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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의 기억
저자: 진우백
2012년 10월 미국 그랜드캐년.
남자는 그랜드 캐년을 내려다보며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의 삶을 돌이켜보니 이가 갈렸다. 그는 1년 전만해도 정말 군개일학의 미남이었고, 모든 여자들이 그를 좋아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대책없이 오동통 해져서 정말 볼 거 없고 인기도 없는 남자가 되고 만 것이다. 남자는 이 모든 게, 그 몹쓸 연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대략 6천 5백만 년 전의 지구.
초식 공룡들이 다소곳이 얌전하게 삼삼오오 모여서 맛있게 풀을 뜯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수컷 티라노사우르스 한 마리가 천지를 울리는 포효소리와 함께 숲 속에서 튀어나왔다. 녀석은 크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풀을 뜯어 먹던 공룡들 중 제일 토실토실하고 맛있어 보이는 놈을 골라 엉덩이를 깨물었다. 초식공룡이 깜짝 놀라 긴 목을 뒤로 돌려보는 찰나, 육식공룡의 날카로운 이빨이 초식공룡의 보드라운 목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가엾은 녀석은 수컷 티라노의 맛있는 스테이크가 되어버렸다.
그 티라노사우르스는 이 지역의 모든 수컷 티라노사우르스 중에서 가장 거칠고 사납고, 수컷다운 녀석이었다. 수 많은 다른 수컷과 먹이나 암컷을 놓고 싸움을 하며 셀 수도 없는 흉터를 몸에 남겼지만 언제나 백전백승이었다. 그 흉터는 이 수컷의 훈장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암컷 티라노사우르스들은 그 수컷을 흠모했다. 그 중 한 암컷이 과감하게 수컷에게 구애의 표현으로 엉덩이를 들이민 적이 있었다. 낯 뜨거웠지만 이런 멋진 수컷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정도 수모는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컷은 본 척도 하지 않고 다른 암컷의 엉덩이에 코를 들이밀더니 그 암컷에게 가버렸다. 구애를 시도했던 암컷 티라노사우르스는 거절의 독배를 마신 슬픔을 언니 티라노사우르스의 품에 안겨 눈물로 달래었다.
수컷 티라노가 콧김만 한 번 뿜어줘도 암컷들은 황홀해 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녀석의 강력한 턱과 튼실한 허벅지는 너무나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수컷은 하루가 멀다하고 암컷을 갈아치우며 난잡한 교미생활을 했다. 암컷들은 그런 수컷을 험담하면서도 막상 자기에게 그 수컷이 다가오면 기꺼이 교미를 허락했다.
그런데 수컷은 자신의 수컷다움과 힘을 과시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많은 초식공룡들을 죽이고 또 먹어치웠다. 하루에 한 마리만 먹던 것이 두 마리가 되고, 세 마리가 되고, 어느 듯 다섯 마리가 되었다.
어느 날, 수컷은 또 숲속에 숨어 있다가 풀을 뜯던 초식공룡들을 덮쳤다. 그리고 제일 토실토실해 보이는 놈의 엉덩이를 깨물려고 하는데, 이상하게 초식공룡이 너무 빨리 달아나는 것 같았다. 그는 사냥에 실패했다. 그 이후로 시도하는 사냥마다 성공을 하지 못했다. 필요 이상으로 너무 먹다보니 살이 쪄서 몸이 둔해진 것이었다.
암컷들은 그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수컷은 슬퍼졌다. 수컷은 사냥에 실패해도 남들이 먹다 남긴 걸 예전에 먹던 만큼 챙겨먹었다. 일단 늘어난 위가 다시 줄어들지 않아 계속 먹어대지 않으면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살은 좀체 빠지지 않았다.
이제는 어떤 암컷도 수컷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수컷이 가끔 용기를 내어 콧김을 강렬하게 뿜으며 멋을 부리려하면 암컷들은 꺼지라는 손짓을 했다. 슬픔에 젖은 수컷은 자신의 삶을 비관하며 절벽 위에 서서 한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가 띵하게 어지러워지는 게 느껴졌다. 수컷의 몸 속에 잔뜩 쌓인 기름기가 피의 흐름을 막기 시작한 것이다. 수컷은 곧 어지러움이 강렬한 통증으로 변하는 걸 느끼고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수컷의 몸은 수 킬로미터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다.
잠시 후, 거대한 혜성이 지구에 충돌했고 그 충격으로 수컷의 시체 위에 엄청난 양의 흙과 돌이 쌓였다. 수컷은 그렇게 자연 속에 매몰되어 화석이 되었고 그 뼈의 일부는 수컷의 시체 아래에 있던 천연흑연과 뒤섞였다. 기나긴 세월이 흐른 뒤 그 흑연은 연필 공장에서 연필심이 되었다.
2011년 10월 대한민국.
그 연구소에는 아주 특출나게 인물이 출중한 남자 연구원이 하나 있었다. 그가 근무하는 연구소는 좀 특이한 곳이었다. 각종 초현상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것이 주된 과제였다. 과학계에서 외면을 당하지만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는 현상들, 과학을 초월한 현상들, 그래서 초현상이라 부르는 그런 현상들을 연구한다.
남자가 그 연구소에 막 입사한 어느 날, 그가 잠깐 화장실에 가기 위해 복도를 거닐었다. 다른 부서 여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복도에 있는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남자가 그녀들과 가까워지자 여자들의 눈빛이 굶주린 암사자 마냥 예사롭지 않게 변했다. 남자가 그들을 지나치고 소리가 들리지 않겠다 싶을 정도의 거리가 되자 소곤소곤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어머, 저 사람 누구야? 우리 연구소에 저런 월척이! 세상에! 무슨 모델이니?"
"이번에 새로온 신입이야. 내가 찍었으니까 침이나 닦아 이 여우야."
"하! 웃긴다 얘들, 저 남잔 내꺼야. 내가 제일 먼저 찍었어."
"호호호. 언니들, 내가 제일 어리다는 거 알죠?"
"그래서? 남자가 어린 여자만 좋아하는 줄 아니? 나처럼 성숙미가 철철..."
"언니는 성숙미가 아니라 노환이짆아요!"
"야! 너 콧구멍으로 커피를 마셔봐야 정신을 차릴거니?"
"킥킥..."
"근데, 남자가 너무 잘 생기면 인물 값 한다던데."
"그래, 인물값 할 거니까 넌 빠져."
"그러고 보니, 성격이 좀 괴팍하지 않을까?"
"그래도.... 저런 남자친구 한 번 사귀어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 때 옆에 붙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한 유부녀가 말했다.
"그럼 지금 가봐!"
"미쳤어요?"
"소원이 없겠다며!? 빼지 말고 한 번 덤벼봐. 사랑은 용기 있는 사람거야."
"쉿... ! 들으면 어쩔려구 그래요."
"왜? 들으면 뭐 어때, 해보는 거지. 내가 불러줄까? 우우웅..."
그녀는 유부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들 중 누구도 무시무시할 정도의 매력과 아름다움이 뿜어내는 근사한 남자의 위엄 앞에 섣불리 다가갈 용기가 없었다.
그런 재잘 거리는 소리가 남자의 뒤로 저 멀리 아득하게 들려왔다. 남자는 그걸 은근히 즐겼다. 아니, 꽤 즐겼다고 해야겠다. 하지만 정작 남자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연애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남자가 연애를 원치 않았던 게 아니다. 남자는 간절히 연애를 하고 싶었고, 지금도 절실하다. 그런데 그에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출생이후 지금까지 언제나 어디서나 거의 모든 여자들이 자기를 좋아하니, 여자들이 먼저 다가오겠지 하면서 소극적으로 기다리기만 했던 것이다. 물론 남자를 곱디고운 왕자님처럼 지나치게 감싸고 돈 엄마의 영향도 있었다.
남자의 소심함의 수준과 외모의 수준은 정비례했다. 간혹 용기 있는 여자가 덤빌 것도 같은데, 너무 외모가 출중하다보니 여자들이 도리어 부담스러워 접근을 잘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남녀 할 것 없이 미모가 지나치면 겉 인기는 많은데 정작 외로운 경우가 종종 있는 법이다.
그래서 남자는 그 잘 생긴 얼굴 들고 연구소에 박혀 연구에만 몰두할 수 밖에 없었다. 누가 데이트 신청이라도 해주면 못이기는 척 만나줄 수도 있을 텐데.... 물론 남자도 자신이 너무 소심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도 그런 성격을 좀 고치고 싶었다. 성격개조를 확실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큰돈이라도 아끼지 않고 투자할 용의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연구실에 새로운 연구 거리가 들어왔다. 연구소의 책임자인 소장이 남자를 불렀다. 소장의 옷차림이 풍기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나는 미스테리, 초현상 등이 좋아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보니 ‘그래도 연구소에만 있으면 답답해요.’ 라고 소리 지르는 것 같았다. 소장이 어딘가로 나가려고 채비를 하며 입을 열었다.
"이보게, 신입연구원! 이번에 하는 실험은 동물 실험이 될 거야. 시간이 좀 걸릴 지도 모르지만, 실력 발휘 할 기회야.“
“아.... 예....”
소장이 좀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말이야.... 결과가 좋아야 돼. 연구지원비를 계속 받으려면 이번에도 한 건 해야 한다구. 잘 할 수 있지?"
"아, 예.... 그냥... 제 나름대로 열심히...."
소장이 얼른 남자의 말을 잘랐다.
“어허! ‘그냥 나름대로 열심히’가 뭔가? 젊은 사람이 패기가 있어야지! 잘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실험 결과가 가설대로 나올지는 아직....”
"자네, 이집트의 왕 파라오를 아나?"
“아... 압니다만...”
“영화 ‘십계’ 봤나?”
“아니요, 아직....”
“파라오가 자신의 역사기록관에게 이렇게 말 했다네.”
“뭐라고요?”
“짐이 명령한 대로, 그렇게 기록하고!”
소장은 ‘기록하고!’에 드라마틱한 힘을 주어 말했다. 특히 ‘하고!’를 강하고 짧게 끊어쳤다. 왠지 그렇게 하니 거만하고 왕다운 결의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대사에 무게감을 싣기 위해 뜸을 좀 들이고는 곧 장엄한 표정이 되어 말을 이었다.
“.... 그렇게 되게 하라.”
3초간 두 사람 간에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남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건 좀....”
“어때? 무지막지하게 사나이다운 자신감! 거기다가 대장부의 패기가 느껴지지 않나? 그렇게 거만하게 역사를 기록부터 하고나서, 그 다음에 그렇게 되게 하라잖아! 파라오를 생각하면서 실험에 임하게.”
소장이 나가자 남자는 뚱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실험에 착수했다. 실험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물질이 지닌 역사가 그 물질에 접촉하는 동물의 성격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
남자는 커다란 방 안에 기계팔을 조종해서 연필 한 다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방 안으로 원숭이 10마리를 풀었다. 원숭이들은 이리 저리 뛰어다니기도 하고 연필을 갖고 장난을 치기도 하고 연필을 깨물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옆 방에는 또 한 다스의 연필과 원숭이 10마리를 풀었다. 그들 역시 비슷한 행동을 보였다. 첫 번째 방을 '가' 라고 이름 붙였고 두 번째 방을 '나'라고 이름 붙였다.
남자는 연필에 관한 데이타를 뽑아서 읽어 보았다. '나'방의 연필들은 평범한 연필들이었다. 그런데 '가'방의 연필들은 특이한 기록을 갖고 있었다. 그 연필들의 심에 육식공룡의 것으로 추정되는 뼛가루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유전자 감식을 통해 그 뼛가루의 주인으로 보이는 공룡 화석을 발견했는데, 녀석의 뼈에 난 상처들로 미루어 당대에 최고로 난폭하고 잘 나가던 녀석이었을 것으로 추정 된다고 했다.
이 연구소의 현장팀원들이 그 연필들을 구해 온 것이다. 한 번은 남자가 연구소에 찾아온 현장팀원 중 몇 명을 만날 일이 있었다. 그들은 검은 정장에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다닌다. 연구 대상이 되는 물건이나 기록을 어디서 어떻게 구해 오냐고 물었는데, 무표정하게 조용히 입술에 집게손가락을 갖다 댈 뿐이었다.
아무튼, 이 실험의 가설은 특정 사물에 얽힌 과거사가 그 사물과 접촉하는 동물의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었다. 언뜻 이상해 보이지만, 세포 기억설을 보면 그게 완전히 헛소리는 아닌 것도 같았다. 세포 기억설은 장기이식을 통해 기억이 전이되는 현상을 말한다. 예를 들면 무당의 각막을 이식 받은 환자가 나중에 귀신을 보는 능력이 생겼다는 식이다. 실제 사례도 상당히 많다. 화가의 심장을 이식 받은 윌리엄 쉐리던 이라는 63세의 남자는 초등학생 수준이었던 그림 실력이 이식수술 이후 갑자기 전문가의 실력이 되어버렸다. 또 제니퍼라는 7세 아이가 있었는데, 살해당한 랄프라는 소년의 장기를 이식 받았다. 수술이후 제니퍼는 꿈 속에서 계속 살인자에게 죽임을 당하는 꿈을 꾸었다. 나중에 그 꿈 속 살인자의 몽타주를 만들었는데, 그를 토대로 장기 기증자인 랄프를 죽인 범인을 검거할 수 있었다는 것 등이다.
남자는 결과를 지켜보기로 하고 지루한 데이터 작성 작업에 들어갔다. 거의 하루 종일 원숭이들의 행동을 모니터로 지켜보고 녹화한 걸 다시 돌려보면서 각 원숭이들의 행동 변화를 기록 했다. 처음 한 주 정도는 두 방의 원숭이들 모두 비슷한 행동을 보였다. 지루한 한 주가 지났다.
그리고 실험 2주 째가 되었다. '나'방의 원숭이들, 평범한 연필을 가진 원숭이들은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연필을 자주 갖고 노는 녀석들도 다른 녀석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가' 방의 원숭이들, 그 중에서 특히 연필에 집착을 보이는 몇 몇 원숭이들이 다른 원숭이들을 자주 괴롭히거나 공격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남자는 흥미가 생겼고, 조금씩 실험의 재미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3주 째가 되자 '가' 방의 원숭이 중에 늘 연필을 갖고 노는 녀석들이 이제 거의 깡패가 되어버렸다. 심지어는 그 연필로 다른 원숭이들의 엉덩이를 찌르기까지 했다. 소장은 실험 결과를 보고 아주 흡족해 했다. 그리고 남자를 더욱 격려하며 이번에는 '나' 방의 원숭이로도 실험을 해보라고 했다. 또 3주가 지나자 역시 그 평범했던 원숭이 중에 연필에 유독 집착을 하는 녀석들이 결국 깡패로 변해버렸다. 그들은 거칠고 공격적이었다. 마치 한 때 잘 나가던 그 육식공룡의 기운을 이어받기라도 한 듯이.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어느 날 저녁, 남자는 쓸쓸하게 혼자서 퇴근을 했다. 거리에는 징글벨 송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런데 남자의 귀에는 노래가 좀 다르게 들렸다.
"싱글벨, 싱글벨, 싱글 올 더 웨이..."
남자는 귀를 틀어막으며 마음속으로 소리 질렀다.
'나도 이젠 정말 연애 하고 싶어! 싱글 생활 좋아서 하는 거 아니라고! 엄마, 나 외로워!'
남자는 한 숨을 길게 내쉬며 무심코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런데 뭔가 손에 잡혔다. 꺼내 보니 핫초코 한 봉지와 귀엽게 접은 작은 쪽지 였다. 남자는 쪽지를 펼쳐보았다.
"오늘도 수고했어요. 열심히 연구하시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요. 따끈한 핫초코 한잔 하고 몸 녹이세요. 밖이 추워요. 감기 조심하시구요... 내일 봐요. 제가 누구냐구요? 당신에게 윙크하는 예쁜 눈을 찾아보세요. 호호호"
남자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자의 데이트 신청인가?! 이런 쪽지는 결혼하자는 뜻인가? 핫 초코는.... 아기를 원한다는 여자들만의 완곡한 표현인가? 내일 보자는 말은 무슨 뜻이지? 보면서 뭘 하자는 거지? 연구하는 모습이 멋있다고 했는데... 뒷 모습 말인가? 앞 모습 말인가? 나는 옆모습이 자신 있는데.... 그건 그렇고, 윙크하는 눈? 나한테 윙크하는 여자가 한 둘이 아닌데.... 방금도 지나가던 여자 한 명이 나 보고 윙크 했는데...
남자의 소극성과 부끄러움이 천년 묵은 용암이 분출하듯 폭발했다. 그리고는 수줍은 소녀마냥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입에 손가락 네 개를 집어넣고는 '어쩜 좋아, 어쩜 좋아' 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실험 4주 째가 되었다. 공룡뼛가루가 섞인 연필에 집착하는 원숭이들은 이제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들은 강하고 공격적이었고 리더십까지 있어보였다. 먹이를 줘도 그 포악한 녀석들이 먼저 실컷 포식을 하고 난 뒤라야 남은 것을 나머지 녀석들이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한 쪽 구석에서 힐끔 거리며 먹었다.
어느 날 남자가 일과를 마치고 퇴근 하려고 하는데, 문득 자기 책상에 또 쪽지 하나와 티 백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쪽지를 펴보았다.
"피곤하시죠? 오늘은 인삼차 하나 드릴게요. 드시고 가세요. 그런데, 아직 저 누군지 모르시겠어요? 하는 수 없죠. 제 번호, 여기 남겨드릴게요. 심심할 때 문자 주고받아요! 호호호."
남자는 무척이나 답답했었다. 자신에게 윙크를 하는 여자가 한 둘이 아닌데, 어떻게 그녀를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그냥 지나가며 눈을 깜박거리는 것도 자신에게 윙크를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도저히 구분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녀가 번호를 남겼다. 남자는 자신의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문자를 찍었다.
"고마워요, 인삼차 잘 마셨어요. 저 번에 주신 핫초코도 잘 먹었어요. 우리, 내일 저녁 퇴근 하고 7시에..."
거기까지 적다가 남자는 떨려오는 오른 손을 다른 손으로 붙잡았다. 너무 너무 긴장이 됐다. 너무 빨리 문자를 보내면 내가 여자만 밝히는 호색한이라고 여기지 않을까? 그리고 좀 남자답게, 건방지고 오만하게 반말로 해야 더 멋있지 않을까? 갑자기 파라오가 떠올랐다.
"고맙다. 인삼차는 잘 마셨다. 저 번에 준 핫초코는 나를 향한 너의 마음만큼 뜨거웠지. 우리, 내일 저녁 퇴근하고 7시에 정문에서 만난다. 그리고 네가 준 핫초코처럼 함께 뜨거워질 수 있도록 한다. 그렇게 기록하고, 그렇게 되게 한다."
그... 그래. 이게 좀 더 남자답고 멋있는 거 같기도 한데... 아닌가? 무례한가? 무례함과 남자다움의 차이는 뭐지? 그런 생각들로 남자의 머리가 어지러웠다. 심장이 마구 뛰고 누가 와서 자기를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엄마에게 전화해서 물어볼까? 하지만. 엄마가 다 큰 남자가 사소한 걸로 전화하면 안 된다고 했으니... 하지만 이건 사소하지 않아! 그래도 엄마가 사소하다고 하면 사소한 건데... 어쩌지?
남자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끝내 문자도 보낼 수 없었고, 통화도 할 수 없었다. 너무 무서웠다. 한 편 여자는 밤새도록 답장을 기다렸다. 그리고 남자로부터 아무런 소식 없이 일주일이 지나버렸다. 쪽지를 보낸 여자는 평생 사용할 용기의 90%를 사용한 듯 한 용기로 남자에게 접근했건만...
여자는 깊이 좌절했다. 그런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말았어야 했다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여자는 끝내 남자를 포기했다. 포기한 그 날 술자리에서 직장 언니의 품에 안겨 거절의 독배를 마신 슬픔을 눈물로 달래었다. 그 후, 여자는 남자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 사람, 완전 마마보이야. 생긴 것만 멀쩡했지. 완전 소심하고 게다가...“
여자가 상대 여자에게 귓속말을 했다.
“남자 구실도 못한다는 얘기도 들었어."”
"어머? 정말? 진짜?"
"정말이야."
"누구한테 들은 거야?"
"아는 언니한테."
"우와, 어쩜 그러니? 역시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거구나. 그런데 그 아는 언니는 누구한테 들었대?"
“아, 음..... 그 언니의 친한 언니한테 들었대.”
“흠.....”
“왜?”
“역시 ‘아는 언니’ 정보통은 대단한 것 같애! 무슨 CIA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걸 알아내는 걸까? 정말 대단해.”
거절의 상처 때문에 근거 없이 퍼뜨린 소문이지만, 사실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얼마 후, 남자는 여자들이 그렇게 수군거리며 자기 흉을 보는 걸 얇은 벽 뒤로 다 들었다. 그리고 정말 엄마의 품에 안겨 최소한 이틀 정도는 울고 싶을 만큼 참담한 기분이 되었다. 그날 저녁은 마실 줄도 모르는 소주를 혼자 마시러 포장마차에 들어갔다.
하지만 들어가서 소주병을 따고 잔에 소주를 한 잔 따르고는 그냥 나와버렸다. 소주 냄새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남자는 갈 곳이 없었다. 결국 야근을 한다고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고 다시 실험실로 돌아왔다.
실험실의 불을 켜고 모니터도 켰다. 남자는 의자에 몸을 파묻고 우두커니 앉았다. 방안의 원숭이들이 '끽끽' 거리며 인기척에 조금 웅성거렸다. 문득 연필을 들고 늠름한 인상을 한 원숭이가 남자의 눈에 띄었다. 녀석은 한 낱 짐승인 주제에 자신보다 더 사나이답고 거칠고 남자다워 보였다. 뭐랄까.... 수컷의 위엄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그 때 남자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연필.... 저 연필이 필요하다."
남자는 부리나케 실험실을 나와 문방구를 찾았다. 실험실의 연필과 비슷하게 생긴 연필 하나를 구입해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남자는 그 늠름한 원숭이가 있는 '가'방으로 들어갔다. 원숭이들이 남자를 피해 달아났다. 그 사내다운 원숭이 녀석이 연필을 가득 손에 쥐고 있었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그 원숭이에게 다가갔다. 연필에 손을 슬금슬금 가까이 가져가자 원숭이가 사납게 이빨을 드러냈다.
남자는 흠칫 놀라서 잽싸게 손을 빼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방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서 전기 충격기를 그 원숭이의 팔에 갖다 댔다. 그러자 '지지직'하는 소리가 나더니 원숭이는 기겁을 하면서 연필을 팽개치고 달아났다.
남자는 얼른 그 연필 중 하나를 집어 들고 광기어린 눈으로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 연필을 한쪽 주머니에 쑤셔 넣고 문방구에서 사온 연필을 대신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유유히 실험실을 나왔다.
이튿날 소장이 남자를 불렀다.
"그래, 실험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아.... 예, 아주 잘 돼가고 있습니다."
"조만간 보고서를 작성해서 올려야 할 거야. 잘 할 수 있지? 내가 안 거들어줘도 되지?"
"예. 걱정 마십시오."
남자는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음. 그래. 믿음직스럽구만. 근데 왠지 평소 자네답지 않아. 뭐 좋은 일이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뭐, 아무튼. 자신감 있는 모습이 보기 좋구만. 그럼, 수고하게. 난 잠깐 바빠서..."
남자는 뜨끔했다가 이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소장은 연구에 별로 관심이 없다. 늘 바쁜 것 같은데, 뭐하느라 바쁜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남자에겐 편했다. 소장은 연필 하나가 바꿔치기 된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남자는 원숭이에게서 뺏은 연필의 표면 전체를 칼로 얇게 깎았다. 그래서 완전히 딴 연필처럼 보였다. 남자는 그 연필을 하루 종일 들고 다녔다. 집에서도 그 연필을 손에 쥐고 있었다. 출퇴근할 때도 그 연필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언제나 연필을 만지작거리며 곧 나타날 자신의 변화를 기대하고 있었다. 부작용에 대한 염려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변화에 대한 욕망이 그 염려보다 훨씬 더 컸다.
이제 곧 남자는 육식공룡처럼 당당하고 거칠 것 없는 남자가 될 것 같았다. 이제는 위기를 만나면 엄마 품에 숨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가녀린 성품의 자신과 이별을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 크리스마스는 반드시 여자와 함께 보내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2주가 흘렀다.
"제가 들어줄게요. 이리 주세요."
"예? 아... 아니, 괜찮은데...."
서류더미는 이미 남자의 손에 올라가 있었다. 남자는 거칠 것 없이 여자가 가던 방향으로 서류를 들고 걸어갔다.
"어디 까지 가는거죠?"
"저... 거기... 제 2 자료실이요."
"거기서 근무하세요?"
"아...아뇨. 전 제 1 자료실에 근무해요."
"그래요. 제가 근무하는 곳이랑 가까운데 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예? 저...저는 그 쪽을 많이 봤는데요..."
그렇게 말하며 여자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래요? 제가 시력이 별로 안 좋아서 그 쪽이 저를 보는 것도 몰랐나봐요. 안경 하나 맞출까봐요."
"어머, 안경 끼시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우리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예?"
여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실 저 시력 좋아요. 하하. 이따가 점심이나 같이 먹으러 가죠. 어때요?"
여자의 눈이 더 휘둥그레졌다. 더 이상 동그래질 수 없다.
"예? 아... 저... 점심때는 직원들이랑..."
"12시 정각에 정문 앞에서 보죠. 제가 쏠게요. 잘 아는 집 있는데 진짜 맛있어요. 그럼, 그 때 봐요."
남자는 제 2 자료실 바로 앞에서 여자에게 서류더미를 건네주고는 살인적으로 매력적인 미소를 던지며 여자의 영혼을 간지럽히는 눈웃음을 날렸다. 그리고 황홀해서 침을 흘릴 듯한 여자의 표정을 뒤로 하고는 아주 근사한 걸음걸이로 걸어갔다. 남자는 걸어가면서 지금 별로 긴장하지 않은 자신을 보며 깜짝 놀랐다. 방금 그렇게 여자에게 낯 두꺼운 작업을 건 자신의 행동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생각했다.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인가?)
남자는 흥분되었다. 무의식중에 휴대폰을 꺼내 재빨리 문자를 찍었다.
"엄마, 나 방금 여자한테 작업 걸었다!"
문자를 전송하기 직전, 문득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문자를 보내는 게 굉장히 찌질하고 마마보이 같다는 느낌을 평생 처음으로, 강렬하게, 진심으로 느꼈다. 그런 행동을 해온 자신이 왠지 너무 낯설게 느껴지고 우스워 보이기까지 했다. 남자는 쓴 웃음을 지으며 거칠게 휴대폰을 닫았다.
그렇게 남자는 그 여자와 데이트를 시작했다. 남자에게 쪽지를 보냈다가 거절을 당하고 뜬소문을 퍼뜨렸던 여자는 둘의 관계가 진척되는 것을 몰래 지켜보며 질투에 휩싸였다. 그 질투는 여자의 가슴에 또 한 번 상처를 냈다. 여자는 다시 술자리에서 직장 언니의 품에 안겨 질투의 독배를 마신 슬픔을 눈물로 달래었다.
거절과 질투의 독배를 마신 그녀가 어느 날 복도를 지나가다가 자신을 향한 그 남자의 뜨거운 시선을 느꼈다. 뭔가 느낌이 왔다. 여자는 생각했다.
(어머, 어머, 왜 저래? 왜 날 자꾸 쳐다보지? 예쁜 건 알아가지고 저러나? 싫어. 이젠 꼴도 보기 싫어.)
그 때 남자가 그녀에게 불쑥 다가오며 핫초코를 한 잔 건넸다. 남자는 왠지 눈치도 빨라져서 평소 그녀의 시선을 보며 그녀가 바로 쪽지를 보낸 여자라는 것을 알아냈던 것이다.
"핫초코. 그리고 인삼 차, 잘 마셨어요. 미안해요. 그리고 그 땐 제가 너무 연구에 몰두하고 있어서 전화해볼 경황도 없었어요. 늦었지만 제가 사과하는 의미에서... 저녁에 그냥 편하게 저녁이나 같이 할래요? 저는 은혜는 반드시 갚아야 하는 성격이거든요. 핫초코랑 인삼차 대신 맛있는 거 쏠게요."
"예? 아... 네. 좋아요."
이럴 때 한 번 매몰차게 튕겨주는 맛이 있어야 한다고 의식은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잠재의식은 넙죽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여버렸다. 하지만 연적을 제거하고 사랑을 쟁취할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알게 뭔가? 여자는 오후 근무를 하면서 이런 저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저 남자, 지금 사귀는 사람이 있는데 나한테 접근을 했잖아! 음? 혹시 접근이 아니라 말한 그대로 그냥 고맙다고 은혜 갚는건가? 아니면 바람둥이 인가? 아니면 정말 그냥 순수한 건가? 아니야, 남자는 다 늑대라고 했어. 저렇게 순정만화에서 방금 막 튀어나온 것처럼 잘 생긴 남자가 바람둥이가 아니면 이상하겠지? 바람둥이는 싫어. 하지만.... 나의 지극한 사랑으로 저 남자의 바람끼를 영원히 가라앉히고 나만 바라보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왠지 그렇게 될 것 같은 느낌이야. 이것이 바로 여자의 육감! 이것은 운명이야! 타로카드에서도 이번 달에 전쟁과 쟁취가 있다고 했어! 오호호호호!)
남자는 그녀와도 데이트를 시작했다. 그렇게 활발하게 연구소 내의 많은 미혼녀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물론 순식간에 소문이 퍼지고 말았다. 남자는 공식적인 바람둥이로 자리매김 해버렸다. 하지만 자신감이 넘치고, 건방지지만 귀엽고, 가끔은 어린 아이 같이 모성애를 자극하면서도, 동시에 거친 야생동물 같아서 옆에서 돌봐줘야 할 것 같은 그 남자의 매력! 더군다나 보고만 있어도 종교적 황홀경을 체험할 것 같은 그 아름다운 외모! 여자들은 그가 바람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뻔뻔한 접근을 거부하기가 힘들었다. 하나 같이 자신만은 그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육감을 믿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생애 최고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남자의 방에 공룡뼛가루가 함유된 연필들이 12개나 있었다. 한 다스 다 들고 온 것이다. 실험실에는 가짜만 들어차 있었다. 남자는 여자를 한 달이 멀다하고 갈아치워 가며 그 동안 못해온 연애를 한 번에 다 해치우는 것 같았다.
여자들은 모이면 뒤에서 그 남자를 험담하면서도 막상 자기 차례가 되면 힘없이 마음의 문을 열어주고 말았다. 남자는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다. 세상의 모든 여자가 자기 것 같았다. 연구소 밖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어떤 여자든 즉석에서 유혹할 수 있었다. 이제는 엄마에게 툭 하면 문자를 보내는 짓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좀 아쉬워했지만, 그래도 아들이 남자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만족 했다.
그런데!
남자는 여자들을 자주 만나다보니 저녁을 거나하게 외식으로 때우는 일이 많아졌다. 그리고 항상 고깃집에 가거나 스테이크를 시켜먹곤 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집에서 혼자 밥을 먹을 때도 외식하는 수준으로 고기를 뜯어야 직성이 풀렸다. 그리고 점점 스테이크도 미디엄보다 레어로 먹는 게 입맛에 맞아갔다.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씹으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남자는 사귀고 있던 한 여자에게 깔끔하게 이별을 선언하고, 다음 날 즉시 다른 여자에게 작업을 걸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여자가 남자의 제안을 거절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의 윙크와 살인적인 미소를 보고도 전혀 황홀해 하거나 멍해지는 표정을 짓지 않는 것이었다. 소문이 퍼질대로 퍼진 곳에서 너무 설쳤나?
하지만 그 후로는 연구소 밖, 다른 곳에서도 남자의 작업이 전혀 먹혀들지 않기 시작했다. 이제는 길거리를 걸을 때 어떤 여자도 그를 보며 싱긋 웃거나, 얼굴을 붉히거나, 일부러 안 쳐다본 척 고개를 딴 데로 돌리거나, 대범하게 윙크를 하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남자는 왜 이럴까 싶었다. 그러다가 문득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몸무게를 재보는데, 20 킬로그램이 불어 있었다.
"이럴수가!"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리고 그의 모습을 거울에 가만 비쳐보니 더 이상 날렵하고 매력적인 순정만화 주인공의 모습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냥 지나치게 토실토실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 살들이 그의 차밍 포인트들을 모두 집어 삼킨 것 같았다. 날렵한 턱선도 보이지 않았다. 조각을 깎아 놓은 듯 했던 얼굴은 두루뭉실해 보였다.
남자는 당장 다이어트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다이어트가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았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음식을 먹었다. 그렇게 먹고 나면 또 살이 쪄서 다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 스트레스를 풀려고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다보니 오징어와 이런 저런 안주가 땡겼다. 그러다보니 또 살이 불었다. 그래서 또 먹어대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렇게 수개월이 지나자 남자의 지방은 총알도 뚫지 못할지도 모를 지경이 되었다. 여자들 사이에 남자의 별명이 돌기 시작했고 결국 남자의 귀에 까지 들어왔다.
'방탄조끼(살이 너무 두꺼워서 총알이 뚫을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기에)'
'바다표범(설명이 필요 없기에)'
'날아다녔던 돈까스(예전에 바람둥이였음을 암시하기에)'
'쓰리쿠션(복합적인 의미가 있다고 한다)'
연구소에 들어온 지 약 1년이 지나자 남자의 삶은 너무나 많이 변해버렸다. 남자는 힘들었다. 그는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다. 연구소장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허락을 받은 남자는 한 달간 여행을 떠났다. 그는 미국으로 갔다.
그랜드캐년.
웅장한 자연 앞에 서서 명상에 잠기고 싶었다. 남자는 바닥에 대충 편하게 앉고 눈을 감았다. 명상을 시작했다. 자기를 이렇게 만든 나쁜 여자들과 자기를 흉보는 사람들을 욕하고 비난하고 응징하는 상상을 하는 것이 그의 명상이었다. 그렇게 상상속에서라도 실컷 욕해주고 비난하고 응징하고 나면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연필. 남자는 실험실의 그 연필이 이 모든 재앙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런 불운한 일 자체가 그 연필의 부작용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랜드캐년을 앞에 두고 그렇게 1시간 동안 명상을 했다.
명상이 끝나고 눈을 떴다. 기지개를 펴며 일어섰다. 가파른 절벽 앞에 서서 광활한 협곡을 바라보고 있자니 머리가 어지러워질 지경이었다. 문득 단순히 어지럽다고 느끼기만 한 게 아니라 진짜 머리가 띵하게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남자의 혈관 구석구석에 가득 들어차 있던 기름덩어리들이 피의 흐름을 막기 시작한 것이다.
이내 남자는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육중한 지방덩어리가 수백미터 아래의 협곡으로 떨어졌다. 남자의 몸이 절벽을 구르며 여기 저기 부딪히자 커다란 바위들이 부서지며 그를 따라 굴렀다. 육중한 몸이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그 위로 더 육중한 바위들이 떨어졌다. 남자는 그렇게 자연 속에 매몰되어 기나긴 세월 속에 화석이 되어갔다.
연구소장은 한 달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연구원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결국 더 이상 그를 기다리기만 할 수 없었다. 당장 새로운 연구원을 채용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결국 본인이 직접 연구에 착수해야 했다.
소장은 이번에는 고릴라를 대상으로 연필 실험에 착수하기로 했다. 그는 예전에 연구원이 쓰던 책상을 정리했다. 여기 저기 널려 있는 파일이며 지저분해진 의자, 책상 등을 깨끗이 닦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새로운 연구 프로젝트의 보고서를 작성해 나갔다.
2주 후.
소장이 연구실에서 고릴라들을 관찰하고 있는데, 여직원 한 명이 새로운 파일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녀는 파일을 소장의 책상 위에 놓고 나가려했다. 그 때, 소장은 뭔가 묘한 기분이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다음 순간,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오.... 미스 김, 오늘 선보러 가?”
“예? 아닌데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예뻐 보여? 화장도 예쁘고, 옷도 예쁘고, 옷맵시도 멋지고, 미스 김이 이렇게 예뻤나?”
“오호호호, 소장님도 참....”
첫댓글 공룡에서 연필까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소재가 무척 특이해요!! 공룡하고 연필하고 어떻게 이어질까 궁금했는데 이렇게되었군요^^ 흥미로운소설 잘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