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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3일 오늘의 역사
2024년 일본 민간 우주로켓 발사 5초만에 폭발 사고
2020년 트럼프 미대통령 코로나19 미국전역으로 확산되자 국가비상사태선언
2016년 이세돌 9단 인공지능 바둑시스템 알파고에 3연패 끝에 1승
2016년 터키 앙카라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하여 34명이 사망하고 125명이 부상
2013년 교황 프란치스코가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됨
2011년 60~70년대 가요계 이끌던 손진석 대표 별세
1960~80년대 신인 발굴의 귀재로 통했던 가요계 거목인 오아시스레코드사 손진석(83·孫晋奭) 대표가 13일 오전 9시 40분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별세했다.
경기도 안양의 오아시스레코드는 1960~70년대 지구레코드와 함께 한국의 대표적 음반사였다. 신생 회사들의 위협을 받기는 했지만 80년대까지도 여전히 대형 음반사로 통했고, 사세(社勢)는 많이 위축됐지만 요즘도 여전히 음반을 낸다.
서울사대 영문과 출신으로 학생회장까지 맡았던 고인은 졸업 후 무역회사를 운영하다가 1958년 오아시스레코드를 인수해 음반업계에 뛰어들었다. 이후 수많은 히트 음반을 제작하며 '가요계 큰손'으로 통했다. 총 2500여종의 국내 음반과 1500여종의 해외 라이선스 음반을 만들었다. 타계 직전까지도 현업에서 뛰며 대중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려 노력했다.
그는 나훈아·남진을 비롯, 조미미· 이수미· 방지연· 김세레나· 송대관· 이용복· 조영남· 김상희· 펄시스터즈, 설운도등을 발굴한 것도 그였다
2008년 삼성 특검
이학수 부회장은 한남동 삼성특검에 변호인과 함께 출석해 피의자 신분으로 오후 2시에서 새벽 1시 30분까지 조사를 받았다.
특검 수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 등 e삼성 사건의 피고발인 28명 전원에 대해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김용철 변호사는 MBC와의 전화 통화에서 "(김성호 국정원장 내정자가) "학수형에게 말하면 술값을 줄 것이라고 자신에게 말했었다"고 밝히고 "한 번에 건네진 돈은 5백만 원 정도"라고 말했다
2006년 김유림, 세계 주니어 빙속 종합1위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유망주’ 김유림(16·의정부여고)이 13일(한국 시각) 독일 엘푸르트에서 막을 내린 2006 세계주니어선수권에서 여자 종합 1위에 올랐다.
김유림은 이날 마지막 3000m 경주에서 4분23초44의 기록으로 13위에 그쳤지만, 전날까지 세 종목(500m, 1000m, 1500m)의 금메달을 휩쓸며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여자 스피드스케이팅이 세계 주니어 무대를 제패한 것은 이번이 처음. 지난해 이상화(휘경여고)가 같은 대회 500m에서 우승했지만 종합 순위는 3위에 그쳤다. 남자부에서도 70년대 한국 빙상의 ‘간판 스타’ 이영하가 1976년 이탈리아 세계주니어선수권을 우승한 것이 유일하다.
2002년 보아(BoA) 앨범 ‘Listen to my Heart’ 일본 음반판매 1위
10대 댄스가수 보아(BoA·본명 권보아·16)가 13일 일본서 발매한 앨범 ‘내 마음에 귀 기울여 봐(Listen To My Heart)’ 로 일본 오리콘 차트 1위를 차지하며 일본 최고 인기 가수 아무로 나미에의 앨범 ‘러브 인핸스드(Love Enhanced)’ 를 2위로 따돌렸다.
오리콘 차트는 음반 판매량으로 집계되는 ‘일본의 빌보드차트’ 로, 한국 가수가 1위에 오르기는 보아가 처음이다.
지난해 5월부터 일본서 활동하고 있는 보아는 그간 싱글 앨범을 4개 발표, 모두 오리콘 차트 20위권에 올려놓았다. 2000년 8월 14세 나이로 국내 데뷔한 보아는 SM엔터테인먼트가 아시아 시장을 겨냥해 키운 가수로, 국내에서는 ‘ID:Peace B’, ‘사라’ 등을 히트시켰다.
2002년 국내 복권 사상 최고액인 55억원 복권 당첨
국내 복권 사상 최고액인 55억원의 복권 당첨자가 나왔다.
한국지방재정공제회는 13일 공제회가 운영하는 제1회 슈퍼코리아 연합복권 추첨에서 인천에 사는 P(41·음향기기 판매업)씨가 1등(30억원) 1장과 2등(각 10억원) 2장, 3등(5억원) 1장 등 5장이 한꺼번에 당첨돼 모두 55억원을 타게 됐다고 밝혔다. P씨는 발매가 시작된 작년 12월과 올해 2월 두 차례에 걸쳐 장당 3000원짜리 복권 30장을 인터넷으로 구입했다. 이 복권에서 한 사람이 탈 수 있는 최대 당첨금은 60억원. 남은 3등(5억원) 1장은 전남 광주에 사는 J(30)씨에게 돌아갔다.
이 복권은 지방자치단체의 재정 마련을 위해 16개 시·도가 연합해 작년 12월 10일 만들었다. 한번에 복권 2000만장을 발행해 4개월에 한번씩 추첨을 한다.
이날 오전 서울 마포구 지방공제회 사무실에서 당첨금을 전달받은 P씨는 “이제야 실감이 난다”며 “지난 11일 전화로 당첨소식을 들었을 때는 장난인 줄 알고 ‘농담하지 말라’고 대꾸했었다”고 말했다. P씨가 이날 받은 돈은 소득세 20%와 주민세 2%를 제외한 42억9000만원이다.
P씨는 15년 전부터 틈틈이 각종 복권을 사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기록한 최고 당첨액은 1000원. P씨는 복권을 사게 된 계기에 대해 “당시 판매되는 복권 중에서 당첨금액이 60억원으로 가장 컸고 1억원짜리도 100명이나 돼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며 “복권을 살 때 특별한 꿈은 꾸지 않았지만 당첨될 것이라는 믿음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첨금으로 빚을 갚은 뒤 자그마한 집부터 마련할 계획이라고 했다. 4년 전 IMF 때 사업 실패로 월세집에서 부인·아들·딸 등 가족과 함께 어렵게 생활해 왔다는 것. 소년소녀가장이나 무의탁 노인 돕기 등 사회사업에도 나설 예정이다. P씨는 “얼마 전 한 재미교포가 200억원대의 복권에 당첨됐다가 파산했다는 보도를 기억하고 있다”며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체계적으로 돈을 쓰겠다”고 말했다.
2002년 `한국의 슈바이처` 문창모 박사 별세
2001년 아펜젤러 타입캡슐 69년 만에 개봉
1932년 배재학당 주춧돌 밑에 묻었던 타입캡슐이 69년 만에 개봉됐다. 2001년 2월 9일 철거된 배재학당 주춧돌 밑에서 발견, 이날 개봉한 청동제 함에는 110년 전 사용하던 동전 100냥, 신약전서와 찬송가 합본 1권, 1900년대 초기에 통용되던 10엔 일본 금화, 1932년 10월 배재학당 대강당 건축 당시의 이사-졸업생-재학생 대표 명부, 배재학당 학칙, 생도 수첩, 1932년 10월 22일자 동아일보가 들어 있었다.
감리교 관계자들은 당초 “주춧돌을 놓으면서 그 아래 성경, 서적, 계약서 사본, 동전 등을 넣은 함을 묻었다”는 아펜젤러의 일기(1887년 8월 6일)에 따라 이 함이 아펜젤러가 묻은 것으로 추정했었다.
그러나 가로 28.5cm 세로 16.5cm 높이 10cm의 함은 개봉 결과 내용물로 보아 1932년 10월 대강당 준공 때 만들어진 것으로 판명됐다. 또 동전 꾸러미에 ‘첫 건물 준공 당시의 동전’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는 점으로 미루어 1887년 묻은 함은 1932년에 개봉되고 그 내용물 중 일부를 새 함에 넣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2000년 조선일보 주최 `세기를 넘어서-21세기 한민족 대항해 시대`전 개막
조선일보 창간 80주년 특별기획 `세기를 넘어서-21세기 한민족 대항해 시대` 전시회가 2000년 3월 13일 서울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서 개막됐다. 이날 오후 개막행사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축사를 통해 "조선일보가 참으로 선각자적인 시각으로 20세기를 둘러보고 21세기를 조망하는 전시회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개막행사에는 박준규 국회의장, 문용린 교육부 장관,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 이항규 해양수산부 장관 등이 참석했다. 전시회는 `지도를 거꾸로 보면 한국의 진로가 보인다`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지난 100년을 돌아보고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3000여점의 영상-사진-실물 등의 자료가 전시되었다. 4월 28일까지 46일간 열렸으며 관람객 수는 약 9만여명에 달했다.
1999년 삼성의료원 명예원장 한용철씨 별세
한용철(70) 삼성의료원 명예원장이 1999년 3월 13일 삼성서울병원에서 폐암으로 별세했다. 한 원장은 국내 의학계에서 호흡기학을 처음으로 만들어 한국 의학 수준을 한단계 높인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미국 미네소타 의대를 2년 간 연수한 뒤 1961년 귀국, 내과학에 통합되어온 호흡기 내과학을 분리해 별도의 학문으로 발전시켰다. 한 원장은 1956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 1962년 서울대 의대 전임강사를 시작으로 30여년 간 서울대 의대에서 진료와 교육에 헌신했다. 1986년부터 4년 간 두차례에 걸쳐 서울대병원장을 역임했으며, 재직 중 호흡기 질환의 대표적 명의로 꼽혔다.
1967년 대한결핵협회 이사로 발을 들여놓은 뒤 1983년부터 지금까지 결핵협회 회장을 맡아왔으며, 한국심장재단 이사장, 한국금연운동협의회 부회장, 대한노인병학회 명예회장 등을 역임했다. 1994년 삼성의료원장으로 자리를 옮겨 의료경영자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받았다.
1998년 주한미군사령부, 미8군을 육군구성군사령부(ASCC)로 개편
미8군이 육군구성군사령부(ASCC)로 개편됐다.
주한미군사령부는 13일 미8군을 육군구성군사령부로 개편, 이날 오후 용산 나이트필드 연병장에서 창설 기념식을 가졌다.
육군구성군사령부는 전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그동안 미8군이 담당해 온 병력 및 군수 지원 업무에 새로운 작전 임무가 추가돼 향후 대북 전쟁 억제력이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개편은 걸프전 이후 미 육군의 교리발전 계획에 따른 것으로 미국은 이미 지난 해 본토에 있는 3군을 ASCC로 개편했으며 유럽에 있는 7군도 ASCC로 개편하는 작업을 추진중이다.
미8군 참모장 스탠리 E 그린 대령은 이날 “ASCC의 창설에 따라 새로운 병력이 증가하거나 기존의 기휘관계 등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며 “그러나 주한미군사령관 및 한미연합사령관은 평시 및 전시에 다양한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된다” 고 밝혔다.
그러나 이에 대해 우리군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향후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바뀌어 한미연합사가 해체될 것에 대비해 미국이 한반도에서의 역할을 증대시키기위한 사전 포석” 이라는 분석도 제기되었다.
1996년 폴란드 영화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사망
1993년 인도 뭄바이 연쇄 폭발사건
1992년 터키, 강도 6.2의 강진으로 3천~5천명 사망
1990년 아이티 임시정부, 여성대통령 에르타파스칼 트루이요 취임
1986년 우주비행사 레오니드 키짐과 블라디미르 솔로비예프, 미르호에 도착
1986년 최은희-신상옥 부부 서방으로 탈출
1978년 1월과 7월에 홍콩에서 각각 납북돼 북한과 동구국가들에서 영화제작 활동을 해오던 최은희-신상옥 부부가 1986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미국대사관을 통해 극적인 탈출에 성공했다. 이들은 2월 14일~15일 양일간 서베를린에서 열린 베를린영화제에 참석한 후 파리를 거쳐 3월 12일 빈으로 와 하룻밤을 지낸 후 일본 교토통신 기자와 식사를 한다며 북한 감시원을 따돌리고 탈출했다.
최-신 부부는 탈출 후 미국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의 정치-사회-문화 현실을 낱낱이 폭로, 세상을 또 한번 놀라게 했다. 신씨는 그동안 두번이나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해 제6형무소에 4년간 수감생활을 했다고 폭로했다. 이들 부부는 미국에서 체류하다 1989년 5월 11년 만에 귀국했다.
귀국 당시 이들은 북한에서 ‘신필름영화촬영소’ 총장과 부총장을 지내는 등 반국가단체간부로 지도적 임무에 종사했으며 ‘탈출기’ ‘소금’등 북한체제를 찬양 선전하는 영화 20편을 제작한 것과 관련, 국가보안법상 찬양 고무 동조(7조1항) 유언비어 날조유포(34조1항) 등의 위반혐의로 불구속 입건됐으나, 북한공작원에 의해 강제로 납치당해 북한에서 강압에 못이겨 활동해온 점을 인정, 불기소 처리됐다.
1982년 충주 다목적댐 착공
1981년 광업진흥공사, 강원도 영월서 국내최대 몰디브덴 광맥 발견
1981년 국무회의, 노동청을 노동부로 승격
1979년 대법원, 근로자의 법정시간외 근무거부는 태업아니다 판시.
1979년 EC수뇌회담, 유럽신통화제도(EMS)발표
1979년 그레나다 무혈쿠데타, 새정권 수립
1976년 최규하 제12대 국무총리 임명
1976년 베트남 대규모 관개공사
1976년 해운항만청 발족
1974년 서울 고려대 앞서 우리나라 첫 나체질주자 등장
1973년 노동3법 공포, 발효
1971년 서울~부산간 자동전화 개통
1969년 문공부, 문화상 일원화 결정
1969년 남산 제1호 지하터널 기공
서울 중구 필동과 용산구 한남동을 잇는 1530미터 길이의 남산 1호 터널이 1969년 3월13일 기공됐다. 사직터널(1967.5.30 완공)이 있었지만 도심을 가로지르는 대규모 터널로서는 처음이었다. 15억6000만원의 공사비를 투입해 1년 5개월 만인 이듬해 8월15일 완공됐다.
폭은 10.3미터로 가변 3차선. 당초에는 터널 중간지점 3미터 밑으로 남산 2호터널이 지나는 지점에 유사시 서울시민의 대피소로 사용할 목적으로 7000평 규모의 광장을 설치할 계획이었으나 공사비 부담으로 취소됐다. 공사비를 회수하기 위한 통행료는 오토바이 30원, 삼륜차ㆍ승용차는 60원, 버스ㆍ트럭은 90원, 대형특수차량은 120원으로 책정했다.
터널 개통과 함께 퇴계로에서 서울역을 넘어 중림동을 잇는 고가도로도 개통돼 도심통행이 원할해졌다. 남산1호 터널부터 불기 시작한 터널 바람은 남산2호 터널(1970.12.4 완공) 삼청터널(1970.12.30 완공) 북악터널(1971.9.10 완공) 남산3호터널(1978.3.31) 등으로 이어졌다.
1962년 서울시 초등학교 휴교
1959년 박태선 장로교 신자, 법정 난입
1959년 3월 13일 서울지법 형사사건 재판정 주변에 박태선 장로교도 수백명이 몰려들어 재판 시작 전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이 날은 자칭 `하나님의 사자이고 동방의 감람나무`라며 전국적으로 수많은 신도를 거느리고 있던 박태선 장로가 사기, 위증, 상해혐의로 구속기소돼 1심 선고 공판이 열리는 날이었다.
구형량은 5년이었으나 징역 2년6개월형 판결이 선고됐다. 이에 흥분한 신도들이 법정에 난입, 법원 관계관들을 폭행하는 등 법정은 난장판이 됐다. 경찰이 투입돼 이중 63명을 연행, 5명을 구속하고 38명은 직결재판에 회부됐다.
박장로는 12월 4일 대법원에서도 1년6개월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원래 크리스찬인 박장로는 일본 도쿄고등공업부속학교를 다니다 광복이 되자 귀국, 서울 원효로에서 조그만 철문점을 경영하다가 1952년부터 `북`과 `천막교회`로 상징되는 그의 전도사업을 시작해 교세를 질풍처럼 확장했다
1958년 미국-영국-프랑스 정상회담
1956년 한국과 스칸디나비아3국, 메디컬센터 건립 협정 조인
1954년 월맹군, 디엔비엔푸 공격 개시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 덕분에 승전국이 됐지만 여전히 식민지 침공을 포기하지 못했다. 1946년 11월, 프랑스는 옛 식민지 베트남을 재차 침공했다. 주로 용병들고 구성된 프랑스군을 맞이한 것은 호치민의 월맹(베트민)군이었다.
1949년 6월, 프랑스는 해외에 망명 중인 응우옌 왕조의 바오다이 황제를 주석으로 한 친프랑스 정부를 세웠다. 전쟁이 장기화됐고 전황은 점차 프랑스군에 불리해졌다. 1953년 11월, 프랑스군 총사령관 앙리 나바르는 라오스로 연결된 월맹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1만 6,000명의 외인부대를 동원해 라오스 국경의 디엔비엔푸를 점령하고 요새를 건설했다. 디엔비엔푸는 주변에 험준한 산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에 월맹군이 중화기를 가지고 진입해 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하지만 월맹군이 이끄는 보구엔지압(武元甲)은 4만 명의 병력으로 터널을 뚫고 요새 벽까지 접근했으며 대포를 분해해서 등에 진 채 인해전술로 산을 넘었다. 1954년 3월 13일, 월맹군이 디엔비엔푸에 공격을 개시했다. 월맹군의 계속된 공격으로 곧 프랑스군의 활주로는 파괴됐으며 프랑스군은 보급을 공중투하에 의존해야만 했다.
결국 1954년 5월 7일 인도차이나전쟁의 종결을 토의하는 제네바회담 도중 인도차이나에 있는 프랑스군의 거점, 디엔비엔푸가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함락됐다. 56일간에 걸친 전투가 끝난 것이다.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라고 쓰여진 월맹군의 군기가 포연 가득한 디엔비엔푸 계곡에 펄럭였다. 디엔비엔푸에 포격을 개시한 이후 프랑스군 지역을 차츰 점령해 나가던 월맹군은 전술을 바꿔 참호를 파나가면서 서서히 프랑스군 거점에 접근했고 함락 전날인 6일, 네번째 공격에서 백병전을 통해 최후의 거점 이자벨을 점거해 승기를 붙잡았은 것이다.
이 전투로 프랑스군은 6,000명의 사상자가 생기고 1만 명이 포로가 됐으며, 월맹군도 8,000명이 전사하고 부상자가 1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 전투를 끝으로 프랑스의 100년간에 걸친 인도차이나 지배도 종지부를 찍었다.
1954년 국가보안위원회(KGB)가 세워졌다
1950년 국회, 내각책임제 개헌안 부결
한민당이 한국헌정사상 처음 국회에 제출한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부결됐다. 개헌안은 1950년 3월 13일 국회본회의에서 한민당과 여당인 국민회가 난투극까지 벌여가며 표결에 부쳤으나 재적의원 179명 중 가 79, 부 33, 기권 66, 무효 1표로 재적 3분의 2가 미달되어 부결됐다.
한민당은 1948년 제헌의회 총선 승리와 이승만 정권 수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으나 1차 내각구성에서 완전히 소외되자 反이승만 투쟁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서상일 의원 등 한민당 소속의원 28명은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정부수립후 처음 제출된 이 1차 개헌안은 1.순수내각책임제 구현 2.법령의 위헌여부 심판을 위한 특별법원 설치 등을 담고 있어 이승만 대통령의 차기집권을 봉쇄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1946년 함흥 학생반공의거
1946년 조선문필가협회 결성
1944년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순국
여성 독립운동가이자 여성 계몽가인 김마리아 선생이 1944년 3월 13일 옥중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선생은 1892년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난 뒤 1913년 일본으로 유학, 일본 유학생들이 조국 광복을 위해 독립선언한 2·8독립선언 대회에 참여했다.
2·8독립선언 후 국내로 잠입한 선생은 전국을 돌며 독립운동을 역설하다 3·1운동 후 배후 지도자로 체포, 서대문 감옥에 이감됐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됐다. 선생은 출감 후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조직을 확대하고 임시정부 군자금 지원 등 활발한 활동을 했으나 조직원 배신으로 일경에 체포돼 3년형을 언도받았다. 옥중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 때문에 병보석으로 풀려난 선생은 1921년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 대한애국부인회 대표로 국민대표 회의에 참석해 조국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이어 1923년엔 미국으로 망명해 여성독립 및 항일 투쟁을 벌였으며 1933년 귀국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1944년 순국했다. 국가보훈처는 선생을 1998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940년 독립운동가 이동녕 선생 사망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과 초대 의정원 의장을 역임한 석오 이동녕 선생이 1940년 3월 13일 사망했다.
충남 천안시 목천면에서 태어난 선생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결사대를 조직, 대한문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이는 등 일제 침략행위를 규탄하는 민족운동을 벌였다. 그후 북간도 용정으로 이주한 선생은 서전서숙을 설립, 독립운동가 양성에 나섰다가 1907년 귀국, 신민회를 결성해 총서기로 활동했다.
1914년엔 대한광복군 정부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을 계획했으며, 1919년 2월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선생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 의정원 초대의장을 맡아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 역할을 했고 국무총리, 대통령 직무대리, 주석 등을 역임하면서 20여년 동안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국가보훈처는 선생을 2000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938년 독일-오스트리아 합병
1938년 오스트리아 재벌 로스차일드, 나치에 체포
1938년 3월13일, 유럽최고의 유태인 명가(名家)를 자랑하는 로스차일드가(家)의 오스트리아 빈(Wien) 저택에 나치 친위대가 들이닥쳐 루이 폰 로스차일드 남작을 연행했다.
이날은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강제병합한 날. 히틀러가 이 가문을 겨냥한 것은 재산이 많은 유태인이기 때문이었지만 이 가문이 미술품과 유물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점도 작용했다. 히틀러의 군화발이 닿는 곳은 언제나 문화재 약탈도 뒤따랐다. 유태인이 주로 표적이었지만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은 프랑스였다. 히틀러는 100년전 나폴레옹이 빼앗아간 게르만 민족의 미술품을 되찾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의 또 다른 꿈 총통미술관 건립을 실현하려 했다.
히틀러가 11세때부터 18세까지의 청소년기를 보냈던 오스트리아 린츠가 후보지. 로스차일드 남작은 상당수의 재산을 이미 영국으로 빼돌려 재산상의 큰 피해는 피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소장품은 고스란히 히틀러 손에 넘겨져 총통미술관으로 보내졌다.
로스차일드가를 명문가로 일군 사람은 18세기 중엽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태인 거주지역 게토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한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였다. 프랑크푸르트, 런던, 파리, 빈, 나폴리 등으로 건너간 다섯아들도 현지에서 막대한 부를 쌓아가며 세계를 쥐락펴락했다.
이 가문의 성장사는 유럽의 근ㆍ현대사와 맥을 같이한다. 나폴레옹, 웰링턴, 메테르니히, 합스부르크, 히틀러 등이 유럽역사의 전면을 장식했다면 배후에는 로스차일드가가 얽혀있었다. `밸푸어선언`(1917년)을 이끌어내 유태민족 1900년 유랑의 한을 풀어준 것도, 이스라엘 건국시 재정적으로 후원한 것도 로스차일드가였다.
1926년 런던-남아프리카 비행성공
1923년 뉴욕서 발성영화 첫상영
1917년 독일의 세균학자 베링 사망
1915년 러시아 제국 헌법에 따라 임명된 초대 총리 비테 사망
1913년 호주, 캔버라를 연방수도로 공식 결정
1908년 우표-엽서 자동판매기 파리에 등장
1901년 종교인.사회운동가 함석헌 출생
1901년 미국 제23대 대통령 해리슨 사망
1891년 프랑스의 시인 방빌 사망
1890년 사상가 유영모 출생
인도의 간디와 견줄만한 `큰 사상가`로 평가받는 다석 유영모 선생이 1890년 3월 13일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유교 불교를 섭렵했지만, 1905년 YMCA에서 행한 명사들의 강연을 들으러 다니다 초대 YMCA 총무 김정식의 인도로 연동교회에 나간 것이 계기가 되어 그리스도교에 입교했다.
1910~1912년 오산학교 교사가 되었으며, 이것이 오산학교가 기독교학교가 되는 시발이 되었다. 1912년 일본의 도쿄 물리학교에 입학했다가 귀국했으며, 1921년 오산학교 교장으로 1년 재직했다. 유명모는 평생 나서기를 꺼리며 수도와 교육에만 힘쓴 `은둔자`로 살았기에 그의 사상은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함석헌 김교신의 스승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서른 여덟살이던 1928년부터 YMCA 연경반을 지도하며 가르침에 나섰다. 35년간 계속된 이 강좌를 통해 기독교와 불교, 유교, 노장사상 등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을 아우르는 독특한 사유체계를 이룩했다. 그는 새벽이면 일어나 책상 앞에 꿇어앉아 고전을 읽고 명상하면서 떠오른 바를 일지에 적었다.
그는 그리스도교에 입교한 후 7년 동안 교회주의 정통 신앙인으로 살다가 비정통신앙인으로 전향했다. 톨스토이의 저서를 통한 신앙의 영향과 아울러 불교 경전과 노자의 `도덕경`을 읽은 때문으로 알려졌다. 그는 톨스토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1883년 이탈리아 작곡가 토셀리 사망
1882년 독일 경제학자 슈미트 출생
1848년 독일 3월혁명 발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시작된 시민폭동이 기폭제가 되어 독일 3월혁명이 일어났다.
1848년 3월 13일 반동적인 `빈체제`의 중심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폭동이 일어났다. 이른바 독일 3월 혁명의 시작이었다. 2월에 발발한 프랑스 2월 혁명에 영향받아 일어난 이 시민 봉기는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독일 전역으로 파급돼 독일 3월 혁명의 기폭제가 됐다.
사태를 수습하지 못한 재상 메테르니히는 런던으로 망명했고, 황제는 출판의 자유를 인정하고 헌법제정을 약속해야 했다. 혁명의 영향으로 오스트리아 제국 영역 안에 있던 헝가리 체코 북이탈리아 등지에서도 민족주의 운동이 일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와 함께 독일의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던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에서도 3월 18일 혁명이 발발, 국왕은 자유주의적 내각구성을 허락하고, 헌법 제정과 의회소집을 약속했다.
그러나 독일 통일의 범위를 놓고 오스트리아 중심의 대독일주의와 프로이센 중심의 소독일주의로 분열하는 동안 수구파에 의한 반혁명이 진행돼 6월에는 체코와 북이탈리아의 민족운동이 진압됐고, 10월에는 빈에서도 혁명세력이 와해됐다. 결국 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1828년 `일본도덕론`(1887)을 저술한 니시무라 시게키 출생
1781년 영국 천문학자 허셀 천왕성 발견
1623년 인조반정
1623년 (광해군 15) 3월13일 이귀 등 서인 일파가 무력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패위 시키고 집권당인 이이첨 등을 몰아내고 능양군을 왕으로 옹립했다.
능양군은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정원군(定遠君)의 아들로서, 조선의 제16대 왕인 인조(1623~1649)다.
능양군과 서인 일파는 여러 차례 역모사건을 조작해 정적을 제거한 대북파
이이첨, 정인홍, 등 수십 명을 사형하고 200여 명을 귀양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