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이숨
기다림이 한계를 넘어서면 시간이 멈춘다
천 년이 오늘이다
그러한
생은 고적하여
달그림자에 운명이 쓸린다
나는 원시의 모계였다가
백제의 여자였다가
한 사람을
여태 기다리는 사람
가요 속에서 누군가 발음에
홀연 옷깃을 바룬다
정읍시 시기동 언덕
철로 끝은 아득하다
오고 가는 방향은 정해졌지만
오고 갔던 사람은 다른데
왜 당신은 세상에 몸을 싣지 않은가
달하 노피곰 도드샤*
달이 한 번 더 나를 비추지만 울지 않는다
개망초가 철로 곁을 달린다
달무리 지나 한낮과 봄여름이 스쳐간다
속도란
피었다 지는 사이의 일
아으 다롱디리*
당신이 내려선 자리에
내가 올라서서
달을 켠다
* 백제 가요 ‘정읍사’
심사평
전북특별자치도를 대표하는 문학상이 많이 있다.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고 한국문학의 메카인 곳이 정읍이 아닌가 싶다. 한글로 내려오는 최초의 시가 ‘정읍사’이고, 우리나라 최초의 정격가사인 불우헌 정극인의 ‘상춘곡’이 탄생 된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정읍사문학상이 주는 권위와 의미는 한국에서 으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에 응모한 작품들 모두가 소중하고 귀하게 느껴졌다. 심혈을 기울인 작품들이 많아 대상 한 작품과 우수상 한 작품을 선정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 정도로 수작들이 많았다. 그중에서 몇 작품을 최종심에 올려놓고 오랜 고심 끝에 대상, 최우수상, 우수상을 선정하게 되었다.
먼저 대상을 받은 작품은 시 ‘정읍’이었다
기다림이 한계를 넘어서면 시간이 멈춘다 / 천년이 오늘이다.
라고 시작되는 이 시는 고요하고 잔잔하면서도 그 내면에서 느껴지는 간절한 소망이 두드려졌다. 요즘처럼 초고속! 빠르게! 가 아닌, 요란하게 내세우지 않아도 언어의 절제력은 물론, 예부터 내려오는 우리 것을 지키려는 정읍의 마음을 천천히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이런 게 바로 천기(天氣)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작품이 눈에 띄어 심사자로서 참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수필이 시보다 시적인 감동을 줄 때가 많다. ‘바람개비’가 그 한 예이다. 어린 시절의 바람개비를 떠올리며 이야기는 누군가를 웃게 만들 수 있는 / 언제나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어린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히 그려낸 ‘바람개비’를 최우수상으로 선정했다.
이 작품이 말하고 싶은 것은 뒷부분에서 찾아진다. 웃지 않는 아이와 뛰지 않는 아이를 바람개비가 연결하면서 따뜻함을 전달해 준다. 척박하고 개인주의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천년의 노래를 간직하고 있는 정읍의 전통성과 정읍이 가진 문학적 소재들하고 일치한다고 본다. 이 수필은 중수필적인 느낌을 준다. 작품을 서술하는 일인칭 화자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표면에 ‘나’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등장한다면 현장감과 사실성이 추가되어 더욱 독자에게 친근감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심사자 모두는 만장일치로 시 ‘정읍’을 대상으로 선정하는 데 이견이 없었다. 최우수상으로 수필 ‘바람개비’가 선정되었고. 우수상으로는 ‘박쥐’가 선정되었다. 세 작가 모두 투고한 나머지 작품에서도 높은 수준의 작품성을 보여줘 더욱 신뢰감을갖게 하였다. 정읍사문학상의 공모 취지에 잘 어울리는 작품이 선정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작가들의 당선을 축하한다.
― 심사위원 : 윤재석, 이광원, 김정임, 정량미
〈출처〉 정읍문학회( 정읍문학회 - Daum 카페)
이숨
전남 장흥 출생. 2018년 『착각의 시학』으로 등단. 2020년 《소래문학회》 가입. 시집 『구름 아나키스트』(시산맥,2020). 시치료전문가. 백석대 기독교전문대학원 상담학박사. 경희사이버대학원 미디어문창과 재학. 한세대학교 겸임교수.
첫댓글 도입부터 강한 눈길을 끕니다.
"기다림이 한계를 넘어서면시간이 멈춘다/ 천 년이 오늘이다".
'정읍사(井邑詞)'의 내용을 단 2행으로 축약해서 사람들의 뇌리속에 다시 한 번 각인 시켜 줍니다.
한계를 뛰어넘는 그리움은 결국은 시간도 초월하며, 박제된 천 년의 사랑이 아니라, 오늘도 살아 숨쉬는 우리와 함께 이 시대를 호흡하며 영구불변의 살아있는 그리움으로 남아있습니다. 아으 다롱디리~ 좋은 작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