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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2일 오늘의 역사
2023년 한국타이어 대전공장 화재 발생으로 1,2공장 전소
대전 대덕구 목상동 한국타이어 대전공장 지하 기계실에서 10시9분 쯤 화재가 발생했다. 소방당국은 오후 10시17분에 대응1단계를 발령했으나 화재상황이 악화돼 오후10시 34분 대응2단계를 발령했다 이 화재로 이 구간을 지나는 고속도로와 철도교통 운행이 통제되었다. 한국도로공사 대전지사는 이날 오후 10시 52분부터 경부고속도로 서울 방향 상행선은 신탄진 인터체인지(IC), 부산 방향 하행선은 남청주 IC에서 통제하고 또한
한국철도공사(코레일)도 이날 오후 11시 20분부터 경부선 상행선은 대전, 하행선은 오송역에서 열차 운행을 우회시켰다. 코레일 관계자는 “SRT 4대 운휴를 비롯해 KTX 8대 등 상하행선 열차 12대가 이번 화재 여파로 운행취소, 지연이 예상된다”며 “하행선의 경우 최소 2시간 이상의 지연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이 불로 공장 작업자 등 11명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다.
202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북부 집중호우로 파하로 강이 범람 8500여명 대피
2020년 코스피 코로나19 팬더믹 영향으로 8년 5개월 만에 사이드카 발동
2015년 넷마블게임즈의 모바일 역할수행게임 레이븐 출시, 출시 40일 만에 일일사용자 100만 돌파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청와대서 삼성동 집으로 돌아감
2014년 서도소리 배뱅이굿 예능보유자 이은관(97세) 세상 떠남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
쓰나미 여파로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폭발, 20만명 대피, 후쿠시마 제1원전 원자로 6기 전력공급 중단, 수소폭발사고에 이어 핵연료 녹아내리는 노심용융 발생, 막대한 방사성 물질 누출, 일본정부는 경미한 사고인 레벨4로 발표했다가 체르노빌 원전사고와 같은 레벨7로 수정, 설계에서 사고 수습까지 전형적 인재로 드러나면서 일본의 안전신화도 무너짐
2009년 연탄가스 중독 치료장비 만든 윤덕로 교수 별세
연탄 난방비율이 75%였던 1960년대, 겨울만 되면 일간지 사회면은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한 사람들 기사투성이였다. 많으면 한 해에 70만 명 이상이 연탄가스에 중독되고, 이 가운데 3000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 웬만한 전염병보다 무서운 사망 원인이었지만, 대책이라곤 동치미 국물 마시는 정도밖에 없었다. 그나마 살아나더라도 치매, 팔다리마비, 언어장애 등 후유증이 찾아오곤 했다.
1969년, 윤교수가 동치미 국물을 대체하는 획기적인 연탄가스 중독 치료장비가 개발했다. ‘고압산소장치’라고 명명된 이 장비는 해녀들의 잠수병이나 탄광, 공장에서 일산화탄소에 중독된 환자에게 사용되던 장비였다.
윤 교수는 1960년대 초 공군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알게 된 외국의 고압산소장치를 응용해 1967년 동물임상용 고압산소장치를 개발했다. 그리고 이를 다시 응용해 1969년 인체용 장치 개발에 성공했다. 연탄가스 중독환자가 이 장치에 3시간 정도 들어가 있으면 완쾌돼 나오는 ‘기적’이 일어났다.
1969년부터 1978년 사이 윤 교수는 이 장치를 이용해 2,242명의 연탄가스중독 환자를 치료해 2,202명을 회복시켰다.
1980년대 이후 연탄 사용량이 줄면서 윤 교수는 일산화탄소 중독 연구로 눈을 돌려 한국항공우주연구원과 함께 비행사고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인 조종사들의 일산화탄소 중독 예방책을 마련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2008년 삼성 특검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대한민국 국회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
2004년 3월 10일 16대 국회 임기 만료를 두 달여 앞두고 국회가 헌정사상 처음으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했다.
한나라당 108명, 민주당 51명 등 국회의원 159명이 서명했다. “대통령이 잇따라 선거에 개입하는 발언을 해 선거법을 위반했다” 는 등의 이유였다.
“설마 가결까지 되겠느냐” 는 여론의 회의적 시각과 달리 이틀 뒤인 12일 국회는 탄핵안을 가결했다. 195명 투표에 찬성 193, 반대 2였다. 이로 인해 헌정사상 초유의 합법적인 대통령 궐위 사태가 초래됐다. 고건 당시 총리가 즉각 대통령 권한대행이 됐다.
5월 14일 헌법재판소의 기각 결정으로 노 대통령은 권한을 회복했다.
2003년 프랑스 교도소서 무장강도 페라라 ‘바주카포 탈옥’ 사건
바주카포(砲)로 교도소 철문을 뚫은 탈옥사건이 프랑스에서 벌어졌다.
파리 외곽의 발 드 마른 지역의 프렌교도소에서 살인죄로 수감 중이던 죄수 안토니오 페라라(29)가 12일 오전 4시30분쯤 교도소 망루에 기총 소사를 가하면서 침투한 4~5인조 공범들로부터 폭발물을 건네받아 감방문을 폭파하고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
탈주범 일당들은 교도소 밖으로 나갈 때 바주카포로 교도소 철문들 중의 하나를 뚫은 뒤 미리 준비된 자동차로 도주했다. 탈주 과정에서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전쟁터에서나 사용하는 중화기를 동원한 탈옥사건이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라 실제로 벌어졌다는 점에서 프랑스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언론들은 이런 대담한 탈옥사건이 올해 들어 벌써 세 번째라며 구멍뚫린 교도 행정에 개탄했다. 도미니크 페르방 법무장관은 오전 7시 사건 현장에 나와 “이번 사건은 전쟁터에서 쓰는 무기를 동원한 탈옥”이라고 어이없어 하면서 “범인들이 교도관들이 대응하기 힘들 정도로 위험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번 탈옥사건 바로 직전인 지난 7일 코르시카섬의 보르고교도소에서는 살인죄로 복역 중인 죄수 조셉 멘코니가 외부의 공범들과 함께 가짜 바주카포와 화기로 교도관을 위협해 감방 문을 열게 한 뒤 도망쳐 경찰의 추적을 받고 있다. 멘코니는 지난 1998년 똑같은 교도소에서 한 차례 탈옥했다가 붙잡힌 전력이 있다
2003년 세르비아 총리 조란 진지치 피살
암살된 조란 진지치(Djindjic·50) 세르비아 총리가 괴한들의 총격을 받은 것은 3월 12일 낮 12시45분쯤. 수도 베오그라드 시내의 정부 청사 앞에서 차에서 내려 건물로 들어서려는 순간 가슴과 등에 2발의 총상을 입고 병원으로 긴급 후송됐지만 끝내 목숨을 잃었다.
진지치는 2000년 10월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철권 통치하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을 축출한 주역이었다. 이후 밀로셰비치를 몰아내는 데 함께 힘을 모았던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는 유고연방 대통령에 당선됐고, 진지치는 연방 산하 세르비아공화국 총리로 재직해왔다.
진지치는 이 과정에서 친(親)서방적인 급진개혁과 부패척결을 강력히 추진했고
특히 2001년 밀로셰비치 전 대통령을 네덜란드 헤이그 소재 유엔 전범재판소에 인도함으로써 거센 비난을 받게 됐다. 밀로셰비치를 넘겨주는 대신 서방 국가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경제개혁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지만, 이후 밀로셰비치 추종파와 민족주의 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보복 위협을 당해왔다.
2002년 유엔 안보리,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는 결의안 채택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2세, 가톨릭의 2000년간 과오에 대해 참회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가톨릭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할 의미깊은 미사가 진행됐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2000년 3월 12일 미사를 통해 가톨릭이 지난 2000년 동안 저질렀던 과오에 대해 용서를 구한 것이다. 교황은 사순절을 기념하기 위한 보라색 제의를 입고 미사를 집전했으며, 성당에는 전 세계에서 모인 성직자와 교인 1만여명이 참석했다.
사순절은 부활절 전날까지의 40일간을 가리키며, 예수가 광야에서 금식 등을 통해 악마의 유혹과 고통을 이겨낸 40일간을 기리기 위한 것. 교황은 특별히 ‘용서의 날’을 사순절 기간 중에 택해 참회의 뜻을 강조하고자 했다. 교황은 “우리 가톨릭은 기독교도들 사이의 분파와, 진리를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행한 폭력, 그리고 다른 종교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준 적대적인 의식 등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고 강론했다. 교황의 강론 중 ‘진리를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행한 폭력’이란 표현은 종교재판과 십자군원정, 그리고 강제적인 개종 요구 등의 과정에서 이교도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박해를 의미하는 구절로 사용돼 왔다.
교황은 이어 3월 20일부터 역사적인 중동 순방길에 올라 3월 27일까지 요르단,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등의 성지를 돌아보며 종교적 화해를 호소했다. 교황의 이스라엘 방문은 1964년 교황 요한 바오로6세 이후 36년 만으로 예수탄생 2000년을 기념해 이루어졌다.
1994년 영국 성공회, 최초의 여성사제 서품
1993년 북한,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북한이 1993년 3월 12일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북한은 이날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중앙인민위원회 제9기 7차 회의를 열고 한-미 양측의 팀스피리트훈련과 IAEA의 특별사찰로 야기된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문제를 의제로 선정, 토의를 거친후 이같은 내용의 성명을 채택했다고 중앙방송이 보도했다.
북한은 이 성명에서 이번 NPT탈퇴조치가 한미측의 팀스피리트훈련과 IAEA의 특별사찰 강행에 대해 "사회주의 제도를 견결히 옹호 고수하기 위한 응당한 자위적 조치"이며 이같은 입장은 "미국이 북에 대한 핵위협을 중지하고 IAEA가 독자성과 공정성의 입장으로 돌아설때까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두달 뒤인 5월 10일 유엔 안보리가 대북 결의안을 채택하자 북한은 6~7월에 미국과 1-2단계 고위급회담을 가진 뒤 NPT 탈퇴유보와 핵사찰협의재개에 동의했다.
북한은 11월 11일 핵문제 일괄타결을 주장하는 등 이후 핵사찰 수용과 불가를 거듭한 끝에 1994년 2월 15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을 전격 수용, 3월에 2주간의 핵사찰을 받았다. 그러나 방사화학실험실의 사찰거부, 핵연료봉의 독자교체 등으로 북한핵문제는 계속 난항을 거듭했다.
1992년 대전 도매시장 화재
1992년 3월 12일 오후3시55분쯤 대전 도매시장내 송월타월 대리점 2층 창고에서 불이나 1백30개 상가점포 5백30평을 모두 태우고 3시간여 만에 진화됐다. 불은 때마침 불어온 강풍을 타고 삽시간에 인근 점포로 옮아 붙어 피해가 컸으며 진화작업을 하던 대전 중부소방서 소속 이성우소방사가 오른쪽 발목인대가 끊어지는 중상을 입었다.
불을 처음 본 노병규씨는 "크로바 가방가게 2층에 있는 송월타월 창고에서 검은 연기와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고 말했다. 불이나자 경찰은 고가 사다리차 4대와 소방차 30여대를 동원, 진화작업에 나섰으나 소방도로가 폭 7m밖에 안돼 소방차 진입이 어려운데다 페인트가게, 가방가게 등에서 유독가스가 나와 불길을 쉽게 잡지 못했다. 그러나 상인들은 "화재 신고후 30분 가까이 돼서야 소방차 1~2대가 출동하는 등 늑장 진화로 피해가 더 컸다"고 주장했었다.
불이 난 대전 도매시장은 1962년 10월 문을 연 슬라브식 콘크리트 2층 건물로 옷, 가방, 타월업소 등 1백30개 점포가 입주해 있었다
1990년 강호동, 18대 천하장사에 최연소 등극
1989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쇼트트랙서 김기훈 이준호 선수가 4개의 금메달 획득
1985년 미-소 군축협상 제네바에서 재개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으로 선출
1979년 칸핀스 베네주엘라 대통령 취임
1979년 이란, 중앙조약기구(CENTO) 탈퇴
1978년 프랑스 총선 우파 승리
1978년 뮤지컬 `레미제라블`,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초연
1976년 정일권 국회의장 피선
1975년 서울 수유동 소재 영아원 '천사의 집' 화재로 영아 14명 소사
1973년 9대국회 개원
1971년 서울 지하철 1호선 기공
1971년 국군, 서부전선 미2사단 지역 20km, 155마일 휴전선을 국군이 전담
1969년 박정희 대통령 차관, 관리부실업체 정비 지시
1968년 모리셔스,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7년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집권
1966년 인도 식량 폭동 발생
1965년 한·미 기관차 도입 차관협정
1964년 제6차 한일회담, 2년 만에 재개
제6차 한일회담이 중지 된지 약2년 만에 1964년 3월 12일 오후3시 일본외무성 대신접견실에서 재개됐다. 첫날 회담에서는 한국 측 수석대표인 배의환 주일대사와 일본측 수석대표 삼도조의 인사교환과 위원회대표의 소개, 본회담 진행방법 등이 토의됐다.
배수석대표는 "양국정부가 결의안의 해결을 위해 이번 본회의를 재개하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여 한일관계를 정상화함으로써 양국 간의 선린관계의 굳건한 터전을 마련하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언급함으로써 한일 양국 간의 국교정상화를 희망적으로 암시했다. 이번 회담은 13년 동안 끌어온 한일교섭의 조기체결 여부가 결정된 자리로 그 의미가 컸다
1963년 울산정유공장 착공
1960년 왜관에서 미군 집단린치사건 발생
1960년 부산 화학공장에서 화재발생 68명 사망
1952년 조선방직 노동자 파업 단행
1951년 신문만화 ‘개구쟁이 데니스’ 첫 발표
‘블론디’와 함께 미국의 대표적인 신문만화로 명성을 떨친 ‘개구쟁이 데니스(Dennis the Menace)’가 1951년 3월 12일 첫 선을 보였다.
처음부터 16개 신문에 동시에 실리는 순조로운 출발이었다가, 그 해 말에는 100여개의 신문이 그의 만화를 실을 정도가 됐다. 작가 케첨이 81세로 숨진(2001년) 시점에는 19개 언어로 번역돼 48개국 1000여개 신문에 실리고 있었다. 만화의 성공에 힘입어 미 CBS방송이 제작한 TV연속극은 1959년부터 5년간 방송됐고, 1993년에는 영화로도 제작돼 인기를 이어갔다. 만화책도 5000만부 이상이나 팔려나갔다.
금발에 주근깨투성이의 얼굴을 한 만화 주인공 데니스는 작가의 네살배기 진짜 아들 데니스가 모델. 어느날 그의 부인 앨리스가 “당신 아들은 참 개구쟁이예요”라고 푸념한 것이 만화의 모티브가 됐다. 하지만 만화가 탄생하는 데 기여한 세 사람 중 아내는 1959년 약물 과다복용으로 숨지고 아들 데니스와는 생전에 왕래를 끊다시피할 정도로 사이가 멀어졌다. “사람들이 30초 동안 개구쟁이 데니스를 즐겁게 보고 그 신문으로 생선을 싸도 만족”이라는 게 케첨의 만화철학이었다.
1948년 유엔한국위원회, 가능한 지역의 선거안 재가결
1948년 북한 중공, 비밀군사협정 체결
1947년 트루먼 독트린 발표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1947년 3월 12일 미국 상하양원합동특별회의에서 `그리스·터키 원조 법안` 승인을 위해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그리스·터키가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국내외로부터 위협받을 경우 미국은 자유국가를 지키기 위해 양국에 군사원조를 실시하고 군사고문단을 파견해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이었다. 트루먼은 "무장한 소수 또는 외부로부터의 압력에 저항하고 있는 자유국가 국민을 지원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당시 그리스에서 영국이 지원하는 아테네 반공정권과 그리스 북부의 친공 게릴라부대의 내전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영국은 그리스를 지원하는 일에 손을 떼려하고 있었다.
그리스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인 1944년 가을에 소련군이 발칸반도에서 독일군을 몰아내자 자연스럽게 생겨난 진공지대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당시 이 진공지대에 친공정권이 들어설 것을 우려한 영국의 처칠이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협상 끝에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는 소련권에, 그리스는 영국권에, 유고와 헝가리는 영소가 공동 관리하는 완충지대로 두기로 합의했었다.
2차대전 중 협력했던 미국과 소련의 우호관계를 파기하고 반소 반공 입장의 냉전정책을 보다 확고히 한 `트루먼 선언`이 발표되자 미국 국민들은 이를 열렬히 환영했다.
10일부터 모스크바에서 시작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외무장관회담에 참석하고 있던 마샬 국무장관이 본국에 전화를 걸어 트루먼에게 발표배경을 묻자, 트루먼은 "법안통과를 위해 공산주의의 위험을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트루먼 독트린에 이어 그해 6월 5일 서유럽의 재건을 돕기 위한 '마셜 플랜'이 발표되고 공산 진영 역시 '몰로토프플랜'으로 서방세계에 맞섬으로써 냉전이 시작됐다.
1938년 독일군, 오스트리아 침공
1930년 인도, 영국에 대한 저항 운동으로 소금 사티아그라하 감행
1925년 중국 건국의 아버지 쑨원(孫文) 사망
중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국민당 당수인 쑨원이 1925년 3월 12일 간암으로 북경에서 사망했다. 향년 58세였다. 쑨원은 중국의 혁명을 이끌어 공화제를 창시함으로써 국부로 일컬어지는 혁명가이다.
1866년 중국 광동성에서 빈농의 아들로 출생한 쑨원은 14세때 하와이로 건너가 서양학문을 배우다 18세에 귀국, 홍콩의 서의서원(의학교)을 졸업하고 마카오와 광주에서 개업해 의사로 일하기도 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하와이에서 홍중회를 조직, 이듬해 광동에서 혁명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다시 1905년 러일전쟁때 중국 동맹회를 결성, 반청 무장봉기를 계속했다. 마침내 1911년 신해혁명이 성공하자 그는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돼 1912년 1월 1일에 중화민국을 건국했으나 힘의 열세와 중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권력을 위안스카이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다시 제2혁명을 일으켰으나 실패해 일본으로 망명했다.
수많은 좌절 끝에 쑨원은 1918년 국민당을 조직하고, 혁명의 완성을 위해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다시 결단을 내려 공산당과 국민당이 합작하는 이른바 제1차 국공합작을 1924년 성사시켰다. 물론 쑨원은 확대 개조된 국민당의 총수로 선출됐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날 혁명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혁명은 아직 이룩되지 않았다.”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1923년 포노필름(Phonofilm) 기자회견장서 첫선.
1920년 이집트 독립선언
1917년 러시아체제 폐지
1912년 미국 걸스카우트 창단
1904년 경의선 철도 기공
1894년 : "코카 콜라(Coca-Cola)"가 세계 최초로 병에 콜라를 담아 판매 시작.
1885년 우리나라 최초 병원 광혜원, 제중원으로 개칭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 건립하게 된 배경에는 갑신정변과 선교사 알렌이 자리하고 있다. 중국에서 의료 선교사로 활동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보지못한 알렌이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884년 9월, 갑신정변이 발발하기 3개월 전이었다. 그해 12월 갑신정변으로 중상을 입고 사지를 헤매던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의 생명을 살린 것은 알렌의 이름을 선교사가 아닌 의사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그에게 두터운 신임을 보내자 알렌은 서양식 병원 건립을 고종에게 건의했고, 고종은 재동에 있는 이윤용의 집(현 헌법재판소)을 병원 부지로 하사했다. 알렌은 1885년(고종 22) 2월 29일(음력) 이곳에 은혜를 널리 펼친다는 뜻의 `광혜원(廣惠院)`을 설립하고 같은 해 3월12일(음력)에는 고종에게 하사받은 '대중을 널리 구한다'는 뜻의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을 바꿨다.
환자가 많아져 스크랜턴, 헤론, 엘러즈 등이 미국에서 파견돼 합류함으로써 병원으로서의 면모도 갖춰나갔다. 이후 1887년, 갑신정변 때 참살당한 홍영식의 집(현 외환은행 본점)인 동현으로 장소를 넓혀 이전했다.
1904년 9월 3일(음력)에는 서울 남대문 밖 복숭아골(현 서울역 앞)에 미국인 실업가 세브란스의 후원으로 현재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의 모체가 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병원이 완공됐다. 착공된지 2년만(1902년 착공)이었다. 이후 제중원의 진료와 의학교육은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전됐다.
우리나라에 최초의 서양 의학교육이 시작된 것은 1889년 알렌이 제중원 내에 의학교를 설립하면서였다. 교육을 시작한지 10년만인 1908년 6월, 제1회 졸업생이 배출됐고 이들은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의사면허 제1번부터 7번까지를 수여받았다. 중간에 제중원의 진료와 의학교육이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전됐기 때문에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세브란스의학교의 졸업생이었다.
서양의학은 광혜원과 제중원 시대를 거쳐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병원인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어졌다.
1862년 미국 남북전쟁, 쉐넌도어계곡 전역 북군 뱅크스 휘하의 쉴즈 사단이 윈체스터 점령. 뱅크스는 잭슨 장군과 남군이 완전히 철수하였다고 오판.
1664년 : 아메리카 대륙의 "뉴저지(New Jersey)", 영국의 식민지가 되다.
BC 515년 : 예루살렘에 2번째 성전 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