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요시프 스탈린(Joseph Stalin, 1879∼1953)은 누구인가?

요시프 스탈린.
1879년 12월 21일 고리에서 태어난 스탈린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고, 14세대 어머니가 고집하는 대로 성직자가 되기 위해 티플리스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미 직업적 혁명가가 되어 있었던 그는 5년 뒤에 학업을 중단하고 학교를 떠났다.

스탈린의 아버지 비사리온 주가시빌리. 구두방 주인으로 술만 먹으면 아내와 아들 스탈린을 구타했다. 알콜 중독으로 사망한다.

스탈린의 어머니

어린 시절의 스탈린
1901년 사회민주당에 입당한 스탈린은, 1903년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이 멘셰비키와 볼셰비키로 분열되자 레닌이 지도하는 볼셰비키의 편에 섰다. 강직한 충성심과 조직 관리 능력, 그리고 정확한 기억력을 소유한 그는, 1912년 레닌의 신임을 얻어 볼셰비키 중앙위원직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줄곧 짜르 체제와 정면 충돌한 그는, 그 때문에 시베리아로 유형을 갔다가, 1917년에 혁명에 가담하기 위해 돌아왔다.

스탈린, 레닌, 칼리닌

시베리아 유형 시절의 스탈린

젊은 시절의 스탈린
혁명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 스탈린은 여러 종류의 직책을 역임했다. 그 가운데 당의 직책 임명과 의제 선정을 담당하는 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직은 1953년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 유지했던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1924년 레닌이 죽자, 스탈린은 신속하고도 잔혹한 방법으로 반대파를 제거해서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명실상부한 소련 제1의 권력자가 된 것은 1929년이었다.
스탈린은 그의 정적 트로츠키(Leon Trotsky)가 영구혁명론을 표방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철저하게 일국 사회주의를 주장하면서, 농업 집단화 작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1928년부터 시작된 집단농장 건설 계획이 농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어려움에 봉착하자, 그는 500만 명이 넘는 부농과 중농을 희생시키는 강경 노선을 택했다. 1928년에는 또한 소련의 신속한 공업화를 위해 5개년 경제 개발 계획이 시작되었다. 스탈린은 이 계획도 특유의 강철 같은 추진력으로 밀고 나갔다.

스탈린의 라이벌 트로츠키.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후 멕시코로 망명했으나 스탈린이 보낸 암살자에 의해 도끼에 맞아 죽는다.
스탈린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방법이든 주저 없이 사용했다. 그의 정치적 입지를 위협하고 혁명의 이념에 도전한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철저한 숙청이 단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살해된 수백만 명 가운데는, 그와 동고동락했던 당 관료들과 전문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전국 도처에 세워진 강제 수용소는 그의 정적과 정치적 반대파들을 숙청하는 효율적인 기구였다.

스탈린의 첫번째 부인인 에카테리나 스바니제. 스탈린이 그나마 애정을 가졌던 유일한 사람이며, 그녀가 가난과 질병으로 죽은 후부터 스탈린은 더욱 냉혹한 인간으로 변했다.

스탈린의 두번째 아내 나디아. 스탈린 친구의 딸로 스탈린과 사이에 바실리와 스베틀라나의 두 남매가 있었으나 스탈린의 학대와 잔인함때문에 1932년 자살한다.

스탈린의 아들 바실리와 딸 스베틀라나 그리고 스탈린. 바실리는 2차대전에서 공군 조종사로 참전했으며 전쟁이 끝난후 모스크바의 대공방어 책임자가 되었으며 1962년 알콜 중독으로 사망했다. 스베틀라나는 1967년 인도 델리의 미국 대사관으로 정치적 망명을 했다.

야고다. 스탈린의 숙청 작업을 전담한 자로서,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프룬제 등 주요 당 관료들을 숙청하였다. 그러나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막심 고리키의 아들을 암살한 것이 들통나 스탈린에 의해 숙청되었다.
스탈린의 학살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그는 신뢰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여러 소수 민족을 불모의 땅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도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피비린내 나는 처형과 보복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예전의 정치적 동지와 전문가, 그리고 정치적 반대파들이 다시 한번 희생양이 되었다. 스탈린의 통치 기간 동안 계속되었던 대량 학살은 1953년 3월 5일 그가 죽음으로써 비로소 끝이 났다.

사망한 스탈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스탈린의 명성은 그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공식적으로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 1956년 2월에 열린 소련 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에서는 스탈린의 학살 책임이 크게 문제가 되었다. 이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그의 후계자 흐루시초프(Nikita Khrushchov)였다.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을 격하할 때 중요한 명분으로 내건 사건은 1937년부터 1941년 사이에 엄청난 규모의 희생을 가져온 장교들에 대한 숙청이었다. 이와 더불어 엄청난 규모의 희생을 가져온 스탈린의 민족 정책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스탈린의 과오는, 고르바초프(Mihail Gorbachov)가 집권한 뒤에 스탈린 치하에서 희생된 삶들에 대한 복권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또 한 차례 폭로되었다.

소련 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을 비난하는 연설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