집어치우고 떠나야 할지는,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전에 뜻한 바를 어디까지 이룰지는, 더더욱 모를 일이지."
무뚝뚝하게만 굴다가, 이젠 제법 멋진 소리도 할 줄 아는 그 놈에게 나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나는 내가 위대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안다.
게다가, 누가 진정 위대한지를 가려내는 방법과, 정의의 규율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더욱 잘 알지.
너는 좋은 때가 올 때까지 기다렸고, 승자가 되었다.
위대한 벨러의 아들로 불릴 자격이 있는 자는 너뿐이다, 바줄. 내 말이 입에 발린 아첨으로 들리나?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를 때는, 진실을 말해야 하는 법이다."
만약 운명 뿐이라면, 자유는 없다.
하지만 만약 자유가 있다면, 운명이란 없다.
그 말은, 우리 자신이 곧 운명이라는 뜻이다. 벨러의 아들 바줄.
너의 말에 동의한다. 정의로운 카즈메르.
End title: 슈베르트 '물 위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