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염화실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 좋은글(스크랩)모음 스크랩 영어 공부와 불서 읽기의 묘미 - 불기 2558년(2014년) 6월 12일 후기/달라이 라마 스님의 The Art of Happiness (6)
관문 추천 1 조회 57 14.06.14 03:15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영어 공부와 불서 읽기의 묘미 - 불기 2558년(2014년) 6월 12일 후기

                                     달라이 라마 스님의 The Art of Happiness (6)

 

서울경기강원지역방 2945번 글 http://cafe.daum.net/altlovebuddha/PEK/2945

의 후속타입니다.

 

영어 공부와 불서 읽기의 묘미 6월 12일 후기.hwp

 

<달라이 라마 스님의 The Art of Happiness>를 여섯 번째로 읽었습니다. 오늘 불서읽기에는 효주 법우, 루카 법우, 저 관문 이렇게 3명이 참석했습니다.

오늘도 지난번에 모였던 장소 ‘Cafe 57th’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곳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나와 80 미터 가량 직진하신 후 풍문여고를 오른 쪽에 끼고 돌아서 약 60 미터 가면 보이는 곳입니다. 모이는 때는 매주 목요일 오후 7시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교재 <The Dalai Lama and Howard C. Cutler, The Art of Happiness> Part I The Purpose of Life: Chapter 4 Reclaiming Our Innate State of Happiness 를 끝까지 읽었습니다. 이렇게 제1부를 다 읽었습니다. 관문이 가지고 있는 책으로 55페이지 5째 줄부터 64페이지 끝까지입니다.

 

<달라이 라마 스님의 The Art of Happiness>를 읽는 동안의 후기는 영어와 저희가 시도해 본 번역을 올리겠습니다. 번역본으로 <달라이 라마 & 하워드 커틀러/류시화 옮김,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 김영사> 를 가끔씩 참고하겠습니다.

 

Part I The Purpose of Life

제1부 인생의 목적

 

CHAPTER 4 Reclaiming Our Innate State of Happiness

제4장 우리 본래의 행복한 상태를 되찾기

 

“So, although aggression can occur, I believe that these conflicts aren’t necessarily because of human nature but rather a result of the human intellect ? unbalanced human intelligence, misuse of our intelligence, our imaginative faculty. Now in looking at human evolution, I think that compared to some other animals’, our physical body may have been very weak. But because of the development of human intelligence, we were able to use many instruments and discover many methods to conquer adverse environmental conditions.

“공격적인 마음이 일어날 수는 있지만, 이런 갈등은 반드시 인간성 때문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지능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불균형한 인간의 지성, 우리 지성의 오용(誤用), 우리의 상상력 등이 그것이지요. 이제 인간의 진화를 살펴볼 때, 다른 동물과 비교해서 우리 인간의 신체는 매우 약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능이 발달함에 따라서, 우리는 적대적인 환경 조건을 정복하기 위해 많은 도구를 사용하고 많은 방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As human society and environmental conditions gradually became more complex, this required a greater and greater role of our intelligence and cognitive ability to meet the ever-increasing demands of this complex environment. So, I believe that our underlying or fundamental nature is gentleness, and intelligence is a later development. And I think that if that human ability, that human intelligence, develops in an unbalanced way, without being properly counterbalanced with compassion, then it can become destructive. It can lead to disaster.

“인간 사회와 환경 조건이 점점 더 복잡해짐에 따라서, 이 복잡한 환경의 끊임없이 늘어나는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우리의 지능과 인식 능력이 더욱 더 커져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혹은 기초적인 본성은 온순함이고, 지능은 나중에 발전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인간의 능력, 인간의 지능이 자비와 적절히 균형 잡히지 않고 불균형하게 발달하면, 그것은 파괴적일 수 있지요. 재앙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But, I think it’s important to recognize that if human conflicts are created by misuse of human intelligence, we can also utilize our intelligence to find ways and means to overcome these conflicts. When human intelligence and human goodness or affection are used together, all human actions become constructive. When we combine a warm heart with knowledge and education, we can learn to respect others’ views and others’ rights. This becomes the basis of a spirit of reconciliation that can be used to overcome aggression and resolve our conflicts.”

“그러나 이렇게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만일 인간의 갈등이 인간의 지능을 잘못 사용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면, 이러한 갈등을 극복할 방법과 수단을 찾는 데 우리의 지능을 활용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인간의 지능과 인간의 선함 또는 사랑이 함께 사용되면, 모든 인간의 행동은 건설적으로 됩니다. 우리가 따뜻한 마음을 지식 교육과 결합하면, 다른 사람들의 견해와 권리를 존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공격성을 극복하고 갈등을 해결하는 데 유용한 화해 정신의 토대가 됩니다.”

 

The Dalai Lama paused and glanced at his watch. “So,” he concluded, “no matter how much violence or how many bad things we have to go through, I believe that the ultimate solution to our conflicts, both internal and external, lies in returning to our basic or underlying human nature, which is gentle and compassionate.”

존자님은 잠시 말을 멈추고 손목시계를 흘끗 보았다. 존자님은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많은 폭력 또는 나쁜 일을 겪는다 하더라도, 내적이건 외적이건 간에, 우리의 갈등을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부드럽고 자비로운 우리의 기본적인 혹은 근본적인 인간 본성으로 돌아가는 데 있다고 믿습니다.”

 

Looking again at his watch, he began to laugh in a friendly way. “So . . . we’ll stop here . . . it’s been a long day!” He gathered up his shoes which he had slipped off during our conversation and retired to his room.

시계를 다시 보시면서 존자님은 다정한 미소를 지어보이기 시작했다. “자 . . . 여기서 그만마쳐야 하겠군요. . .오늘은 긴 하루였습니다!” 존자님은 우리의 대화 동안에 벗어놓았던 신을 집어 들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The Question of Human Nature

인간 본성의 문제

 

Over the past few decades, the Dalai Lama’s view of the underlying compassionate nature of human beings seems to be slowly gaining ground in the West, although it has been a struggle. The notion that human behavior is essentially egoistic, that fundamentally we are all out for ourselves, is deeply ingrained in Western thought. The idea that not only are we inherently selfish but aggression and hostility are part of basic human nature has dominated our culture for centuries.

지난 2, 30년 동안에, 달라이 라마 존자님의 인간의 근본적인 자비로운 본성에 대한 견해는 물론 반대 의견이 있기도 하지만, 서서히 서양에서 지지를 받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의 행동이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라는, 우리는 근본적으로 모두 자기 일만 생각하고 있다는 관념이 서양 사상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 우리는 본래 이기적일뿐만 아니라 공격성과 적대감이 우리의 기본적 본성이라는 생각이 수 백 년 동안 서양 문화를 지배해 왔다.

 

Of course, historically there were plenty of people with the opposite view. For instance, in the mid-1700s David Hume wrote a lot about the “natural benevolence” of human beings. And a century later, even Charles Darwin himself attributed an “instinct of sympathy” to our species.

물론, 역사상으로 볼 때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예를 들면, 1700년대 중반의 데이비드 흄은 인간의 “자연적인 자비심”에 대해 많은 글을 썼다. 한 100년 후에, 찰스 다윈조차도 “동정의 본능”을 우리 인류의 본성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But for some reason the more pessimistic view of humanity has taken root in our culture, at least since the seventeenth century, under the influence of philosophers like Thomas Hobbes, who had a pretty dark view of the human species. He saw the human race as being violent, competitive, in continual conflict, and concerned only with self-interest. Hobbes, who was famous for discounting any notion of basic human kindness, was once caught giving money to a beggar on the street. When questioned about this generous impulse, he claimed, “I’m not doing this to help him. I’m just doing this to relieve my own distress at seeing the man’s poverty.”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인간성에 대한 비관적인 견해가, 적어도 17세기 이후, 서양 문화에 뿌리내렸다. 인간에 대해 매우 어두운 견해를 가졌던 토마스 홉스와 같은 철학자들의 영향이 강했던 것이다. 홉스는 인간을 사납고, 경쟁을 좋아하고, 끊임없이 투쟁하고, 오직 자기 이익에만 관심을 가진다고 보았다. 그는 기본적인 인간의 친절이라는 관념을 도외시한 것으로 유명한데, 한 번은 거리에서 거지에게 돈을 주는 것이 발각되었다. 이 자비로운 돌출 행동에 대해 질문을 하자,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나는 거지를 도우려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 사람의 가난을 보아야 하는 내 자신의 고뇌(苦惱)를 없애려고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Similarly, in the earlier part of this century, the Spanish-born philosopher George Santayana wrote that generous, caring impulses, while they may exist, are generally weak, fleeting, and unstable in human nature but, “dig a little beneath the surface and you’ll find a ferocious, persistent, profoundly selfish man.”

이와 유사하게, 20세기 초에, 스페인 출신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도 이렇게 썼다. 관대하고 배려하는 일시적인 감정은 존재한다고 해도 대개 인간 본성에 있어서 약하고, 금방 사라지고, 불안정하다. 그러나 “표면 아래를 조금만 파 보면 포악하고, 끈질기고, 완전히 이기적인 인간을 발견할 것이다.”

 

Unfortunately, Western science and psychology grabbed hold of ideas like that, then sanctioned, and even encouraged, this egoistic view. Beginning in the earliest days of modern scientific psychology, there was a general underlying assumption that all human motivation is ultimately egoistic, based purely on self-interest.

불행하게도, 서양의 과학과 심리학은 그와 같은 생각을 움켜잡고는, 이런 이기적인 견해를 인정하고, 심지어 용기를 북돋워주기까지 했다. 현대의 과학적 심리학의 초기에 시작해서, 모든 인간의 동기는 궁극적으로 이기적이고, 순전히 자기-이익에 기초한 것이라는 일반적인 기본적 가정이 있었다.

 

After implicitly accepting the premise of our essential selfishness, a number of very prominent scientists over the past hundred years have added to this a belief in the essential aggressive nature of humans. Freud claimed, “the inclination to aggression is an original, self-subsisting, instinctual disposition.”

암묵적으로 우리의 본질적인 이기심을 전제로 받아들인 후에, 지난 수 백 년 동안 많은 유명한 과학자들이 여기에다 인간의 본질적인 공격적 성질에 대한 신념을 추가해 왔다. 프로이드는 “공격적인 경향은 독자적이고, 자기-존재적이고, 본능적인 성향이다.”라고 주장했다.

 

In the latter half of this century, two writers in particular, Robert Ardrey and Konrad Lorenz, looked at patterns of animal behavior in certain predator species and concluded that humans were basically predators as well, with an innate or instinctive drive to fight over territory.

20세기 후반에, 특히 두 작가, 로버트 아드리와 콘라드 로렌츠는 어떤 약탈적인 종(種)의 행동 유형을 살펴본 뒤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인간 또한 기본적으로 약탈자이며, 영토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본유적인 혹은 본능적인 충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In recent years, however, the tide appears to be turning on this profoundly pessimistic view of humanity, coming closer to the Dalai Lama’s view of our underlying nature as gentle and compassionate. Over the past two or three decades, there have been literally hundreds of scientific studies indicating that aggression is not essentially innate and that violent behavior is influenced by a variety of biological, social, situational, and environmental factors.

하지만, 최근에 이르러서, 인간성에 대한 이러한 완전히 비관적인 견해에 반격을 가하면서, 우리의 기본적인 본성이 온순하고 자비롭다고 보는 달라이 라마의 견해에 더 가까이 접근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지난 2, 30년 동안에, 실제로 수 백 편의 과학적 연구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공격성은 본질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며 폭력적인 행동은 자양한 생물학적, 사회적, 상황적, 환경적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

 

Perhaps the most comprehensive statement on the latest research was summarized in the 1986 Seville Statement on Violence which was drawn up and signed by twenty top scientists from around the world. In that statement, they of course acknowledged that violent behavior does occur, but they categorically stated that it is scientifically incorrect to say that we have an inherited tendency to make war or act violently. That behavior is not genetically programmed into human nature.

아마도 최근의 연구에 대한 가장 종합적인 성명은 세계 도처에서 온 20명의 일류급 과학자들이 작성하고 서명한 ‘폭력에 대한 1986 세비유 성명’에 요약되어 있었다. 그 성명에서 학자들은 폭력적인 행동이 당연히 일어난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우리가 전쟁을 일으키거나 폭력적으로 행동하려는 유전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행동은 유전적으로 인간의 본성에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다 라고 단정적으로 공언했다.

 

They said that even though we have the neural apparatus to act violently, that behavior isn’t automatically activated. There’s nothing in our neurophysiology that compels us to act violently. In examining the subject of basic human nature, most researchers in the field currently feel that fundamentally we have the potential to develop into gentle, caring people or violent, aggressive people; the impulse that gets emphasized is largely a matter of training.

과학자들은 우리가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신경 기관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행위는 자동적으로 활성화되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우리의 신경생리에는 폭력적으로 행동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기본적인 인간 본성이라는 주제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 이 분야의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현재 근본적으로 우리는 온순하고, 돌보려고 하는 사람으로 혹은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사람으로 발전하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강조되고 있는 충동은 대체로 훈련의 문제이다, 라고 느끼고 있다.

 

Contemporary researchers have refuted not only the idea of humanity’s innate aggression, but the idea that humans are innately selfish and egoistic has also come under attack. Investigators such as C. Daniel Batson or Nancy Eisenberg at Arizona State University have conducted numerous studies over the past few years that demonstrate that humans have a tendency toward altruistic behavior.

현대의 연구자들은 인간의 타고난 공격성이라는 생각에 반박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본래적으로 이기적이라는 생각도 공격을 받고 있다. 아리조나 주립 대학교의 C. 대니얼 뱃슨 또는 낸시 아이젠버그와 같은 연구가들은 지난 몇 년 동안 인간이 이타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많은 연구를 했다.

 

Some scientists, such as sociologist Dr. Linda Wilson, seek to discover why this is so. She has theorized that altruism may be part of our basic survival instinct ? the very opposite to the ideas of earlier thinkers who theorized that hostility and aggression were the hallmark of our survival instinct. Looking at over a hundred natural disasters, Dr. Wilson found a strong pattern of altruism among disaster victims, which seemed to be part of the recovery process. She found that working together to help each other tended to ward off later psychological problems that might have resulted from the trauma.

린다 윌슨과 같은 사회학자를 비롯한 몇몇 과학자들은 왜 인간이 이타적으로 행동하는가를 밝히려고 하고 있다. 윌슨 박사는 이타적 행위가 우리의 기본적인 생존 본능의 부분일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이 이론은 적대감과 공격성이 우리의 생존 본능의 특징이라고 주장하는 초기 사상가들의 생각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백여 차례가 넘는 자연 재해를 검토한 결과, 윌슨 박사는 재난의 희생자들 사이에서 강한 이타적 행위의 유형을 발견했다. 마치 그것이 재난에서 회복되는 과정의 부분인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사람들이 서로를 돕기 위해 함께 일하는 것이 나중에 정신적 충격에서 생길 수 있는 심리적 문제를 막아주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했다.

 

The tendency to closely bond with others, acting for the welfare of others as well as oneself, may be deeply rooted in human nature, forged in the remote past as those who bonded together and became part of a group had an increased chance of survival. This need to form close social ties persists up to the present day.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행동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으려는 경향은, 인간 본성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지도 모른다. 혹은 오래된 과거에 서로 힘을 합쳐 집단적으로 행동한 사람들이 살아남는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긴밀한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하려는 욕구는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In studies, such as one conducted by Dr. Larry Scherwitz, examining the risk factors for coronary heart disease, it has been found that the people who were most self-focused (those who referred to themselves using the pronouns “I,” “me,” and “my,” most often in an interview) were more likely to develop coronary heart disease, even when other health-threatening behaviors were controlled. Scientists are discovering that those who lack close social ties seem to suffer from poor health, higher levels of unhappiness, and a greater vulnerability to stress.

관상 동맥성 심장병에 위험 요소를 살펴보는, 래리 셔윗츠 박사가 한 것과 같은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밝혀졌다. 심지어 다른 건강 위협 행동들이 통제된 경우에도, 가장 자기-중심적인 사람들 (면담에서 “나는”, “나를”, “나의”라는 대명사를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면서 자신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관상 동맥성 심장병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다. 과학자들은 긴밀한 사회적 유대 관계가 부족한 사람들이 건강이 나빠서 고통을 받고 있고, 불행의 수준이 더 높고, 스트레스에 더 피해입기 쉽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Reaching out to help others may be as fundamental to our nature as communication. one could draw an analogy with the development of language, which, like the capacity for compassion and altruism, is one of the magnificent features of the human race. Particular areas of the brain are specifically devoted to the potential for language. If we are exposed to the correct environmental conditions, that is, a society that speaks, then those discreet areas of the brain begin to develop and mature and our capacity for language grows. In the same way, all humans may be endowed with the “seed of compassion.”

남을 도우려고 손을 뻗는 행동은 의사소통과 같이 우리의 본성에 근본적인 것 같다. 이렇게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비와 이타심의 능력처럼 언어의 개발은 인간의 가장 비길 데 없는 특징 중의 하나이다. 두뇌의 특정 부분이 언어 능력의 잠재력에 특히 헌신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올바른 환경 조건, 말하자면,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에 노출된다면, 두뇌의 그 신중한 부분은 개발되고 성숙해지기 시작하고 우리의 언어 능력은 늘어난다. 그와 똑같이, 모든 인간은 “자비의 씨앗”을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When exposed to the right conditions ? at home, in society at large, and later perhaps through our own pointed efforts ? that “seed” will flourish. With this idea in mind, researchers are now seeking to discover the optimal environmental conditions that will allow the seed of caring and compassion to ripen in children. They have identified several factors: having parents who are able to regulate their own emotions, who model caring behavior, who set appropriate limits on the children’s behavior, who communicate that a child is responsible for her or his own behavior, and who use reasoning to help direct the child’s attention to affective or emotional states and the consequences of her or his behavior on others.

제대로 된 조건 -- 가정에서, 사회 전반에서, 나중에 자신의 집중적인 노력을 통해서 -- 에 노출되었을 때, 그 “씨앗”은 꽃을 피울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염두에 두고서, 연구자들은 이제 돌봄과 자비의 씨앗이 어린이들 안에 성숙될 수 있도록 하는 최적의 환경적 조건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연구자들은 여러 가지 요인을 찾아냈다. 다음과 같은 부모를 만날 것. 자신의 감정을 규제할 수 있는, 돌보는 행동의 모범을 보이는, 아이들의 행동에 적절한 제한을 두는, 아이가 자신이 한 행동에 책임이 있다고 아이와 의사소통을 하는, 아이의 관심이 애정을 담고 정서적인 상태로 향하도록 돕고 자신의 행동이 남에게 미치는 결과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 줄 수 있는 부모를.

Revising our basic assumptions about the underlying nature of human beings, from hostile to helpful, can open up new possibilities. If we begin by assuming the self-interest model of all human behavior, then an infant serves as a perfect example, as “proof” of that theory. At birth, infants appear to be programmed with only one thing on their minds: the gratification of their own needs ? food, physical comfort, and so on.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가정을, 적대적인 것으로부터 도움을 주는 형태로 바꿈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모든 인간 행동의 자기-이익을 가정함으로써 시작한다면, 갓난애가 그 이론의 완벽한 예, “증거”로 쓸모가 있다. 아기는 태어났을 때, 단지 한 가지만 마음에 두도록 계획되어진 것 같다. 즉 자신의 욕구 충족 - 음식, 신체적 편안함, 등등.

 

But if we suspend that basic egoistic assumption, a whole new picture begins to emerge. We could just as easily say that an infant is born programmed for only one thing: the capacity and purpose of bringing pleasure and joy to others. By just observing a healthy infant, it would be hard to deny the underlying gentle nature of human beings.

그러나 우리가 그 기본적인 가정을 잠시 보류해 둔다면, 완전히 새로운 그림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아주 쉽게 갓난애는 단지 한 가지만을 위해 계획된 것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남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능력과 목적이라는. 단지 건강한 아기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기본적인 온순한 본성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And from this new vantage point, we could make a good case that the capacity to bring pleasure to another, the caregiver, is inborn. For example, in a newborn infant the sense of smell is developed to perhaps only 5 per cent that of an adult and the sense of taste is developed very little. But what does exist of these senses in the newborn is geared toward the smell and taste of breast milk. The act of nursing not only provides nutrients for the baby; it also serves to relieve tension in the breast. So, we could say that the infant is born with an innate capacity to bring pleasure to the mother, by relieving the tension in the breast.

또 이 새로운 유리한 입장에서 보면, 다른 사람, 즉 돌보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가져오는 능력은 타고난 것이라는 주장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갓 태어난 아기에게 후각은 성인의 5 퍼센트 정도 밖에 발달되어 있지 않고, 미각은 거의 발달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신생아에게 있는 이 감각들은 어머니의 젖의 냄새와 맛을 향해 조정되어 있다. 젖을 주는 행위는 아기에게 영양분을 제공하는 것뿐 아니라, 가슴에서 긴장을 덜어주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기가 가슴에서 긴장을 덜어줌으로써, 엄마에게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타고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An infant is also biologically programmed to recognize and respond to faces, and there are few people who fail to find genuine pleasure in having a young baby gazing innocently into their eyes and smiling.

아기는 또한 생물학적으로 얼굴을 알아보고 반응하도록 계획되어져 있어서, 아기가 천진난만하게 사람의 두 눈동자를 뚫어지라고 쳐다보며 미소 짓는 것을 보면서 참된 즐거움을 발견하지 않을 사람들은 없다.

 

Some ethologists have formulated this into a theory, suggesting that when an infant smiles at the caregiver or looks directly into his eyes, the infant is following a deeply ingrained “biological blueprint,” instinctively “releasing” gentle, tender, caring behaviors from the caregiver, who is also obeying an equally compelling instinctual mandate.

몇몇 비교행동학자들은 이것을 이론으로 공식화했다. 그 이론에 따르면 아기가 자신을 돌보는 사람에게 미소 짓거나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볼 때, 아기는 자기 마음 깊이 새겨진 “생물학적 청사진”을 따라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돌보는 사람으로부터 온순하고, 부드럽고, 관심 어린 행동을 끌어내려는 본능이다. 아기를 돌보는 사람도 똑같이 이 본능적인 명령에 복종해 아기를 애정으로 대하게 된다.

 

As more investigators strike out to objectively discover the nature of human beings, the notion of the infant as a little bundle of selfishness, an eating and sleeping machine, is yielding to a vision of a being that comes into the world with an innate mechanism to please others, requiring only the proper environmental conditions to allow the underlying and natural “seed of compassion” to germinate and grow.

인간의 본성을 객관적으로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연구자들이 더욱 많아지면서, 아기가 먹고 잠자는 것밖에 모르는 이기심 덩어리라고 보는 생각이 차츰 물러가고 있다. 그 대신 아기가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선천적 능력을 갖고 세상에 태어난다는 새로운 시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들은 단지 기본적인 자연적 “자비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기에 알맞은 환경 조건을 요구할 뿐이라는 것이다.

 

Once we conclude that the basic nature of humanity is compassionate rather than aggressive, our relationship to the world around us changes immediately. Seeing others as basically compassionate instead of hostile and selfish helps us relax, trust, live at ease. It makes us happier.

일단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이 공격적이 아니라 자비롭다는 결론을 내리면, 우리와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는 곧바로 달라진다. 사람들이 적대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을 갖고 있다고 보는 대신에 그들이 기본적으로 자비심을 가지고 있다고 볼 때, 우리는 안심하고 그들을 믿을 수 있고, 편한 마음으로 생활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를 더욱 행복하게 만든다.

 

Meditation on the Purpose of Life

인생의 목적에 대한 명상

 

As the Dalai Lama sat in the Arizona desert that week, exploring human nature and examining the human mind with the scrutiny of a scientist, one simple truth seemed to shine through and illuminate every discussion: the purpose of our life is happiness. That simple statement can be used as a powerful tool in helping us navigate through life’s daily problems. From that perspective, our task becomes one of discarding the things that lead to suffering, and accumulating the things that lead to happiness. The method, the daily practice, involves gradually increasing our awareness and understanding of what truly leads to happiness and what doesn’t.

일주일 동안 존자님은 아리조나 사막에 앉아 과학자처럼 정밀하게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인간의 마음을 조사했다. 그 동안 한 가지 단순한 진리가 모든 토론에서 내내 비추고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다. 그 단순한 진술은 우리가 일상의 문제를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강력한 도구로 쓰일 수 있다. 그런 견지에서, 우리의 임무는 고통으로 이끄는 것들을 버리고, 행복으로 이끄는 것들을 쌓아나가는 것이 된다. 그 방법인 매일의 실천에는 진정으로 행복으로 이끄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이해를 점차적으로 증진시키는 것이 포함된다.

 

When life becomes too complicated and we feel overwhelmed, it’s often useful just to stand back and remind ourselves of our overall purpose, our overall goal. When faced with a feeling of stagnation and confusion, it may be helpful to take an hour, an afternoon, or even several days to simply reflect on what it is that will truly bring us happiness, and then reset our priorities on the basis of that. This can put our life back in proper context, allow a fresh perspective, and enable us to see which direction to take.

삶이 너무 복잡해지고 우리가 압도당한다는 느낌이 들 때, 그저 뒤로 물러서서 우리의 전반적인 목적과 전반적인 목표를 상기하는 것이 유용하다. 침체와 혼동의 느낌과 직면할 때, 한 시간, 하루 오후, 또는 며칠의 시간을 내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고나서 그것을 토대로 우리의 우성순위를 재조정하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 이러한 실천은 우리의 삶을 알맞은 상황으로 되돌려 놓고, 새로운 견지를 열어주고, 어느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를 알게 해준다.

 

From time to time we are faced with pivotal decisions that can affect the entire course of our lives. We may decide, for instance, to get married, to have children, or to embark on a course of study to become a lawyer, an artist, or an electrician. The firm resolve to become happy ? to learn about the factors that lead to happiness and take positive steps to build a happier life ? can be just such a decision. The turning-toward happiness as a valid goal and the conscious decision to seek happiness in a systematic manner can profoundly change the rest of our lives.

때때로 우리는 우리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칠 중대한 결정을 마주 대하게 된다. 예를 들면, 결혼, 아이를 갖는 것, 또는 변호사, 화가, 전기기술자가 되기 위한 과정을 시작하는 것 등을 결정해야 한다. 행복해지기 위한 확고한 결심 -- 행복으로 이끄는 요소에 대해 배우기와 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긍정적인 조치를 취하기 -- 은 마찬가지로 그러한 결정일 수 있다. 유효한 목표로서의 행복으로의 방향 전환과 체계적인 방법으로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식적인 결정은 우리의 남은 인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The Dalai Lama’s understanding of the factors that ultimately lead to happiness is based on a lifetime of methodically observing his own mind, exploring the nature of the human condition, and investigating these things within a framework first established by The Buddha over twenty-five centuries ago. And from this background, the Dalai Lama has come to some definite conclusions about which activities and thoughts are most worthwhile. He summarized his beliefs in the following words, which can be used as a meditation.

궁극적으로 행복으로 이끄는 요인에 대한 존자님의 이해는 다음 여러 가지 수행이 그 토대가 되었다. 평생에 걸쳐 자신의 마음을 꼼꼼하게 관찰하기, 인간의 조건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기, 이러한 것들을 2,500년 전에 부처님께서 처음 확립하신 틀 안에서 상세히 조사해 보기 등이다. 이런 것을 배경으로 해서, 존자님은 어떤 활동과 사상이 가장 가치 있는지에 대한 몇 가지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존자님은 명상의 자료로 사용될 수 있는, 다음의 말로써 자신의 신념을 요약했다.

“Sometimes when I meet old friends, it reminds me how quickly time passes. And it makes me wonder if we’ve utilized our time properly or not. Proper utilization of time is so important. While we have this body, and especially this amazing human brain, I think every minute is something precious. Our day-to-day existence is very much alive with hope, although there is no guarantee of our future. There is no guarantee that tomorrow at this time we will be here. But still we are working for that purely on the basis of hope.

“때때로 오래된 친구들을 만날 때,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시간을 잘 활용했는지 아닌지에 대해 의심하게 만듭니다. 시간을 잘 활용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 특히 이 놀라운 인간의 두뇌를 가지고 있는 동안, 매 순간이 귀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미래에 대한 보장은 없지만, 우리의 일상의 생활은 희망으로 대단히 활기에 차 있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 우리가 여기 있을 거라는 보장은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적으로 희망을 토대로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So, we need to make the best use of our time. I believe that the proper utilization of time is this: if you can, serve other people, other sentient beings. If not, at least refrain from harming them. I think that is the whole basis of my philosophy.

“따라서 우리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내가 믿기로는 적절한 시간의 활용은 이것입니다. 할 수 있으면, 다른 사람, 다른 생명 있는 존재에게 봉사하라. 그렇게 할 수 없으면, 최소한 그들에게 해를 입히지는 말아라. 이것이 내 철학 전체의 토대입니다.

 

“So, let us reflect on what is truly of value in life, what gives meaning to our lives, and set our priorities on the basis of that. The purpose of our life needs to be positive. We weren’t born with the purpose of causing trouble, harming others. For our life to be of value, I think we must develop basic good human qualities ? warmth, kindness, compassion. Then our life becomes meaningful, and more peaceful ? happier.”

“그러므로, 무엇이 진정으로 인생에서 가치가 있는지, 무엇이 우리 인생에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반성해 봅시다. 그것을 토대로 우리의 우선순위를 조정합시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문제를 일으키거나 남을 해치기 위한 목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이 가치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선한 인간적 성품을 개발해야 합니다. 따뜻함, 친절, 자비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의미 있고, 더욱 평화롭고, 더욱 행복해집니다.”

 

 

 

 
다음검색
댓글
  • 작성자 14.06.14 10:36

    첫댓글 영어 본문에서 단어 사이의 ? 는 -- 이 반영되지 않은 것입니다. ^^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