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초고령사회
발달 심리학자인 에릭 에릭슨은 1994년에 92세로 죽기 직전에 초고령사회라는 새로운 주장을 했다. 그가 인생의 마지막 시기를 노년기라고 하였는데, 노령기의 모델은 70대 였다. 그러나 그가 죽었을 때는 8-90대 노인들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그래서 인생의 단계를 9단계로 늘리면서 초고령기라고 하였다.
다시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은 노인사회학에서 100세 이상의 노인을 다루기 시작했다. 에릭슨이 살아 있다면, 인생의 10단계로서 초초고령기라고 하였을지도 모르겠다.
2019년 여름에 노년사회를 연구하는 기관에서 장수마을로 소문난 구곡순담 장수 벨트 지역(농촌지역이다.) 찾아갔다. 20년 전에 비해서 100세 이상의 독거노인이 10%에서 25%로 늘어났고, 요양시설에 입주한 노인도 5%에서 20%로 증가했다. 딸이 부모를 모시는 경우도 5%에서 20%로 증가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20년 전에는 딸도 부모도 미안해 하였는데 지금은 딸도 부모도 당당했다. 꼭 맏아들이 모시는 것도 아니었다, 부모는 누가 무셔야 한다는 의식도 사라졌다. 이도저도 모시기 어려우면 요양원으로 보내거나, 간다는 의식도 보편화되었다. 초초노령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하였지만 노인을 부양하는 사회적 의식에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초초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슬픈 이야기도 많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100세 이상의 독거노인 비는 10년 전에 10명 중 1명이었는데, 지금은 3명이다. 100세 이상 독거노인이더라도 여자들은 그런데로 살고 있지만 남자 노인은 비참하기 말할 수 없었다. 조사원의 말로는 동물보다도 더 비참하더라고 했다. 담당 공무원의 말로는 지금의 법으로는 도울 길이 없다고 하였다. 자식도 있고, 노인 앞으로 된 재산도 있으므로 복지 대상이 아리는 것이다. 이런 경우 노인이 비참하게 사는 가장 큰 원인은 가족의 외면이다.
100세가 넘는 초고령의 경우는 손자가 보호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손자가 할머니를 가족으로 여기고 있을까? 초고령 독거 할머니를 조사하고 나온 조사원은 밖에서 기다리는 손자를 만났다. 할머니늘 어떻게 모시느냐고 하였더니, 할머니에 대한 부정적인 말들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할머니 때문에 가족들이 많은 희생을 한다에서부터 시잡간 딸만 챙긴다, 다른 가족은 무시한다. 등등이었다. 보름에 한 번 씩 반찬을 만들어서 찾아가는 것이 가족의 끈을 잇는 전부였다.
할머니를 면담하면서,‘가족은 안 오느냐’고 하였더니
“불러도 아무도 안 와”
우리나라에서 고려장 이야기는 이야기로만 전해 올 뿐 역사적 증거자료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현대판 고려장은 얼마든지 목격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요양원을 많이 설립했다. 그러나 부모를 요양원에 맡긴 후에는 찾아오지 않는 가족이 많다는 요양원 직원들의 말이다. 초고령 사회를 조사 - 연구하는 사람이 내린 해답은 가족이라고 하였다.
인천 남동구 주월도에 사는 106세 할아버지는 아파트의 반 지하에서 81세 아들 부부와 함께 산다. 아들은 아파트 경비원이고, 며느리는 폐지를 주워 생활비에 보태고, 본인도 빗자루를 들고 아파트 주변을 청소한다. 서로가 만족한다고 하였다.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에는 100세 할머니를 손자 부부가 모시고 산다. 이 가족의 특징이라면 할머니와 손주 며느리 사이에 스스럼이 없다는 것이다. 조사원의 말로도 보기가 좋더라고 했다. 고령 사회의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것 중에는 나이 든 이와 젊은이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거부감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이 노인은 손자가 어릴 때부터 같이 살았으므로 거부감이 거의 없다고 하였다. 100세 오빠를 91세 누이가 함께 사는 경우도 아주 좋았다. 할아버지는 경제적 능력은 있었지만 아들들이 모두 집을 떠나서 혼자 살았다. 누이가 찾아와서 같이 사는데, 조사원의 눈에도 서로의 관계가 좋더라고 하였다.
초고령 사회에서 가족의 의미는 특별하다. 가족으로 조합하는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지만 역시 가족이 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