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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목 관아와 향교(羅州牧 官衙와 鄕校, 사적 제483호)는 나주는 삼국시대 때부터 농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농업이 산업의 근간을 이루던 전근대 사회 동안 풍요를 누리던 지역이었고, 고려왕조부터 조선왕조까지 약 1,000년 동안 목(牧)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한 전라도의 대표적 큰 읍치이었으며, 현존하는 관아 건물과 향교 건물들이 그에 상당한 권위를 보여주고 있어 상당한 가치가 있다.
나주 관아 금성관(羅州 官衙 錦城館,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성읍지, 여지도, 나주목지도를 비롯한 고지도 등에서 위치와 건물 구성을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으며. 객사 등의 발굴 성과와 옛 사료들을 토대로 조선시대 지방통치 중심지의 구조를 파악하고자 할 때, 현존하는 관아 건물이 좌표축의 구실을 하는 중요한 가치가 있다.
나주향교(羅州鄕校,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28호)는 평지에 들어선 전묘후학의 배치형태를 띠고 있는 전형적인 예이며, 특히 나주향교 대성전(羅州鄕校 大成殿, 보물 제394호)은 그 규모가 대단히 웅장할 뿐 아니라 양식, 격식이 뛰어나 조선후기 향교건축을 대표할 수 있어 건축학적 가치가 크다. 또한 나주향교는 조선시대 교육시설의 규모를 따지면 성균관 다음이라고까지 지칭될 정도로 규모가 클 뿐 아니라 교육과 제사의 고유기능을 간직하고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나주읍성(羅州邑城, 사적 제337호)은 고려시대에 쌓은 석성(石城)으로 조선 세조 3년(1457)에 성을 확장했고, 임진왜란(1592) 후에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있었다.
석성(石城)은 돌을 쌓아 만든 것으로 원래 길이는 약 3.53km, 높이 약 2.7m로 평지에 남북으로 긴 타원형 형태로 쌓았으며, 대포를 쏠 수 있는 성벽에 나온 포루가 3개이고, 우물이 20여 개 있었다고 한다. 성문(城門)은 동·서·남·북에 4대문(東漸門, 西城門, 南顧門, 北望門)이 대한제국 말까지 그 골격을 유지해 왔으나 1916년에서 1920년 사이에 일제가 성벽에 대한 훼손하여 모두 없어지고 현재는 북문터(北門址)에 기초석(基礎石)만 남아있었다.
동점문(東漸門)은 2006년 정면3칸, 측면2칸의 2층 문루(門樓)와 옹성(甕城)으로 복원되었다. ‘나주천 물이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서경 하서 우공편(書經 夏書 禹貢篇)’에서 유래되어 나주 사람의 정신이 작게는 개울에서 시작하여 큰 바다를 이룬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서성문(西城門)은 문루(門樓)와, 성문을 보호하는 시설인 옹성(甕城) 21.94m 등을 2011년 복원하였다. 문헌에 주로 ‘서성문(西城門)’ 이라는 명칭으로 나타나지만 1815년에 편찬된 것으로 전하는「나주목여지승람(羅州牧與地勝覽)」에 “동남북 삼문(三門)에는 편액(扁額)이 없으며, 서문에만 ‘영금문(映錦門)’이라는 편액이 있다.”는 기록에 따라 역사를 기록하는 의미에서 편액을 걸었다. 1894년(고종31) 동학농민운동 때 동학군이 서성벽을 넘지 못하고 전멸하였다는 슬픈 사연이 있으며, 동학농민군의 우두머리 전봉준이 당시 나주목사였던 민중렬과 협상을 했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남고문(南顧門)은 1993년 남문터에 복원 하였다. 2층으로 된 누(樓)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화려하다. 옆에서 보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있어 나주읍성의 옛 모습 일부분을 보여준다. 남문터(南門址)의 석축은 비록 적게 남아있지만 역사적 차원에서 보존해야 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현재 동∙서∙남문은 복원 하였고 북망문은 복원 중에 있다. 주변에 문화재로는 나주향교와 금성관이 있다.
나주 금성관(羅州 錦城館, 보물 제2037호)은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관사 또는 객관이라고도 한다. 객사는 고려 전기부터 있었으며 외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 객사(客舍)에 묵으면서 연회도 가졌다. 조선시대에는 객사에 궐패(闕牌)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망궐례(望闕禮)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창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각종 기록과 구조양식으로 보아 전체적인 건축물의 규모와 골격은 1617년 중수시의 것을 유지하고 있다고 추정되며, 목조 가구와 세부 공포형식은 1775년과 1885년 중수시의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금성관은 주심포계 양식의 요소를 채용한 익공계 공포 구성이 돋보이며, 1출목 3익공식의 공포형식은 제한된 공력으로 충분한 위계를 드러내고자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변형 기법으로 볼 수 있다. 객사는 앞면 5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겹처마집으로, 외일출목(外一出目)의 주심포양식(柱心包樣式)이며, 칸의 넓이와 높이가 커서 위엄이 느껴진다. 월대와 평면 및 입면 그리고 천장 등을 일반적인 객사와는 달리 궁전의 정전과 유사하게 구성한 점은 금성관만의 고유성을 지닌 두드러진 특징이다. 금성관 정청은 조선시대 객사 건축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클 뿐 아니라, 팔작지붕을 하고 있어서 일반적인 맞배지붕의 정청과 대비되는 희귀성을 갖는다.
나주는 이중환의 '택리지'에 따르면 그 지형이 한양과 닮아 예부터 소경(小京)이라 불렀다고 한다. 고려 성종 때'목(牧)'으로 지정된 나주는 군사적 거점인 동시에 지방통치의 핵심을 이룬 땅이였다. 나주읍성은 조선 초기 축조된 이후 고을의 위상에 걸맞게 600여 년 동안 호남의 행정 중심지 역활을 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금성관의 정문인 2층짜리 망화루(望華樓)도 함께 만들었으나 지금은 망화루의 현판과 내삼문만을 남산시민공원으로 옮겼다. 이후 나주목 금성관 복원 정비 사업으로 금성관 앞을 가리고 있던 나주군청사(羅州郡廳舍)를 헐고 금성관의 동쪽에 있는 건물로 관찰사가 나주에 왔을 때 집무처로 사용하였으며, 정3품 이상의 관리가 목던 동익헌(東翼軒, 碧梧軒-조선초 이행 관찰사가 벽오동 나무가 근처에 있어 '벽오헌'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전함)∙서익헌(西翼軒)을 복원(2004∼2008)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 때의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1537-1593) 선생이 의병을 모아 출병식(出兵式)을 가졌던 곳이며, 일본인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했을 때도 이곳에서 관을 모셔 항일정신을 높이기도 하였다. 나주 금성관은 전남지방에 많지 않은 객사 중 하나로서 전국의 객사 건물 중 그 규모가 웅장하고 나주인의 정의로운 기상을 대표할 만한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이 점은 부근에 위치한 나주향교 대성전이 일반적인 조선시대 향교 대성전의 맞배지붕과 달리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점과 함께 지역적인 특수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금성관은 무엇보다 지역성에 주목하여 대표적인 지역역사문화유산이라는 점,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오랫동안 나주군청 및 시청으로 사용되면서 벽체와 바닥, 천장 등의 변형을 거치면서도 전체적인 원형을 유지하여온 역사적 건축물로서 높이 평가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금성관은 나주 읍치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대표하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원래 자리를 잘 지키고 있으며, 다른 객사와 뚜렷한 차별성을 띤 격조 높은 건물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역사적, 건축적, 예술적 가치가 충분하다.
나주향교(羅州鄕校,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28호)는 태조 7년(太祖,398)에 지었으며, 내부에 계성사(啓聖祠)라는 사당(祠堂)이 있는데 이곳에는 공자(孔子) 아버지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로 인해 향교의 배치방법이 다른 향교와 다르다.
나주향교 대성전(羅州鄕校 大成殿, 보물 제394호)은 태종 7년(1407)에 세워 제사와 교육기능을 수행하다가 신학제 실시 이후로는 제사 기능만을 수행하고 있다. 호남지방의 향교 중 계성사(啓聖祠)가 있던 다른 향교는 전주향교와 함평향교 등이 있다. 나주향교의 대성전은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을 갖춘 건물로,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대성전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인데, 기둥 사이에는 꽃모양의 받침을 만들어 위에 있는 부재를 받치고 있다. 건물 안쪽 바닥은 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뼈대가 다 드러나는 연등천장으로 꾸몄다.
대부분 명륜당(明倫堂)을 중심으로 한 배움의 공간을 앞에 두고, 뒤에 제사공간이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계성사가 있기 때문에 대성전(大聖殿)과 명륜당(明倫堂)의 위치가 바뀐 전묘후학(前墓後學)을 따르고 있다. 향교(鄕校)는 훌륭한 유학자(儒學者)를 제사(祭祀)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儒學敎育)과 교화(敎化)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 노비, 책 등을 지급 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甲午更張), 1894) 이후에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제사만 지낸다. 이곳에 보관되어 있는 책은 이 지방 향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현재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으며, 소장 전적 145종 195책 중 필사본인 금성연계방안(錦城蓮桂榜案)·유림안(儒林案)·청금안(靑衿案)·통문(通文) 등은 이 지방의 향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나주 향교의 대성전 벽흙을 공자의 고향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말과 임진왜란 이후 성균관을 다시 지을 때 나주향교 대성전을 참조하여 건축 하였다는 말이 전해온다. 평면과 세부기법에서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향교 대성전 양식을 찾아 볼 수 있는 좋은 예이며, 서울문묘·강릉향교·장수향교와 더불어 가장 큰 규모에 속하는 중요한 향교문화재이다.
불회사(佛會社)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높은 산을 뒤로한 협곡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에 ‘백제 침류왕 원년에 호승 마라난타(胡僧 摩羅難陁)가 진나라로부터 와서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마라난타가 침류왕 원년(384)에 백제 도읍지로 바로 들어온 것이 아니고 지금의 법성포에 도착해서 불갑사를 창건한 다음 불회사를 세우고 도성으로 돌아갔다는 일설도 있다. 이는 불회사의 연혁 뿐 아니라 백제 불교의 불교 전파 경위를 밝히는데 중요한 기록이다. 불회사는 고려 말 원정국사가 대대적으로 고쳐지었다.
나주 불회사 대웅전(羅州 佛會寺 大雄殿, 보물 제1310호)은 비로나지불을 주존불로 관음보살과 제세지보살을 협시불을 모시는 건물로 천장 주위에 22개의 각종 불교와 관계된 벽화를 그려 대웅전으로서의 장엄미가 엿보인다.
대웅전은 자연석 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세워진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에는 모두 궁창판이 있는 4분합의 빗살문인데 한국전쟁 이전에는 꽃살문으로 장식 되어 있었다. 기둥을 받치고 있는 초석은 덤벙주초로 비교적 큰 편이며 그 위에 세워진 기둥은 민흘림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기둥 위에는 다포계(多包系)의 일반적인 수법을 따라 창방과 평방이 놓이고 전·후면의 각 주칸에는 외3출목, 내4출목 포작(包作)을 2조씩, 양측면에는 1조씩 배치하였는데 외부살미의 끝은 심하게 휘어져 올라가 있고 내부에서는 화려한 연봉형으로 마감하였다. 또한 정면 어칸에는 용머리 장식의 안초공을 사용하여 용두는 외부로 힘차게 빠져나왔고 그 꼬리는 내부로 힘차게 뻗었다.
건물의 양측면 중앙에서는 건물내부로 2개의 충량을 걸어 그 머리를 용두로 장식하여 대량에 걸치었는데 이러한 결구법은 조선중기 이후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수법이다. 건물의 내부천장은 빗천장과 우물천장을 혼용하였는데 빗천장에는 물고기, 연화문 등을 매우 정교하게 조각하여 달았다. 건물 기둥 위 창방 위에 평방을 돌리고 그 위에 공포(栱包)를 짜 올려 다포계(多包系)의 일반적인 수법을 따른 것으로 보이나 가운데 칸의 양 기둥사이로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한 점이 특이하다. 즉, 용두를 밖으로 나오게 하고 그 꼬리를 건물 안쪽 대들보 밑에 끼어 넣은 수법, 양쪽 대들보 사이로 상호 중앙을 향해 마주 보도록 또 다른 두 마리의 용을 목각으로 조각한 수법, 건물 내부에 연꽃봉오리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기법, 천장 주위에 22개의 각종 불교와 관계된 벽화를 그려 대웅전으로서의 장엄미가 엿보인다.
나주 불회사 대웅전은 상량문 및 건축수법 등으로 볼 때 1799년(정조 23년) 중건된 조선후기 건립 당시의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는 중요한 건물로 역사적 의의와 함께 학술적 가치가 있다.
나주 불회사 건칠 비로자나불좌상(羅州 佛會寺 乾漆毘盧遮那佛坐像, 보물 제1545호)은 불회사 대웅전의 주존으로 모셔진 고려 말 조선 초에 특히 많이 조성된 건칠불상이다.
대웅전 내부에는 공(空)한 우주 진리 자체를 상징하며, 모든 이에게 빛을 비추는 비로나자불이다. 종이에 옻칠을 해서 만들어진 희귀한 불상은 양식적으로 다소 길어진 신체의 비례와 형태, 작아진 얼굴, 착의형식, 옷 주름의 표현 등에서 고려후기 불상 양식을 계승한 조선 초기에 제작된 상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상체가 긴 편이며 고개를 앞으로 내밀어 구부정한 자세에 무릎이 낮고 넓게 표현된 점 등에서 고려말에서 조선초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작품이다. 머리에는 촘촘하게 표현한 나발과 중간계주가 확인된다. 얼굴은 볼살이 있어 통통한 모습이며 뚜렷한 이목구비에 입술 양 끝을 올려 미소가 있는 듯 전체적으로 온화한 인상을 풍긴다. 착의법은 편삼 위에 변형통견식의 대의를 입었으며 넓은 가슴에는 수평의 내의(승각기)와 나비형으로 묶인 띠매듭이 보인다. 대의의 목깃을 입체적으로 세운 모습이나 왼쪽 무릎 위에 드리운 넓은 소맷자락, 비슷한 간격으로 넓게 주름을 잡은 도식적인 옷주름이 특징이다. 제작기법은 X선 조사를 통해 삼베와 칠을 6겹 정도의 겹으로 올려 제작한 건칠상으로 확인되었으며, 눈동자와 백호는 수정을 감입하였고 손은 나무로 만들어 끼운 다음 철정으로 고정하였다. 이 불회사 비로자나불좌상은 두 손을 서로 감싼 독특한 지권인의 수인 형식과 작은 얼굴에 허리를 긴 신체 비례, 고개를 앞으로 숙인자세에 도식적인 옷주름이 특징으로 고려말에서 조선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좌불의 수인(手印)은 특히 주먹 쥔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 쥔 형태의 지권인(智拳印)으로 고려후기의 화엄경 변상도에 등장하는 비로자나불의 수인인데, 불회사 상은 현존하는 조각에서 이 수인이 표현된 이른 예일 뿐만 아니라 조각적으로도 우수한 불상이다.
나주 불회사 석장승(羅州 佛會寺 石長栍, 중요민속문화재 제11호)은 절 앞 300m 되는 지점의 길 양쪽으로 마주보고 서있는 2기의 돌장승(石長丞)이다. 장승(長丞)은 민간신앙(民間信仰)의 한 형태로 마을이나 사찰 입구에 세워져 경계를 표시함과 동시에 잡귀(雜鬼)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守護神)의 구실을 하는데 이 장승 역시 경내의 부정(不正)을 금(禁)하는 수문신상(守門神像)이다.
장승(長丞)은 남·녀의 모습으로 구별된다. 남장승(男長丞)은 선이 깊고 뚜렷하며 수염이 표시되었고, 머리 위에서는 상투(推髻)를 올린 듯한 모습을 하고 커다란 돌기형 코 선이 특징적이다. 입 가장자리에는 송곳니가 아래로 뽀족하게 돌출되었고 몸체에는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란 이름이 새겨있다. 원래 하(下)자가 새겨졌는데 누군가가 추가로 새겨 정(正)자로 보인다.
여장승(女長丞)은 남장승(男長丞)에 비해 표정이 온화하고 얕은 선으로 표현되었다. 미소 띤 얼굴에 몸체에는 ‘주장군(周將軍)'-원래 명칭은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이란 이름이 있다. 두 장승 모두 크고 둥근 눈에 두리뭉실한 주먹코이다. 얼핏보면 제주도의 돌하루방을 옮겨다 놓은 것 같기도 하고 나주 운흥사 석장승((羅州 雲興寺 石長栍, 중요민속문화재 제12호)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당(唐)자는 사당가는 길을 뜻하며, 주(周)자는 꼬불꼬불한 길을 뜻한다. 불회사(佛會社)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높은 산을 뒤로한 협곡에 자리잡고 있다. 이 장승은 숙종 45년(1719) 전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민간의 무속신앙(巫俗信仰)과 불교신앙(佛敎信仰)이 혼합된 상징적인 조형물로서 험상궂은 듯 하면서도 익살스러운 모습이 친근감을 준다.
나주 북망문 밖 삼층석탑(羅州 北望門 밖 三層石塔, 보물 제50호)은 나주 북문 밖에 있던 것을 1915년 옛 나주 군청 내로 옮겼다가 2006년 심향사 경내 미륵전 앞으로 다시 옮겨 놓은 탑으로, 상 ·하 2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일반적인 모습이다.
기단에는 면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아래기단에는 모서리에만 두고, 윗기단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각각 조각을 하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한 돌로 구성하였는데, 위층으로 갈수록 몸돌의 비율이 줄어들어 전체적으로 날렵한 느낌을 준다.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두꺼운데, 밑면마다 3단의 받침을 두었고, 윗면은 지붕돌의 처마끝에 이르러 살짝 들려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장식으로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있다.
전체적으로 풍화(風化)가 심하고 뛰어난 작품은 아니지만 단정한 품위를 잃지 않았고 각 부의 비례도 아름답다. 양식으로 보아 고려(高麗)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죽림사 세존괘불탱(竹林寺 世尊掛佛幀, 보물 제1279호)은 전남 나주 죽림사 소장, 석가불을 단독으로 그린 비교적 작은 크기의 괘불이다.
이 그림은 화면 중앙에 큼직하게 연꽃 위에 결가부좌 자세로 앉은 석가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등 뒤에는 금빛 광배가 있고 붉은색에 녹색이 섞인 옷에는 꽃무늬가 뚜렷해 밝고 화사한 느낌을 준다. 머리는 감청색의 곱슬이고 얼굴은 원만하며 몸집은 단아하다. 오른손은 마귀를 누르는 듯 무릎을 짚고, 왼손은 엄지와 검지를 맞붙인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이 괘불의 석가의 모습이 오른손이 크고 팔이 유난히 가늘고 긴데 이것은 안심사의 영산회괘불탱(국보 제297호)과 곡성도림사의 영산괘불탱(1683년 작)에서도 볼 수 있는 표현으로 조선 중기 괘불의 흐름을 알 수 있게 하는 귀한 작품이다.
다보사 괘불탱(多寶寺 掛佛幀, 보물 제1343호)은 화면 가득 서 있는 모양의 석가삼존불을 배치하고 그 윗부분에 보살과 여래 등을 작게 그린 괘불이다.
크기는 길이 1,143cm 폭 852cm로, 원래는 나주 금성산 보흥사(普興寺)에 봉안되었던 것이다. 구성은 석가삼존불입상을 중심으로 윗부분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다보여래와 아미타여래가 짝을 이루고 있는데, 당시에 성행하였던 형식이다.
이 괘불은 조선 영조 21년(1745)에 조선후기의 대표적 승려화가인 의겸을 비롯하여 9명의 화원이 함께 그렸다. 옷 문양은 화사하나 형태·채색·필선 등에서 정교함이 줄어들어 의겸의 말년의 그림 경향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나주 동점문 밖 석당간(羅州 東漸門 밖 石幢竿, 보물 제49호)은 사찰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절에 행사가 있을 때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대개는 두 지주만 남아 있는데, 이것은 당간이 함께 남아 있어 중요한 유물이다. 당간은 5개 돌을 서로 맞물리게 하여 세웠는데, 아래는 굵고 올라갈수록 차츰 가늘어져 안정감 있다. 이러한 당간에 철띠를 두른 후 지주의 안쪽에 마련된 받침돌 윗면에 구멍을 파서 이를 고정시켜 놓았다. 당간 위에는 8각의 보개(寶蓋:지붕모양의 장식)와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달아 놓았다.
본래 당간은 절 앞에 세워지는데, 이 곳에 절이 있었다는 역사기록은 없고 다만 풍수설과 결합하여 나주의 땅모양이 배모양이기 때문에 안정을 빌기 위하여 당간을 돛대로 세운 것이라는 말이 전해내려오고 있다.
나주 심향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羅州 尋香寺 乾漆 阿彌陀如來坐像, 보물 제1544호)은 고려 말 조선 초에 특히 많이 조성된 건칠불상 중 하나이며, 점토나 석고로 만든 원형을 제거한 탈활(脫活) 건칠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고려후기 불상의 특징인 이국적이면서도 단엄한 얼굴표정을 지니고 있으며, 왼쪽 어깨 위에 부채살처럼 흘러내린 세밀한 잔주름은 13세기 후반에 조성된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1276년), 화성 봉림사 목조아미타불좌상(1362년 이전) 등에서도 확인되는 공통된 특징이다.
나주 지역에서는 이 불상 외에도 불회사와 죽림사 등 여말선초에 조성된 건칠불이 전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조형적 완성도가 가장 높다. 더욱이 이 불상은 현재 알려진 건칠불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는 작품 중 하나로 중요성을 지닌다.
나주 철천리 석조여래입상(羅州 鐵川里 石造如來立像, 보물 제462호)은 전체 높이가 5.38m나 되는 커다란 불상으로 하나의 돌에 불신과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가 조각되어 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肉髻)가 큼직하게 표현되었고, 얼굴은 사각형으로 양감이 풍부하다. 목에는 3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에는 발목까지 늘어진 U자형의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두 팔은 두꺼운 옷자락 때문에 양 손만이 드러나 있는데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내리고, 왼손은 위로 향하고 있는 모습이다. 광배는 배(舟) 모양이며,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구분되는데, 머리광배 안에는 연꽃무늬를 새기고 몸광배에는 구름무늬를 새겨 넣었다.
살찐 얼굴이라든지 비정상적으로 표현된 신체의 모습, 그리고 형식화된 옷주름 등에서 고려 초기 유행하던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특히 남원 용담사지 석조여래입상(南原 龍潭寺址 石造如來立像, 보물 제42호)과 크기와 양식이 비슷한 작품이다.
나주 철천리 마애칠불상(羅州 鐵川里 磨崖七佛像, 보물 제461호)은 4각에 가까운 원추형의 바위 표면에 불상을 조각한 독특한 형태의 작품이다.
바위 꼭대기에는 동자상(童子像)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동쪽면에는 좌상 1구가 있고, 북쪽면에도 좌상 1구가 합장하고 있다. 남쪽면에는 표현수법이 비슷한 4구의 입상이 있으며, 서쪽면에는 원래 2구의 불상이 있었는데 일제시대에 광부들이 1구를 떼어갔다고 전해진다.
이들 불상은 모두 세부표현이 거의 같다. 민머리 위에 높게 솟은 상투 모양의 머리(肉髻)를 가지고 있으며 얼굴은 길쭉하다. 신체는 길고 굴곡이 없이 밋밋하며 경직된 자세와 간략하게 표현된 옷주름의 처리 등에서 형식화된 모습이 보인다. 불상의 발 아래에는 돌출부분을 마련하여 대좌(臺座)를 대신하고 있다.
비록 불상의 표현수법에서는 고려 석불상에 흔히 나타나고 있는 형식화된 모습이 보이지만 독특한 겉모습과 사방불적(四方佛的) 특징이 표현되고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나주 다보사 목조석가여래삼존상 및 소조십육나한좌상(羅州 多寶寺 木造釋迦如來三尊像 및 塑造十六羅漢坐像, 보물 제1834호)은 다보사 석가여래삼존과 16나한상은 17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조각승 수연과 그의 일파가 제작한 불상으로, 물 오른 수연의 중기적 조각 경향이 잘 드러나 있는 불상이다.
불상의 구성은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양대 제자인 가섭과 아난이 삼존을 이루고, 그 좌우에 각각 8구의 나한을 배치하였다. 본존 석가여래는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하였다. 머리에는 동글동글한 나발을 부착하였고, 육계와 머리의 경계가 되는 중앙에 반달모양의 자그마한 계주를 표현하였고, 정수리에도 낮고 조그마한 계주를 나타내었다. 이 시기 다른 불상에 비해 머리가 빈약한 것이 특징이다. 둥글 넙적한 얼굴은 양감이 넘치는데, 특히 통통한 뺨과 큼직하게 돌출한 삼각형의 코, 짧은 인중과 턱, 열쇠구멍 모양으로 새긴 귓구멍과 볼록한 이병耳屛 등 전체적인 이미지는 순박한 인물을 직접 모델로 삼은 듯 현실감이 넘쳐난다.
착의는 오른쪽 어깨를 덮은 변형의 편단우견식인데, 오른쪽 어깨를 덮은 대의자락이 둥근 원을 그리며 시원스럽게 표현되었다. 굵은 목에는 옅게 삼도를 새겼으며, 가슴의 쇄골선은 윤곽만을 둔중하게 비사실적으로 드러내었다. 가슴에는 사선으로 접은 군의가 표현되었고 복부는 볼록하게 처리하여 불신의 신성한 굴곡을 드러내었다. 수인은 오른손은 팔꿈치를 약간 부자연스럽게 꺾어 내려 촉지인을 결하였고, 왼손은 무릎 위에서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맞대었다. 상체는 깊이가 얕고 힘 있는 철선묘鐵線描 위주의 선을 사용하였으며, 여백이 많고 요점적이다. 무릎에는 상체보다 좀 더 밀도 있는 요철 주름을 속도감 있게 펼쳐 한결 율동적이다.
늙은 승려형의 가섭존자는 장삼위에 가사를 걸쳤으며 석가모니불의 왼쪽에 서서 합장하였다. 앞니를 드러내고 자애롭게 미소 지은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하며, 본존상에 비해 코가 작고 빈약하고 부자연스러운 것은 후대에 보수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건장한 장년의 아난은 두터운 가사장삼을 걸치고 석가모니불의 오른쪽에 당당하게 서서 합장하였다.
16나한상은 석가여래의 좌우측에 각각 8구씩 배치되었는데, 이안 당시부터 정확한 배치법과 순서에 입각해서 배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6나한상은 다양한 몸짓과 개성 있는 표정을 통해 각 나한의 신통력과 개성, 인간사의 다양한 희노애락을 표출하였다. 좌측(향우)부터 살펴보면, 가섭존자의 얼구부분은 후대에 약간 수리를 가한 것으로 생각되며, 좌2 존자와 좌7 존자는 본존불과 이와 같은 계통의 나한상의 얼굴표현과 약간 상이하여 이를 담당한 조각승이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대부분의 나한상은 신체에 비해 얼굴이 작은 편이고, 노소老少의 인물 변화에 따른 다양한 표정을 현실감 있게 묘사, 연출하였다.
나주 다보사 목조석가여래삼존상 및 소조십육나한좌상(羅州 多寶寺 木造釋迦如來三尊像 및 塑造十六羅漢坐像)들은 조선후기 불교미술의 특징인 대중적 평담미와 수연이 추구한 중량감 있는 형태미를 잘 간직하고 있고, 더불어 사실적인 묘사에서 작가의 개성과 솜씨가 마음껏 발휘된 완성도 높은 작품이다. 특히 여러 존상에서 발견된 발원문(發願文)을 통해 1625년이라는 정확한 조성목적과 조성시기와 제작자, 시·발원자 등 조성과 관련된 구체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어 이 시기 불교조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나주 서성문 안 석등(羅州 西城門 안 石燈. 보물 제364호)은 본래 전라남도 나주읍 서문 안에 있던 것을 1929년에 경복궁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는 3단을 이루는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네모난 모양의 널찍한 바닥돌 위에 세워져 있으며, 아래받침돌은 8각이고 연꽃문양이 새겨져 있다. 기둥모양의 중간받침은 8면으로 각 면마다 테를 둘러 공간을 만들고 그 중심 안에 한 줄씩의 문장을 새겼다. 윗받침돌은 8각면에 돌아가며 연꽃무늬를 조각했고, 화사석은 새로 만들어 놓은 것으로 창이 4개다. 지붕돌은 매우 장식적으로 8개 면마다 처마 끝에 짧은 막을 드리운 것처럼 세로줄무늬가 있고, 그 위로 막 피어오르는 형상의 꽃장식이 두툼하게 달려 있다. 지붕돌 위로는 마치 지붕을 축소해 놓은 듯한 돌이 올려져 있고, 맨 꼭대기에 올려진 연꽃봉오리모양의 돌은 석등을 옮겨 세울 때 새로 만든 것이다. 받침에 새겨져 있는 기록을 통해 고려 선종 10년(1093)에 석등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이 석등은 전라남도 나주의 읍성 터 서문 안의 절터에 파손된 채로 남아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석등의 기둥 돌에는 석등을 세운 내력과 함께 이 석등이 1093년(고려 선종 10)에 만들어졌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석등의 본체인 불발기집은 파손되어 조선총독부 시절 다시 옛 모습대로 만들었으며, 그 위의 지붕은 처마 밑에 드림 장식을 하고 처마와 추녀 끝에는 귀꽃 장식을 하여 고려시대 중엽에 새로이 드러내는 매우 장식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 위에는 현재 작고 아담한 덧지붕만이 남아 있으며, 맨 꼭대기의 꽃봉오리 모양의 보주는 원래 부서진 것을 옛 모양대로 새로 만든 것이다. 이 석등은 고려시대 문화의 전성기에 나타난 단아하고 격조 있는 팔각석등의 조형적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각 부분의 조각이 둔중한 편이나 지붕돌의 형태가 장식적인 공예기법을 보이고 있는 특이한 고려시대 작품으로, 통일신라시대 8각형 석등의 양식을 이어받으면서도 그 구조와 조각이 우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