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대함은 어디에서
歸去來兮 (귀거래혜) 돌아왔노라.
請息交以絶遊 (청식교이절유) 세상과 교유를 끊어버리자.
世與我而相違 (세여아이상위) 세상과 나는 이제 서로 어긋났으니
復駕言兮焉求 (부가언혜언구) 다시 수레 타고 나가 벼슬한들 무엇하랴?
悅親戚之情話 (열친척지정화) 친척들과 정담(情談)을 즐거워하고
樂琴書以消憂 (낙금서이소우)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시름을 달래련다.
已矣乎 (이의호) 아, 그만두자.
寓形宇內復幾時 (우형우내부기시) 이 몸이 세상에 남아 있을 날이 다시 얼마나 될까?
曷不委心任去留 (갈불위심임거류) 어찌 마음을 대자연의 섭리(攝理)에 맡기지 않고
胡爲乎遑遑欲何之 (호위호황황욕하지) 어찌 허둥지둥 어디로 가려하는가?
登東皐以舒嘯 (등동고이서소) 동쪽 언덕에 올라 조용히 읊조리고
臨淸流而賦詩 (임청류이부시)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
聊乘化以歸盡 (요승화이귀진) 잠시 조화(造化)의 수레를 탔다가 죽음에로 돌아가리니
樂夫天命復奚疑 (낙부천명부해의) 주어진 천명(天命)을 즐길 뿐 다시 무엇을 두려워하랴!
위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일부로, 도연명은 대자연의 섭리와 천명에 따라 사는 마음에서 담대함을 얻고 세상을 살아갔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에 귀의(歸依)하여 그를 믿고 그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에 담대함을 얻고 하나님의 돌보심을 따라 복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내가 입을 다물고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에는, 온종일 끊임없는 신음으로 내 뼈가 녹아 내렸다.”(시편 32편 3절).
사도 바울(Apostle Paul)은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贖良)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로마서 3장 23-24절).”라고 하였다. 이런 연고로 일찍이 예수 그리스도는 말하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나 그리스도 예수에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1장 28-30절)”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요한(Apostle John)은 말하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요한1서 3장 21-22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잠언 4장 23,25절에 기록되기를 “너는 앞만 바라보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말며,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고 한 것이다.
2025. 1. 4. 素澹
* 귀거래사(歸去來辭)
······································· 도연명(陶淵明, 365- 427)
歸去來兮 (귀거래혜) 자, 돌아가자. (경주 귀래정 당호의 유래)
田園將蕪胡不歸 (전원장무호불귀) 전원이 황폐해지려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旣自以心爲形役 (기자이심위형역) 이미 스스로 마음을 육신의 노예로 삼았으니
奚惆悵而獨悲 (해추창이독비) 어찌 슬퍼하며 홀로 비통해 할 것인가?
悟已往之不諫 (오이왕지불간) 이미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없음을 깨닫고
知來者之可追 (지래자지가추) 앞으로 다가올 일은 좇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實迷塗其未遠 (실미도기미원) 실로 길을 잘못 들었으나 멀리 벗어나진 않았다.
覺今是而昨非 (각금시이작비) 지금이 옳고 어제(벼슬살이)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舟搖搖以輕颺 (주요요이경양) 쪽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흔들리고
風飄飄而吹衣 (풍표표이취의) 바람은 산들산들 옷깃을 스친다.
問征夫以前路 (문정부이전로) 길손에게 앞길(고향 길)을 물어보지만
恨晨光之熹微 (한신광지희미) 새벽빛이 희미(稀微)한 것이 한스럽구나.
乃瞻衡宇 (내첨형우) 마침내 도리(처마)와 지붕이 보이니
載欣載奔 (재흔재분) 기쁘기도 하고, (걸음이) 바쁘기도 하다.
僮僕歡迎 (동복환영) 머슴아이는 환영하고
稚子候門 (치자후문) 어린 자식은 문에서 기다린다.
三徑就荒 (삼경취황) 세 갈래 길은 황무지가 되었지만
松菊猶存 (송국유존)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그대로구나.
携幼入室 (휴유입실) 어린 자식 손잡고 방에 들어가니,
有酒盈樽 (유주영준) 술이 있어 항아리에 가득하구나.
引壺觴以自酌 (인호상이자작) 병과 술잔 끌어당겨 자작하며,
眄庭柯以怡顔 (면정가이이안) 뜰의 나뭇가지 바라보며 웃음 짓는다.
倚南窓以寄傲 (의남창이기오) 남창에 기대어 마음을 푸니
審容膝之易安 (심용슬지이안) 용슬(작은 방)의 편안함을 환히 알겠노라.
園日涉以成趣 (원일섭이성취) 동산을 날마다 거닐며 취미를 삼고
門雖設而常關 (문수설이상관) 문은 달아 놓았지만 늘 닫혀 있다.
策扶老以流憩 (책부로이유게) 지팡이로 노구 받들며 물 흐르듯 쉬고
時矯首而遐觀 (시교수이하관) 때때로 머리 들어 멀리 바라본다.
雲無心以出岫 (운무심이출수) 구름은 무심히 산봉우리에 떠오르고,
鳥倦飛而知還 (조권비이지환) 새들은 날다가 지치면 돌아올 줄 안다.
景翳翳以將入 (경예예이장입) 날은 어둑어둑 해는 지려 하는데
撫孤松而盤桓 (무고송이반환) 홀로 선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이고 있다.
歸去來兮 (귀거래혜) 돌아왔노라.
請息交以絶遊 (청식교이절유) 세상과 교유를 끊어버리자.
世與我而相違 (세여아이상위) 세상과 나는 이제 서로 어긋났으니
復駕言兮焉求 (부가언혜언구) 다시 수레 타고 나간들(벼슬한들) 무엇하랴?
悅親戚之情話 (열친척지정화) 친척들과 정담을 즐거워하고
樂琴書以消憂 (낙금서이소우)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시름을 달래련다.
農人告余以春及 (농인고여이춘급) 농부가 내게 찾아와 봄이 왔다고 일러 주니
將有事於西疇 (장유사어서주) 장차 서쪽 밭에 들일이 생기겠다.
或命巾車 (혹명건거) 혹은 장식한 수레를 부르고
或棹孤舟 (혹도고주) 혹은 한 척의 배를 저어서
旣窈窕以尋壑 (기요조이심학) 이미 아름다운 깊은 골짜기를 찾아가기도 했지만
亦崎嶇而經丘 (역기구이경구) 또한 험한 산을 넘어 언덕을 지나가기도 한다.
木欣欣以向榮 (목흔흔이향영) 나무들은 생기발랄하게 자라고
泉涓涓而始流 (천연연이시류) 샘물은 졸졸 흐리기 시작한다.
羨萬物之得時 (선만물지득시) 만물이 때를 얻음을 부러워하지만
感吾生之行休 (감오생지행휴) 내 삶이 가다가 멈출 날이 멀지 않음을 느낀다.
已矣乎 (이의호) 아, 그만두자.
寓形宇內復幾時 (우형우내부기시) 이 몸이 세상에 남아 있을 날이 다시 얼마나 될까?
曷不委心任去留 (갈불위심임거류) 어찌 마음을 대자연의 섭리에 맡기지 않고
胡爲乎遑遑欲何之 (호위호황황욕하지) 어찌 허둥지둥 어디로 가려하는가?
富貴非吾願 (부귀비오원) 부귀(돈과 지위)도 내가 바라던 것이 아니며
帝鄕不可期 (제향불가기) 신선 세계에 태어날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懷良辰以孤往 (회양신이고왕) 좋은 때라 생각되면 혼자 거닐다가
或植杖而耘耔 (혹치장이운자) 때로는 지팡이를 세워 놓고 풀을 뽑기도 한다.
登東皐以舒嘯 (등동고이서소) 동쪽 언덕에 올라 조용히 읊조리고
臨淸流而賦詩 (임청류이부시)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
聊乘化以歸盡 (요승화이귀진) 잠시 조화의 수레를 탔다가 죽음에로 돌아가리니
樂夫天命復奚疑 (낙부천명부해의)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다시 무엇을 두려워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