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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이 백성을 구하다
민 16:36-50
3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37 너는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명령하여 붙는 불 가운데에서 향로를 가져다가 그 불을 다른 곳에 쏟으라 그 향로는 거룩함이니라
38 사람들은 범죄하여 그들의 생명을 스스로 해하였거니와 그들이 향로를 여호와 앞에 드렸으므로 그 향로가 거룩하게 되었나니 그 향로를 쳐서 제단을 싸는 철판을 만들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표가 되리라 하신지라
39 제사장 엘르아살이 불탄 자들이 드렸던 놋 향로를 가져다가 쳐서 제단을 싸서
40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물이 되게 하였으니 이는 아론 자손이 아닌 다른 사람은 여호와 앞에 분향하러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함이며 또 고라와 그의 무리와 같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여호와께서 모세를 시켜 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더라
41 이튿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 하고
42 회중이 모여 모세와 아론을 칠 때에 회막을 바라본즉 구름이 회막을 덮었고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났더라
43 모세와 아론이 회막 앞에 이르매
4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5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 하시매 그 두 사람이 엎드리니라
46 이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피워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셨으므로 염병이 시작되었음이니라
47 아론이 모세의 명령을 따라 향로를 가지고 회중에게로 달려간즉 백성 중에 염병이 시작되었는지라 이에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48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에 염병이 그치니라
49 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에 죽은 자가 만 사천칠백 명이었더라
50 염병이 그치매 아론이 회막 문 모세에게로 돌아오니라
민 16:36-50 / [향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37) `아론 제사장의 아들 엘르아살을 시켜 향로들을 모으고 그 속에 있는 불똥은 다른 곳에 버리게 하여라. 향로는 거룩한 것이기 때문이다. 38) 향로를 들고 왔던 자들은 나 여호와에게 죄를 지어 모두 목숨을 잃었지만 그 향로는 나 여호와에게 바친 것이므로 거룩한 것이다. 그 향로를 두드려서 얇은 놋판을 만들어 그 판으로 제단을 감싸라. 이스라엘 백성은 제시를 드릴 때마다 그것을 보고 내게 들고 일어났던 그 무리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39) 엘르아살 제사장은 불에 타죽은 자들이 들고 왔던 놋향로를 모두 모아다가 두드려서 얇은 판을 만들어 제단을 감쌌다. 40)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향로를 들고 갔다가 불에 타죽은 사견을 기억하고 아론의 후손외에는 그 누구도 제단에서 여호와께 향을 피워 올리지 못한다는 것과 만일 그렇게 하였다가는 고라 일당처럼 되리라는 사실을 알려 주려는 것이었다. 엘르아살 제사장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다. 41) [아론과 모세가 백성을 구하다] 이튿날 이스라엘 온 공동체 사람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몰려와 마구 불평하였다. `당신들이 여호와의 백성을 죽이다니 말이 되는거요?' 42) 이렇게 많은 무리가 모세와 아론에게 대들자 만남의 장막에 구름이 뒤덮이면서 여호와의 영광이 찬란하게 빛났다. 43) 모세와 아론이 만남의 장막문 앞으로 나아가자 4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45) `너희는 어서 빨리 이 무리가 있는 곳에서 물러서라. 내가 순식간에 저들을 없애 버리겠다' 이에 두 사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빌었다. 46) 그러고 나서 모세가 아론에게 말하였다. `형님은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에 있는 불을 담고 향을 얹어 빨리 백성이 있는 곳으로 가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속죄하십시오. 그들이 여호와를 진노케 하였으므로 전염병이 번지고 있습니다.' 47) 아론은 모세의 말대로 향로를 가지고 무리가 있는 곳으로 급히 갔다. 사람들 사이에 이미 전염병이 돌고 있었다. 아론은 황급히 향을 피워 무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 내는 예식을 올렸다. 48) 그러자 퍼져 나가던 전염병이 수그러들었다. 이렇게 아론은 살아 있는 사람과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 사이에 서서 전염병이 더 이상 퍼져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49) 고라 일당이 하나님께 반역하여 죽은 사람외에도 이때 퍼진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1만 4700명이나 되었다. 50) 전염병이 그치자 아론은 만남의 장막문 앞에 서 있던 모세에게 돌아왔다.
죄가 무서운 것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을 위해 버릴 것은 버리고, 바꿀 것은 바꾸고, 지킬 것은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명령하여(36-40) 하나님은 모세에게 250명이 분향하였던 향로를 회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아론이 아닌,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명령하라고 하십니다(37). 향로를 회수하면서 불에 탄 시체를 만지는 것은 부정한 것을 가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거룩함을 유지해야 할 대제사장 아론이 아니라, 그 아들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이 일을 맡기십니다. 그리고 향로를 쳐서 제단을 싸는 철판을 만들어서 이스라엘에게 표가 되게 하라 하시고(38), 40절에는 기념물이 되게 하라 하십니다. 그리하여 불에 탄 향로가 기념물이 되게 해서 그것을 볼 때마다 이스라엘이 다시는 고라와 그 무리처럼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할 삶을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주신 징표였습니다(40).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41절의 말씀에선 회중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이튿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41-50)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셔서 반역자들의 죽음을 직접 지켜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죽음의 원인을 모세와 아론에게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41). 회중들이 모여 모세와 아론을 치려 할 때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납니다(42). 본문을 통해 죄가 점점 깊어져서 죄로 마비되어가는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죄와 멀어지기 어렵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에 역부족임을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염병으로 그 백성들을 멸하려 하십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45). 이미 염병이 시작되었지만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의 불을 담고 그 위에 향을 피워 급히 회중에게 가서 속죄하라고 말씀하십니다(46). 자신을 죽이려는 이들의 속죄를 위해 기도하시던 예수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아론이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 전염병이 그칩니다(48).
적용: 제사장이 있어야 할 자리는 성막만이 아닙니다. 죽음이 가득한 곳,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 있는 삶의 현장, 좌절과 낙심으로 가득한 세상에 함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찾아가야 할 ‘죽은 자와 산 자 사이’는 어디일까요(출 16:8)?
“그대가 어떠한 습관을 얻고자 한다면 그것을 많이, 그리고 자주 되풀이하는 것이 필요하다.”-에픽테토스.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저절로 익혀지도록 만들어진 습관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이 습관은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좋은 습관을 들일 건지 나쁜 습관을 들일 건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죄의 습관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인격이 새롭게 변화되며 하나님의 자녀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하나님 은혜의 거룩하신 손길이 필요합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 설 교 >
교회에서 당을 지으면 망합니다
민 16:36-50 / 임현수 목사
요즘 한국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참 어려운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위기의 상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통령을 반대하는 것인지 여당을 대적하는 것인지 하여간 저항과 반항과 반역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거리마다 뭔가 불만스런 내용의 글들을 적은 피켓을 들고 자기들 뿐만 아니라 동조세력을 얻어 합세하는 장면이 속출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종교 편향 문제로 비화되어 사찰에 계셔야될 승려들까지 역사상 처음 으로 거리에 뛰쳐 나와 나라가 혼란에 빠질 지경입니다. 불교신문과 불교 방송을 몇 시간 동안 살펴 보았는데.. 그 안에서도 시위대에 대한 찬반 시비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불교계의 한 중진이 불교 신문에 쓴 대목을 읽어드립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목사의 집도로 예배를 본것이 불교계에서 볼 때 그토록 경천동지할 일이며, 분격할 일인가? 박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는 독실한 불교인이었다. 박대통령 18년간 재임시 청담스님을 위시하여 얼마나 많은 승려들이 청와대에서 목탁소리를 울리며 독경을 하며 살다시피 했는지 아는 가? 암산(巖山)의 구곡양장(九曲羊腸)같은 도선사 소로(小路)를 자동차가 다니도록 누가 도로공사를 했는가?
국군의 공병대대가 동원되어 다이너마이트로 암산을 발파하며 길을 뚫었다. 국방에나 투입되어야 할 공병대대가 박대통령과 육여사의 불심명령에 의해 사적(私的)으로 동원되어도 당시 기독교계는 벌떼같이 일어나 종교편향을 외치며 규탄성(糾彈聲)을 내지르지 않았다.
아전인수(我田引水)처럼, 우리가 하면 문제가 없고, 남이 하면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처럼 대적시 (對敵視)하는 것은 대승적 자비와 아량이 없는 자들의 소인배(小人輩)들의 작태일 뿐이다.
이것은 불교인들의 목소리입니다. 이런 모습들을 지켜 보면서 ….
한마디로 지금 우리 민족은 선진대열에 들어가기 직전의 홍역을 치루고 있는 느낌입니다.
모두가 다 원망의 소리이고, 불평의 아우성이고, 저항과 반역과 투쟁의 외침 뿐입니다.
지금 대한 민국의 위상은 안홀트GMI의 국가 브랜드 평가에 의하면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한국을 혐오하는 나라들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도 국제사회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 멋대로 소리 지르고, 길 막고 드러눕고, 때려 부시고 (경찰차 180대 / 450명 전경 입원), 퍼져 울고, 멱살잡고 싸워대고, 턱 없이 사치하고 무례하고, 남 돕는 일에 인색하고, 외국인 노동자 차별 하고 학대하고 그러면서도 내 자랑만 늘어 놓는 한국 사람이 싫은 것입니다.
그런 나라에 누가 가겠으며 누가 맘놓고 기업을 차리고 돈을 투자하겠습니까?
국가 브랜드 가치는 한 나라의 관광산업, 투자유치, 상품판매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 나라의 신용도와 국가의 품격을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듣기 거북하다고 흘려 버릴 이야기가 아닙니다. 겸허히 받아들여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우리 국민 모두가 반성하고 고쳐나가서 나라 위신을 격상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반성이 없기에 한류가 혐한류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 입니다. 전세계가 어글리 코리안이라고 하는 풍토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고질병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이런 말은 듣기 싫어하고 피하고 자기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무시해버립니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그러다가는 국제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더 급하다고 하겠지만 그보다 더 급한 것은 우리가 좀 덜 먹고 좀 덜 입고 살더라도 국제사회에서 신용 있고 호감이 가는 국가로서 인정받고 대접받는 일입니다.
요즘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민수기는 영어로 Numbers, 한자로는 백성 민(民)에 숫자를 나타내는 수(數)를 사용해 백성의 숫자를 말합니다. 이 책의 제목이 민수기인 이유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가 얼마인지 두 번에 걸쳐 계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민수기를 보면 백성의 숫자를 계수한 것은 두 번 밖에 나오지 않는데 불평과 원망과 반역의 사건은 끊임없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11장에는 백성의 원망 사건, 12장에는 형제의 원망사건, 13장과 14장에는 가데스바네아에서 일어난 백성의 끝없는 반항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민수기는 차라리 불평수기라고 이름을 바꾸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16장에서 우리는 또 다른 반역 사건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지도자 반항사건입니다. 지도자들이 모세 반대 운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 대표자가 고라이기 때문에 이 사건을 ‘고라의 사건’ 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고라와 다단, 그리고 추종세력들이 점점 늘어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죽은 사람만 14,700명입니다. (49절) 그들은 당을 짓고 지도자인 모세에 대하여 반역을 시도했습니다.
어떤 역사학자는 '인류 역사를 반역의 역사'라고 했습니다. 사실 인류 역사는 반역으로 시작했습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반역했고, 그 피를 이어받은 모든 인류가 계속되는 반역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신하가 왕에게, 아들이 아비에게, 종이 주인에게 반역하는 일은 성경 역사를 봐도, 세상 역사를 봐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사건들입니다.
일반적으로 '반역'이란 자기 보다 위에 있는 권세나 권위에 도전하여 그것을 빼앗으려는 시도를 말합니다. 본문을 보면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반역' 사건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대한 고라 당의 '반역'사건 입니다. 우리는 이 고라 당의 '반역' 사건을 통해 그들의 '반역'의 동기가 무엇인지,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동기…과정…결과…
첫째로, 고라 당의 '반역'의 주 동기는 시기심이었습니다.
원래 고라는 모세와 아론과는 사촌 지간이었습니다.
야곱이 레위를 낳고, 레위는 고핫을 낳았고, 고핫은 아므람과 이스할을 낳았습니다. 아므람은 모세와 아론을 낳았고, 이스할은 고라를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고라는 모세와 아론의 사촌 형제였습니다. 그도 모세와 아론처럼 레위 지파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같은 레위 사람이었지만, 모세와 아론에게는 특별한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모세에게는 이스라엘을 이끄는 지도자로 삼으셨고, 아론은 대제사장으로, 그의 아들들은 제사장들로 임명하셨습니다.
이것이 고라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 입니다."아니, 왜 아론의 가족만 제사장을 해? 우리는 레위 지파 사람이 아닌가? 왜 우리가 그들의 밑에 들어가야 하지?" 하는 마음이 고라의 마음 밑바닥에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라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제사장이 되겠다는 도전이요, 반란이었습니다. 이렇게 도전하기 위해서 고라와 그의 추종자들은 한 가지 중요한 논리를 들고 나왔습니다. 3절을 보면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 하며 불평합니다.
결국 이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들은 자기 만족입니다. 결국에 이들에게 가나안 땅은 은혜의 땅이 아니라 자기를 만족시키는 욕심의 땅이었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자기의 만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욕심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고 있지만 사실상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모세가 가나안땅을 못 들어가게 했습니까? 또 모세가 제사장을 세웠습니까? 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부정하고 불만터뜨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앙하고 있음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고라 당의 주장이 왜 잘못된 것일까요?
1)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마치 모세와 아론이 스스로 만든 것처럼 주장했습니다. 모세도 아론도, 누구 하나 스스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나 제사장이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 임무들을 맡았고 수행했을 뿐이었습니다. 또한 아론 자손이 아니고는 같은 레위 지파 사람들일지라도 고라와 다른 레위인들은 제사장이 될 수 없었던 것도 다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라 당이 이에 도전한 것은 바로 모세와 아론을 도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도전한 중한 죄였습니다.
2) 그들은 한 가지 진리를 주장하기 위해 다른 더 중요한 진리들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다 거룩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그들 중에 지도자로 세우신것도 사실입니다. 모든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수평적으로 동등한 것은 사실이지만, 신앙공동체 안에 수직적인 질서를 세워놓아 지도자와 백성간에 명령과 복종의 관계를 만드신 것도 사실입니다. 이는 계급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동체의 영적 질서를 위해 만드신 제도입니다.
고라는 바로 이런 영적 질서를 파괴하려는 장본인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크리스챤은 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그러나 개개인의 부르심과 특별한 임무가 다 다르기에 서로 순종하며 따라야 하는 것 입니다.
3) 그들은 모세의 지적처럼 "너무 분수에 지나쳤습니다."
민 16:7 내일 여호와 앞에서 그 향로에 불을 담고 그 위에 향을 두라 그 때에 여호와의 택하신 자는 거룩하게 되리라 레위 자손들아 너희가 너무 분수에 지나치느니라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고라의 무리들이 시기심에서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분수를 아는 것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모세는 그들에게 다시 반문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9)
사실 그들이 맡은 일도 중하고 귀하며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맡은 일과 모세와 아론이 맡은 일을 비교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의 일에 비해 자기들의 일이 형편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들은 시기심에서 그런 무서운 반역을 저질렀습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의 직분들을 말하면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롬 12:3)고 권면했다. 오늘날도 거의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거의 모든 것을 가진 이들보다 더 자족하며 더 많이 감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많은 것들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없는 아주 작은 것들을 보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분수를 알아야 합니다…. 분수를 알고 삽시다. 소크라테스… 네 자신을 알라! /수학 선생도 흉내… 네 분수를 알라 /지리 선생… 네 자리를 알라 / 국어선생… 네 주제를 알
라 / 미술선생… 네 꼬라지를 알라 /
어떤 교회에 오랜동안 묵묵히 신앙생활을 한 집사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주일성수신앙이나 십일조신앙이나 감사신앙이나 무엇하나 흠잡을 것이 없는 이 집사님에게, 딱 한가지 흠이 있었는데,그것은 회중기도 기피증 환자였던 것입니다. 아무리 대예배 시간에 기도를 시켜도, 30분이 지나던 40분이 지나던 침묵의 기도로 일관하여 당혹스러웠습니다.
교회 담임목사님은 그 집사님 기도 시키는 일이 필생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어느날 심방길에 오른 목사님은 천신만고 끝에 집사님의 기도 허락을 받아내었습니다. 이 소문은 금방 전 교인에게 알려져, 돌아오는 주일은 목사님의 설교보다,그 집사님의 기도가 모든 성도들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예배시간이 되어 집사님의 기도순서가 되자, 모든 교인들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집사님의 철빗장 말문이 열렸습니다.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극진하신 사랑과 보혜사 성령님의 감동하시는 은혜가.......!" 그만, 그날 예배실은 완전히 폭소 바다가 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기도원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셔서 성령 충만함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충만한지를 시험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극히 적은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산을 명하여 저 바다에 빠지라 고 하면 그대로 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믿고 삼각산을 향하여 명령 했습니다. "삼각산아,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들려서 서해 바다에 빠지거라." 그런데 아무리 밤새 기도해도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삼각산은 꿈쩍도 안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기도원에 들어가서 주님께 기도 하면서 여쭈어 봤습니다. "어찌하여 말씀대로 안 이루어 집니까?" 얼마 후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삼각산을 서해 바다에 빠춰서 뭣 할려고?"
둘째로, 고라 당의 '반역'의 과정은 당 짓기였습니다.
사람들은 '반역'을 꾸밀 때 절대로 혼자 하지 않습니다. 꼭 당을 지어 모사를 꾸밉니다. 고라는 르우벤 자손들 중 다단과 아비람 그리고 온과 그를 동조하는 이름 있는 족장들 250명과 함께 이 일을 꾸몄습니다. 1, 2절입니다.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 백 오십 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
여기서 보는 것처럼 당시 이스라엘 회중에서 지도급에 있는 쟁쟁한 인사들이 결탁하여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고라는 시기심 때문에 반역을 주도했는데, 그러면 르우벤 지파 사람들은 왜 이 반역에 가담했을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르우벤 지파의 오래 된 불만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르우벤은 야곱의 장남이었다. 그래서 르우벤은 자신이 모든 형제들 앞에 섰어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메시야가 태어나는 특권도 유다 지파에게 넘어갔고, 따라서 이스라엘 진이 행군할 때도 유다 대에 밀려 뒤따라 가는 것이 늘 못마땅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늘 모세와 아론에 대한 불만이 마음 속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런 불편한 심기에 고라가 불을 질렀고, 르우벤 자손들은 '이 때다' 싶어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든 것 입니다.
2) 고핫 자손과 르우벤 자손은 다같이 회막 남쪽에 진을 치고 있었던 이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서로 옆에 있으니 작당하기가 좋았던 것 입니다. 사람이 누구와 함께 있고, 누구와 가까이 하며, 누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느냐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진리를 재삼 느끼게 됩니다. 사람은 가까이 있는 사람을 닮게 마련입니다. 이것도 바라봄의 법칙입니다. 더군다나 불만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같이 모였으니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을까요? 우상을 만들어 파는 아버지 데라에게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롯을 음란한 도성 소돔과 고모라로부터 떠나게 하셨을까요?
이 떠나는 법칙도 중요한 것입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주의해서 관찰하셔야 합니다.
운명적으로 닮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진리를 먼저 깨달은 다윗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 (시 1:1)고 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바울은 당 짓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문제가 많은 교회였고… 어린아이 같이 미숙한 교회였다는 중거가 바로 당 짓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갈 때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훼방함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고후 12:20)
그는 또한 성령의 열매를 육신의 열매들과 비교하면서 그 중에 하나를 "당 짓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런 일을 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갈 5:20, 21).
갈 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촛불집회도 그런 것입니다. 불만이 많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인 것 입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이 집단화 되면 그 공동체는 몸살을 앓기 시작하는 것 입니다. 이제 고라당의 반역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셋째로, 고라당은 '반역'의 결과로 땅이 입을 열어 그들을 삼키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모세가 정말 온유한 사람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너무도 화가 나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는 그들의 예물을 돌아보지 마옵소서. 나는 그들의 한 나귀도 취하지 아니하였고 그들의 한 사람도 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15) 즉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도 기도도 받지 말아달라는 기도입니다.
죄를 사하는 제사도, 기도도 안 받으신다면, 그들은 결국 멸망당하고 말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고라와 아론에게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너희는 각기 향로를 잡고 그 위에 향을 두고 각 사람이 그 향로를 여호와 앞으로 가져 오라. 향로는 모두 이 백 오십이라. 너와 아론도 각각 향로를 가지고 올지니라" (17) 모세가 말한 대로 아론과 고라 및 250명의 족장들이 향로를 들고 회막 앞에 서자마자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하노라" (21)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이 일에 가담치 않은 무죄한 백성들도 고라 당과 함께 멸망당할 것이 두려워 그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드렸습니다.
22절 그 두 사람이 엎드려 가로되 하나님이여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여 한 사람이 범죄하였거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나이까?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일에 가담치 않은 백성들을 그들과 갈라서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고라 당이 서있는 땅이 입을 벌리며 갈라져서 그들을 다 삼키고 말았습니다. 지진을 보세요. 10만명 20 만명이 죽는 시간이 불과 10초도 안 걸립니다. 쓰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카트리나도 그렇습니다. 지난 주에 미국도 200만명이 대피하는 소동을 벌였습니다. 심판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영적인 교훈 두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 편에 서셔서 그들의 권위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말한 대로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자 보시오. 내가 지금까지 행한 일이 다 내 임의대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셔서 한 것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이 죽는 것처럼 자연사로 죽는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요, 만일 땅이 입을 벌려 이들을 삼켜 버린다면 과연 이들이 여호와를 업신여겼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대로 하나님은 즉시로 그들을 땅으로 입을 벌리게 해 삼킴을 당하게 하셨고, 모세와 아론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쓰시는 하나님의 종들이라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재삼 깨닫게 하셨습니다. 모세의 생애 동안 많은 반역이 있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모세편에 서셔서 그의 권위를 세워주셨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의 반역에서도 보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 하면 이러한 영적 질서가 바로 서야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바로 서기 때문이었습니다.
2) 고라 당의 멸망 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대하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고라 및 그의 자손들이 다 멸망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민수기 26장을 보면 "땅이 그 입을 열어서 그 무리와 고라를 삼키매 그들이 죽었고 당시에 불이 이 백 오십 명을 삼켜 징계가 되게 하였으나 그러나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아니하였더라" (10, 11)고 했습니다. 고라의 행위로 보면 당연히 그의 아들들도 다 멸망을 당해 마땅했지만, 하나님은 또 다른 계획을 가지셔서 그 아들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고라 자손들은 후에 많은 시편들을 지어 하나님을 찬양했고, 특히 84편을 보면, 그들은 고라의 사건을 통해 큰 교훈을 얻어 바르게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10)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이 상태가 되어야 정상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틈만 나면 솟아오르는 것이 인간의 욕심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관심이 없습니다. 진리에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 자신의 욕망을 이루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눈에 심판이 훤히 보이지만 그것을 잠간입니다. 죽음을 늘 보고 있어도 그 죽음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런 우리들의 모습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큰 소리를 치고 남보다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것 때문에 주님이 세상으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천대를 받고 멸시를 당하셨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내가 부자되고 출세하는 것을 기뻐하고 그것이 복이라고 감사해 할 때에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나를 잘되게 하는 부적으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액운을 쫓아내고 사업을 잘되게 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볼 때 마다 나의 죄가 보이고 나의 악함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을 것이며 나에게 주어진 환경속에서 감사하며 그저 주님의 뜻대로 하여 주옵소서라고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
원망하지 말라!
민수기16:41-50 / 崔仁根 牧師
타락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간의 특징은 원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타락한 아담은 하나님과 자신의 여자를 싸잡아 원망하였습니다.
창 3:12 /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인생들은 평생을 살아가면서 원망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소중한 축복을 상실하고 무서운 심판을 받으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원망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고전 10:10 /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이렇듯 원망은 타락한 인간의 공통된 특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이와 같은 원망에서 떠나 “모든 것이 내 탓이오!”하면서 책임을 통감하며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소위 그들은 선민이라는 특별한 칭송을 받으며 하나님의 사람들로 구별되어 있으면서도 그랬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의 주인공들은 또 다시 구별되어 레위 지파의 성전을 맡은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당을 지어 단체로 모세와 아론에게 몰려와 “왜 너희 형제들이 다 해먹느냐? 너희가 우리들의 왕이냐?”하면서 대들었습니다.
민 16:1-3 /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 오십 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너희들 형제끼리 다 해먹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땅이 갈리지는 지진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딸린 모든 가족들과 모든 재산들이 다 그렇게 비참하게 망하고 말았습니다(민16:31-33)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 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형벌입니까?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것을 두 눈으로 목도하고서도 남은 백성들이 또 다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함께 공부하면서 도전과 각성으로 신선한 변화를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원망하지 말라!
사람들이 함께 모여 250명을 만들었다면 이것은 엄청난 수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사람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그들에게 속했던 모든 소유물이 함께 모이면 실로 엄청난 모습일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모든 것들이 그들이 서 있는 땅이 순식간에 벌어져 그 속으로 빠져들고 다시 땅이 입을 닫으므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무섭고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와 같은 모습을 두 눈으로 보고 무서워 질겁을 하였으면서도 이틀이 지난 다음에 또 다시 몰려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데모를 하였다면 그것은 더욱 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민16:41-45)
이튿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가로되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 하고 회중이 모여 모세와 아론을 칠 때에 회막을 바라본즉 구름이 회막을 덮었고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났더라 모세와 아론이 회막 앞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 하시매 그 두 사람이 엎드리니라
그들은 이렇듯 거짓말처럼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반복해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달려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무려 14,700명이나 몰살을 당하는 재앙을 맞고야 말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타락하고 육신으로 변해버린 인간의 진면모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바로 이렇다는 말씀입니다.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는 우매함, 설마 하나님이 우리들을 다 죽이시겠는가? 하는 불신, 지도자와 이웃에 대한 분노... 이런 것들이 타락한 인간의 본심이요 육신이 만들어 놓는 삶의 현주소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 오늘 우리들에게 간청하고 있습니다.
고전10:10 /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과연 그렇습니다. 원망은 이토록 무서운 형벌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사는 날 동안 그치지 않고 원망하며 그토록 불행하고 안타까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왜 이처럼 무서운 원망을 그치지 못하고 하나님은 또 그렇게 원망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와 원인을 찾아 육신을 넘어 영적으로 변화 받는 복된 역사를 함께 만들어 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원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보화 시대에 세상 돌아가는 온갖 사실들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사실은 그 옛날 농경사회 때와 비교해 보면 엄청난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고 지구촌의 모든 소식들을 모르는 것이 없을 만큼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 평창에서 열리고 있는 올림픽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누가 금을 땄는지? 거기에서 누가 무슨 일을 하였는지? 속속들이 다 듣고 또한 다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용히 생각해 보면 꼭 알아야 할 진짜는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기 눈 속에는 들보를 두고 형제의 순 속의 티를 보는 그런 안타까운 모습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죄가 많은지? 자신이 얼마나 이웃을 헐뜯고 죽이고 원망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의 속에 지식도 지혜도 메말라 가을 낙엽처럼 바스락거리고 있다는 사실 또한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웃을,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을, 스승을, 심지어는 하나님도 원망하고 나무라며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통탄하시며 말씀하고 계십니다.
렘 17:9-11 /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이렇듯 부패한 자신의 모습과 마음을 볼 수 없다면 우리는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부패한 자신의 마음을 고치지 못한 채 이웃을 판단하고 원망하는 것은 語不成說(어불성설)이기 때문입니다. 대머리가 대머리 약을 판다면 그 누가 그런 약을 믿고 사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레위 자손들과 고라 자손들을 보면서 참으로 그들은 잘난 척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떼를 지어 의로운 척 하지만 그들의 우매함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무식이요 무지입니다. 모세를 원망하며 모세를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지만 실제로 모세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모세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그들 앞에 선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출 4:10-14 /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가라사대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
무엇입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극구 사양하며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화를 내시면서까지 그를 보내셨고 결국 아론을 그의 수종자로 붙여 주시면서 까지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도 모르고 모세와 아론이 스스로 그들 앞에 서서 왕 노릇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원망하지 말아야 할 가장 큰 이유입니다. 어떤 사람이나 사건 배후에는 우리들이 원망하는 그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서 계심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고라 자손들은 모세만 보고 아론만 보았지 그들 뒤에 서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다가 결국은 그렇게도 비참하게 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깊은 깨달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 어떤 상왕이든 사람이든 원망하고 싶거든 꼭 그것만 보지 말고 그 상황과 그 사람을 세우신 하나님을 먼저 볼 수 있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고라 자손들과 같은 비참한 멸망을 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들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어서 우리들이 절대로 모르는 숨은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욥처럼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에서 이런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오토바이를 사서 폼 잡고 다니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시골길을 오토바이를 타고 신나게 달리는데 자꾸만 바람이 단추와 단추 사이를 헤집고 들어와 추웠습니다. 그는 오토바이를 세우고 옷을 뒤로 돌려 입었습니다. 그러니까 단추는 뒤로 가고 등 쪽이 앞으로 오니 바람이 들어오지 않고 좋았습니다. 그렇게 다시 신이 나서 달리던 그는 커브 길에서 마주 오는 버스를 피하려고 핸들을 꺾었다가 그만 언덕 아래 논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승객들이 뛰어 내려 가보니 청년은 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끔찍하게도 목이 돌아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우선 그 목을 똑바로 해 보려고 아무리 해도 목이 돌아오지를 않았습니다. 그 중에 힘이 센 한 사람이 나오더니 목을 홱 잡아 돌렸습니다. 갑자기 부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청년의 목이 그만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청년은 병원으로 옮기기도 전에 죽고 만 것입니다. 단추 있는 곳이 뒤에 있고 머리는 앞으로 숙여져 있으니 그 사람의 목이 뒤틀린 줄 잘못 알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지식의 한계입니다. 너무나도 잘 아는 것처럼 하지만 실상은 이렇게 돌려 입은 옷 하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목이 돌아간 줄 알고 끔찍한 사고를 만들어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웃을 판단하고 심판하고 원망하는 어리석은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웃은 원망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오래 전 The Day After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지구촌에 핵전쟁이 일어나 생명 있는 것은 모두가 다 죽어버리고 어떻게 단 한 사람만이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만족했습니다. 모든 은행의 돈이 모두 자기 것이고 모든 딜러의 새 자동차가 또한 모두 자기 것이었습니다. 코스트코의 그 많은 물건들 또한 자기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세상에 있는 그 모든 것들을 다 소유하였으면서도 결국은 그것들을 써보지도 못한 채 죽고 맙니다. 바로 외로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혼자 살도록 만드시지 않고 더불어 함께 살도록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이웃은 우리들을 이 땅에서 생존하게 하는 생명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소중한 이웃들을 하나님은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레 19:18 /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이웃을 어떻게 대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웃을 원망하지 말고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예배보다 더 소중하게 이웃과 더불어 화목하고 화평하기를 명하셨던 것입니다.
마 5:23-24 /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이렇듯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예배보다 더 이웃들과 화목하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망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상대적입니다. 상대가 나를 칭찬하면 나도 상대를 칭찬하게 됩니다. 하지만 상대가 나를 원망하면 나도 상대를 원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이웃을 원망하지 말고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초대교회는 바로 이렇게 서로 相扶相助(상부상조)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 드리므로 불같이 일어나는 기적을 보았던 것입니다.
행 2:44-47 /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입니다. 내 영혼을 구하려는 노력과 내 이웃을 도우려는 노력도 하나입니다. 토인비는 말했습니다. “행복이란 남을 행복하게 해 줄 때 얻어지는 부산물이다.”고 말입니다. 행복은 선물처럼 모두 나눠 갖는 기쁨입니다. 미국 가요 가운데 “행복하고 싶어라. 그대를 행복하게 할 때 까지 난 행복할 수 없어라.”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남녀의 애정표현이지만 진리 같은 표현입니다. 하나님과 남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 사람은 자유인입니다. “주여, 내게 밀알처럼 썩는 기쁨을 주시옵소서. 나룻배처럼 살게 하소서. 이름 없이 살게 하소서.”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사는 삶이 바로 영적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원망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은 절대자를 우습게 여기고 경거망덕 하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바로 교만하거나 무지한 탓이기도 합니다. 그 옛날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며 진주만 폭격을 감행했다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맞고 단숨에 항복한 것만 보아도 무지함의 弊害(폐해)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북한이 미국을 향해 호언장담하며 핵무기게임을 하는 것도 똑 같은 맥락에서 단순무지한 소치임을 볼 수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금요일인 23일 북한 제재를 위한 새로운 초강경 발표를 내 놓았습니다. 다음은 조선일보의 기사 일부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23일(현지 시각) 메릴랜드 주 옥슨힐에서 열리는 보수정치행동회의(CPAC)에서 “오늘 나는 북한 정권에 대해 사상 최대의 제재를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재무부는 곧 북한의 제재 회피를 돕는 선박, 해운회사 및 무역회사 56개를 대상으로 북한 정권이 핵프로그램에 투자하고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한 재정과 연료의 근원을 차단하는 새로운 조치를 취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재무부는 이날 오후 석유 등 유엔 금지 물품을 밀수하는 북한 선박에 대한 해상차단을 대폭 강화하는 제재를 발표 할 전망이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앞서 1월 16일 한국전 유엔 참전국을 포함해 20개국 외교장관이 참석한 캐나다 밴쿠버 한반도 안보회의에서 “유엔 제재를 침해하는 북한 선박의 공해상 불법 환적을 막기 위해선 지구적 해상차단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상 최대’ 규모의 해상차단을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대북제재는 남북 간 대화를 늘리는 기조에도 불구하고, 대북 압박의 고삐는 늦추지 않을 것이란 트럼프 정부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풀이된다.](조선일보 2월 24일자)
불나방은 불에 뛰어 들면 죽는 줄도 모르고 불만 보면 불 속으로 뛰어듭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조차도 불나방인 것입니다. 참으로 미련한 것이지요. 이렇듯 인간들도 어리석기 짝이 없을 때가 있는데 하늘의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가 바로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사람이 저렇게도 미련하고 어리석을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무모하게 도전하다가 결국은 다 죽고 말았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는 것은 그들을 세우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을 대적하다가 250명의 고라 자손들과 그 일당 및 그들에게 따른 모든 가족들과 재물이 몽땅 지진으로 망하는 것을 두 눈으로 목도하고 두려워 떨었으면서도 그것이 모세와 아론 때문이라고 다시 또 대적을 하고 일어났으니 이 보다 더 무모한 짓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이 일상으로 도전 없이 하는 원망이 이렇게도 무서운 형벌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면 더는 원망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아무런 유익도 없는 이웃 원망으로 비참하게 망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원망은 단순한 윤리 도덕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심판의 대상이 되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고전 10:10 /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원망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미련한 자들은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담대하게 당을 짓고 떼를 지어 일어났다가 너무나도 비참하게 망한 대표적인 모습들입니다. 다시 한 번 더 그들의 우매한 멸망을 성경 그대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민 16:31-35 /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 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그 주위에 있는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도망하며 가로되 땅이 우리도 삼킬까 두렵다 하였고 여호와께로서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오십 인을 소멸하였더라
민 16:49 / 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에 죽은 자가 일만 사천 칠백 명이었더라
이 두 사건은 한결같이 미련한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다가 심판 받은 케이스로 사도 바울은 이 사건을 경고로 삼아 고린도교인들을 훈련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이 사건을 거울삼아 이제 더 이상은 이웃을 원망하는 어리석은 육신적인 처신을 그만 두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인생 여정에 가장 백해무익한 일이 이와 같은 원망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살이와 신상생활은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들과의 관계와 세상과 물질과의 관계가 우리들의 삶입니다. 그것이 잘 못 되면 인생도 불행하게 되고 신앙생활도 망가지고 맙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소중한 관계를 소리도 없이 깨드리는 것이 바로 원망입니다. 원망과 불평을 듣고 기뻐하거나 사랑 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에 대해 입을 열면 칭찬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입을 열지 말아야 합니다. 평생토록 해 온 일들이 하루아침에 고쳐지지는 않겠지만 기도하며 훈련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입으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 둘씩 육신의 그릇된 습관과 죄악을 고쳐가게 되면 마침내 영적인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되는 날이 도래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옛말에 "안 되면 조상 탓, 잘되면 내 탓"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일이 뭔가 안 되는 것 같으면 곧 바로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탓합니다. 이러한 원망은 아담 때부터 있었습니다(창3:12). 그러므로 원망은 습관이며, 명백한 책임회피입니다. 그리고 원망의 말은 바로 자신을 향해 쏘는 화살입니다. 옛날에 작전을 아주 잘 세우는 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장군이 세우는 작전은 늘 화창한 날에만 승리할 수 있는 작전이었습니다. 그날도 화창한 날이었습니다. 병사들은 싸우기 전부터 승리를 확신하면서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가 비가 오는 바람에 그만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장군은 하늘을 욕하고 원망하면서 일제히 하늘을 향해 활을 쏘라고 병사들에게 명령했습니다. 결국 그 화살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이렇듯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욕하는 어리석은 행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빌 2:14-16 /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는 길은 참으로 멀고도 험한지도 모릅니다. 어느 덧 두 달이 지나가고 있는데 아직도 우리는 도토리처럼 육신의 껍질 속에 단단히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노력하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면 반드시 영적인 사람이 되어 디모데와 같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신의 잔재를 하나씩 둘씩 벗어가야 만 합니다. 오늘은 원망을 떨쳐버릴 수 있도록 고귀한 말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으로 구별 받아 성전의 일을 맡을 정도로 쓰임 받으면서도 이웃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감히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들을 원망하다가 망한 고라 자손들은 영원히 우리들의 거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목도하고서도 깨닫지 못한 백성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정확하게 모르고 말씀에 무지하게 되면 그 누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우리 모두는 도전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도와주고 살려주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은 고사하고 심판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항상 기도와 말씀으로 깨어 있어서 깨달음이 있는 성도들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바로 이것이 영적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축복된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를 위해 예배자로 구별되어 거룩한 성전으로 예배드리기 위해 올라오신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이처럼 깊은 깨달음으로 원망을 넘어 사랑으로 무장하는 가장 복 받은 심령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성경에 나타난 전염병 이야기
민16:41-50 / 김원효 목사
요즘 전염병 코로나 바이러스의 명칭을 놓고 국가 간에 알게 모르게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우한 바이러스’ 혹은 ‘중국 바이러스’라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우한 폐렴’이라고 좀 더 세밀하게 부르고 있습니다. 당연히 중국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전의 사례들을 보면 유행병에 그렇게 지역 명칭들을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면 1900년 이후 세계적인 판데믹 유행병이 세 번 있었습니다. 1918년 4-5천만 명이 사망한 ‘스페인 독감’, 1957년 2백만 명이 사망한 ‘아시아 독감‘, 1968년 100만 명이 사망한 ‘홍콩 독감’ 모두 지역 명칭을 사용하여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COVID-19’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엔 산하 WHO에서 정식 명칭을 COVID-19이라고 명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계속 ‘차이니즈 바이러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한 기자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당신은 왜 그렇게 부르세요?”라고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합니다. “이 바이러스가 중국에서 나왔으니까요. 그리고 중국 사람들은 미군이 바이러스를 퍼트렸다고 뒤집어씌우려고 하기에 나도 사실을 이야기해야 합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그렇게 불러주니까 다행이긴 합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중국의 영향력이 워낙 막강하여 자꾸 ‘신천지 바이러스‘니 ’대구 바이러스’니 하는 말들이 생겨나고, 한국의 보건부장관 역시 “이 바이러스가 퍼진 원인이 한국 사람들 때문이다.”라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말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중국 보건부장관인지 한국 보건부장관인지.... 아- 참!
최근에 유행했던 전염병의 경우는 2003년 발생하여 774명이 사망한 ‘사스’가 있고, 2009년 발생하여 18,239명이 사망한 ‘신종 플루’가 있고, 2013년 발생하여 212명이 사망한 ‘조류 인플루엔자’가 있고, 2014년 발생하여 10,096명이 사망한 ‘에볼라 바이러스’가 있고, 2015년에 발생하여 383명이 사망한 ‘메르스’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전염병들로 인해 지금처럼 교회가 예배를 못 드리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번 전염병이 참으로 심각합니다. 이런 심각한 전염병을 저와 여러분들이 직접 맞이하면서 도대체 성경에는 이런 전염병에 대하여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궁금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경에 나타난 전염병 이야기를 전해 드리려고 합니다. 더 나아가 성경에 나타난 전염병 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도 함께 알아보려고 합니다.
먼저 출애굽기 5장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모세와 아론이 애급의 바로 왕에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하셨나이다.” 바로가 대답합니다.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모세와 아론이 대답합니다.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가서 우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가기를 허락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전염병과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출5:3) 이 구절에서 보면 ‘전염병과 칼’이 나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두 가지를 무서워했습니다. 첫째 전염병이고, 둘째 칼(전쟁)입니다.
전쟁은 적이 오는 것이 보이고 같이 싸워보기라도 하는데, 바이러스라는 전염병은 적이 보이지도 않고 싸워볼 수도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대량학살을 당하고 맙니다. 과학과 의학이 발달된 오늘날도 COVID-19이라는 바이러스를 보면서 우리도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전염병으로 당신의 백성 된 우리들을 치지 마옵소서.”
레위기 26장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믿으면 이런저런 복들을 주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과 계명을 지키지 않고 배반하면 이런저런 재앙이 임한다고 경고합니다. 그 중 빠지지 않는 것 하나가 있는데 바로 전염병입니다. 레위기 26장 25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성읍에 모일지라도 너희 중에 전염병을 보내고...”
신명기 28장에도 보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잘 듣고 지키면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저주가 임한다고 경고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전염병입니다. 신명기 28장 21-22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네 몸에 전염병이 들게 하사 네가 들어가 얻을 땅에서 필경 너를 멸하실 것이며 폐병과 열병으로 너희를 치시리라....”
이 구절에 보면 전염병, 폐병, 열병이 나오는데 제가 이 구절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분, 전염병, 폐병, 열병 하면 지금 뭐가 생각납니까? 영락없이 COVID-19 증상이지 않습니까? 그 중 폐병이 가장 두드러진 것인데 아시다시피 폐는 한 번 망가지면 다시 재생이 안 되는 기관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COVID-19의 치사율이 당장은 5-6%이지만 일단 폐가 망가지면 결국 이로 인해 수년 혹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사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전염병은 치사율이 당장 나타나는 것보다 훨씬 높은 겁니다. 더욱이 이것은 에이즈 바이러스처럼 일단 치료가 되더라도 나중에 면역력이 약해지면 다시 활성화하고 재발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유행하는 이 바이러스가 그 옛날 성경에 나오는 전염병과 너무나도 유사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이미 오래 전에 이런 전염병이 하나님의 백성에게조차 임할 수 있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1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하나님을 반역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민14:12)
성경에서 전염병에 관한 구절이 가장 많은 곳은 예레미야서입니다. 몇 구절을 소개해 볼까요?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그들을 멸하리라.”(렘14:12) “이 성에 거하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리라.”(민21:9)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보내리라.“(렘24:10)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그들을 벌하리라.”(렘27:8)
예레미야 선지자는 남왕국 유다가 멸망을 당할 것을 계속 예언했고 그 예언이 성취되었는데 여기에 보면 항상 세 가지를 언급합니다. 바로 칼과 기근과 전염병입니다. 자그마치 예레미야서에 14번이나 언급합니다. 그리고 에스겔 선지자 역시 유다 왕국이 멸망당할 것을 언급했는데 여기에도 보면 칼과 기근과 전염병 이 세 가지가 계속 나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에 대하여 좀 더 특이하고 세밀하게 예언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먼 데 있는 자는 전염병에 죽고, 가까운 데 있는 자는 칼에 엎드러지고, 남아 있어 에워싸인 자는 기근에 죽으리라.”(겔6:12) 성경에서 전염병과 칼(전쟁)과 기근, 이 세 가지는 거의 같이 따라 다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하는 환경도 마찬가지가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즉 전염병이 오니까 직장과 가게 문을 닫아야 하고, 직원들을 정리해야 하고, 경제가 스톱이 되고 맙니다. 즉 성경에서 말한 기근이 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인심이 사나와집니다. 얼마 전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에서 캐나다로 들어오는 마스크를 못 들어오게 막았습니다. 자기들도 부족하니 남을 주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래도 이웃 나라고 동맹국인데 그럴 수 있느냐?
예- 전염병이 돌고 경제가 어려워지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마스크 전쟁이지만 나중에 식량이 부족하면 식량 전쟁이 될 수 있고, 그로 인해 예수님이 말세의 징조에 대하여 예언하신대로 나라와 나라 간에, 민족이 민족 간에 전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즉 성경에 나타난 전염병, 기근, 칼(전쟁)이 펼쳐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상당히 높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세에는 그렇게 된다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족장인 고라, 다단, 온 그리고 250명의 족장들이 당을 지어서 모세와 아론에게 들고 일어났습니다. “당신들만 왜 우리들 중에서 군림을 하오. 우리들도 지도자들인데....”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하나님이 직접 지도자로 세운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려고 하는 것을 막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250명의 족장들과 아론에게 각기 향로를 들고 하나님의 성막에 나오라고 합니다. 그들이 나아오자 하나님이 나타나서 모세에게 말씀합니다. “그들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없애버리라.” 모세가 사정합니다. “하나님, 참으세요.” 그러나 땅이 갈라져 고라 가족이 산채로 땅속에 빠져죽습니다.
으악- 도망가자! 그러나 불이 나와서 250명의 족장들을 불태워 죽입니다. 이에 대하여 얼마 후 회중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을 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였도다.“ 그러자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합니다. ”너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그들을 순식간에 멸하노라.“ 그리고 이어서 전염병이 시작되어 사람들이 순식간에 죽습니다.
이에 제사장 아론이 향로를 가지고 하나님께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고 전염병으로 죽은 자와 산 자의 사이에 섰습니다. 그러자 전염병이 그칩니다. 그리고 이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14,700명이었습니다. 민수기 25장에도 전염병 사건이 나옵니다. 모암과 미디안 여인들의 미인계에 빠져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체로 음행을 저지르고 그들의 신에 절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 전염병이 퍼져 24000명이 죽었습니다.
역대상 21장에도 전염병 사건이 나옵니다. 다윗 왕이 군사의 숫자만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려고 군사의 수를 세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괘씸하여 벌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3일 동안 전염병이 돌아 이스라엘 백성들 7만 명이 죽었습니다. 3일 동안 7만 명이 죽었으니 이 전염병은 지금 유행하는 COVID-19 전염병보다 더 극한 전염병인 것 같습니다.
참으로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전염병입니다. 그만큼 전염병이 무시무시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타난 전염병들이 어떻게 그쳤나요? 다윗이 자기 죄를 회개하고, 아론이 백성들의 죄를 속하고, 비느하스가 음행의 죄를 물리치니까 전염병이 그쳤습니다. 즉 전염병이 퍼질 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일단 죄를 회개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솔로몬 왕에게 말씀합니다.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전염병으로 내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대하7:13)
여러분, 오늘 우리는 COVID-19으로 인하여 고난 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이 부활절인데 도대체 부활절 기분이 영- 나지 않습니다. 여전히 고난주간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우리도 부활합니다. 잠시 이 바이러스가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주안에서 행복합니다. 아무쪼록 소망가운데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