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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의 싹난 지팡이
민 17:1-13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 중에서 각 조상의 가문을 따라 지팡이 하나씩을 취하되 곧 그들의 조상의 가문대로 그 모든 지휘관에게서 지팡이 열둘을 취하고 그 사람들의 이름을 각각 그 지팡이에 쓰되
3 레위의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쓰라 이는 그들의 조상의 가문의 각 수령이 지팡이 하나씩 있어야 할 것임이니라
4 그 지팡이를 회막 안에서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증거궤 앞에 두라
5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 이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너희에게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 앞에서 그치게 하리라
6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매 그들의 지휘관들이 각 지파대로 지팡이 하나씩을 그에게 주었으니 그 지팡이가 모두 열둘이라 그 중에 아론의 지팡이가 있었더라
7 모세가 그 지팡이들을 증거의 장막 안 여호와 앞에 두었더라
8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9 모세가 그 지팡이 전부를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가져오매 그들이 보고 각각 자기 지팡이를 집어들었더라
10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
11 모세가 곧 그 같이 하되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더라
12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죽게 되었나이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13 가까이 나아가는 자 곧 여호와의 성막에 가까이 나아가는 자마다 다 죽사오니 우리가 다 망하여야 하리이까
민 17:1-13 / [아론의 지팡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각 지파의 우두머리들로 하여금 지팡이 하나씩을 가져오게 하여라. 그리고 그 12개의 지팡이에는 열두 지파 우두머리들의 이름을 새겨 넣어라. 3) 레위 지파가 가져오는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새겨 넣어라. 4) 그 지팡이 12개를 만남의 장막으로 가져와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계약궤 앞에 갖다 놓아라. 5) 내가 가려 뽑은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지팡이에서 싹이 움틀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너희를 원망하지 못하도록 하겠다.' 6) 모세가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르자 각 지파 우두머리들이 지팡이를 하나씩 가져왔다. 모세에게 가져온 지팡이 12개 가운데에는 아론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지팡이도 들어 있었다. 7) 모세는 그것들을 여호와께서 늘 머물러 계시는 만남의 장막안 계약궤 앞에 갖다 놓았다. 8) 이튿날 모세는 계약궤가 모셔져 있는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레위 지파를 대표하는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움터서 순이 돋고 꽃이 피어나 감복숭아 열매가 열려 있었다. 9) 모세는 지팡이를 모두 들고 나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였다. 각 지파 우두머리들은 자기 지파의 지팡이를 하나씩 찾아갔다. 10)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셨다. `아론의 지팡이는 계약궤 앞에 도로 갖다놓아라.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해서 반기를 들고 불평만 늘어놓으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되게 하여라.' 11) 모세는 여호와께서 이르신 대로 하였다. 12) [제사장과 레위인의 해야할 일]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하소연하였다. `이젠 모조리 끝장이 나고 말았소. 우리는 모두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요. 13) 여호와께서 내려와 계시는 성막에 다가가기만 하면 다 죽지 않습니까? 이제 우린 모두 죽은 목숨이오.'
조직적으로 모세의 리더십에 대항했던 고라와 다단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습니다. 이 사건 후, 하나님께서는 열두 지파의 지도자에게 권위를 세우시고자 지팡이를 주셨습니다. 그중에 아론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각 조상의 가문을 따라 지팡이 하나씩 취하되(1-7) 하나님께서 각 지파의 지휘관들에게 지팡이(지휘봉)를 주셨습니다(1). 특별히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게 하시므로 대제사장이라는 최고의 지휘권을 확립해 주셨습니다(8). 싹 난 지팡이를 통하여 주시는 영적교훈은 매우 심오합니다. 첫째, 모든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산 나무가 죽어 지팡이가 되었으나 하나님의 역사로 살아났습니다. 둘째, 능력의 근원도 하나님이십니다. 마른 막대기에서 싹이 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슥 4:6). 셋째,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모세와 아론처럼 사명을 주시고 감당하게 하신다는 예표입니다. 지팡이가 다 싹이 난 것은 아닙니다. 아론의 지팡이만 싹이 났습니다. 고라와 그의 추종자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들어 지도자의 위치가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팡이 사건을 통해 모세와 아론의 권위를 더욱 굳건하게 하시어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아론의 지팡이에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8-13) 성경에는 지팡이가 무려 53번 나옵니다. 시편 23편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지팡이는 호신용이고 막대기는 공격용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때로는 지팡이로 지켜주시고 때로는 막대기로 악한 세력들을 물리쳐 주십니다. 더 나아가 지팡이는 성도들에게 사명을 완수하라고 주신 통치권을 의미합니다.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라고 하였습니다(8). 이는 하나님께서 싹 난 지팡이를 통해서 대제사장으로서 통치권을 아론에게 부여해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벧전2:9) 세상을 통치하는 사명을 부여 받았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을 모세와 아론처럼 하나님의 지팡이를 붙잡고 세상을 향하여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적용: 당신은 왕 같은 제사장로서 살고 있나요? 당신은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의 지팡이를 붙잡고 세상을 통치하며 살고 있나요?
“욕망을 이성의 지배하에 두어라.”-마르쿠스 콜리우스 키케로. 어떤 일을 처리하다 보면 감성보다 이성이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내식대로 하나님을 뜻을 생각하며 내식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연히 보여줬습니다. 내식대로의 감정의 물살에 휘말리면 저 멀리 떠내려가 버릴지도 모릅니다. 영영 돌아오지 못하기 전에 눈앞에 보이는 바위를 붙잡듯이 이성의 끈을 놓치지 마시고 참된 순종의 인생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 설 교 >
아론의 지팡이
민 17:1-13 / 이정원 목사
우리는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시기 위해서 특별히 성경과 목사라는 매우 귀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충분한 이해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목사를 세워주셨습니다. 목사의 가장 큰 임무는 성도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에 순종하도록 인도하는 일입니다. 이 일이 너무나도 중대하기 때문에 성경은 이 직분을 귀하게 여기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딤전5: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13:17)
이 직분은 주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친히 세우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직분에 대한 권위는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 권위가 존중되는 곳에는 질서와 은혜가 있지만, 이 권위가 무시되는 곳에는 혼란과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우리는 민수기 16장 17장에 기록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하여 이러한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제사장의 권위를 확증하신 하나님
16장에 기록된 고라 일당의 반역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에 대한 도전이었는데, 그것은 곧 그 지도자를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놀랍고 두려운 이적으로 고라 일당을 징벌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세와 아론의 권위를 확인해 주셨습니다. 이 사건으로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여 심판을 받아 죽게 되었을 때, 모세와 아론은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이들의 중보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사하여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래도 회개할 줄 모르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14,700명이 염병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때 아론이 향로에 향을 피워가지고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 염병이 그치고 백성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에게 도전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임을 명백히 보여주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의 중보기도를 통해 백성들이 진멸을 당하지 않은 것과, 특히 아론이 향로를 잡고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섬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그친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사장의 권위와 그 효력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위해 모세와 아론을 친히 택하여 세우셨으며, 그들을 통해 백성들을 인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율법을 주셨으며, 그들을 통해 사유의 은총을 받게 하셨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세와 아론은 백성들에게 큰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순복해야 했습니다.
또 하나의 이적
모세와 아론을 대적한 고라 일당을 심판하신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더 이상 불신앙으로 원망하며 지도자에게 도전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각 지파를 따라 지팡이 하나씩을 취하되 그들의 종족대로 그 모든 족장에게서 지팡이 열둘을 취하고, 그 위에 그 족장들의 이름을 쓰도록 지시하셨습니다. 레위 지파의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지팡이들을 회막 안 증거궤 앞에 가져다 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택하사 제사장의 직분을 맡기신 자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게 하실 것이며, 이로써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세우셨음을 확증하심으로 백성들이 더 이상 원망하며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게 하실 작정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 중에서 각 조상의 가문을 따라 지팡이 하나씩을 취하되 곧 그들의 조상의 가문대로 그 모든 지휘관에게서 지팡이 열둘을 취하고 그 사람들의 이름을 각각 그 지팡이에 쓰되 레위의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쓰라 이는 그들의 조상의 가문의 각 수령이 지팡이 하나씩 있어야 할 것임이니라 그 지팡이를 회막 안에서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증거궤 앞에 두라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 이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너희에게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 앞에서 그치게 하리라”(1-5절)
그런데 왜 하필이면 지팡이를 가지고 시험하게 하셨을까요? 지팡이는 권위를 상징합니다. 족장들의 지팡이는 각 지파를 다스리는 자로서의 권위를 나타내는 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지팡이들 중에서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게 하심으로써, 과연 어느 족장이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아 백성을 인도하는 권위를 위임받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다.
다음 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보니 열두 지팡이 중 레위 지파를 위하여 가져다 둔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 살구 열매가 달려 있었습니다. 모세는 지팡이 전부를 이스라엘 자손들 앞으로 가지고 나와서 각각 자기의 지팡이를 취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싹이 난 아론의 지팡이를 증거궤 안에 간직하여 백성들에게 표징이 되게 했습니다.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지파를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옴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모세가 그 지팡이 전부를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가져오매 그들이 보고 각각 자기 지팡이를 집어 들었더라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8-10절)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지팡이 중에서 아론의 지팡이에만 싹이 나고 꽃이 피어 살구 열매가 열린 것은 누가 참된 제사장인가를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였습니다. 이로써 제사장 직분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분쟁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싹이 난 아론의 지팡이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을 미리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수없이 체험해 왔으면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쉽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싹이 난 아론의 지팡이를 보존함으로써 백성들이 더 이상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를 원망하고 거역하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또 싹이 난 아론의 지팡이는 백성을 위해 지도자를 세우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었습니다.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만일 백성들이 이렇게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인도하기 위하여 세우신 지도자들을 인정하지 않고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백성들은 광야를 무사히 통과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것이며, 혼란과 무질서 가운데서 망하게 될 것이 뻔했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지도자로 세우신 모세와 아론에게 온전히 복종해야 했습니다.
마른 지팡이에 싹이 나게 하신 하나님
아론의 지팡이도 다른 족장들의 지팡이와 다를 바가 없는 마른 막대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마른 지팡이에서 어떻게 싹이 나고 꽃이 피어 열매가 열렸을까요? 그것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적을 인정하지 않고 이 기록을 설명해 보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래서 아론이 산 살구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놔두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살아 있는 나뭇가지를 꺾어왔다 치더라도, 어떻게 그 가지에서 하루 밤사이에 움이 돋고 싹이 나고 꽃이 피어 열매가 맺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을 인정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분명하고 단순해지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절망과 혼돈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마른 지팡이가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린 것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이었습니다.
아론도 다른 족장들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사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아론의 제사장 직분은 자연적인 자격이나 능력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권위에 의해서 된 것이었습니다. 만일 아론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사장이 아니었다면,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다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간구하여 그들을 구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고 꽃이 피어 열매가 맺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아론을 친히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세우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께서 택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열두 지팡이 중에서 아론의 지팡이에만 싹이 나게 하심으로써 아론을 제사장으로 택하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도록 택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백성들이 알아야 할 매우 중요한 큰 원칙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히5:4) 바울은 엡 4:11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세우셨으니” 안디옥 교회가 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할 때도 그들을 세우신 분은 성령님이셨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행13:2) 바울은 그의 서신을 시작할 때마다 자신이 사도가 된 것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셨기 때문임을 여러 차례 강조해서 말했습니다.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갈1:1)
이 모든 예들은 하나님을 섬길 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목사나 선교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의 생각인지 하나님의 부르심인지를 신중하게 검토하고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단지 자신이 원해서 목사나 선교사가 된다면 실패하게 되어 자신도 불행해지고 교회에도 큰 손실과 피해를 끼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택하시지 않으신 자들, 하나님께서 보내시지 않은 자들에 대해 엄하게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내 이름으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칼과 기근이 이 땅에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선지자들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노라 그 선지자들은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요 그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은 기근과 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거리에 던짐을 당할 것이요 그들을 장사할 자가 없을 것이요 그들의 아내와 아들과 딸이 그렇게 되리니 이는 내가 그들의 악을 그 위에 부음이니라”(렘14:15-16)
오늘 교회에서
고라 일당의 반역은 ‘왜 모세와 아론만 지도자 역할을 하는가, 우리도 그들과 동등한 자격이 있으므로 우리도 능히 지도자가 될 수 있지 않은가’라는 교만하고 어리석은 생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처럼 모세와 아론의 지위에 불만을 품고 시작되었던 고라 일당의 반역은 하나님의 긴급하고도 초자연적인 심판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고라의 반역 사건을 완전히 마무리 짓기 위해서 죽은 나무인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이 기적을 통해 아론의 제사장직에 대한 정당성을 확인시켜주셨습니다. 아론의 제사장직은 아론이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의 권위와 지도에 겸손히 순복해야 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을 사용하실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분명한 교훈을 배웠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러한 이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해 당신의 종들을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권위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세우신 종들에게 순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세우신 종들과 그들에게 주신 권위에 순복하기로 맹세했습니다.
당신은 세례 받을 때 서약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여러분은 교회의 관할과 치리에 복종하고 교회의 덕과 화평을 이루는 일에 힘쓰며, 교인된 의무와 권리를 바르게 행사하기로 서약합니까?”
담임목사를 청빙할 때는 이렇게 서약했습니다. “여러분은 겸손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교훈하는 진리를 받으며 치리에 복종하기로 승낙합니까?” “여러분은 저가 본 교회 목사로 재직 중에 한결 같이 그 허락한 생활비를 의수히 지급하여 주의 도에 영광이 되며 목사에게 안위가 되도록 요긴한 일에 도와주기로 맹세합니까?”
장로 임직식 때는 이렇게 서약했습니다. “참사랑교회 교우들이여, 노석현씨를 장로로 받고 성경과 교회 정치에 가르친 바를 좇아서 주 안에서 존경하며 위로하고 복종하기로 맹세합니까?”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13:17)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세우신 종들과 그 권위에 순복함으로 그들을 통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맘껏 힘입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고목나무에도 꽃은 핍니다
민 17:1-13 / 이한규 목사
< 살면서 높여야 할 지수 >
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삶을 보면 그 일생이 특이합니다. 120년을 살면서 40년의 왕궁의 삶, 40년의 광야의 삶, 40년의 소명의 삶으로 칼로 두부를 자르듯 세 토막으로 반듯하게 정리됩니다. 그처럼 모세는 삶도 특이하지만 죽음도 특이합니다. 그는 120세에 죽을 때 눈도 흐리지 않고 기력도 쇠하지 않은 상태에서 죽었습니다(신 34:7).
성도는 죽음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죽을 때 사고나 병으로 죽지 않게 하시고 모세처럼 눈도 흐리지 않고 기력도 쇠하지 않게 하소서!” 저도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성도님들에게 건강과 장수의 축복을 주소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돌아가실 시간도 없게 하시고 병들어 누워있을 시간도 없게 하소서!”
저도 저 자신의 죽음을 위해 기도합니다. 오래 살고 싶은 욕심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2019년까지 네트영어 사전도 만들고, 2023년까지 성경 전권 설교파일 완성하고, 2040년까지 전권 설교파일의 영문판도 완성하고, 40개 이상의 선교연맹 교회를 만들어 국가총회를 구성하고, 더 나아가서 수많은 선교사님들을 후원해야 하기에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저 모세만큼만 살렵니다.
여러분들도 너무 오래 살려고 욕심 부리지 말고 모세만큼만 사십시오. 그리고 천국에 가실 때도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는 꿈을 가지십시오. 모세처럼 건강하게 장수하며 복된 리더의 삶을 살려면 몇 가지 지수가 높아야 합니다.
첫째, 비전 지수가 높아야 합니다. 모세는 80세에 떨기나무 불꽃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뚜렷한 꿈과 비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성공적인 교인과 실패하는 교인과의 가장 큰 차이는 뚜렷한 비전이 있느냐의 차이입니다. 실패하는 사람은 대개 성공한 사람을 쫓아가기에 급급하지만 성공하는 사람은 분명한 목표와 비전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삽니다. 비전을 잘 세우면 그 비전이 자신을 끌어줍니다.
둘째, 거절 지수가 높아야 합니다. 영적 리더는 무엇보다 물질 거절을 잘해야 합니다. 목사가 돈을 추구하면 목회는 얻어먹기 좋아하는 조잡한 직업이 됩니다. 한국에서 얻어먹기만 좋아하는 3부류의 사람이 목사, 경찰서장, 세무서장이라고 합니다. 어느 날, 그 셋이 음식점에 가서 밥을 먹었는데 누가 돈을 냈을까요? 아무도 안내서 결국 음식점 주인이 냈다고 합니다. 또한 어떤 목사님은 교회 건축을 하는데 돈 생각을 너무 하다가 예배시간에 “찬송가 355원을 부릅시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또한 목회자는 쾌락도 잘 거절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목회가 힘들어 심심풀이로 당구를 시작했다가 당구에 빠졌습니다. 그 다음부터 기도할 때마다 말씀이 아닌 당구가 떠올랐고 나중에는 성도들의 머리가 당구공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설교도 당구를 치듯이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씀으로 김집사를 치면 히네루가 걸려 박권사를 때리고 다시 쓰리쿠션으로 이장로를 때리겠지.” 그렇게 때리는 설교를 해서 목회를 거의 망쳤다가 회개하고 다시 목회 잘하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심신의 피로를 풀겠다고 바둑을 시작했다가 바둑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예배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했는데 뒤에는 애굽 군대가 있고 앞에는 홍해가 있어서 결국 홍해 앞에서 아다리 되었습니다.” 그처럼 쾌락을 거절하지 못하면 인생이 아다리 되는 수가 있습니다.
또한 영적인 리더는 이성과 명예도 잘 거절해야 합니다. 명예심 때문에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사탄으로 끝나는 목회자도 꽤 많습니다. 영어로 그런 사람들을 ‘크리스탄’이라고 합니다. 또한 영적인 리더는 자존심도 잘 거절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안식년을 가려고 오래 전부터 계획했다가 마침 교회건축이 시작되어 한 푼이라도 절약하려고 안식년을 포기했습니다. 그때 A 집사가 루머를 퍼뜨렸습니다. “목사님이 부목사보다 인기 떨어지기 싫어서 안식년을 포기했다.” 그 A 집사가 그렇게 삐친 이유는 근처에 사는 B 집사가 매일 아침마다 보약을 끓여와 목사님을 대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어떤 교인은 칭찬하지만 어떤 교인은 질투합니다. 그처럼 시기심으로 B 집사를 미워하다가 목사님에게도 삐친 것입니다.
목사님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속 터진다! 어떻게 저렇게 판단력이 없나? 목사가 헌금하려고 안식년을 포기했으면 잘했다고는 못할망정 인기 떨어질까 봐 그랬다는 말을 왜 퍼뜨릴까?” 결국 목사님도 속이 상해서 A 집사가 교회를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매번 A 집사 쪽은 보지도 않고 반대쪽만 보고 설교했습니다. 어느 날, 그 목사님은 성령의 감동을 따라 교인명단을 보며 죽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은 이래서 교회를 나갔으면 좋겠고, 저 사람은 저래서 교회를 나갔으면 좋겠다.” 그렇게 따지자 나중에는 다 떠나고 사모님만 남을 것 같았습니다. 결국 목사님이 마음을 고쳐먹고 자존심이 상해도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는 심정으로 기회만 생기면 A 집사와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그러자 나중에는 그 집사가 루머를 퍼뜨린 것을 사과하고 그때부터 거의 매주 소꼬리를 사오며 교회에 충성했다고 합니다. 그처럼 자존심도 잘 거절해야 지도력이 생깁니다.
셋째, 인내 지수가 높아야 합니다. 모세는 40살에 인내지수가 제로였습니다. 자기 뜻에 안 맞는다고 홧김에 사람을 때려죽이고 모래 속에 파묻었습니다. 얼마나 성질이 급합니까? 결국 그 급한 성질로 왕궁의 삶이 광야의 삶으로 추락했습니다. 그 광야에서 끊임없이 인내 훈련을 하다가 80살에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한 후에 모세는 잘 참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처럼 인내지수가 높아야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합니다.
넷째, 기적 기수가 높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있으면 기적도 따릅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적은 총 33번입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수아가 7번, 엘리야가 7번, 엘리사가 14번, 모세가 39번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모세는 지팡이 하나로만 14번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모든 기적은 하나님을 만나 소명 받은 80세 이후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니까 기적지수가 높아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려면 기적적인 축복을 구하십시오. 사업의 기적을 구하고 자녀의 기적적인 축복을 구하십시오. 욕심을 채우려고 기적을 구하지 말고 좋은 일에 많이 쓰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렇게 기적적인 축복을 받는다는 모델이 되려고 기적을 구하십시오. 그처럼 선한 목적과 비전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며 살다가 기적적인 축복을 체험하면 예수 믿고 인물이 되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 그를 통해 영적인 리더십도 나오게 됩니다.
< 아론의 싹 난 지팡이 >
본문을 보면 기적을 통해 모세와 아론이 영적인 리더십을 굳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본문 앞 민수기 16장에는 아론의 제사장직에 도전해 일어난 고라 일당의 반역 사건이 나옵니다. 그 반역으로 하나님의 불이 나와 250인을 죽였고 땅이 입을 열어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재물들을 삼켰습니다.
그 엄청난 사건을 통해서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고 다음날 또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다.”고 대들었습니다. 그러자 그때는 하나님이 그들을 염병으로 쳤습니다. 그처럼 염병이 휩쓸고 가면서 백성들이 다 죽게 될 상황에서 모세가 아론에게 향로에 제단의 불을 담고 백성들을 위해 속죄의식을 드리라고 하자 아론이 막 달려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향로를 들고 섰습니다. 그래서 간신히 염병이 그쳤지만 이미 14,700명이 죽은 상태였습니다.
그 사건 직후에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의 리더십을 굳게 하려고 모세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12지파의 12족장이 지팡이 12개를 취해 그 지팡이에 각각의 이름을 쓰게 하고 레위 지파의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쓰게 했습니다(2-3절). 그리고 그 지팡이를 회막 안의 언약궤 앞에 두게 했습니다(4절). 그러면 하나님이 택한 자의 지팡이에 싹이 나게 할 텐데 그 역사를 통해 모세와 아론에 대한 원망을 그치게 하겠다고 했습니다(5절).
그처럼 하나님은 죽은 것과 같은 지팡이에서 싹이 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공증하고 지도자에 대한 원망을 그치게 하십니다. 결국 오늘날처럼 리더십 부재의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그 일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처럼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는 역사와 고목나무에 꽃이 피는 역사가 우리 분당 샛별 제단에도 나타나야 합니다.
현재 우리 제단에는 어르신들이 많아서 겉으로는 고목나무와 같습니다. 그러나 섬길 어르신이 많은 것은 엄청난 축복이고 또한 축복의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님과 어르신들을 잘 섬기는 일을 어떤 일보다 가치 있게 여기십니다. 십계명을 보면 인간에게 주어진 제일 우선적인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 그만큼 그 계명에 충실하면 반드시 복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고목나무에 꽃이 피는 역사를 위해서 기도하고 도전해서 부모님과 어르신들이 희망을 가지고 사시도록 해야 합니다.
이제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우리 제단에 속한 어르신들이 큰 꿈과 비전과 희망을 가지고 살게 하셔서 제단에 고목나무에 꽃이 피는 역사가 있게 하소서!” 우리는 앞으로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성경 전권 설교파일도 완성하고, 네트영어도 확산시키고, 딸 교회도 많이 개척하고, 선교사도 많이 파송하고, 어려운 이웃들의 눈물을 닦아주려면 축복을 많이 받아야 합니다. 그런 축복을 준비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이 바로 부모님과 어르신들을 최대로 섬기는 일입니다.
지난주에 미국에서 김진태 목사님이 오셔서 오후 성경공부를 인도할 때 연세 드신 분들이 많이 참석한 것을 보고 엄청난 숫자가 모였다고 했습니다. 연세 80이 넘은 분 한 명이 20살 청년 4명이 모인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그처럼 어르신들을 존재감 있게 해드리면서 부모님과 어르신들을 뒷방에만 계시라고 하지 말고 비전의 중심에 세워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제단이 더욱 큰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 고목나무에도 꽃은 핍니다 >
계속해서 본문을 보십시오. 모세가 하나님 말씀대로 조치하고 다음날 보니까 정말로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습니다(8절).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어떤 자유주의 신학자는 아론의 지팡이가 막 베어낸 살구나무 가지로 만들어서 자체에 남은 생명력으로 그렇게 열매까지 생겼다고 기적을 부인하지만 사실상 그렇게 해석해도 기적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의 리더십을 공증하시려고 그 기적을 일으켜주신 것입니다.
그때 모세가 다시 각 지파들이 자기 이름이 적힌 지팡이를 취하게 했습니다(9절). 그리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도로 언약궤 앞에 두어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해서 백성들이 더 이상 원망으로 죽는 일이 없게 했습니다(10절). 결국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아론 가문에게 주어질 제사장직에 대한 하나님의 공증이었고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면 준엄한 심판을 받고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면 부활의 은혜를 체험한다는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그 기적을 보고 백성들은 자기들이 죽고 망하게 되었다고 탄식하며 이제 성막에 가까이 가면 다 죽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탄식했습니다(12-13절). 그들은 하나님을 무서운 하나님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를 누구보다 기쁘게 맞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죄를 그냥 두고 하나님이 무섭다고 탄식하지 말고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십시오. 그러면 생명력이 끊어진 아론의 지팡이에서도 싹이 나고 고목나무에도 꽃이 피는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교회는 절망 중에 희망을 만들고 고목나무에도 꽃이 피는 역사를 만들어 우리를 어둠 속에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복된 교회로 만들어가야 합니다(벧전 2:9).
요새 한국 종교계가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불교계의 큰 스님들이 억대의 도박판을 벌이며 술 먹고 담배 피는 장면이 CCTV에 그대로 찍혀 방영되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일은 스님들 사이에 그런 현상이 만연되어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계도 부족함은 많지만 적어도 그런 모습은 상상조차 안 됩니다. 잘못된 목사도 있겠지만 적어도 제가 어느 정도 잘 아는 2-3백 명의 목사님 중에는 한 명도 술 먹고 담배 피고 도박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요새 한국은 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가톨릭교회가 성장하는 국가입니다. 사람들은 신부님들이 멋지다고 합니다. 왜 멋지냐고 물으니까 “소통을 잘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소통을 잘하는 것이냐고 하니까 “보통 사람처럼 술과 담배를 하니까 얼마나 인간적이냐?”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니까 일반 교인들도 술과 담배를 편하게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교회에 오면 술 먹고 담배 피는 것을 자신도 조심합니다.
물론 목사 중에 설교할 때 “술 먹고 담배 피는 사람은 교회에 발도 들여놓지 말라!”고 설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술과 담배를 해도 교회에 오라.”고 설교합니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교회에 오면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술과 담배를 점점 멀리합니다. 그것이 소통이 부족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만큼 무언중에 교회는 비록 잘 실천을 못해도 죄와 멀어지려는 몸짓이 강한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요새 어떤 사람은 목사가 여자 성도들을 농락한다고 인터넷에 악의적으로 열심히 퍼뜨리고 다닙니다. 그때 냉철하게 판단하지 않으면 인터넷 소문만 듣고 교회에 다니면 마치 다 바람이 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와서 자주 듣는 뻔한 얘기가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하면 “남편을 사랑하라! 남편을 존중하라!”는 얘기입니다. 그 얘기를 듣고 바람이 날 가능성이 많을까요? 바람기가 줄 가능성이 많을까요? 사실상 통계를 낼 가치도 없습니다.
목회자가 여자 성도를 유혹한다는데 적어도 목회를 포기한 사람이 아닌 정상 목회자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요새처럼 인터넷 시대에는 그런 일들은 감추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인생과 목회 전체를 포기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그렇게 못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유혹의 가능성들을 그런 대로 극복해내는 것입니다.
꽃뱀이 누구를 제일 싫어할까요? 최저생계비로 묵묵히 남을 섬기며 사는 60% 이상의 작은 교회 목사입니다. 나올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형교회의 힘 있는 목사에게는 접근하고 싶겠지만 그 접근이 쉽습니까? 한번 실수하면 전 인생과 목회가 끝나는 그 구렁텅이에 누가 쉽게 빠지겠습니까? 그처럼 꽃뱀에게도 잘 유혹되기 힘든 현실에서 악의적으로 들춰낸 인터넷 사례만 보고 평범한 자신의 아내가 유혹의 중심선상에 설지 모른다는 지극히 확률이 희박한 상상을 왜 할까요?
문제는 집착입니다. 결국 아내도 남편만 너무 집착하면 안 되고 남편도 아내만 너무 집착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폭넓은 교제와 시야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배우자에게 자기 외의 사람과 건전한 만남을 가질 기회를 주고 그런 건전한 만남을 가지면 기뻐해주어야 합니다. 사람은 만남이 없으면 건강하게 살 수 없는 존재이기에 배우자에게 건전한 만남의 길을 열어주어야 결국 배우자의 행복지수가 높아지면서 자신의 행복지수도 높아집니다.
그 만남의 장소로서 교회만큼 좋고 안심이 되는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자들끼리 구역예배를 드리면서 가정의 상처를 토로하다가도 결국 “그래도 남편을 위해 기도하자!”고 결론내리는 모임을 막고 그저 목회자와 눈이 맞을 것이란 확률이 희박한 상상으로 아내의 교회출석을 막으면 아내가 어디에 가서 누구를 만나야 안심이 되겠습니까?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는 것’입니다. 집착을 버릴 때 사랑은 한 차원 성숙해집니다.
물론 어떤 공동체이든지 리더의 자리에 있으면 동료로부터는 시기의 대상이 되기 쉽고 이성으로부터는 유혹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리더는 항상 조심해야 하고 세상 사람들의 염려에도 반드시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가끔 방송에서 한국 교회를 질타하는 보도 프로그램이 나갑니다. 그러면 방송국 앞에 몰려가 찬송하고 통성기도를 하며 “마귀야 물러가라!”고 외칩니다. 대개 이단들이 그렇게 합니다. 그런 장면을 보면 마음이 참담합니다. 교회가 자기반성을 하도 못하니까 하나님이 방송까지 동원해서 매를 드는데 세상의 매를 맞을 정도로 행동했으면 정신을 차려야지 무슨 추태입니까? 변화는 자기 실상을 바로 인식할 때 시작됩니다. 허물을 숨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아무리 교회를 칭송해도 세상이 공감하지 않으면 허무한 메아리가 됩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마른 지팡이와 같습니다. 그 지팡이에 다시 싹이 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마른 지팡이가 하나님의 권능이 나오는 능력이 지팡이가 될 것입니다. 그런 소망으로 내일의 축복을 준비하십시오. 현재 자신의 처지가 마른 지팡이 같아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요단강을 건넜다가 두 떼를 이룬 야곱처럼 될 것입니다(창 32:10).
< 자기 것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
지금 자신이 가진 것이 초라해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것을 가지고 얼마든지 큰 역사를 만들 수 있습니다. 모세는 처음 부름 받을 때 자기 능력을 의심하고 무엇인가 신비한 체험을 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전혀 예상 밖의 질문을 했습니다. “모세야!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때 늙은 모세의 손에는 지팡이밖에 없었습니다. 그 모세의 지팡이가 나중에 놀라운 일을 이루는 가장 위대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지금 묻습니다. “아무개야!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 말은 현재 가진 것으로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어르신은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이제 가진 것이 나이 먹은 것밖에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됐다! 그 나이로 지혜를 빚어내고 기력이 없으면 기도의 능력을 구하라! 내가 그것도 사용할 수 있다!”
지금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우연히 있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속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마른 지팡이처럼 초라하게 보여도 그것이 지닌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은 자기가 소유한 것의 의미를 깨닫고 감사하며 그것을 최선을 다해 활용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모세의 일생은 지팡이로 시작해서 지팡이로 끝납니다. 모세는 지팡이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고, 지팡이로 홍해를 갈랐고, 지팡이로 반석에서 물을 냈습니다. 그 모세의 지팡이가 가진 의미를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며 사십시오. 자신이 가진 것이 대수롭지 않게 보여도 마른 지팡이보다는 낫습니다. 그 작은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크게 역사하실 것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멋지게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작은 것도 하나님 안에서는 큰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무기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모세의 지팡이, 다윗의 물맷돌, 삼갈의 소 모는 막대기, 삼손의 나귀 턱뼈가 다 보잘것없는 것들이지만 그것들이 하나님의 손에 들릴 때 엄청난 힘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내가 가진 재능, 건강, 인맥, 물질 등 모든 것을 가지고 놀라운 축복의 역사를 꿈꾸며 나가십시오.
우리 교회는 지금 연령층이 높습니다. 외부 사람들이 보기에는 고목나무처럼 보이고 큰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찬란한 꿈과 비전입니다. 찬란한 꿈과 비을 뚜렷하게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교회를 부모님을 공경하고 어르신을 존중하는 교회로 만들면 하나님이 반드시 고목나무에도 꽃이 피는 역사를 펼쳐주시고 우리 교회를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복된 모델 교회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런 축복의 때를 준비하며 사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아론의 지팡이
민수기 17:1-13 / 정승안 목사
부르심에 순종한 모세와 그의 형 아론에게 위기가 찾아옵니다.
40여년 가까이 이스라엘을 이끌던 이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이 나타납니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총회의 지휘관이며 족장인 250인을 앞세워 반역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앞에 선 이들을 불과 전염병으로 심판하게 됩니다.
그들의 반역은 지도자 모세를 향한 장자족장으로서의 권위를 세우며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주어신 제사장직의 권위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레위인들에 의해서 일어난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악하고 패역한 백성들의 불평에 진노하셨습니다.
모세를 향해 도전하던 지도자로서의 권위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역자 모세의 권위를 더 이상 침범하지 못하도록 불로 심판 하시고 아론의 제사장직의 권위를 세워 주시기 위해 이스라엘 12지파 족장의 지팡이를 모아 그중 아론의 지팡이에만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게 하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이는 아론의 제사장직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확실히 입증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택하신 자를 위해 친히 증거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지파 대표들의 지팡이들을 통해 택하신 자가 누구인지 증거를 보여주시고 백성들의 불만을 종식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 중에는 아론이 백성들 위에 자기를 높인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사역자들이 흔히 직면하게 되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대다수 선지자들이 이러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으며,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직접적으로 불평하며 도전했습니다.
마태복음 21:23절에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라며 따져듭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예수께서 가지신 권세는 위로부터 난 것이지 아래 곧 사람들에게 부여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배척을 받았으며 무수한 도전에 직면하곤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4:7절에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며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그리스도께 했던 것처럼 사도들의 권위도 배척하고자 시도했지만 그들의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결국 사람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맞서는 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위해 역사하시며 그 권위를 세워 주십니다.
끝없는 협박과 살해위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역들은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 어떻게 행하셨는지 알게 합니다.
세상 권세나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강력한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자기의 택하신 성도들을 위해서 이와 같이 행하십니다.
주께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함께하신다는 약속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역할은 충성입니다.
세상이 우리의 앞길을 막고 우리가 하려는 일을 적극적으로 방해할지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보내신이의 능력과 역사가 보냄을 받은자들에게서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주께서 친히 증거를 나타내십니다.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증거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에게 속하였음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사역자의 믿음과 순종으로 영광받으십니다.
6. 7절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각 지파에게 족장의 이름이 기록된 지팡이를 하나씩 가져오게 하고 그것을 증거궤 앞에 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택한 자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리라는 말씀을 믿음가운데 순종합니다.
사실 베어진 나무, 이미 말라서 몇 년씩 손에 들려있던 나무에 싹이 돋아나는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므로 그것이 과학적으로나 지적으로 맞든지 맞지 않든지 또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비난하며 수군거릴지라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묵묵히 순종할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믿음이요 사역자의 자세입니다.
이는 역사상 모든 믿음의 선배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것은 누구라도 믿고 신뢰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모세나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 준 행동은 이것을 훨씬 뛰어넘은 차원입니다.
산 정상에 방주를 제작한 노아가 그러하고, 고향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이주한 아브라함이 그러합니다.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았지만 주를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였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셨으므로 무조건 믿고 따르는 믿음이 오늘 우리에게도 요청됩니다.
순종의 근거는 오직 말씀입니다.
우리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우리의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은 믿음을 확증하는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믿음이 있다 하고 그 입의 신앙 고백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순종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그 믿음을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아무런 능력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믿는다고 말합니다. 믿음이 승리한다고 외칩니다.
믿음만이 생명이라고 외치는 이들에게 한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리켜서 죽은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주의 말씀이 우리 머리로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고, 모세가 홍해를 건너며,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등은 과학적인 사고를 가진 우리들에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 분명합니다.
상식과는 거리가 먼 일들입니다.
상식적이지 않고 도무지 이해할 수 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받은 사역자에게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역사의 순간입니다.
그 순간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하며 상식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역사를 온 땅에 선포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어지는 곳에 이처럼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각과 능력을 초월하여 역사하십니다.
8절에 보면 12지파 족장들의 지팡이를 증거의 장막 안에 둔 이튿날에 그 지팡이들 가운데 아론의 지팡이에만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열매가 열렸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연 법칙을 깨는 역사였습니다.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며 그 어떤 논리적인 설명으로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살구나무가 열매를 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됩니다.
싹이 난다고 금새 꽃이 피는 것이 아니며 열매가 바로 맺힐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이와 같은 일들이 진행된 것입니다.
그것도 생명력을 상실한 아론의 지팡이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시는 성경안에는 이처럼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고 과학적인 증명 또한 의미 없는 일들이 가득합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시며 자연을 마음대로 조절하시며 세상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 인간들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입니까?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 뿐만 아니라 자연의 법칙들이 그것입니다.
한계가 극명한 인간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일에 대해 판단하거나 측량하며 평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부요하여 그의 판단은 우리가 측량하지 못하며 그의 길은 찾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롬 11:33).
인간이 그분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그분이 계시를 통해 보여 주신 것들 뿐입니다.
첨단 과학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인간의 지식과 능력을 자랑합니다.
심지어 그것을 신격화하려고 하며 스스로를 신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얼마 전 뉴 호라이즌이라는 위성이 명왕성을 스치듯 지나가며 관측했습니다.
발사된지 9년 반 만에 도착해 발견한 것들이 아지랑이 같은 것들과 아마도 이러이러한 것이겠지 않느냐는 추측가능한 것들입니다.
이를 두고 세기적인 대 발견이라고들 합니다.
그리고는 지구와 가장 가까운 곳에 마치 지구와 비슷한 환경의 행성이 존재할 것이라고 하며 그곳에 가서 확인하려면 빛의 속도록 1400년만 가면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한계가 극명한 우리의 생각과 사고로 하나님을 제한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대로 이루어질 줄로 믿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 생각과 의지가 내려놓아질 때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안에서 생명의 소망을 가졌습니다.
8절을 보면 레위집을 위하여 낸 아른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이적입니다.
아론의 지팡이는 생명력을 잃은 말라비틀어진 나무 막대기입니다.
그런 나무 막대기에서 싹이 돋고 열매가 맺혔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일은 자연의 법칙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이는 자연의 법칙을 넘어서는 신적인 권위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다 다 죽습니다.
죽음에서 예외가 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영생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위대했던 영웅도, 세계를 통치한 절대 권력자도,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았던 사람도 다 죽었거나 죽습니다.
이 사실만 본다면 우리는 절망적이며 소망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아론의 지팡이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언약궤안에 담겨 사라져버리 그 지팡이가 저와 여러분에게 무슨 의미입니까?
아론의 지팡이는 단순한 목자의 지팡이가 아닙니다.
아론의 지팡이는 소망없고 절망적인 마른 나무가지 같은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서는 아론의 지팡이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 싹이 나고 꽃이 피며 열매까지 맺게 하셨듯이 당신이 부르시는 자에게 생명을 불어 넣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며 믿음 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소망을 가졌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의 전능으로 우리를 살리시리라(고전 6:14)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사된 지 사흘 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사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생명있는 택하신 백성들에게 놀라운 약속의 말씀입니다.
생명 없는 나뭇가지가 하나님께 붙들려 쓰임받게 됩니다.
죄로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 사함을 얻어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손에 쓰임받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능력 있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삶의 환경 곳곳에서 능력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모두의 시선을 받게되는 자리일수록 자신의 기량을 최대한 사용합니다.
많은 일들의 결과 앞에 좌절하기도하고 우월감에 싸이기도 합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4: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말 수 있다는 놀라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당대의 학자요 능력자인 사도바울의 고백은 우리로 하여금 궁금하게합니다.
그는 지금 그의 능력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지식을 소유했고 사회적 지위와 경험들을 말하지않습니다.
반대로 그의 능력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말하고있습니다
바로 ‘능력을 주시는자 안’에서 입니다.
생명력이 하나도 없는 죽은 나무에 생명의 기운이 돌고 열매를 맺게하시는 바로 그 능력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일들을 본능적으로 해결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한 능력이 우리에게 있지만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초월하시는 전능자가 나의 능력이 된다고 한다면 이보다 더 할 수 없습니다.
능력있는 삶은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삶입니다.
내 삶에 전능자의 능력이 드러나 영광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무능한 우리의 삶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은혜를 구해야합니다.
삶의 자리에서 임마누엘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사람이 되시기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십니다.
10절에 보면 싹이 난 아론의 지팡이를 증거궤 앞으로 다시 가져다가 거기에 간직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고 원망을 그치게 함이며 다시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는 것을 피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멸망치 않고 다 구원에 이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비록 패역한 악인이라고 할지라도 멸망하는 것을 결코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는 사람이 있다면 속히 마음 문을 열고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장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듯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한 중보자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는 바로 우리를 대속하여 십자가형벌을 감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요 14: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가 이제 우리의 눈앞에 있습니다.
믿음 안으로 들어오시기를 촉구합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해 기억해야 해야 합니다.
생명의 역사요 소망의 역사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마른 나뭇가지와 같은 저와 여러분에게 놀라운 능력이 될 것입니다.
이 역사는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선택받은 성도의 믿음과 순종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믿음이 말씀대로 살아가며 말씀대로 순종하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민 17:1-11 / 피영민 목사
서 론
가수 최진희 씨가 부른 ‘사랑의 미로’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미로란 미궁과 같은 말인데, 가도 가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그런 길을 의미합니다. 길을 매우 복잡하게 만들어서 앞으로 가도 제자리로 돌아오고, 뒤로 한참을 가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 때문에 제자리에서 한 걸음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미로입니다. 아마 그 노래를 작사한 사람이 사랑도 그와 같은 것이라 생각하여 사랑을 미로라고 말한 것 같습니다. 미로에 빠진 사람은 처음에 재미를 느낍니다. “아! 이상하다. 다른 길로 갔는데 나온 길이 똑같네.” 그러나 시간이 지나게 되면 점차 당황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더 지나게 되면 좌절을 겪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이 마치 미로를 헤매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의 미로를 헤맸습니다. 물이 없다고, 고기 없다고 원망하다가 큰 재앙을 당합니다. 그래도 형제들이 원망하고, 백성들이 원망하고, 지도자가 원망하여 땅과 불이 삼키는 심판을 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날 일어나서 또 원망하는 바람에 염병으로 14,700명이 죽는 재앙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하는 죄는 마치 미로와 같은 것입니다. 어느 방향으로 빠져나가려고 해도 결국은 원점으로 돌아오는 미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죄의 미로 가운데 돌파구는 없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의 미로에서 좌절을 경험하였습니다. 본문 17장 12-13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에게 말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는 죽게 되었나이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가까이 나아가는 자 곧 여호와의 성막에 가까이 나아가는 자마다 다 죽사오니 우리가 다 망하여야 하리이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민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원망하고 싶지 않지만 또 원망하게 되고, 우리는 죄짓고 싶지 않지만 또 죄짓게 됩니다. 원망을 하면 하나님께서 불과 병으로 죽이시니 우리가 다 죽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우리가 여호와 앞에서 다 죽을 지도 모르는데, 과연 우리가 다 망하여야겠습니까?”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좌절의 하소연입니다. 미로를 헤매는 도중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죄와 사망의 골짜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라고 외치는 간절한 부르짖음인 것입니다.
이 간절한 물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제기됐지만, 사실 오늘날 죄의 미로에서 헤매고 있는 수많은 인류들은 이와 동일하게 하나님께 질문해야 합니다. “죄의 미로를 벗어날 수 있는 돌파구는 없습니까?”
1. 죄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 방법
이에 대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돌파구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일러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을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돌파구를 내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로와 같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방법은 매우 재미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열 두 종족으로부터 지팡이를 하나씩 취하도록 명령하십니다. 히브리어로 지팡이를 ‘마타’라고 하는데 이 ‘마타’가 ‘종족’과 같은 말입니다. 종족을 대표하는 것이 지팡이가 된 이유는 히브리어의 언어유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종족이나 지팡이나 같은 말이기 때문에 열 두 종족을 대표해서 지팡이를 하나씩 취하고, 지팡이마다 각 족장의 이름을 쓰되, 레위 지파의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 지팡이 열 두 개를 모아서 증거궤 앞에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모세가 말씀대로 행하였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튿날 장막에 들어가 보니 열 두 개의 지팡이 중에서,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다고 했습니다. 살구 열매는 영어로 ‘Almond’라고 하는데 초콜릿에 넣어서 먹으면 바삭바삭하고 맛이 좋습니다.
열두 지팡이는 모두 죽은 나무요, 원가지에서 끊어진 생명력이 없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아론의 지팡이는 생명을 얻어서 열매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론 지파의 제사장 직위를 명확하게 세워주신 것입니다.
다른 지파에서는 제사장이 임명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택하신 레위 지파 중에서도 아론의 후손만이 제사장이 되는 것이니, 더 이상 불평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후에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도로 가져다가 증거궤 앞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한 자에게 표징이 되게 할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찌니라”(10절).
왜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이런 기상천외한 기적을 행하신 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원망을 그치게 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죄를 이기고, 사망을 피하려면 아론의 싹 난 지팡이에 나타난 표징을 보면 되는 것입니다.
2. 아론의 싹 난 지팡이의 세 가지 특징
아론의 싹 난 지팡이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택함 받은 지팡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 이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너희를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 앞에서 그치게 하리라”(5절)고 했습니다. 아론의 지팡이라고 해서 스스로 생명력을 갖추고 싹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열매를 맺은 것도 아닙니다. 아론의 지팡이도 죽은 나무요, 스스로 생명력을 가질 수 없는 나무입니다. 그런데도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고 열매가 맺힌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은혜를 인하여 생명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레위 지파는 복을 받을만한 조건을 가진 지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창세기 49장을 보면 야곱이 아들들에게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른 아들들에게는 모두 한두 마디씩 축복을 건넨 야곱이 유독 레위에게는 단 한 마디의 축복도 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49장 5-7절을 보면 야곱은 도리어 레위를 두 번씩이나 저주합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찌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찌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이처럼 레위는 야곱의 이중 저주를 받은 지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 번이나 야곱의 저주를 받은 레위 지파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영적인 지도자가 되었을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공로 때문입니다. 레위 지파에게는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우리 공로나 우리 노력이 아닙니다. 우리는 레위처럼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무조건적인 은혜입니다.
로마서 9장 16절에 보면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또 로마서 5장 20절에도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했습니다.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택하심이며, 우리가 구원을 받게된 것도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이 있었기 때문임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어서 스스로의 의지로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러한 주장에는 일부 진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완벽한 정답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택하신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이고,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었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부활의 지팡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지팡이를 살아있는 가지로 만드시고 살구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이 능력이 바로 부활의 능력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입니다. 로마서 4장 17절에도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죽은 지팡이에서 싹이 나고 열매를 맺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 부활의 능력이기 때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아론의 지팡이는 표징의 지팡이입니다. 이 지팡이를 보고난 후에 하나님께서 아론을 제사장으로 세우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죽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그 표징을 보고도 하나님께서 언제 아론을 제사장으로 세우셨느냐고 반항하며 불평하는 사람은 죽게 됩니다. 죽고 사는 표징의 지팡이가 바로 아론의 싹 난 지팡이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택하시고, 부활의 능력을 부여하셨으며, 지팡이를 통하여 표징을 드러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아론의 싹 난 지팡이의 영적의미
그렇다면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사야서 11장 1절 말씀을 보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이 ‘싹’이라는 말은 영어성경(King James Version)에서는 ‘rod’, 곧 ‘지팡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지팡이가 나와서 가지가 나고 결실을 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지팡이가 무엇일까요?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스가랴서 6장 12절에도 “고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순’이라고 하는 것은 ‘나뭇가지’를 의미하는데, 영어로 ‘branch’입니다. 이 ‘순’이라는 가지가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게 될 것인데,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의 세 가지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으신 구주시요, 부활의 능력을 가지신 구주이십니다. 사람이 그 분을 믿으면 생명을 얻게 되고, 믿지 않으면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되는 표적으로서의 구주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미궁에 빠진 인간들의 유일한 돌파구요, 생명을 주시는 구주이십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은 구약성경입니다. 구약성경의 매 페이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만이 인간의 죄를 미궁에서 건져내실 수 있는 해결책이요, 돌파구라는 사실을 반드시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싹이 난 이유
그렇다면 다른 지팡이에서는 싹이 나지 않고, 오직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싹이 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유일한 제사장이며, 구세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제사장이시며,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존재는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제사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수없이 많은 존재들이 구세주임을 자처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되심과 경쟁을 이루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경쟁자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 유일무이한 구주시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사도들도 이 진리를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을 보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 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공자, 혹은 석가모니를 비교하지 마세요. 예수님은 어떤 경쟁자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소위 종교 다원주의, 즉 다른 종교도 모두 천국 가는 각기 다른 길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아론의 지팡이에만 싹이 났지, 다른 지팡이에는 싹이 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다른 지팡이에서도 싹이 났다면 저는 종교 다원주의가 옳다고 믿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지팡이는 싹을 내지 못했고,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동일하게 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을 사망에서 건져내시고 생명을 주시는 유일한 구세주시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은 막대기를 의지하는 존재는 둘째 사망을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경쟁자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라이벌이 없는 겁니다. 예수님은 천상천하에 유일한 구세주요, 하늘과 땅의 유일한 중개자이신 것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아론의 지팡이에만 싹이 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만이 싹이 나고 열매 맺는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레위는 사실 그런 은혜를 받을 아무런 자격이 없기 때문에, 레위가 영적인 지도자가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은혜요 또한 이름값입니다. 레위라고 하는 이름은 ‘하나님과 연합되었다(attached)’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레위 지파에서 싹이 났다는 말은, 레위 지파가 하나님과 연합되어 싹도 나고 열매도 맺는 인생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연합된 자만이 인생에 움이 돋고, 순이 나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과 연합됨이 없는 인생은 생명의 근원에서 끊어진 채 이 땅에서 살다가 영원히 끊어지는 지옥에 던져질 것입니다. 죽은 막대기에도 꽃이 핀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아론의 지팡이가 아닌 다른 지팡이에도 꽃이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화가 아니고 조화입니다. 죽은 막대기에 열매가 맺힌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입니다.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힙니다. 이처럼 여러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아론의 지팡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만이 생명의 부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레위 지파의 지팡이에만 싹이 나고 열매를 맺었다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생명의 부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는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선량하게 사는 것은 부수적인 교훈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처럼, 그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젠가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마른 지팡이처럼 될지라도 다시 싹이 나고 꽃이 피며 열매 맺는 부활의 영광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다시 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생명의 부활을 하게 된다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들을 서로 대할 때에도 하루 이틀 보고 말 그런 사람처럼 대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기서 보고 끝날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서 영원토록 서로를 보고 또 보게 될 것입니다.
결 론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이 땅에서 죄의 미궁을 헤매는 존재들입니다. 내 스스로 죄를 벗어나 보고자 해도 다시 죄로 돌아오게 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연약한 존재들이 어떻게 죄를 그치고 사망에서 벗어나겠습니까? 다른 길은 없습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그 표징을 보는 것 외에는 다른 치료책이 없습니다. 오직 성경의 매 페이지에서 증거 하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건져내시는 유일한 구주라는 사실을 믿어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두 가지를 결단해야 합니다.
첫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 예배에 처음 나온 분이 계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마음에 영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낄 때면 언제나 돌아가 다시 그 분과 연합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만이 죽은 후에도 영원히 살게 되는 생명의 부활을 맞이하고, 기쁨 가운데 하나님과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혹시 지금 이 자리에 예수님과 멀리 떨어져 살았던 분들이 계십니까? 오늘 다시 주님 앞으로 가까이 가시고 그 분과 연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은혜로 생명과 영원한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론의 지팡이 교훈
민 17:1-13 / 박봉수 목사
며칠 전 아들이 아버지를 구타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42살 난 정모 씨는 72살 노인인 아버지에게 용돈을 타 쓰는 처지였습니다. 아버지에게 용돈을 아껴쓰라고 꾸중을 듣자 화가 나서 아버지를 주먹과 발로 수차례 폭행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집에 불까지 질렀습니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얼마 전 초등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협박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 초등학교 여선생님이 잘못한 아이를 벌을 주려 하자 아이들이 핸드폰을 들고 경찰서에 신고하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겠다고 공갈을 했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안타깝고 충격적인 일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존의 권위가 흔들리고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을 비롯한 지도자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버렸습니다. 나라의 원로들이 권위를 잃어버렸습니다. 교회 목회자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우리 사회가 권위와 권위주의를 혼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권위주의를 타파한다고 지켜야 할 권위까지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권위와 권위주의는 다른 것입니다. 우선 권위란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공동체를 올바로 세우고 이끌어가는 힘을 말합니다. 어떤 공동체가 올바로 서려면 이 권위가 지켜져야 하고 존중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권위주의는 “어떤 일에 있어 권위를 내세우거나 맹목적으로 그 권위에 복종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힘으로 권위를 주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힘에 밀려서 마지못해 권위에 복종해 주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런 권위주의는 공동체를 병들게 하기 때문에 철저하게 타파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는 이 권위주의의 잘못을 청산한다고 지켜져야 할 권위를 흔들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나라 전체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반드시 지켜지고 존중되어야 할 권위마저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가 이토록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 권위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은 진정한 권위는 무엇이고, 그 권위는 어떻게 세워져 가야 하는가를 교훈해 줍니다.
민 16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38년 광야생활을 거의 끝내는 시점에 또 다시 일어난 반역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레위지파 고라라는 사람이 르우벤 지파 다단과 아비람과 결탁하고, 군 지휘관 250명을 동원하여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한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 정치 지도자들, 그리고 군 지휘관들이 의기투합하여 최고 지도자의 권위에 도전한 것입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기에 동조했습니다. 공동체에 심각한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반역의 무리들을 응징하셨습니다. 땅이 갈라져 반역의 수괴를 삼키고 불이 나와 추종 세력을 불살랐습니다. 그래도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은 모세와 아론에게 있다며 공격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셨습니다. 권위에 도전하는 백성들에게 염병을 내리셔서 응징하셨습니다. 가까스로 아론이 하나님 앞에 중보해서 염병이 그쳤습니다. 이 때 죽은 사람들이 14700명이었습니다.
이제 본문에 오면 하나님께서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특단의 조치를 취하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다시는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다시는 권위가 흔들리지 않도록 한 가지 이적을 보이셨습니다.
우선 각 지파의 대표로 하여금 지팡이 하나씩을 가져오게 하셨습니다. 거기 자기 이름을 쓰게 하셨습니다. 레위지파가 가져온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쓰게 하셨습니다. 이 12개의 지팡이를 성막 안 언약궤 앞에 두었습니다. 다음 날 들어가 보니 아론의 지팡이에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열매가 열린 것입니다.
모세가 그 지팡이를 본인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아론의 지팡이만은 언약궤 안에 넣어 보관케 하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제사장 아론의 권위를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다시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권위의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몇 가지 교훈을 받게 됩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권위를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권위의 출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이 남다른 권위를 갖게 될 때 그 권위는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권위의 출처가 모두에게 인정될 때 비로소 그 권위가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권위의 출처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권위자 개인입니다. 그 사람의 남다른 능력 거기에서 권위가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누구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이 있을 때 그 사람의 권위를 인정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아인쉬타인 같은 사람은 그 탁월한 지적 능력 때문에 모두 그의 권위를 인정합니다. 파바로티 같은 사람은 그 탁월한 노래 솜씨 때문에 모두 그의 권위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과 필적할 만한 사람이 나타나면 그 권위는 더 이상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그 능력이 예전 같지 못하면 역시 그 권위는 더 이상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아론에게 이런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레위 자손 가운데 고라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고라는 아론의 사촌이었습니다. 성막 봉사의 고위직책을 맡았습니다. 광야 생활 38년 동안 성막 봉사를 하면서 대제사장 아론을 가까이에서 보좌했습니다. 그런데 오래 동안 지켜보니까 자기가 아론보다 못할 것이 없어보였습니다. 아론이 하는 일을 자기가 훨씬 더 잘할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아론을 비판하며 흠집을 내기 시작합니다. 자기가 하면 더 잘할 수 있다고 도전하고 공격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권위의 출처를 사람들에게 두는 것입니다. 권위가 따르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민주주의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투표로 지도자를 뽑습니다. 당선되면 일단 지도자로서 합법적인 권위를 얻게 됩니다. 거기에 여론 조사의 지지도가 높으면 그 권위는 더욱 든든한 기반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들의 지지도가 떨어지면 권위도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아론에게도 이런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아론의 인기가 떨어졌습니다. 반면에 고라의 인기는 점점 높아졌습니다. 대제사장으로서 아론의 권위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고라가 권위에 도전할 때 동조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고라가 하나님의 징계로 죽은 뒤에도 백성들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권위의 출처를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론을 선택하셔서 대제사장으로 세우신 것은 그가 남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사람들에게 특별한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기준에 맞게 아론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들은 저마다 결격 사유가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모세가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압제에 고생할 때 왕자로서 왕실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역에 고통을 겪으며 살 때 미디안 광야에서 자신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지도자가 될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권위를 세워주셨습니다.
또 하나 바울도 그랬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일에 앞 장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 땅의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가 핍박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외국 땅 저 시리아 다메섹까지 쫓아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려 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가 될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권위를 세워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권위는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가정에서 부모의 권위는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교회에서 주의 종의 권위는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장로를 비롯한 안수하여 기름 부은 평신도 지도자들의 권위 역시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나라의 대통령을 비롯한 지도자들의 권위 역시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내가 볼 때 그 사람이 형편없이 보인다고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다고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기준에 맞게 세우셨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아론은 변화된 지팡이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게 됐을까요? 자기 지팡이에만 싹이 나고 살구 열매가 맺혔습니다. 자기가 무능하다고 고라에게 공격을 당한 처지입니다.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어 자리가 위태하던 상황입니다. 그런 자기 지팡이에만 특별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로 자기의 권위가 되살아났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게 됐을까요?
간단합니다. “나의 권위는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로구나! 나는 앞으로도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겠구나! 정말 겸손하게 섬겨야 하겠구나!”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총으로 권위의 자리에 세움 받은 사람들은 겸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권위의 자리에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권위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사울은 가장 실패한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보내셔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물론 사울은 왕이 되기에는 결격 사유가 많았습니다. 사울도 이 점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기름 부으려 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그러나 사울은 왕이 된 후 달라졌습니다. 자기가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권위의 자리에 세워주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왕이 된 후 나라가 기반을 닦았습니다. 암몬과의 전쟁에 나가 대승을 거뒀습니다. 따르는 무리가 많아졌습니다. 교만해졌습니다. 자기가 대단한 줄 착각했습니다. 백성들의 인기에 도취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로 잘 나갈 때 조심해야 합니다. 매사가 잘 풀릴 때 조심해야 합니다.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 하나님께서 권위를 세워주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노예 해방을 이루어 낸 데는 두 사람의 업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4년간의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링컨 대통령이고, 다른 하나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는 소설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스토 부인입니다.
노예 해방을 이루고 난 뒤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링컨은 스토부인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정말 스토 부인입니까? 저는 이렇게 위대한 소설을 쓴 분은 강한 분인 줄 알았습니다.” 이때 스토 부인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사실 그 소설을 쓴 사람은 제가 아니었습니다. 노예제도를 보고 노여워하신 하나님이 쓰신 것입니다. 저는 단지 그분의 도구였을 뿐이지요”
이번에는 스토부인이 말했습니다. “각하의 모습도 제가 상상한 것과는 너무 다릅니다. 의외로 인자한 표정이군요” 링컨이 말을 이었습니다. “사실은 제가 싸운 것이 아닙니다. 저도 작은 도구였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권위를 세우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겸손해야 합니다.
존중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의 변화된 지팡이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특히 아론의 권위에 도전했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간단합니다. “아론의 권위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로구나! 아론의 권위를 존중해야 하겠구나. 아론에게 복종하는 것은 인간 아론에게 복종한다기 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롬 13:1-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니 그 권위를 존중하고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권위를 존중해야 하는 우선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존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던 중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한 번은 사울이 3000명 군사를 이끌고 엔게디 지역에서 다윗을 찾고 있었습니다. 찾다 못해 쉬기 위해 한 동굴에 들어와 잠을 잤습니다. 그 때 다윗과 그 부하들이 그 동굴 갚은 곳에 숨어있었습니다.
다윗은 그의 옷자락만 베고 살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 조차도 마음에 찔려서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삼상 24:6)
그렇습니다. 우리가 권위를 존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밉고 죽이고 싶어도 하나님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권위를 세우신 하나님 때문에 그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의 태도입니다.
또한 우리가 권위를 존중해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어느 날 아기 사슴이 사냥꾼에게 쫒기고 있었습니다. 숨을 곳을 찾던 아기 사슴은 포도나무 밑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잎과 덩굴이 우거진 포도나무는 충분한 은신처가 되 주었습니다. 사냥꾼의 추격을 피한 후 배가 고파진 사슴은 포도넝쿨을 조금씩 뜯어 먹었습니다. 결국 사냥꾼에게 들키게 됐고 잡혀버리게 됐습니다. 자기를 보호하던 울타리를 스스로 없애버린 후 위험을 자초해 버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도록 권위를 세우셨습니다. 그 권위를 무시하고 존중하지 않으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그 권위를 존중하고 따르는 것이 결국 우리를 위해도 좋은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권위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는 권위 앞에 겸손해야 하고 또한 그 권위를 존중해야 합니다.
원망을 그치라
민수기 17:8-11 / 김정호 목사
어떤 부부의 지난 15년 동안의 결혼 생활은 마치 탁구공을 치는 것과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남편이 분노라는 공을 치면 아내 역시 그 분노의 공을 받아치고 아내가 비난이라는 공을 치면 남편도 그 공을 받아치면서 서로 공격하고 방어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겁니다. 과거 대학 캠퍼스에서 만났을 때 보았던 진실하고 능력 있는 남편의 모습이 결혼해서 살아보니까 완전히 위선으로 드러났다고 아내가 분노하는 겁니다. 남편 역시 아내의 아름다운 외모와 정결한 모습에 반해 결혼했지만 결혼생활에서 보여지는 아내의 게으르고 무성의한 모습에 역시 실망하게 된 겁니다. 그 결과 “이 여자 때문에, 이 남자 때문에 내 인생이 망했구나!” 라고 생각한 이들 부부는 서로를 윽박지르면서 가정을 전쟁터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상처로 비뚤어진 마음의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면서 상대방의 결점을 변화시켜 보겠다고 서로 싸워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머리로는 믿었는지 모르지만 마음중심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인 부부관계의 성공은 부부의 내면이 변화되어 사랑하는 마음을 소유하게 되는 것임을 우리 모두가 다시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고라 일당의 반역은 왜 아론과 모세만이 종교와 정치의 지도자로 활약하는가? 우리도 그들과 동등한 자격이 있으므로 능히 지도자로 나설 수 있다는 교만하고 어리석은 생각에서 반역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고라 일당을 쓸어 버리셨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내에 잠재해 있는 반역과 불순종의 마음을 일소하시기 위해서 아론의 마른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습니다. 12개의 지팡이 가운데 아론의 이름이 쓰인 지팡이에서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론의 권위를 세우셨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이 막거나 불평할 수 없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람이 살고 죽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모든 원망을 그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순종하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하나님이 선택 하신다.
본문 8절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살구나무는 원어상 ‘살아 있고 깨어 있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본문에 언급된 살구나무는 원래 수분이 완전히 제거된 죽은 막대기에 불과 했으나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단번에 생명을 얻고 열매를 맺기까지 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항상 깨어 역사하시며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확실히 나타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을 찾는 것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앞뒤가 잘려진 막대기에서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열매가 맺힌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사망이 생명으로 바뀐 것을 말합니다. 이는 아론의 대제사장직을 하나님이 친히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똑똑하고 분명하게 증명하셨습니다. 살구나무 기적은 하나님의 깨어 지키시는 은혜 없이는 아무도 생존할 수 없다는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서울 지하철 입구에서 구걸하는 거지가 있는데 날마다 그 자리를 지나가면서 만원을 주던 신사 한분이 있었습니다. 이 신사 분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어려운 거지에게 날마다 만원씩 도와주었습니다. 거지는 자연스럽게 그 신사를 기다리게 되었고 신사도 역시 어김없이 같은 시각에 나타나서 그 거지에게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돈의 액수가 점점 줄었습니다. 거지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참고 인내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같은 시간에 나타난 신사분에게 염치불구하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재작년까지 늘 만원씩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작년에는 5천원으로 줄이더니 올해는 또 2천원으로 줄이셨습니다. 대체 어떤 연유이신지요?” 그 신사분 왈 “전에는 내가 총각이었으니 여유가 있어서 만원을 드렸지요, 하지만 작년에 결혼을 했어 5천원으로 줄였고요, 올해는 예쁜 아기가 태어나서 부득불 2천원으로 줄인 것입니다.” 거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아니 신사 양반, 어찌 내 돈으로 가족을 부양한단 말입니까?”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살고 죽고, 제사장이 되고 안 되고 쓰시고 안 쓰시고,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무엇을 하시든지 인간은 말할 수 없습니다. 토기장이에게 토기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론과 그의 자녀들이 제사장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고 은혜입니다. 하나님 하시는 일에 고라처럼 원망하고 파당을 만들면 불행해지고 모든 것은 끝납니다. 우리 마음, 생각, 언어, 삶 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모든 원망의 쓴 뿌리를 모아 태우기를 바랍니다. 때만 되면 솟아오르는 원망을 이제는 완전히 제거해야 살고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주권을 믿어 모든 원망을 그치고 전적으로 순종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하나님이 은혜 주신다.
본문 10절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은 멸망이 아니라 생명임을 강력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멸망이 아닌 구원이 하나님의 소원이고 목적입니다. 지옥이 아니라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많은 선지자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구원을 위해 최고의 값을 치루셨습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아니하시고 다 주셨습니다. 더 이상 줄 것이 없을 정도로 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다만 감격하고 감격할 뿐입니다. 늘 울어도 그 은혜를 갚을 수 없습니다. 죽도록 충성해도 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비하면 먼지처럼 작고 초라할 뿐입니다. 하나님께 반역한 자는 죽음을 초래하는 것이나 원망을 그치게 하고 살려 주셨습니다. 죽어야 되는데 산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서 열 번 백 번 죽어야 하나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살게 하셨습니다.
미국의 “스탠다드 석유 회사”가 있었습니다. 존 록펠러라는 사람이 그 회사를 세웠는데 세계에서 제일 부자였습니다. 지금은 엑숀 모빌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당시 회사원 중에 ‘아치볼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난히도 그의 회사를 사랑하고 충성하는 마음이 깊었습니다. 그는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호텔에서 숙박계를 쓸 때에도 자기의 이름을 쓰지 않고 “한 통에 4달러 스탠다드 석유” 라고 자기 회사의 석유 가격과 이름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구와 대화할 때에도 “한 통에 4달러 스탠다드 석유”라는 말을 먼저 한 후 용건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한 통에 4달러 스탠다드 석유” 라고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사장 록펠러가 이 아치볼드라는 사원을 불렀습니다. 록펠러는 이 평사원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하면서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스며있는 회사를 사랑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고 그가 얼마나 회사를 위해서 열심히 충성하는지 알고는 마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록펠러는 ‘아치볼드’야말로 스탠다드 석유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록펠러는 이 아치볼드를 자기의 뒤를 잇는 후계자로 삼으므로 평사원이었던 그가 세계 최대의 석유 회사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이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이런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최선을 다해 충성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사람의 최선의 삶의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하나님을 향한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원망을 그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하면서 죽도록 충성하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하나님이 축복 하신다
본문 11절 “모세가 곧 그 같이 하되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더라"
모세가 곧 그 같이 하되 그리고 명령하신 대로 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일에 자기의 생각이나 경험이나 인간적인 것을 혼합하지 아니하고 명령하신 그대로 하였습니다. 지위가 높고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융통성이 생기게 됩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대로 철저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자신의 의견이나 말을 섞으면 안 됩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기적이 일어납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도 철저히 순종했을 때 물이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 일곱 번 목욕을 했을 때 문둥병이 떠나고 아기살처럼 고침 받았습니다. 여리고성을 일곱 번 돌았을 때 성이 무너졌습니다. 대충 흉내만 내거나 적당히 해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과학보다 더 치밀하고 세밀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조금이라도 못 미치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적당히 혹은 대충 대충하는 면이 있다면 반드시 뜯어 고쳐야 합니다. 안 고치면 평생 고생하고 축복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철저하게 순종하기만 하면 축복은 쏟아지고 차고 넘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무엇도 순종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거역하면 다 잃어버리지만 순종하면 모든 것을 다 얻게 됩니다. 살구나무의 기적은 원망을 그치고 절대 순종하라는 명령입니다. 순종 안 하면 마른나무 그대로 죽어 있는 것입니다. 순종하면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고 살구 열매가 열립니다. 순종하면 건강, 자녀, 물질, 은사, 범사에 다양한 축복의 열매가 열립니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서독)을 공식 방문하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태운 국빈용벤츠 자동차는 속도 무제한 아우토반 고속도로를 시속 160㎞로 달렸습니다. 이것이 그분에게는 큰 충격이었던 모양입니다. 박대통령은 본-쾰른 구간의 아우토반 고속도로를 두 차례나 왕복하면서 중간에 차에서 내려 고속도로의 노면과 중앙분리대 등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고속도로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4년 후 1968년 2월 1일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482㎞ 단군 이래 가장 큰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2년 반이 지난 1970년 7월 7일 드디어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이 열렸고 전국이 1일 생활권 시대가 열렸습니다. 길이 열리자 수출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고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부유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길이 중요합니다. 길이 열리면 다 열리지만 길이 막히면 다 막힙니다. 신앙인에게는 시온의 대로(大路)가 뚫려야 만사형통합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성전이 있는 산인데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짓기 위해 길을 뻥 뚫어버렸습니다. 그 전에는 시온 산에 올라가려 높은 언덕을 기어 올라가야 했습니다. 우리의 새 예루살렘은 하늘에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 성전까지 직통으로 도달하는 시온의 대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열려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길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지금도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길은 누구에게나 알려지고 보여지는 길이 아니고 아무나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자에게 반드시 시온의 대로는 열려 있습니다. 원망을 그치고 순종하면 하나님은 놀라울 정도로 축복하십니다. 순종은 축복의 씨앗이고 비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 모두를 선택하시고 은혜를 주시고 축복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원망을 그치고 순종하고 충성함으로 영육 간에 놀라운 축복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
민 17:8-11 / 김영수 목사(늘찬양교회)
시집살이를 하는 며느리는 열심히 일을 하면서 그 수고를 인정받기 원합니다.
남편이 알아주고, 시부모님이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이렇듯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즉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였다가 미리암이 하나님의 저주로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간절한 중보 기도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고침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라 자손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은 제사장의 직분에 욕심을 내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는 형벌을 받게되는 것을 봅니다. 이런 형벌과 깨달음의 중앙에 아론의 싹난 지팡이의 기적이 있었습니다.
12지파 중 유일하게 레위 지파인 아론의 지팡이에만 움이 트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린 것입니다. 이로써 아론이 대제사장의 직분을 맡아 제사를 수행(隨行)하는 것이 친인척간에 나누어 먹기 식의 제사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이 증명이 되었습니다.
Ⅰ. 하나님의 질서와 영적 권위
하나님의 질서와 영적 권위에 도전하면 망하게 되어있습니다. 고라 백성이 모세와 아론을 거슬려 지도권을 빼앗으려고 비난과 선동을 하였습니다. (민 16:1-20) 고라는 레위의 후손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의 분량을 깨닫지 못하고 대제사장의 직분에 욕심을 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을 반역하는 선두에 서서 진두 지휘를 하였습니다.
특별히 '다단'과 '아비람'과 '온' 등 세 명의 리더들과 함께 아론을 향한 저항을 모의했습니다.(민16:1) 그러더니만 그 반역에 참가한 숫자가 점차 불어서 각 지파의 저명인사 250명이 이들에게 가담하였습니다.(민16:2) 이렇듯 죄는 전염병처럼 한 사람에게서 소수에게, 그리고는 많은 사람에게로 확산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의 표면적인 저항의 이유는 민수기 16장 3절에 있듯이 "...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하며 모세와 아론이 사람들에게 받는 독보적인 권위와 세력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현대식 민주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신정체제에 반역하는 죄악의 행위 입니다. 신정체제는 하나님 중심의 독재체재로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그 앞에 순복하며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라를 비롯한 다단과 아비람, 온이 그리고 250명의 이스라엘 자손의 총회 회원들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봉기(蜂起)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그 결과 고라와 3역은 물론이고 이에 가담한 250명이 다 죽음을 당하는 비극을 맞이하였습니다.(민16:35), 뿐만 아니라 이에 동조한 민중 14,700명도 함께 생명을 잃었습니다.(민16:49)
고라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자그마치 14,950명의 합동장례식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질서와 권위에 도전하면 그 결과는 멸망뿐입니다.
Ⅱ. 아론의 지팡이에 일어난 기적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합동장례식을 치른 후에 12지파에게 "각 자손마다 지팡이를 하나씩 가지고 나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지팡이에 이름을 쓰라고 명하셨습니다. 레위 지파 역시 지팡이를 가지고 나왔고 그 곳에다 아론의 이름을 써 넣었습니다. 모세는 12지팡이를 받아 회막 안 증거궤(법궤)앞에 갖다 놓았습니다.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 안에 들어가 본즉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11족속의 지팡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는데 오직 하나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만은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열매가 열려있었습니다.(민17:8)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유독 아론의 지팡이에만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고 살구열매가 맺도록 역사 하셨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께서는 아론에게 제사장으로서의 권위를 높여주기 위함입니다. 둘째로: 만인들에게 아론의 제사장직이 형제관계로 인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명령과 위임에 의하여 구별되어진 거룩한 직분임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권위와 질서에 대적하거나, 반항하다가 죽음을 당하는 그런 불상사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충성 되이 감당하려는 일꾼들에게 지도자적 권위는 물론 여러 물질과 기타 필요한 것들을 돌보시고 채워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같은 모습은 교회안에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 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인들이 교회의 사정과 어려움에 대하여 나 몰라라 하고 방임하거나, 또는 목회자의 권위에 대항하여 저항하고 반대세력을 펼치려는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가만히 있지 아니하시고 분명하게 심판하신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역이 중단되지 않도록 도와주십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역사는 바울이 선교사로 활동할 때에도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1차 전도여행 때에는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을 때에 지진을 통하여 감옥 문을 열어주셔서 간수장과 그의 가족이 예수를 믿도록 축복해주셨으며, 3차 전도여행 때는 말씀을 듣다 창문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살려주시므로 그의 영적 권위를 높여주셨습니다. 4차 전도여행 때에도 유라굴라 광풍을 만나 겨우 그레데 섬에 목숨을 건져 피난하고 있을 때 독사에게 물렸는데 죽지 않고 건재(健在)하게 하시므로 섬사람들이 바울을 신으로 섬겼으며 추장의 병을 고치므로 모두가 다 안전하게 로마까지 올 수 있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군들을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돌보실 뿐만 아니라. 각 양의 은혜와 축복으로 채워 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이 되어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열매가 맺힘으로 아론이 12지파를 대표하여 대제사장 직분을 맡은 것이 모세나 아론의 자의로 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증거궤 앞에 가져다가 보관하므로 더 이상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반항하지 않게 되었습니다.(벧후3:9)
Ⅲ. 싹난 지팡이에 담긴 영적의미
1. 예수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아론의 지팡이는 뿌리에서 잘리어진 나무인고로 생명을 가진 식물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지팡이에서「새 순이 나고 꽃이 피고 살구 열매가 열렸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석가모니」를 믿는 불교를 포함하여,「모하멧트」를 믿는 이슬람교,「공자」를 믿는 유교 등 다양한 종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타종교에도 부활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포함한 이 땅의 모든 종교 창시자들이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독 우리가 믿는 유일신 하나님 즉 예수님만이 그가 약속하신 대로 무덤에서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물러 계시다가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하늘나라로 올리우심을 받았다 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53절에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은 기독교가 타종교와는 달리 생명의 종교요 소망의 종교요, 영생의 종교임을 분명하게 증거 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주안에는 죽음이 없다는 것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죽은 나무가 지팡이가 싹이 나고 열매가 맺은 증거인 것입니다.
♪ 예수님은 사망권세를 다 이기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찬150장)
2. 믿는 자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본문 8절과 고전15:20,23에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열매가 열렸더라" "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우리들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영이 죽었던 자로 영원한 죽음 가운데 처했던 마른 막대기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참으로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근본적으로 내적인 변화를 받아 생명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생명 있는 성도는 그 삶 속에 움이 돋고 순이 나며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이것이니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하였습니다.
만일 우리 속에 움도 돋지 않고 순도 나지 아니하며 꽃도 피지 아니하면 죽은 나무로 간주하여 열매를 맺기도 전에 베어버리거나 뽑아 버릴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성도들의 삶이 믿지 아니하는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을 본 자가 없되 우리가 서로 사랑하므로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음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하늘나라의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나의 삶에 부활의 역사 거듭남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3. 우리 모두를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루 밤사이에 마른 지팡이에서 싹이 나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심으로 너희를 부르신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시므로 이들을 격려 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다귀에 생기를 불어넣어 군대를 만드신 하나님,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사 갈멜산 제단 위에 불을 내리시고, 홍해바다를 가르신 하나님, 반석에서 생수를 솟게 하신 하나님,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눈동자처럼 지켜주시사 평탄하고 안전한 길 승리의 길 영광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힘있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찬송가 497장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의 찬송을 함께 불러보겠습니다.
1절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 어디든지 예수 함께 가려네 예수 함께 아니 가면 낙 없고 항상 예수 함께 가면 겁없네 어디를 가든지 겁낼 것 없네 어디든지 예수 함께 가려네"
4.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자는 높이신다는 의미입니다.
본문 10절에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고라 일당의 제사장직 도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의 교만을 제어하기 위한 조처인 동시에 당신의 뜻에 철저히 순복하고 주를 섬기며 따르는 자들에게는 과거의 잘못을 다 용서하여 주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더욱 주님의 영광을 높이는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실제로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였던 미리암과, 주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주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옥에다 가두고 살인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울을 문둥 병자와 눈먼 자로 각자 만드셨지만 저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섰을 때 하나님은 미리암의 문둥병을 깨끗하게 고쳐주시고 여 선지자로 세우셨으며, 또한 사울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시며 사도 바울로 세우사 세계선교를 감당하는 훌륭한 복음 증거자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주위에서 교회를 핍박하고 욕하며 저주하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그가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언제든지 주님은 각양 은사와 능력을 베풀어 주셔서 그를 귀한 일꾼으로 사명자로 세워 주실 것입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가문을 제사장의 가문으로 택하셨음을 입증하기 위해, 이스라엘 12지파의 지팡이 가운데 유독 아론의 지팡이에만 움과 순을 돋우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도록 하는 이적을 베푸셨습니다.(8절) 곧 죽은 나무를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기적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을 직접 택하시되, 그에게 생명력 넘치는 능력과 사명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일꾼 삼기 전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었습니까? 정말 별 볼일 없는 하챦은 우리의 존재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움 받은 후 하나님께서는 일에 알 맞는 은사와 능력과 권능을 베풀어 주셔서 능히 감당케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미디안 광야의 모세와 아론이 그러했고, 갈릴리 호수의 시몬 베드로가 그러했으며 다메섹 도상의 사도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를 돌보는 목사님들과 성도님들에게 동일한 은혜와 능력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교회성장과 나의 내적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악한 권세 마귀를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물리치고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