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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신원을 밝힐 수 없기 때문에 얼굴은 얼룩처리했다. 사진 가운데는 김용태 의원 |
만주(滿洲)를 밟다. 주말을 이용해 연길(延吉), 도문(圖們), 훈춘(琿春) 등 동북3성의 주요 도시를 돌았다. 평소 탈북자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한나라당 김용태 의원과 이재곤 사무국장, 변희재氏, 이렇게 일행은 4명이었다. 늦은 밤 현지 조선족 소개로 컴컴한 건물에 들어섰다. 방 안에는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해 사는 탈북자들이 일행을 맞는다. 50대에서 70대의 여성 5명이다. 짠하다. 현지 UN관계자는 「북한주민들 스스로 알아서 먹고 사는 방법을 터득해 경제사정이 예전보다 좋아졌다」고 하지만, 막상 국경을 넘은 이들 말은 전혀 달랐다. <『북한에선 살아가는 게 기적....콩알, 옥수수, 보이는 대로 훔친다』> 길주 출신 50대 후반 A씨는 지난 5월 탈북 했다. 그녀는 『옥수수, 입쌀 값이 많이 올라 먹고 살기 너무 힘들어졌다. 길주는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역(驛) 앞이나 시장 입구엔 밤사이 굶어죽는 사람이 많이 나온다. 나는 독한 사람이라(생활력이 강해서) 버텨왔지만,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웠다. 먹을 것만 있으면 자식들 놔두고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올 초 탈북 한 함흥 출신 B씨도 『2009년 이래 더 어려워졌다. 북한에선 살아가는 게 기적이다. 군대에서 쌀을 다 가져가고, 산에 있는 나무는 다 자른다. 주민들은 풀을 말려 먹고 산다.』고 했다. 탈북한 지 1년이 넘었다는 C씨의 증언이다.『관리들은 역전이나 시장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을 밤사이 실어다가 다른 구역에 버리고 오는 경우가 많다. 살기가 어려우니 어른부터 아이들까지 모두 도둑질이다. 날치기, 덮치기...보이는 대로 훔친다. 콩 심으면 콩알을 훔쳐가고 옥수수를 심으면 옥수수 알을 훔쳐가 소금에 무쳐먹는다. 사과가 열리면 익지 않아도 훔쳐서 삶아먹는다.』 <『산다고 했는데 2~3년 간 세 끼 먹은 적 없다』> 사회주의를 한다는 북한에서는 더 이상 무상배급(無償配給)이 존재하지 않는다. 90년대 들어 경제가 나빠지자, 소위 적대적(敵對的) 계층이 모여 사는 지역을 중심으로 배급이 중단됐다. 기자가 만난 탈북자들도 『배급 물품 받아보지 못한 게 20년 가까이 된다. 수령님 생일날 같은 때 1Kg, 2Kg 나오는 정도』라고 입을 모았다. 탈북한 지 1년이 넘은 C씨는 『94년 이래 배급이 안 나왔다. 해마다, 내년은 정상 배급 해 준다고 말하지만 지나고 나면 모두 거짓말이었다. 나도 그 중 「산다」고 했는데 2~3년 사이엔 하루 세끼 먹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탈북자들 증언에서 공통되지만, 5명의 여성들 역시 소위 인도적 지원은 받아본 적이 없었다. 몇 사람이 『UN이라는 표시가 된 식량과 물품을 군대가 싣고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하는 정도였다. 『백성들에겐 공짜로 안 간다. 외국 사람이 와서 나눠줘도, (그 사람이) 가고 나면 당에서 다시 가져간다.』고 말했다. <『심장이 큰 사람도 도둑처럼 떨고 있다』> 가족을 떠나 중국에 머무는 탈북자, 특히 여성들은 자유인(自由人)이 아닌 노예(奴隸)의 삶을 산다. 먹고 살기는 북한보다 낫지만, 산간벽지, 유흥가 등으로 팔려 다니며 강제결혼, 性폭행, 원치 않는 임신, 각종 부인과 질병에 시달린다. 결혼을 해도 남편과 시댁식구들의 무시와 구타, 북한거주 가족에 대한 그리움, 不法체류신고 협박 및 체포 그리고 「강제송환(强制送還)」의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 어느 날 들이닥친 중국 공안은 탈북자들을 잡아가고, 북한 당국은 변방의 구류장으로 끌고 간다. 변방의 구류장에서 수많은 탈북자들은 지금도 「뽐쁘질」·「통닭고문」·「비둘기고문」 등 저주스런 고문으로 죽어간다. 만일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송환되면 「강제낙태」·「영아살해」같은 끔직한 유린을 당해야 한다. 기자가 만난 5명의 여성들은 조선족 가정에서 간병인, 식모살이 비슷한 생활을 하는듯했다. 그들은 자유가 없었다. 중국에 온 지 3년이 넘었다는 D씨조차 집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다. 언제 어느 날 공안이 잡아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C씨(2007년 탈북)는 아들과 딸이 강제 송환됐다. 아들은 생사를 알 수 없고, 딸은 노동교화소 7년 형에 처해졌다. 그녀는 『북한에 다시 끌려가면 노동교화소 3년에서 5년은 기본적으로 살게 된다. 교화소에 일단 들어가면 살아나지 못한다. 살아서 들어가, 죽어서 나오는 곳이 교화소』라고 말했다. 5명의 여성들은 하나같이 최근 『1~2년 사이 경제사정도 더 어려워졌고, 단속과 처벌도 심해졌다』고 말했다. 중국에 온 지 3년이 된다는 E씨는 『지금 잡혀간 사람은 살아나올 수 없다』고 했다. E씨(2008년 탈북)는 『조선족과 결혼한 여자도 애만 두고 끌려간다.』고 말했다. B씨(2009년 초 탈북)는 『거기서(북한)도 죽고, 여기서(중국)도 죽고 한국에 가려해도 죽는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며 울먹였다. C씨(2007년 탈북)는 『심장이 큰 사람도 도둑처럼 떨고 있다. 문소리만 나도 심장병이 도진다. 자고 나면 살았구나, 이러며 산다. 떨리고 무섭다.』며 눈물을 비쳤다. <『남한은 황홀했다』> 도강(渡江)을 한 북한사람에게 대한민국은 낙원(樂園)이다. 고향에 있을 때도 남한이 잘 사는 줄 다들 알았다고 말했다. A씨(2009년 8월 탈북)는 『TV로 본 남한은 황홀했다. 더 일찍 올 것을...TV를 보니 탈북자가 반동인 줄 알았지만 지금은 똑똑한 사람임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녀는 『북한에선 「우리 사회주의」가 제일이라고 했지만 한국에 가서 세상을 보며 살고 싶다. 중국에선 설움 받지만 한국은 같은 조선민족이니까 좀 더 낫지 않겠나? 세상을 보며 살지 않겠냐』고 말했다. 기자가 만난 여성들은 한국을 동경하면서도 감히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목숨을 건 탈출을 감당할 체력도, 나이도 아닌 탓이다. 가장 최근에 탈북 한 A씨(2009년 8월 탈북)는 인터뷰 끝 무렵 현재와 북한의 삶을 비교하며 『북한에선 김정일 장군님 건강이 나빠져 울었었다』고 말했다.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C씨(2007년 탈북)가 말을 받았다. 『김정일 장군님? 백성을 굶겨 죽인 개새끼 아이가? 북한백성 다 죽이고...사람들은 잡아 가두고...김정일이 내 앞에 있으면 암살해 버릴끼다. 암살해 버릴끼다...』 애통과 눈물과 아픔이 오갔다. 방문을 나섰다. 마치 지옥에 친구를 버리고 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거기서도 죽고, 여기서도 죽고 한국에 가려해도 죽는다』고 울부짖는 수십 만 동포들에게 우리는 잔인(殘忍)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