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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메일과 게시물의 형태로 각계각층의 지성인들께 올리는 글입니다. 가독성을 위하여 한글 문서를 첨부했습니다.)
“17살 때, 이런 문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있을 것이다. 이 글에 감명 받은 저는 그 후 50살이 되도록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그리고 여러 날 동안 그 답이 ‘아니오’라고 나온다면, 저는 어떤 것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제가 인생에서 큰 결정들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준 가장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모든 외부의 기대들, 자부심, 좌절과 실패의 두려움, 그런 것들은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을 남기게 됩니다.” -스티브 잡스, 스탠포드 대학 연설문
위대한 창의성을 발휘한 사람들의 특징을 연구한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천재와 일반인의 차이가 죽음에 대한 성찰의 깊이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성찰을 지닌 사람은 자질구레한 일상을 죽음 앞에 던져버리고 삶의 궁극적 가치에 몰입하게 되는데, 이 능동적인 몰입이 시간의 흐름이나 공간, 나아가서 자신에 대한 생각까지도 잊어버리게 만들어 직선적인 패턴에서 벗어나게 해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혁신적인 길의 선봉에 서게 됩니다.
개척자가 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입니다. 참호 속에 웅크린 대중들은 집단을 뚫고 나온 사상가를 향해 비난과 냉담의 거친 포화를 쏠 자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틀에서 벗어난 일을 하고자 한다면 타인의 시선을 감내하고 일을 추진할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일이 선구적이고 거창한 일에 가까울수록 ‘통과하기 힘든 관문’은 견고해집니다.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인문학, 예술 계열의 선구자에겐 더욱 견디기 힘든 관문이 됩니다. 수많은 선구적인 아티스트들은 자신의 독창성을 지키기 위해, 물질적 가난과 정신적 궁핍을 감내하며 대중들에게 처절히 저항했습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남이 뭐라고 말할까? 이런 생각을 늘 하는 사람은 이미 남의 시선의 노예일 뿐이다. 노예는 늘 주인의 눈치를 살피고 주인의 명령대로 해야 한다. 자기가 싫어도 해야 하기 때문에 자유가 없어서 불행하다."
지금부터 저는 선구적인 철학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죽음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된 저의 철학 탐구는 이제 선구적인 사상을 준비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이 이야기는 완성된 철학은 아니며, 사상 전개를 준비하는 과정에 생겨난 이야기입니다. 주제 자체가 사회 통념에서 벗어난 ‘통과하기 힘든 관문’이기에 이야기를 부풀려 관문을 더욱 견고히 할 생각은 없습니다. 덜어내고 덜어냈음에도 자연적으로 남은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영성철학’이란 장르로 2차 계몽시대를 열고자 합니다. 영성이란 표현에서 뉴에이지 사상이나 기독교 사상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영성철학은 이성에 기반을 둔 철학이며 서양에선 들뢰즈, 동양에선 화엄에 근접한 철학입니다. 영성철학은 다른 학문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철학을 왕의 위치로 되돌릴 것입니다. ‘천대받는 여왕’이 되어버린 형이상학을 뿌리부터 재조명할 것입니다. 형이상학, 특히 동양의 형이상학은 본래 우물 안에 가둘 수 없는 거대한 바다를 품고 있었습니다.
불은 머리이고,
달과 해가 두 눈이며, 방향은 두 귀고,
게시된 베다들이 말이며,
공기는 숨이고, 온 세상이 심장이며,
그것의 두 발로부터 흙.
실로 그것은 모든 존재들의 내재적 아트만이다. -우파니샤드
어느 날 장주는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즐거울 뿐, 자기가 장주임을 알지 못 하였다. 얼마 후 문득 꿈에서 깨어보니, 자신은 틀림없는 장주였다. 그러니 장주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그 나비가 꿈을 꾸면서 장주가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장주와 나비는 반드시 구별될 것이다. 이를 일러 사물의 변화라고 하는 것이다. -장자
하늘로 이불 덮고, 땅을 자리 삼아 산을 베고 누웠다가
달을 촛불로, 구름을 병풍으로, 바다를 큰 술통삼아 크게 취한 김에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긴 소매 자락이 곤륜산에 걸릴까 걱정 하노라. -진묵선사
그들이 철학으로 추구한 것은 단순한 지적인 유희가 아닌, 존재 자체의 대변혁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대중들은 철학이 여유 있는 사람들의 지적인 유희거나 지친 삶에 순간적인 위안을 주는 도피처, 드링크제 같은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은 분석철학에서 볼 수 있듯 다른 학문에 시비를 거는 2차적인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분과학문이 발달할수록 철학은 무용한 학문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수많은 철학 분과는 소피스트들에게 잠식당하여, 철학이 대면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의 역할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철학 제 1의 과제는 어느새 낡은 가치가 되어버린 삶과 죽음의 문제, 존재의 대변혁입니다. 종교가 이 문제를 비이성적으로 해결하고자 한다면 철학은 이성을 잃지 않고 해결하고자 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오강남 교수는 종교학의 영역에서 표층종교와 심층종교를 구분하여 참된 영성이란 무엇인지 밝히고자 했습니다. 저는 철학의 영역에서 이 작업을 하고자 합니다. 수많은 20세기 영성가들은 문학적인 방법으로 이 작업을 시도했으나, 세월의 검증을 견디지 못 하고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사태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엄밀한 철학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철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태도는 진솔함입니다. 인식의 범위를 탐구하고자 했던 버클리의 초기 테제는 매우 의미 있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으나, 인식으로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욕망을 참지 못 하고 '지각되지 않는 존재는 없다'라는 비약적인 논리를 선포하면서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명확히 알 수 없는 부분에 왜곡을 가하고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신의 존재를 끼워 넣었습니다. 사기꾼이 몰락하는 지점은 사기가 현실이라고 믿기 시작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철학자는 사상을 전개하는 모든 부분에 있어서 자신이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할 수 없다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솔함을 바탕으로 한 <진취적인 사상>과 <다각도의 검증>이 만났을 때 학문의 발전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람직한 사례로는 다이아몬드 교수가 있습니다. 그는 강대국과 약소국의 원인이 인종이 아닌 지리환경에 있다는 논지를 다양한 근거로 전개하였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퓰리처상까지 수상했습니다. 그럼에도 저자인 다이아몬드 교수는 자신의 주장에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학문의 발전이 <가설과 검증>이라는 양 축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인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주장은 항상 다양한 비판에 노출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발전을 위한 과정입니다.
저는 <영성 철학>이라는 진취적인 가설을 독단적으로 내뱉기 보다는 예리한 칼날로 다듬고 다각도의 시선에서 바라보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은 대학의 도움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한국의 대학은 오늘날까지도 극히 부조리한 입학 제도를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이 글을 통해 개인적으로 얻고자 하는 바는, ‘철학 연구를 위해 누군가에게 입학사정관제에 응시하기 위한 추천서를 얻거나 새로운 입시 전형의 선례가 되고자 함’입니다. 처음에는 이런 목적으로 글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 글의 1차적 목적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글을 써내려 가다보니, 이 문제는 단순한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며, 기후 변화의 문제처럼 범사회적 조치가 시급한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공교육은 1차 계몽시대 철학자들의 사상에서 태어난 제도입니다. 2차 계몽시대를 열고자 하는 제가 교육제도의 혁신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일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새로운 입시 전형의 신호탄이 되고자 합니다.
이 글은 <교육 철학>파트와 <영성 철학>파트로 구성하였습니다. <교육 철학> 파트는 얼마 전 국민신문고에 올렸던 ‘나는 왜 대학에 가지 않았는가’라는 주제의 짧은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현재 20대 중반의 나이임에도 대학에 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며 현대 사회의 요구에 걸맞게 대학이 반드시 개선해야 하는 사안들을 밝혔습니다.
1.무분별하게 기존 제도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제도가 추구하고자 했던 목적은 무엇이며 그 목적이 과연 현대 사회와 학문 발전에 걸맞은가를 우선 살펴보았고, 본인이 제안하는 '창의 전형'에는 이미 기존 제도가 추구하던 목적 정도는 기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이 제도가 생겨야 하는 당위성을 밝혔습니다. 이 당위성을 기반으로 ‘창의 전형’이 왜 현대 사회에 걸맞은 제도이며 왜 교육의 본질인지 서술했습니다. 또한 정치적인 문제를 비롯한 다각도의 관점도 살펴보았습니다.
2.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대학입시제도가 인간의 창의성과 심성을 어떻게 망가뜨리고 있으며 이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는 한 순수하고 창의적인 인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함으로써 현대 공교육제도가 지니고 있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밝혔습니다.
3.현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교육의 본질과 목표를 분명히 하였으며, 창의성의 메커니즘과 창의적 교육을 할 수 있는 토양과 방법을 간략히 제시했습니다.(프로게이머와 세타파의 관계 등)
저의 교육철학은 TED에서 조회수 1위를 기록한 ‘학교가 창의력을 죽인다.’의 강연자, '켄 로빈슨'과 일치합니다. 차이점은 켄 로빈슨은 '공교육'을 중점으로 이야기 한 반면, 저는 ‘대입 제도’를 중점으로 이야기 했다는 점입니다. 공교육 제도의 전반이 바뀌려면 필연적으로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러나 대입제도는 즉각적으로 개선할 수 있으며 저에게 당면한 문제입니다. 공교육의 문제는 ‘줄 세우기’, ‘사회의 계층화', ’고강도의 공부노동' 등이 있겠으나, 저는 대입제도와 관련된 ‘주도적 학습’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대학이 ‘주도적 인재’를 뽑는다면 학생들도 마음 놓고 공교육의 폭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도적 인재를 선발하는 ‘창의 전형’의 씨앗이라고 볼 수 있는 ‘입학사정관제’는 ‘현역 고교생’들에겐 긍정적인 제도지만, 아쉽게도 ‘현역 고교생’이라는 틀에 갇힌 치명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또한 저와 켄 로빈슨이 문제 삼는 것은 ‘공교육’과 ‘대입 제도’에 국한된 문제임을 밝힙니다. ‘대학 교육’ 자체는 현재로서도 창의적 인재를 위한 훌륭한 공간이 되어준다고 생각합니다.
<교육 철학> 파트가 덕(德)에 해당된다면 <영성 철학> 파트는 도(道)에 해당됩니다. <영성 철학> 파트는 <영성 철학>이란 무엇인지 서술하고, 달마가 인도불교와 중국문화를 융합하여 선(禪)을 탄생시킨 것처럼, 이제는 동아시아의 직관과 서양의 이성이 만나 새로운 문화가 탄생할 시기임을 밝혔습니다. 구성은 이하와 같습니다.
1.타락한 영성문화와 고루한 학계의 문제점
2.문체(style)에 대한 생각
3.영성철학이란 무엇이며 무엇을 개척하고자 하는가?
4.어떤 점이 혁신적이며 얼마나 시대적인 가치가 있는가?
5.이 일을 하고자 하는 이유
영성 철학은 개인을 해체시키면서도 근원적인 전체와의 관계를 긍정합니다. 이 지점에서 들뢰즈의 포스트모던과 영성 철학이 만납니다. 동양 사상은 심법(心法)적인 깊이는 서양 보다 깊으나 체계적 전개가 미흡하여 뜬 구름 잡는 이야기 취급을 받을 수 있는데, 들뢰즈의 철학은 동양적인 사상을 지녔음에도 이를 체계적으로 구현하여 동양 철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줬습니다.
글 전체를 통틀어 저만의 고유한 사상과 깊이를 갖춰 학술적 가치를 지닌 대목은 ‘화엄의 재해석’입니다. 나머지 내용들은 ‘에세이’적 성격, ‘호소하는 주장’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동서양의 철학을 논하긴 했으나, 저는 아직 동서철학 모두에 정통하진 못 했습니다. 동양 철학에 대해선 견성 체험과 학문적 내공을 모두를 갖췄으나, 서양철학은 공부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전반적인 이해가 부족한 편입니다. 이것이 제가 대학을 가고자 하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포스트모던 철학을 심도 있게 공부하고, 단지 드러난 해체만이 아닌 해체가 등장해야 했던 전반도 공부해보고 싶습니다.
저 자신의 의견에만 집착하지 않고 함께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개방된 형식으로 글을 적고자 했습니다. 그럼에도 강한 문체를 금할 수 없었던 것은 상황의 심각성을 감추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글의 총 길이는 약 A4 30page 분량이며 <교육 철학>과 <영성 철학> 파트의 구분은 “=====~=====”라는 기호로 표기했습니다. <교육 철학> 파트와 <영성 철학> 파트 중 한 가지만 읽으셔도 좋지만 하나의 파트는 유기적으로 짜여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글의 성격상 자화자찬도 있으나 거짓은 단 한 문장도 없다는 것을 맹세합니다.(원하실 경우 가능한 모든 것을 통해 증명하겠습니다.)
"나는 내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권위를 내세우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여러분의 논리적 근거를 통한 검토와 판단을 기대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할 임무를 소홀히 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내가 남들과 전혀 반대되는 의견들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들을 가볍게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원칙들이야 말로 진실인지 허위인지를 기필코 알아내야 하는 중대한 것들이며, 그것에 인류의 행·불행이 좌우되는 것이다." -루소, <에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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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 육 철 학 >
[나는 왜 대학에 가지 않았는가]
“세계 어디서나 봉건시대의 제도들은 산업발전을 가로막았다. 마찬가지로 산업시대의 관료주의는 부 창출을 위한 지식 기반 시스템의 발전을 방해하고 있다. (중략) 시속100마일로 질주하는 자동차는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기관을 대변한다. 기업이나 사업체가 여기에 해당되는데, 이들은 사회 다른 부문의 변혁을 주도한다. (중략) 관료조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조차 백미러를 통해 자신들보다 훨씬 뒤쳐져 있는 자동차를 볼 수 있다. 타이어는 펑크가 나서 흔들리고, 라디에이터에서는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이 차량은 뒤 따라오는 차까지 속도를 낼 수 없게 만든다. 이 부서진 고물 자동차를 유지하기 위해 4,000억 달러를 들이는 일이 가능할까? 물론 가능하다. 실제로 해마다 그만한 비용을 쏟아 붓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미국의 학교이다. 미국의 학교들은 대량생산에 맞게 디자인되어 공장처럼 가동되고, 관료적으로 관리되며, 강력한 교원노조와 교사들의 투표권에 의지하는 정치인들로부터 보호받는다. 이들은 20세기 초의 경제체제를 완벽하게 반영하고 있다. 그들의 유일한 위안은 다른 나라의 학교들도 그보다 나을게 없다는 점이다. 기업들이 속도 경쟁을 벌이며 변화에 매진하는 동안 공교육 체제는 독점의 특혜를 누리며 보호받고 있다.”
-엘빈 토플러, 부의 미래
“한국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은 교육이 정반대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학생들은 하루 15시간 이상을 학교와 학원에서, 자신들이 살아갈 미래에 필요하지 않을 지식을 배우기 위해, 그리고 존재하지도 않는 직업을 위해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엘빈 토플러 방한 인터뷰, 한국 교육 제도에 대하여
“제도변화에 열중하라. 교육제도 전면 개편하라고 제안하고 싶다. 한국 교육 제도는 공장 직원이 반복 작업 하듯이 학생이 공장에서 일하는 것과 같다. 미래는 이 같은 공장 필요 없다. 다양성 있는 제도가 필요하며 다양한 교육형태 제공이 필수적이다. 빌 게이츠가 말한 것처럼 나는 교육제도가 완전히 대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엘빈 토플러 방한 인터뷰, 한국 경제인에게 한마디
현대 공교육제도는 계몽시대의 보편적 지성문화와 산업시대의 경제적 상황 속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근대사회 당시의 필요에 의해 구상되고 구조화되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공교육이 ‘사회가 기대하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당시 환경으로부터 200여년이 지났습니다. 사회 구조의 전반과 인간 내면의 전반이 바뀌었고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의 기준이 달라졌습니다. 전체주의적 합리성, 획일화된 규율, 무분별한 경쟁보다는 융합, 혁신, 개인 내면의 열망과 창의성을 이끌어내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실현하는 것이 미덕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창의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사회로 진입하려면 저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앉아 권력자 행세를 하고 있는 '바람직함'이나 '해야 함' 혹은 '좋음' 대신에 자기가 바라는 내적 충동, 즉 욕망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바람직한 것보다는 바라는 것을 하는 사람으로 채워지고, 해야 하는 것보다는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사람으로 채워지고, 좋은 일을 하는 사람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채워질 때 우리 사회는 건강해집니다. 상상력과 창의성이 샘솟게 됩니다.” -최진석(서강대 철학과 학과장)
공교육제도는 이처럼 다원화된 사회에 걸맞게 개선되어야 합니다. 제가 구태여 언급하지 않아도 이미 개선되고도 남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토플러의 지적처럼 교육 제도는 부서진 고물 자동차가 되어 격변하는 사회 환경을 조금도 쫓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교육은 현대 사회에 태어나 현대 문명을 누리는 아이들을 타임머신에 태워 200년 전의 환경으로 보내버리는 파렴치한 짓을 합법적으로 저지르고 있습니다.
창조경제시대를 준비하는 학생에게 가장 중요한 학습능력은 ‘주도적 학습능력’입니다. 여기서 열정-창의-혁신-융합이 탄생합니다. 그러나 작금의 대입제도는 이러한 능력을 지닌 학생을 키워주진 못 할망정 오히려 튕겨냅니다. 대입제도는 천편일률적 수능-내신제도라는 침대를 갖춘 프로크루스테스가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작던 학생들을 그나마 늘려서 죽였다면 지금은 커진 학생들을 잘라서 죽이고 있습니다. 능동성과 창의성을 타고난 아이들을 암기-분석 잘하는 낡은 기계 부품으로 만들겠다고 선포합니다.(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프로크루스테스는 규격화 된 침대를 가져다 놓고 지나가던 행인을 납치하여 침대보다 키가 크면 잘라 죽이고 짧으면 늘려 죽였다고 합니다.)
시대와 어울리는 인재,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학자의 자질을 갖춘 학생을 거부하는 현대 공교육-대입 제도는 참된 과학자를 억압하던 중세인과 같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신매매범과 같습니다. 중세시대 때는 신학에 반기를 들면 괴상한 사람, 몽상가, 반역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오늘날을 사는 많은 이들 역시 변화를 두려워하며 작금의 공교육 제도를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들의 합리화가 얼마나 낙후한 논리이며, 공교육 제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인간을 파괴하고 있는지 낱낱이 밝히겠습니다.
현대 대입제도는 ‘입학사정관제’, ‘창의 전형’이란 이름의 얇은 포장지로 획일화된 입시 제도를 감추고 있습니다. ‘창의 전형’은 고교졸업 후 2~3년 이내의 학생만 응시할 수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에는 입학사정관제가 없었습니다. 완벽히 획일화 된 철혈 공산 입시 제도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문제 푸는 기계'에 질려버린 대학 교수들의 압력으로 ‘입학사정관제’라는 창의 전형의 씨앗이 움트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잔혹하게도 이 제도 는 저에게 처참한 부조리를 깨닫게 해줬습니다.
입학사정관제(혹은 창의인재선발전형) 전형을 갖춘 다수의 대학은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2~3년 이내인 학생들에게만 응시 자격을 주겠다는 난센스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 이런 제약을 둔 것일까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학생의 경우 그의 내신 성적을 중점 삼아 그를 평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2년이 지난 사람은 획일화된 내신으로 평가할 수 없으니 획일화된 교육의 다른 모습인 수능으로 평가하겠다는 심산인 것입니다. 겉으로는 창의적 제도를 표방하지만 결국엔 획일화 교육에 비중을 두겠다는 것입니다. 획일화된 교육을 거부하고 주도적 학습을 한 사람은 대학이 부르짖는 창의적 인재, 주도적 인재의 기준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21세기 다원 사회에 어울리는 ‘창의 전형’은 ‘유효하고 공정한 실력’만 있다면 남녀노소 누구나 창의적인 응시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정함’은 ‘똑같음’과 다릅니다. 공정하다는 것이 획일적인 제도를 의미하진 않습니다. 개인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획일성은 근대국가, 공산국가, 제국주의국가에 어울립니다. 공정하다는 말의 의미는 예술가는 예술로 평가받고 철학자는 철학으로 평가받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술을 지망하는 학생이 예술에 대한 뛰어난 실기, 풍부한 지식, 통찰과 비전을 지니고 있다면 이것을 기반으로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문학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 훌륭한 글을 써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순수 학문적’으로 가장 유효하면서도 공정한 제도이자 창의-능동-생산적 인재를 수용할 수 있는 올바른 입시제도입니다.
도대체 학교생활기록부-수능-내신은 무엇을 위해 존재합니까? 그것에 뛰어난 학생은 우수한 암기력, 분석력, 성실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기에 그런 학생을 뽑고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필요한 인재가 그 정도에서 멈추겠습니까? 제가 주장하는 ‘창의 전형’은 ‘순수 자기소개서+실기 전형’ 혹은 '학술 에세이'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능력이자, 학문 연구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능력인 ‘생산성’, ‘창의성’을 중점으로 측정하는 제도입니다. 또한 제대로 된 ‘학술 에세이’를 쓰려면 다독(多讀), 논술력, 창의력이 기본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이 제도에는 이미 성실함, 분석력, 암기력에 대한 측정 또한 기본적으로 포함되어져 있습니다. 이런 능력 없이 어찌 훌륭한 학술 에세이를 써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학술 에세이'전형은 기존의 입시전형의 목적 정도는 기본적으로 내재하고 있고, 현대사회와 생산적 학문에 필요한 그 이상의 가치까지 평가하는 ‘총체적으로 업그레이드 된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존 입시 제도가 지닌 문제인, 실용적이지 않고 자신이 원치 않는 잡다한 지식을 강압적으로 배우지 않더라도 그에 해당하는 능력은 평가할 수 있는 제도, 단점은 버리고 장점은 취한 제도입니다.
창의 전형에 대한 오해
1. 혹자는 창의 전형이 대학 수학 능력이 없는 사람을 뽑는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실기 전형과 창의 전형을 혼동한 오류입니다. 제가 말하는 창의 전형은 단순히 실기만 보는 전형이 아닙니다.(실기만으로 뽑힌 학생은 대학 적응력이 일반 학생보다 2배가량 떨어진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창의 전형이란 지원자의 전공 분야에 대한 지식, 태도, 비전, 통찰(논술)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제도입니다. 이러한 종합 평가를 통해 자신의 분야에 있어 대가이자 석학이 될 수 있는 자질을 지닌 사람을 뽑는 것입니다. 여기에 뽑힐 정도로 우수한 학생이 대학 수학 능력이 없겠습니까? 주도적으로 학문을 연구할 수 있을 정도로 출중한 인재, 대학에 입학하면 당장 석-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할 수 있는 인재가 대학 교육을 이수할 수 있는 능력이 없겠습니까?
이렇게 걸출한 인재가 있다면 그에게 부질없는 폭력적 잣대를 들이밀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를 네모난 틀에 끼워 맞추려고 하는 것입니까? 자신만의 학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삶과 학문이 하나 된 주도적-창의적-천재적 인재에게는 영혼의 생존권과 같습니다.
2. 수능-내신을 철폐하고 이 제도만을 채택한다면 연륜에 따른 형평성의 문제나 빈부 격차에 따른 사교육 시장의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능-내신 전형을 70%이상으로 유지하는 것은 필요하며, 내신 미반영의 창의 전형을 30%미만으로 책정하되 ‘정말로’ 창의적인 전형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작금의 입시 제도는 100% 공장주입식 수능-내신 전형에 가깝습니다.(서울대를 필두로 논술 전형은 2015학년부터 폐지하는 대학들이 생겨나고 있으며 애초부터 ‘수동적 논술’은 ‘주도적 학습’과 연관이 없습니다. ‘학술 에세이’는 ‘능동적 논술’입니다. ‘수동적 논술’은 ‘모범 답안’, ‘문제 풀이’ 등으로 사교육의 영향을 많이 받지만 ‘능동적 논술’은 학생 내면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탐구하고자 하는 학문 자체가 없습니다. 누구나 자기만의 천부적인 길이 있고 누구나 스타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현대사회가 만든 환상이란 주장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찍부터 자기만의 재능을 찾고 그 길을 고집스레 걷을 수 없습니다. 또한 나이가 들었음에도 대학에 입학하고자 하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열려 있는 창의 전형'은 본질적으로 소수 전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의 전형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정치적인 문제가 있다한들 본질적으로 미미한 차원입니다.
3. 다원화교육-자기소개서 전형이 사교육을 증가시킨다는 논지는 무지함에서 나온 기우에 불과하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창의 전형과 가장 유사한 전형인 입학사정관제 전형을 연구한 유상근 작가에 의하면, 입학사정관제 자소서 전형은 매우 까다로운 필터링 시스템과 고도로 훈련된 입학사정관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학원이 대신 만들어준 입학사정관 자기소개서를 원천봉쇄하고 있으며, 다원화된 교육을 학교가 해줄 수 없다면 학원도 해줄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학원이라고 해서 분야별 전문가를 마음대로 초청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분과가 다양해지면 다양해질수록 학원의 수익률 또한 저하됩니다.
다수의 대학의 경우 추천서가 없으면 응시도 할 수 없습니다.
-입학사정관제 추천서 제도의 기원은 차별입니다. 미국 정부가 유대인이 명문대에 합격하는 비율을 떨어뜨리기 위해 고안한 것이 추천서 제도입니다.(현재의 미국 입시제도에서는 가장 중요하지 않은 마지막 고려사항입니다.) 이것이 한국에 수입되자 또다시 비열한 차별적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고교생이 아닌 경우 추천서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지만 고교생은 추천서를 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담임교사가 알아서 잘 작성해줍니다.
추천서를 옵션으로 구비하는 제도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으나 현행 제도는 추천서가 없으면 다른 것은 살피지도 않고 응시불가입니다. 이는 고교생이 아닌 사람의 응시를 곤란하게 만들며 고교생이라고 해도 추천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추천서가 학생을 평가하는데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추천서를 엉망으로 제출할 담임교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추천서를 ‘잘’ 써주지 않을 교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명목상 추천서는 ‘학생을 오래 지켜본 사람의 조언을 듣고자 함’이겠으나, 실질적으로는 ‘고교생이 아닌 사람은 응시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한 거름망’이라는 난센스만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교생이 아닌 사람의 접근을 가로막는 대입제도는 ‘20세 전후의 학생들이 대기업 취직을 위한 하나의 자격증으로 대학 간판을 선택하게 만들고 이것에 응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대학 입시 기회를 박탈해버리는 직선적인 근대 사회’의 표상입니다. 그토록 평생교육과 다원교육을 부르짖지만, 정작 입시 제도는 지극히 근대적인 형식을 띠고 시대적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 하고 있습니다. 자기표현 욕구가 강한 주도적-자발적-창의적 학생은 순종적인 노예가 되어야 대학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시대적인 요구를 떠나서 보더라도, 대학의 순기능을 생각한다면 ‘참된 학자적 자질’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는 것이 대학의 의무입니다. 그렇다면 대학은 고교생만을 선호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학문에 진정한 열정과 재능을 지닌 사람을 위한 열린 제도가 필요합니다.
평생교육의 시대인 오늘날까지도 최고 교육기관이 배움에 참 뜻을 두고 있는 국민들을 외면하고 등 떠밀려 입시 치르는 아이들만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는 시대의 흐름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것입니다.
자기소개서는 허울일 뿐, 공교육 충실도로 학생을 평가합니다.
-요즘은 수능보다 입학사정관제-내신 전형으로 학생을 뽑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또한 일부 대학에선 자기소개서에 지원자의 스팩을 적지 못하게 하는 제도를 갖춰 학생들의 스팩이 아닌 내신을 중시하겠다고 합니다. 이는 지금보다도 더욱 획일화된 입시제도로 행군하겠다는 선포입니다. 저는 스팩으로 학생을 뽑는 것에 부정적이지만, 스팩은 적어도 공장식 교육에서 벗어난 ‘자기주도적 학습 능력’, ‘자기가 좋아하는 공부를 한 내력’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쓰일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입학사정관들이 1순위 선발 요건이라고 말하는 ‘공교육에 대한 충성심’은 전적인 ‘공장 주입식 교육’의 상징이요, 반(反)자기주도적 학습의 이력입니다. 공장에서 던져주는 지식만 열심히 습득한 학생을 ‘주도적 인재’, ‘창의적 인재’라며 눈 가리고 아웅 하겠다는 것입니까? 물론 ‘학교생활기록부’에서 내신이 전부는 아닙니다. 학교생활기록부를 통해 ‘틀 안에서의 주도적 학습능력’을 측정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주도적 학습 능력을 지닌 학생은 공교육에 적응하지 못 한다는 견해를 지닌 교육학자도 많습니다. 또한 입시생 중에는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오래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참된 주도적 학습 능력’을 지닌 이들을 위한 ‘창의 전형’은 ‘정말로’ 창의적이어야 합니다. 정말로 창의적인 전형이라면 학생 내면의 열망을 존중하면서도 대학 수학 능력을 종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학술 에세이’와 ‘작품’으로 학생을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름만 수시모집이지 실제로는 1년에 단 한번만 응시할 수 있기에 ‘수시’ 모집이란 이름값을 못 합니다.
- 도대체 ‘수시’란 이름을 왜 붙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시’라는 표현이 담기면 응시자가 자유롭게 응시할 수 있다는 열려있는 느낌이 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일까요? 1년에 단 한번만 대학에 응시할 수 있다는 사실은 대학입시를 위해 다른 일을 접고 입시에만 ‘올인’해야 한다는 무거운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대학은 국민 모두에게 열려있는 공간이 아니라 인생의 ‘한때’에만 응할 수 있는 ‘폐쇄적인 상아탑’이라는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이는 현대 사회와는 동떨어진 제도이기에 교육 선진국들은 ‘정말로’ 수시모집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평생교육과 인문학 대중화를 하겠다며 공공기관에서 인문학 강의가 종종 열리긴 하지만 일방향적, 일회성, 자극성 강연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 하고 있습니다. 공공기관이 가볍게 주최하는 인문학 행사에는 쌍방향적 소통, 인문적 깊이가 생기기 힘듭니다. 그러므로 평생교육은 최고 교육 기관이 제대로 책임져야 합니다. 국민들의 인문학 열풍과는 정반대로 인문학과를 폐지하는 학교가 많다고 하는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고교생 위주로만 학생을 선발하기에 벌어진 폐단이기도 합니다.
반(反)인문적, 반(反)창의적 기준으로 학생을 선발하겠다는 폭력적인 독재자 앞에서 창의적 인재는 좌절하고 분개합니다. 대입제도는 배고픈 사람 앞에 좋은 음식 가져다 놓고는 이 음식을 먹으려면 개처럼 자기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는 폭력배와 같습니다. 이처럼 ‘광기에 휩싸인 입시제도’는 호기심을 품게 만듭니다. ‘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할 교육제도가 어떻게 이토록 반(反)현대적, 반(反)인문적일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원리는 무엇일까?’, ‘지성인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왜 보고만 있을까?’. 이 글은 이러한 의문을 쫓은 결과입니다.
[창의 전형]
창의 인재를 선발하는데 적합한 제도를 세부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제안하는 창의 전형이란 지원자가 제출한 학술 에세이(3000~30000자 내외) 및 작품을 토대로 지원자를 평가하는 제도입니다. 이는 가장 간명하면서도 가장 이상적인 제도입니다.(언급한대로 수능-내신을 중점으로 한 입시 제도를 유지하되, 소수 전형으로 운영하자는 소리입니다.) 이 제도는 지원자의 특정 학문에 대한 열정, 실력, 혁신성 모두를 총체적이면서도 진실하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현행 입학사정관제 자기소개서 양식은 지원자가 살아온 인생사와 비전을 작성하라는 공간만이 유효할 뿐, 그가 탐구해온 학문에 대한 에세이를 들어보고자 하는 공간은 거의 없습니다. 자신이 심도 있게 탐구한 학문을 1000자 이내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극도로 함축해서 표현할 경우 학술적인 전개를 할 수는 없고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면접관은 이러한 학술 에세이를 가치 있게 여기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입학사정관제 평가 기준은 지원자의 공교육에 대한 복종성과 성실함이 가장 중요하며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포부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입학사정관제 자소서 양식에 학술 에세이를 쓸 수 있는 공간이 빈약한 이유는 합격 기준에서 학교생활기록부의 반영 비중을 높이기 위한 ‘짜고 치는 고스톱’인 것입니다. ‘1000자 이내의 감언이설’로 포장한 ‘내신이라는 내용물’을 가지고 학생을 평가하겠다는 것입니다. 정녕 이런 의도인지 궁금하여 교육부와 대학 입학처에 정중히 문의해보았습니다. 반론을 기대했으나 애석하게도 이런 의도가 맞는다고 하더군요. 이는 세월호 참사에 분개한 국민이 대통령이나 선장에게 ‘일부로 그런 것은 아니겠죠?’ 라는 역설적 물음을 던졌더니 ‘일부로 그랬다.’고 답하는 격입니다. 아마 응대하신 분이 입학사정관제의 본질을 잘 모르는 미숙한 분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학문을 주도적으로 탐구하지 않고 수능-내신이라는 공교육 제도에 반항 없이 순응한 입시생들은 기존의 입시 제도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모릅니다. 다들 열심히 순응해서 대학에 갔는데 왜 그렇게 유별을 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학문을 주도적으로 탐구할 정도로 창의적인 인재는 작금의 입시 제도에 순응한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모독임을 압니다.
“대학이 다시 붐비기 시작한다. 새내기들의 눈길들이 쳐다보기가 아까울 정도로 너무나 곱다. 대학이란 도대체 뭔가 하는 두리번거리는 그런 눈길의 의구심도 예쁘기만 하다. 해맑은 얼굴들이지만, 저들의 속은 시커먼 응어리들로 가득 차있을 것이 뻔하다. 대학에 들어오기 위해 지난 3년간 그들의 영혼을 입시마왕에 저당 잡혔던 그들이니, 그들 가슴속에 제대로 변변하게 남아 있는 것이 있을 리 없다. 대학의 문을 사선삼아 넘어 온 저들이니, 정신적으로는 공황 바로 그런 것일 것이다. 저들이 대학에서 제대로 공부할 수 있으려면, 생명줄처럼 기대었던 저들의 암기학습 병독부터 해독시켜야 한다. 저들의 눈은 입시병독 때문에 아직도 기묘한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한준상(연세대 교육학과 명예 교수)
학생이 탐구한 학문의 결과물로 학생을 평가하는 제도가 생긴다면, 학생에게 반(反)대학수학능력인 ‘암기학습 병독’을 심어주지 않고 ‘참된 대학 수학 능력’을 길러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학위논문으로 학력(學力)을 평가하여 학위수여 여부를 결정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학생이 제출한 학술적 에세이로 학생을 평가한다면 최종적인 구술면접에서 학술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로써 면접관은 응시자가 지원 학과에 실제로 어느 정도의 이해를 지니고 있는지 날카롭게 가늠할 수 있으며 응시자가 에세이를 직접 작성한 것인지의 여부도 점검해볼 수 있습니다. 수능-내신에 강압적으로 쏟아야 하는 막대한 시간을 학생이 원하는 학문에 쏟을 수 있게 해준다면 주도적 학습력, 상상력, 호기심, 탐구심을 공장식 교육 보다 수십 배 이상 길러줄 수 있습니다.
이 제도는 ‘능동적인 논술’입니다. 학위 논문을 쓸 때는 대학이 논문 주제를 정해주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학생 스스로 연구 주제를 정하고 혁신적인 논문을 작성하는 것이 미덕입니다.(그러나 콩 심은데 콩 나듯 혁신적인 논문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대학입시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 혁신적인 학술 에세이를 작성하여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겠다고 나선다면 지성인이나 대학 관계자들은 그 사람을 냉대하기 보다는 한마디 덕담이라도 건네고 반겨줘야 하는 것 아닐까요?
‘수시’ 모집이라는 이름이 유효하려면 이런 행사가 최소한 4개월에 한번 정도는 열려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대학 수학 능력’을 유효하면서도 공정성을 잃지 않는 방법으로 측정하는 제도가 아니겠습니까? 이 제도가 지닌 ‘공정성’의 핵심은 누군가 대필해준 글을 들고 요행으로 문답법을 익힌 학생을 골라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짧은 자기소개서를 평가했을 때 보다 면접관의 역량이 지금보다 중요해질 것이고 인력도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제도 보다 더욱 까다롭게, 입시생과 1박2일 동거하며 평가하는 제도를 지닌 국내 유명 대학도 있으며, 교육 발전과 경제 발전의 밀접한 관계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시도해볼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획일화된 교육으로 인해 천재적인 인재들이 자신의 재능과 가치를 마음껏 꽃피우지 못 하고 있습니다. 이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엄청난 손실입니다. 창조경제시대를 제대로 맞이하려면 교육 제도부터 창조적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창의적 인재가 한다는 ‘주도적 학습’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저의 사례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인생의 유한함에 대한 성찰, 인간과 우주의 관계에 대한 강렬한 탐구심을 지녀왔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철학-종교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7세 때는 우주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화두에 목숨을 걸고 정진한 끝에 화엄 사상을 영성적으로 체험했으며(견성-해인삼매) 그 후 약 10년간 독학으로 동양철학과 현대명상에 대한 총체적인 공부를 하며 영성과 철학에 대한 다각도의 통찰을 길렀습니다. 이 내공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논리 전개’를 중시하는 이성적인 서양 철학과 ‘영적인 깨달음’을 중시하는 직관적인 동양 철학을 상호보완적으로 융합하고 혁신하고자 하는 학문적 비전도 생겨났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대학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며 대학에 입학하여 열정적이고 순수한 자세로 수학하여 저의 사상을 가다듬고자 합니다.”
(짧게 요점만 간추려 보았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의 ‘영성철학’편에 있습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학문이 있다면 비싼 사교육을 받지 않더라도 상당한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사교육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 교육을 통해 진정으로 값진 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정작 학생 자신은 원치도 않는 사교육을 강요받습니다. 공교육에 치중한다고 사교육 문제가 조금이라도 해결 되었습니까? 오히려 대부분의 학생들은 초등학생부터 밤늦도록 사교육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사교육을 받는 주된 이유는 ‘학교 공부만으로 전 과목을 잘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전 과목을 획일적으로 강요하는 공교육을 고집한다고 사교육이 줄어들 리 만무합니다. 사교육을 없앨 수 없다면 학생이 원하는 사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한국 청소년들의 학업성취도(PISA)가 세계 일류 수준인 것으로 나타나자 정부에선 유럽과 미국의 교육정책자들을 국내에 초청하여 좋은 이야기를 듣고자 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공교육이 모범적이거나 창의적이라고 주장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으며 PISA점수가 높게 나온 이유는 학부모들의 교육열과 사교육 열풍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는 공공기관이나 학교가 맞춤형 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여건이 지금도 됩니다. 또한 창의적인 입시 전형 때문에 사교육시장이 증가하는 일이 만에 하나 발생한다면 창의 전형의 합격 기준을 더욱 까다롭게 만들면 되는 문제입니다. 수능-내신제도보다 창의 전형의 합격률이 떨어진다면 누가 기꺼이 그 시험을 치르겠습니까? 평가 기준도 획일적이지 않은 시험을 누가 기꺼이 치르겠습니까? 진정으로 자신의 학문에 뜻있는 사람만이 응할 것입니다.
자신이 탐구하고자 하는 학문이 뚜렷한 사람은 이미 사교육 문제를 초월해있습니다. 각 분야의 석학, 장인, 대가들을 보십시오. 그들 중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그들이 그런 경지에 오른 것이 비싼 사교육 때문입니까? 그들을 대가로 만들어준 가장 중요한 가치는 내면의 진실한 열정입니다. 그들은 삶과 학문이 하나가 된 ‘주도적 학습’을 했기 때문에 역경에 굴하지 않고 대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위대한 창의적 업적은 언제나 능동적인 토양에서 자라납니다. 혁신적인 철학자들의 전기를 보면 그들이 얼마나 지독한 반항아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능동적 탐구 정신과 기존 제도에 대한 반성적 사고는 학문-사회의 진보를 가져다주는 근본적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창의적 인재는 자신의 창조성을 보호하기 위해 황폐한 토지를 거부하고 비옥한 토지를 개척하고자 합니다.
대학은 ‘창의적인 인재’가 학문을 연구하기에 적합한 공간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학은 ‘좋은 음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저항하는 것은 창의적인 인재를 거부하는 ‘전체주의적인 대입제도’입니다. 대학이 진정 21세기를 선도할 창의적 인재를 선발하고자 한다면 창의적 인재를 수용할 수 있는 탄력이 필요합니다. 제가 진학하고자 하는 ‘철학과’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철학과’가 원하는 인재는 어떤 특성을 지닌 사람인가요? 능동적이고 반성적인 자세로 스스로 철학할 줄 아는 사람 아닌가요? 그렇다면 철학적-반성적 사고와는 무관한 ‘학생기록부’ 따위가 아니라 ‘진지한 성찰이 담긴 철학 에세이’로 학생을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요? 작금의 대학 입시 제도는 철학과에 입학하고자 한다면 반(反)철학적인 태도를 습득하라는 추태를 부리고 있습니다.
창의적 인재는 자신의 창조적 영혼을 죽여 가며 기계가 되어야 한다는 현실 앞에 분개합니다. 던져주는 먹이만 받아먹는 감방의 죄수가 되고자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느끼지 못하는 학생은 창의적인 학생이 아닙니다.(이런 이야기는 국내만 하더라도 강신주 박사, 최진석 교수 같은 인문학계 스타를 필두로 과반수이상의 지성인들이 줄기차게 주장하는 이야기입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말 뿐만이 아닌 직접적인 도움을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좋아하는’을 통하면 확실히 보편적인 기준이나 합리적 계산 혹은 객관적 표준 등을 벗어납니다. 누구나 숭앙하는 ‘이념’을 따르지 않습니다. 모두가 가치 있다고 믿는 사회적 합의를 추종하지도 않습니다. 체계를 초월할 수 있지요.” -최진석(서강대 철학과 학과장)
[사자와 개]
대학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들고 학생들을 ‘문제 잘 푸는 기계’로 길들이고 있지만, 창의적 인재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유대인 학생들이 차별대우를 극복해 낸 것처럼 저도 부조리한 제도에 굴복하지 않고 저만의 방식으로 이를 극복할 것입니다.
최근 어느 명문대 철학과 교수님을 만나 입학사정관제 평가 방식에 대해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그 교수님 말로는 입학사정관제 자소서 서류를 평가하는 심사관이 응시자가 지원한 학과의 교수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지원자가 자기소개서에 지원 학과와 관련된 학술적 에세이를 아무리 잘 써서 제출해도 면접관이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말씀이겠지만 채점 기준이 ‘학술 에세이’와는 별 상관없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대학은 ‘주도적 탐구’, ‘생산적 지성’, ‘가치 실현’을 표방하지만 정작 입시 제도는 지극히 모순적으로 그것을 배반하는 짜임새를 보이고 있습니다.
“미친개는 흙덩이를 쫓아가지만 사자는 흙덩이를 던지는 사람을 물어뜯는다.” -대주혜해
북한에서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얼마나 모진 고초를 겪겠습니까? 그 혁명가가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자유정신, 지성적인 삶, 인간다운 삶에 대한 동경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주위에 없다는 것입니다.
대중들이 이토록 불합리한 제도를 보고도 그토록 순응적인 이유는 셋 중 하나입니다.
1.비판적-이성적 사고능력과 창의적-주도적-생산적 태도가 없기에 불합리함을 인지하지도 못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은 이런 일을 굳이 신경 쓰고 싶지도 않은 것입니다.
2.위와 같은 문제를 인지하고는 있으나 이를 극복할 힘과 시간이 없었기에 순응한 것입니다. 철학적인 문제보다는 자신의 밥그릇이 더 중요하기에 기성 제도에 순응하고 나름의 합리화를 곁들인 것입니다. 봉건시대의 농노가 신분 제도에 대해 합리화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3.근대적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획일화된 공교육에 나름의 이유를 지닌 채 만족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부류 대해서는 굳이 왈가왈부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1번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들은 비판적-반성적 사고 능력이 부족하기에 집단 세뇌를 인지할 수조차 없습니다. ‘남들이 다 하니까, 권력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라고 하니까, 한국의 현실이 그러니까 괜히 골치 아픈 생각하지 말고 겸허하게 살자’라는 심산입니다. 이런 학생들은 구체적으로 ‘한국의 현실’이 무엇인지 교육사회학적으로 파고들지 않습니다. 저는 그들이 잘 못 되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세상 편하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처럼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비판적, 반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철학과에 어울리는 철학자가 아닐까요? '왜'라는 의문과 비판적 사고로 무장한 투사만이 집단 세뇌에 걸려들지 않고 반성적 사고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투사만이 ‘한국의 현실’이 무엇인지 고찰합니다.
2번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들은 학창 시절 문제를 인지하고는 있었으나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기성 제도에 순응했습니다. 그들은 기성제도에 순응하여 이미 기득권 세력이 되었고 그 후로는 문제의 심각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이 아직도 이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기득권 세력이 되고 나서도 입시 제도를 개혁하는데 힘을 쏟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기득권 세력이 된 후에 그런 태도를 갖기는 어렵습니다. ‘자기 충족적 이유’라는 본능이 발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대학 입시 문제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못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저의 고등학교 담임교사는 저에게 후자의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교육 제도의 문제를 자각할 수 있을 정도로 예리한 지성은 갖추되 제도에 순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을 보고 있으면 타협하는 순간 ‘관성의 늪’ 속에 빠져 다시는 나올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좀비나 늑대인간에게 물리면 자신도 좀비나 늑대인간이 됩니다. 알렉산더 대왕에게 일침을 가할 수 있는 디오게네스적 용기 없이 어찌 철학을 하고 쇠락한 제도를 개선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안락함 보다는 진실을 쫓는 트루먼이 되고자 했습니다.
“나는 모든 일을 받아들이고 조용히 있지 못 하기 때문에 '새 조국'에서 무서운 아이가 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
저는 프로크루스테스의 가랑이 밑을 기어가기 위해 경쟁하지 않고 그에게 당당히 맞서고자 합니다. 폭군에게 저항하여 현자답게(philosopher) 음식을 먹거나 굶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입니다. 이 글이 비장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하의 자료는 서울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유일무이한 입학사정관제 인재상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KoiinH5g49Q
(저는 서울대와 서강대에 지원할 계획인데, 그 이유는 두 대학이 철학과 교수진뿐만 아니라 종교학과 교수진 또한 최고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서울대 입학처에 문의해보니 입학사정관제 인재상 관련 자료는 현재로선 위 영상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서울대학교는 공교육의 테두리 안에서 학업에 충실하고 이를 통해 우수성을 보인 학생들을 선호한다는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울대학교 입학사정관)
-‘자신의 학문’과는 관련이 없는 ‘획일화된 공부’에서 벗어나 ‘주도적인 학습’을 한 사람은 선호 대상에서 제외되나요?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학교생활에 충실하며 자기 주도적 학습을 할 수 있는지의 여부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주도적 학습이란 학교생활 중에 스스로 고민하며 스스로 계획하고 스스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며 미래의 성장 가능성을 확인시켜주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대학교 입학본부장)
-자기 주도적 학습에 대한 뒷 말씀은 지당하신 말씀이지만 학교생활에 충실하라는 앞말씀은 뒷말씀과 비례하지 않습니다.
과거 서양인들은 '골프는 백인에게 알맞은 운동'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보면 참 우스운 편견이지만 여기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럴듯한 인체생리학, 문화사적 근거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그 근거를 기준으로 생각하며 정말로 사실이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타이거우즈를 보면 알 수 있지요. 이는 '자기 충족적 예언'에 불과했습니다.
공장식 교육에 충실한 것과 주도적 학습은 서로 비례 관계가 없습니다. 자기 주도적 학습에 능한 ‘상급’ 학생이 공장식 교육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학교생활에 충실한 것과 학습능력의 비례 관계는 ‘중급’이나 ‘하급’ 학생에게만 유효합니다. ‘중-하급’ 학생들은 학교생활에 충실하지 않으면 방탕한 생활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급’학생은 ‘중급’학생이 되기 위해 학교생활에 충실해야 한다는 논지는 타당할 수 있습니다. '중-하급'의 인재에게는 공교육 성적이 대학 수학 능력을 가늠하기 위한 '필요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도적 학습에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은 그와 반대되는 양상을 보입니다. ‘상급’ 학생은 공교육 제도에서 갑갑함을 느끼고 자신의 길을 걷곤 합니다. 그러므로 학생의 수준별로 평가의 척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명문대학들도 수능-내신 점수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그들은 탄력성 또한 갖추고 있습니다. '상급'에 해당하는 인재를 판별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한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수능-내신제도는 알 속에 들어있는 새의 가치를 측정하기 위한 제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알을 깨고 나온 새에게는 알 껍질 자체가 없습니다. 그런데 알 껍질을 가지고 새의 자질을 평가하겠다고 나선다면 이미 창공을 날고 있는 새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가치 평가의 척도는 유연해야 합니다. 알 껍질을 초월하여 창공을 나는 새의 가치는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요? 그가 보여주는 궤적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 새가, 그 조나단이 얼마나 창조적인 비행을 하고 있는지 날고 있는 궤적을 바라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철학으로 그려내는 저의 궤적입니다.
[전체주의를 깨부수는 주도적 학습]
위대한 학자의 자질은 남녀노소를 가리며 찾아오지 않습니다. 20살 전후의 등 떠밀려 입시 치른 학생들만 위대한 학자가 될 자질이 있을까요? 위대한 학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은 언제 어떤 사람에게서 나타날지 모릅니다. 가정주부가 우연히 어떤 학문에 큰 매력을 느껴 세계적인 석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고 교육기관은 모든 국민에게 ‘공정하게’ 열려있어야 합니다. 언급했듯이 ‘공정함’은 ‘똑같음’과 다릅니다. 음대에 가겠다는 사람을 미술 실력으로 평가하는 것은 공정한 것이 아닙니다. 공정함은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됩니다. 하나는 ‘주도성’, ‘창의성’, ‘전문성’이라는 평가의 척도입니다. 다른 하나는 음대 지원자를 음악으로 평가할 수 있는 ‘적합성’입니다.
강신주 박사에 의하면, 자신이 지향하는 학문을 탐구하지 않고 공교육의 강압적 제도에 순응한 사람들은 학문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와 열망이 없다고 합니다. 물론 모든 학생이 그런 것은 아니겠으나,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외부로부터 주입된 ‘자신과 분리된 학문’을 충실히 공부한 것입니다. 그들의 노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의 것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며 자신을 파괴하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하게 만든 원동력은 대게 ‘참된 학문적 탐구심’에 있지 않습니다. 참된 학문적 탐구심은 자신이 탐구하고 싶은 것을 탐구하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삶과 학문이 하나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원하는 공부가 아닌 밖에서 강제로 주입한 ‘죽은 지식’을 방대하게 습득하기 위해서는 부조리한 심리상태를 감내해내야 합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주요한 원동력은 ‘남들 보다 앞서고자 하는 경쟁심’입니다. 대학이 이런 학생을 선호하니 학문의 혁신이 일어나는 대신 학벌주의 문화의 병폐만이 난무하는 것입니다.(학벌주의가 불합리한 제1의 요인은 학벌=학력(學力)=능력이라는 등식이 타당하지 못 하다는 것에 있습니다. 좋은 대학에서 제공하는 양질의 교육이 학력을 향상시켜준다는 논리는 타당합니다. 그러나 학벌을 결정짓는 입시 제도가 학생의 학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 할 뿐더러 오히려 왜곡시킨다는 것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릇된 입시 제도가 학벌주의를 부추기는 이유는 ‘보상심리’ 때문입니다. 자신이 정말 원해서 공부를 했다면 '여정이 곧 보상‘입니다. 그러나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하여 억지로 고학력을 취득한 사람,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고위직에 입사하기 위해 원치도 않는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사람이 보상심리가 발동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물론 자신의 학문을 하고 싶어 일시적인 부조리함을 감내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육학자 한준상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반(反)학문적 태도를 온 몸으로 습득해야 합니다.(“저들이 대학에서 제대로 공부할 수 있으려면, 생명줄처럼 기대었던 저들의 암기학습 병독부터 해독시켜야 한다. 저들의 눈은 입시병독 때문에 아직도 기묘한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이토록 모순적인 제도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교육이 창의적 영혼과 감성을 박살내고 경쟁심을 부추기며 부조리를 감내케 하니 어찌 온전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권력자에게 순응할 수 있으며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기계가 될 수 있는가, 얼마나 경쟁심에 휩싸인 지식인이 될 수 있느냐를 평가하는 것이 학구적 자질을 평가하는 척도입니까? 얼마나 잘 맨땅을 파느냐를 테스트 하는 것이 ‘주도적 학습능력’을 평가하는 척도입니까? 군대 맨땅파기에도 명분은 있습니다. 맨땅파기는 근력을 길러주고 충성심을 길러줍니다. 수능-내신도 분명 맨땅파기의 근력에 해당하는 어떤 지력과 부조리함에 순응하는 전체주의적 복종성을 길러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현대 사회에 얼마나 유용할까요? 작금의 교육제도는 학생들을 '일차원적 인간'으로 훈련시킵니다. 주입식 교육은 비판적 사고, 자유로운 사회적 상상력을 '상식과 통념'으로 길들입니다. 2010년 G20 서울정상회의 폐막식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기자들에게 질문권을 주었지만 아무도 질문하지 못 한 사례가 있습니다. 이런 현상 이면에는 주입식 교육 문화와 군대 문화로 이어지는 전체주의적 복종성이 무섭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틀에 벗어난 질문이나 생각을 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통념 주의'가 그들의 입을 틀어막고 발목을 붙잡은 것입니다. 한국에 정착한 외국인들이 가장 적응하기 힘들어 하는 것이 튀는 사람을 참지 못하는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문화라고 합니다.
[통섭 제1의 가치]
혹자는 공교육을 옹호하기 위해 이런 의견을 제기할 것입니다. ‘학생은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골고루 섭렵하는 것이 필요하다.’ 마침 근래에 떠오른 이슈 중 ‘학제(Interdisciplinarity)’, ‘통섭(consilience)’이란 주제가 있습니다. 저 역시 동서양 철학의 통섭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공교육의 다과목 주입식 교육은 열려있는 학제적 성격의 공부가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양한 과목을 학생에게 제공하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든 과목에 높은 수준의 테스트를 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학생들이 다양한 과목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것과 모든 과목을 시험 볼 것이니 외우라고 강요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대학 입시 제도는 대다수 과목에 대한 획일적인 기준을 요구합니다. ‘정해진 입력’과 ‘정해진 출력’이라는 ‘정답’을 요구하며 창의성을 파괴하고 주입식 교육의 전쟁터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공장식 축산업과 같은 환경 속에서 학생들을 의자에 묶어놓고는 등 뒤에 서늘한 총구를 겨누고 던져주는 지식을 빨리 두뇌 속에 처박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있습니다. 반항하거나 더딘 학생은 총탄에 맞아 처참히 쓰려집니다. 다른 학생들은 죽어가는 친구를 바라보며 밤잠을 줄이고 더욱 분발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행복지수가 꼴찌고 자살률이 1위인데 그 자살의 거의 절반이 10대들이란 사실입니다. 십대들이 이성 때매 죽습니까? 아니에요. 거의가 다 성적 때문에 15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게 우리나라 현실입니다.” -조정래(소설가, 교수)
(절반이 10대란 이야기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런 환경 속에 자유분방한 성격의 학제적 공부와 통섭이 있습니까? 이런 환경에 익숙해진 학생은 대학에 들어가서도 열심히 주입식으로 파고들어 학점을 높이고자 경쟁할 것입니다.
다양한 학문의 융합은 누가 합니까? ‘융합을 하는 주체’는 능동적 태도, 선입견이 없는 태도를 바탕으로 융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제적 성격의 공부를 강요하고 주장하기 전에 능동적인 태도를 길러주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우선입니다. 능동적인 태도를 지닌 사람, 열려있는 사고를 하는 사람, 자신의 삶-열정-학문이 하나가 되어 몰입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독창적인’ 통섭과 융합이 창발적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 사람은 다방면에 대한 호기심과 주도적 탐구심으로 똘똘 뭉쳐있습니다.
School의 어원인 그리스어 Schole은 여가를 의미합니다. 학문은 본래 노동이 아니라, 아무 대가 없이 즐길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여기서 말하는 노동은 경제적 의미가 아닌, 하기 싫은 것을 강압적으로 한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사회의 계층적 구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을 것이나, 이는 생산적 학문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태도이기도 합니다. 무언가가 정말 좋아서 능동적 몰입을 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악상(樂想)이 떠오릅니다. 특히 문학, 철학, 예술은 인간의 삶과 직관된 학문입니다. 자신의 삶과 하나 되지 않고선 제대로 공부할 수 없는 학문입니다. 자신의 삶과 분리된 공부는 박물관의 화석을 씹어 먹는 것과 같습니다.
학문과 삶이 하나 된 상태를 유지하다보면 일부로 무언가를 혁신하려고 몸부림치지 않아도 개척하고자 하는 주제가 자연스럽게 명확해집니다. 이번에도 저의 관심사인 철학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철학은 광범위할 뿐만 아니라 서로 대립하는 사상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삶과 학문이 하나 된 사람, 능동적인 학습을 하는 사람은 광범위한 철학사를 던져주는 대로 낱낱이 파고들기 보다는, 자신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와 관련된 철학을 공부합니다. 이는 혁신적인 업적을 남긴 근현대 철학자들의 일화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낡은 철학을 무시했다고 합니다. 새로운 시대의 흐름이나 자신이 탐구하고자 하는 주제와 맞지 않는 철학에서 참을 수 없는 갑갑함을 느꼈습니다.(이는 물론 사상적 낡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시기적으로 오래된 고전이라도 사상적으로는 현대적일 수 있습니다. 또한 낡은 사상이라 할지라도 일면에서는 세련된 점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동양의 유가 사상을 보면 일면에는 화엄이 있으며, 소크라테스 관련 원전은 지금 보기엔 궤변 수준이 많지만 문학적인 가치는 높습니다.)
공대생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관심사인 ‘수리 철학’ 뿐만 아니라 세계 철학사를 모두 연대순으로 공부하고 있었더라면 젊은 나이에 철학사에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까요? 그에게 주도적-몰입적 성격이 없었더라면 늙어서도 철학사에 무언가를 남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삶과 학문이 하나 된 사람은 명확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주도적 학습’을 하게 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철학뿐 아니라 문학, 예술, 과학 등 어떤 학문을 보더라도 대가들에게는 항상 ‘해결하고자 하는 분명하고 직접적인 주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통섭이 중요하다고 해서 자신이 원치도 않는 학문을 골고루 공부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통섭의 원동력은 ‘통섭을 하는 주체의 능동성과 독창성’에 있습니다. 통섭은 '주도적 탐구'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창의 전형은 한 가지만 잘하는 전문가를 뽑는 전형이 아니라 통섭적인 인재를 뽑는 전형이기도 합니다. 창의적인 인재에게 배움은 의무가 아닌 표현을 위한 수단입니다.
“배우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리면 표현하는 능력이 거세되기 쉬워요.” -최진석
“남의 철학을 배우지 말고, 스스로 철학하는 것을 배우라!” -임마누엘 칸트
[현대 교육 제 1의 가치]
제가 생각하는 현대 교육의 본질과 목표는 '주도적 학습 능력', '비판적 사고 능력', '합리적 토론 능력'을 길러주는 것입니다. 개별화-특성화된 주도적 학습은 창의적-융합적-생산적 인재를 위해 필요하며, 토론을 통한 비판 능력 강화는 '비판적인 시민', ‘열린 토론과 학습의 문화’을 돕습니다.
주도적 학습 능력을 위해 필요한 것은 삶과 학문이 하나 될 수 있게끔 학생 내면의 열정을 일깨우는 교육이며, 당장 시도할 수 있는 것은 대학이 이런 학생을 위한 입시 제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토론 능력은 ‘통념주의’, ‘논쟁을 꺼려하는 분위기’를 없애고 자유 토론의 가치를 존중할 때 발전합니다. 이 역시 대학에서 추구하는 가치지만 정작 공교육은 이를 억압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재의 교육제도-대학입시제도는 ‘고장 난 자동차’일 뿐만 아니라 역주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입시제도에 늘 거론되는 이야기로 ‘정치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각계각층의 지성인과 교육정책자분들께서는 제가 언급한 문제들을 인지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수능-내신 위주의 제도를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그들이 ‘대학 간판의 신분제’와 ‘사회적 공정함’이라는 정치적인 문제에서 변명거리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위정자들은 대학 간판이 사회 계급을 나타내는 자격증이라는 관념을 지니고 있으며 이 계급을 성취하는 데에 ‘빈부격차’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정치적인 문제를 교육에 끌어들였습니다. 이 문제 때문에 현대의 대학은 타락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정치가 개입되자 대학은 고유의 순수함을 잃고 공산주의적 대학, 제국주의적 대학이 되었습니다. 참된 학자를 선발하고자 하는 태도는 사라지고 학문을 하나의 노동으로 격하시켜버렸습니다. 다원화된 평가 제도를 도입하면 공교육이 감당할 수 없는 ‘맞춤식 학원’이 생겨나 사교육 빈부격차가 생겨날 것이라는 기우 하나로 초가삼간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사교육 문제는 글의 서두에서 이미 살펴보았으니, 이번엔 다른 관점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왜 ‘공교육’은 ‘다원화’되면 안 되는 것일까요? 다원화 교육을 통해 교육 수준이 전문화되면 높아진 수준을 공교육이 감당하기 힘들까봐 두렵습니까? 공교육은 사교육보다 품질이 떨어집니까? 그래서 하향평준화를 하겠다는 것입니까? 사교육이 두렵다는 이유로 교육 수준을 퇴보시키겠다는 것은 사냥꾼이 두려워 땅에 머리를 박고 아무 것도 보지 않겠다고 고집피우는 타조와 같은 행동입니다. 만에 하나 사교육이 문제된다면 창의 전형의 비율을 조정하거나 다른 문제를 조절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제도야말로 현대 교육 제 1의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학생 내면의 열정을 일깨워주는 교육, 융합-창의-생산적 교육은 현대 교육의 생명이자 본질입니다. 창의 전형을 반드시 도입해야 하는 이유는 자녀에게 장애가 있든 없든 그 자녀를 길러야 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인 것과 같습니다. 사교육, 공정함, 유효성의 문제는 모두 부차적인 문제이며 ‘주도적 학습’, ‘창의적 사고’, ‘개인의 자유’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근대 교육 제1의 가치는 ‘전체주의적 합리성’, ‘교양 수준의 지식’이었기에 지금과 같은 공교육이 유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교육 제 1의 가치는 ‘개인 내면의 열망과 창의성을 일깨워 혁신적인 인재로 길러내는 것’입니다. 이런 교육은 ‘순응하고 따르는 것’ 보다는 ‘상상력, 호기심, 탐구심’을 길러 ‘가치 창조와 실현’을 돕습니다. 지금 당장 공교육 전체를 이렇게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실현 가능한 대입 제도의 즉각적인 변화를 주장합니다. 현대 교육 제1의 가치를 지닌 인재를 선호하는 제도를 만드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며 어렵지도 않습니다.
[창의성의 메커니즘]
‘창의성’은 인간과 동물이 구별되는 지점입니다. 동물들도 일정 수준의 논리력은 있으며 ‘정해진 입력’과 ‘정해진 출력’의 원리로 이를 훈련시킬 수도 있습니다. 작금의 공장식 교육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창의적 교육의 원리는 무엇일까요? ‘새로운 입력’에 대응하는 ‘새로운 기억의 조합’을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상황, 맥락적 출력’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융합, 통섭은 이러한 창의성의 메커니즘과 직관된 가치입니다. 이런 능력은 작금의 교육 보다는 차라리 ‘쌍방향 전략 게임’을 할 때 길러질 수 있습니다. 교육이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닌 것처럼 게임이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단순 반복적, 무의미한 경쟁적 게임은 자폐증과 조급증을 유발하는 반면, 바둑과 같은 쌍방향 전략게임은 집중력과 창의성을 길러줍니다. 쌍방향 전략 게임을 즐기는 프로게이머들의 뇌파는 명상 상태에서 나타난다는 ‘세타파’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일반인은 집중을 한다고 해도 프로게이머들과 같은 정도의 세타파가 증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왔다. <그래픽 참조> 채교수는 “그동안 임상에서도 이 같은 증가폭은 보고된 바 없다”고 밝혔다. 또 정원장 역시 “일반에서 이 같은 변화폭은 본 적이 없으며 단 지난 1984년 LA올림픽 양궁 금메달리스트인 김수녕 선수의 대회 시 뇌파를 측정했을 때만이 이정도의 세타파의 증가를 보였다”고 지적했다.
(중략)
이번 실험은 KTF와 투나SG의 프로게이머(평균나이 22.5세)중 상위권 선수 9명을 대상으로 게임 전·후의 ‘뇌파의 변화’, ‘스트레스 관리능력’, ‘인지기능검사’ 등을 통해 이들의 능력을 평가했다. 실험결과, 일반인들에 비해 프로게이머들은 게임을 시작하면서 고도로 집중할 때 나타나는 뇌파인 ‘세타파’의 증가폭이 일반인에게서 나타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는 것이 관찰됐다. 또 외부자극에 대해 두뇌가 자극을 인지하고 판단을 내린 뒤 행동을 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국내 최고의 대학이라고 알려진 대학교의 학생보다 월등했다. 스트레스의 이완능력 역시 탁월한 것으로 조사됐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14&aid=0000126423)
동양에서 무술로 도(道)의 경지를 추구한다는 것도 이러한 ‘창의적인 쌍방향 입출력’ 메커니즘에 의한 것입니다. 앞으로의 교육은 ‘정해진 입력’과 ‘정해진 출력’으로 창의력을 죽이는 방향이 아닌 학생이 스스로 자신의 길을 새롭게 조합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학교가 창의력을 죽인다]
당신은 아마도 나를 몽상가라 부르겠지요.(You may say I'm a dreamer)
하지만 난 혼자가 아니랍니다.(But I'm not the only one)
언젠간 당신도 함께 하리라 믿어요.(I hope someday you'll join us) -Imagine, 존 레논
주옥같은 명사들의 강연회 <TED>가 시작된 지 20여년이 지났습니다. 20여 년간 진행된 강연 중 가장 높은 조회를 기록한 강의는 이 글의 주제와 걸맞은, 켄 로빈슨 경의(Sir Ken Robinson) “학교가 창의력을 죽인다.”(How schools kill creativity)라고 합니다.(그는 TED에서만 이런 주제의 강연을 여러 차례 진행했습니다.) 그는 저와 정확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육학자 켄 로빈슨은 획일화된 교육이 학생의 타고난 재능을 죽이고 있으며 이는 기후 변화와 같은 긴급한 범사회적 문제이기에 지금 당장 범사회적 차원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기후 변화에 대처하는 것이 한두 명 힘써서 되는 일이 아닌 것처럼 교육 제도 역시 공교육 차원에 손을 대야지 대안교육이라는 작은 울타리 안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건 우리가 당연하고 분명하다고 생각해온 것들에 대한 도전이기도 합니다. 개선이나 변화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다름 아닌 '무시무시한 상식이란 틀'인데요. "음, 그건 원래 그런 거라, 다른 방법이 없어." 모두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죠. (중략) 많은 관념이 현 세기의 환경에 맞춰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이전 세기의 환경에 맞춰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우린 여전히 그 관념에 최면 당해 있습니다. (중략) 패스트푸드가 우리 몸을 병들게 하듯이 패스트 교육은 우리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직선적 사고와 순종, 인적획일화에 기초한 교육 산업모델, 제조식 모델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중략) (가르치는 사람이 아닌) 가르쳐야 할 사람들에게 맞는 맞춤식 교육과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켄 로빈슨, <교육에서의 죽음의 계곡에서 벗어나는 방법>
"창의성의 핵심인 확산적 사고의 능력을 측정해보니, 유치원생의 경우 98%가 천재수준이었으나 자라나면서 이 능력을 비례적으로 잃어간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오직 한 개의 해답만이 존재한다는 주입식 교육 때문입니다." -켄 로빈슨, <교육 패러다임을 바꾸자> 요약
그의 강연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이유는 교육제도의 개선이 시급하다는 것을 그뿐만 아니라 과반수의 지성인들이 지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육자들은 교육제도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하나의 이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온갖 변명을 해대며 실질적인 개선은 미루고 있습니다. 그들에겐 위험을 감수하고 혁신을 주도할 만한 가치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근대적 가치 보다 현대적 가치를 선호하고, 유가(儒家)적 교육보다 도가(道家)적 교육을 선호하는 사람만이 교육제도를 실질적으로 개선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겐 피부로 와 닿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최근 공부의신 유상근 작가님의 강연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미 입학사정관제 관계자들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더군요. 저는 기겁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획일화된 공교육이 아닌 주도적 학습에 관심이 있고, 그런 학생을 원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이런 생각을 선구적으로 지니고 실천해온 인재를 외면한다는 것은 잔혹합니다. 현 입학사정관제의 치명적인 문제는 ‘현역 고교생’에 지나치게 치우친 나머지 ‘비현역 고교생’을 조금도 배려하지 못 하고 있다는 것, 말로는 획일화된 학교 공부보다는 주도적 학습을 한 학생을 뽑겠으니, ‘학생들이여 자신만의 꿈을 가져라’, ‘대학은 공부벌레를 원하지 않는다.’, ‘잘 노는 학생이 좋은 대학 간다.’, ‘대학 입시제도는 바뀌었다. 이제 입시제도는 다원화 되었으니, 고루한 학생들이여 공부만 하지 말고 꿈을 가져라’고 선동하면서도, 정작 학교생활기록부-교사추천서를 제1의 평가기준으로 선정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친구인척 하면서 뒤통수에 칼을 꽂는 냉혹함입니다.
물론 공장식 교육의 '틀' 안에서 나름의 주도성을 훌륭히 발휘한 학생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현행 입학사정관제에 가장 잘 맞는 인재일 것입니다. 이는 분명 ‘주도적 학습’에 있어서 발전적인 모습이니, 이런 점은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욱 주도적이고 더욱 창의적인 인재가 학교 안에 없을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주셨으면 합니다. 공장을 벗어나 검정고시를 치루거나, 이미 공장을 졸업한 사람들 중에도 얼마든지 창의적 인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혁명은 사소한 변화에서 시작됩니다. 대입 제도 혁신에 관심 있으신 분이 계시다면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저 같은 비운의 창의적 인재가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면 됩니다.(간단하게는 추천서를 써주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철학의 혁신과 교육의 혁신에 신호탄이 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종이 장영실을 등용시킨 사건이 ‘아름다운 화폭’으로 역사에 남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장영실과 세종 사이에는 친분이 없었을 뿐더러 엄청난 신분적 격차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간극이 오히려 ‘인문적 가치’를 탄생시킨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비록 초면이지만 아름다운 인문적 가치는 오히려 이런 조건에서 탄생할 수 있습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 ‘키팅’ 선생처럼, 눈먼 자들의 부패한 학교에도 등불 같은 존재가 계시길 바랍니다.
"어디서나 비슷비슷한 광물을 얻기 위해 지구를 갉아먹는 것처럼, 우리의 교육제도가 우리의 정신을 갉아 먹고 있습니다. 미래를 위해서는 도움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이를 가르치는 기본 원칙에 대해 재고해봐야 합니다. 조너스 솔크가 주장하기를 ‘세계의 모든 곤충들이 사라진다면 50년 이내에 모든 생명체가 전멸할 것이고 인간들이 전부 사라진다면 50년이내에 모든 생명체가 번창할 것이다.’ 그 말이 맞습니다. <TED>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이라는 재능이며 우리는 이 재능을 현명하게 사용하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얘기했던 몇몇 시나리오들을 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창의적인 능력을 보며 그 풍부함을 깨닫고 아이들을 보며 그들이 희망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의 과제는 아이들이 미래에 맞설 수 있도록 전인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미래를 볼 수 없을지 모르지만 아이들은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그들이 미래를 멋지게 만들도록 돕는 것입니다." -켄 로빈슨, <학교가 창의력을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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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 성 철 학 >
[철학을 하고자 하는 이유]
IT업계의 신화 스티브 잡스는 인문(人文)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습니다. PC와 스마트폰의 탄생은 문자와 종이의 탄생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자전거가 인간의 걸음 속도를 향상시켜주진 않았으나 인류의 이동속도에 큰 기여를 한 것처럼, PC와 스마트폰이 제공하는 각종 소프트웨어는 인류의 소통능력, 사고능력, 업무능력에 막대한 기여를 했습니다. 개인에게 환경을 지배할 수 있는 자유를 주고 삶의 밀도를 높여주었습니다. 과거의 인간은 홀로 신호를 기다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그 공간에 지배당하여 시간을 무료하게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대중교통을 이용해보면 안절부절 못할 정도로 무료해하시는 어르신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언제 어디에 있든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자유가 생겼습니다. 세계를 손안에 넣게 된 것입니다.
또한 잡스는 ‘애플의 DNA는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점에 있다’는 발언 하나로 전 세계에 인문학 열풍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합니다.(잡스가 말한 liberal arts는 인문학이 아닌 교양과목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technology와 대립시켰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문학이란 표현 역시 적합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발언에서 시작된 인문학 열풍이 인문학을 경영학의 하위 학문이나 자기계발서 수준으로 격하시켰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으니 인문학의 본질을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인문학은 순수과학과 마찬가지로 실용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인문학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과 우주에 대한 순수한 관심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문학의 기능은 무엇일까요? 흔히 ‘인간, 문명, 세상에 대한 다각도의 관찰’이 인문학의 기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을 다각도로 보게 해주는 것이 비단 인문학만의 기능일까요? 인문학의 고유성은 인간과 세상의 ‘가치’를 탐구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세상을 다양한 ‘가치의 시선’, 그 어떤 학문보다도 ‘폭넓고 종합적인 시선’으로 보게 해주어 자신의 관점을 훈련할 수 있다는 것에 인문학의 가치가 있습니다. 특히 철학과 종교는 삶, 죽음, 우주에 대한 가치 탐구를 가장 깊고 폭넓게 하며(가장 세밀하고 정확하게 조망하는 학문은 과학일 것입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란 무엇인지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이를 통해 인간과 세상에 대한 ‘문제의 발견과 조망’, ‘삶에 대한 종합 판단력’을 기를 수 있습니다. 실용적인 면으로는 대표적으로 문장력 강화, 스토리텔링이 있겠습니다. 스토리텔링은 패션, 건축, 음식, 의약, 정치 등 모든 분야에서 실용적으로 쓰일 수 있고 인문학은 스토리텔링을 풍성하게 해주는 자원이 됩니다.(물론 인문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실용성’은 하나의 가치체계일 뿐이지 절대적인 가치는 아닙니다.)
인문학이 함축하는 의미는 매우 광범위하지만, 최대한 간명하게 인문학을 정의해보았습니다. 이렇게 잡스와 인문학에 대해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 이유는 잡스가 선(禪)이란 인문학과 IT라는 기술을 융합했기 때문입니다.(이를 분석한 책으로는 ‘iMind’, 'Zen of Steve'가 있습니다.) 저의 오랜 화두는 선(禪)과 일(Job)을 조화시키는 것이었고 잡스는 이것을 선구적으로 보여줬습니다. 저는 이 때문에 잡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창조경제 붐이 일어나 IT계열의 창업도 공부해보았습니다. 각종 세미나에 참석하고 성공한 기업가들의 글을 탐독했습니다. 한국에서 성공한 기업가들은 대부분 이렇게 말하더군요. “자신이 원하는 가치가 아닌 고객이 원하는 가치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잡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객이 아닌 자신이 진정 원하는 가치를 찾아라.” 이것이 노예적 사업관과 주체적 사업관의 차이였습니다. 주체적 삶이란 사업을 하느냐 직장생활을 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가’에 달린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잡스는 “여정이 보상이다.”라는 도가(道家)의 속담을 좋아했는데, 이는 저 역시 늘 추구하던 가치입니다. 자신의 사명이 담긴 일을 해야만 “여정이 곧 보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 통찰은 제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진심을 다해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저의 일차적 관심사는 언제나 철학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창업에 뜻을 두고 있었을 때는 사업의 일차적 목표를 금전적 이득이 아닌 사업 철학에 두고 있었습니다. 탐독했던 서적들은 경영학 서적이 아닌 '승려와 수수께끼' 같은 사업 철학 서적이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를 저의 롤모델로 삼은 이유 역시 그가 잘나가는 기업가이고 억만장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불교철학과 사업을 융합시킨 ‘선구적 철학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한때 프로게이머 생활을 준비했을 때조차 게임과 철학을 융합시키는 것을 게임을 하는 제 1의 이유로 삼았었습니다.(이소룡이 무술과 철학을 융합시켰듯이)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의 철학을 탐구하는 것은 언제나 가장 우선시 되는 가치였습니다.
이렇게 철학에 최우선의 가치를 두며 살아서인지 재능적인 측면도 철학자의 길을 북돋았습니다. 동양철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화엄 사상을 청소년기 때 이미 견성 체험했으며 독학으로 동양 철학의 전반을 터득했습니다. 폭넓은 이해를 위해 견문을 넓히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서양 철학도 섭렵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학문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에 대한 성찰이 교육 철학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고, 부패한 제도에는 과감히 맞섰습니다. 이는 학자로서의 오성(悟性), 주도적 탐구력, 비판적-반성적 사고, 행동하는 양심과 용기 모두를 종합적으로 갖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철학자가 되란 법은 없습니다. 잡스나 이소룡처럼 자신의 일에 철학을 접목하는 삶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이야말로 창의적으로 개척하는 융합적 삶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철학자의 길을 걷고자 결심한 것은 김종욱 교수의 <불교로 이해하는 현대철학>이 화룡점정을 찍어줬기 때문입니다. 이 강연을 듣고 제가 철학사에 기여할 바가 분명하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잡스와 이소룡은 IT와 무술에 열정과 재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시대적인 배경까지 맞물렸기에 선구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이 모든 것이 갖춰진 것은 철학이었습니다. 철학에 대한 내면의 열정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떤 작업을 통해 업적을 남길 수 있을 것인지도 명확해졌습니다. 저는 개인의 역량과 시대적 조건이 절묘하게 맞물리는 빅뱅의 지점에 서있었습니다.
[영성계, 종교학계, 철학계의 실태]
입시 마왕에게 세뇌당하는 것을 거부한 저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할 순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과 무한한 우주의 관계에 대한 강렬한 탐구심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타올랐고 도가철학, 불교철학, 인도철학, 종교철학, 명상철학(마하리쉬,마하라지,크리슈나무르티,오쇼,톨레,켄윌버,한국현대명상)을 독학으로 섭렵했습니다. 서양철학에 대해서는 그동안 무지한 편이었으나 이제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 철학자로서의 길을 걷고자 하는 만큼 서양철학도 섭렵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서양철학사의 대강을 훑어보니 흥미롭지만은 않았습니다.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이 동양철학 보다 어렵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으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근대 이전의 서양철학을 공부할 때면 어떤 체계화된 조각틀 안에서 영혼이 석고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제가 긍정적으로 말하는 동양철학은 베단타-도가-불교철학입니다. 전체주의, 상명하복, 통념주의로 상징되는 유가철학은 꺼립니다.) 동양철학은 읽는 이를 물과 같은 상태로 만들지만, 근대 이전의 서양철학은 독자의 영혼을 고체화 시키고 세상을 박제화 시킨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곧 니체와 들뢰즈를 만났고 그들은 기존의 서양철학을 해체-전복시킨 영성적인 철학자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제가 영성철학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영성철학은 이성이 만든 그물을 뛰어넘어 살아 움직이는 실질적인 현상을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비철학적인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베르그송 이후의 현대 철학자들은 이미 이러한 ‘직관’에 귀를 기울여오고 있었습니다.(예를 들자면 현대 현상학자 유진 젠들린Eugene Gendlin은 내적 감각felt sense을 제창했습니다.) 아직 서양 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없지만, 직관적인 동양 철학과 이성적인 서양 철학이 융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보였습니다.
이것이 영성철학이며, 이는 ‘이성이라는 도구를 적극 활용하는 가운데 영성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저는 영성철학의 동지를 찾고자 수많은 단체를 찾아 헤맸습니다. 그러나 어디를 가보아도 이런 생각을 지닌 동지를 찾을 수 없어 고독한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최근에는 유명 대학의 명예 교수님이 고문으로 계시는 XX정신과학회를 가보았습니다. 그들은 유체이탈-초능력-사후세계를 주제로 토론하고 있었으며 사이비 지식이 과학적인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공신력 있는 학문적 토대와 건전한 명상을 추구하는 단체는 찾기 힘들었습니다. 사회적 공신력이 출중해 보이는 영성 단체들조차 내막을 살펴보면 무속신앙이 변모된 단체라는 것을 발견할 뿐이었기에 언제나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의 교육제도가 아프리카 개발도상국 수준이라면 영성계는 아프리카 토테미즘 수준이었습니다.
영성계의 실태를 접해보면 믿기 힘들 정도의 사이비단체들이 버젓이 대중문화 공간에 침투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매매 특별법을 만들자 변종 업소들이 시내에 침투한 것처럼, 무속신앙이 과학에 의해 밀려나자 명상 단체로 둔갑하여 대중들에게 침투했습니다. 시내를 돌아다녀보면 ‘글로벌 시장에 진출한 국산 교주’들의 책이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며 국위선양을 했다는 듯 뽐내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들의 책이 국민은행 권장도서로 뽑혔다는 기사를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국산 교주뿐 아니라 영미(英美)에서는 이미 사이비 교주로 밝혀진 ‘데이비드 호킨스’가 한국에서는 종교학-영성계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http://blog.naver.com/sunyanet/60209413972) 호킨스는 오링테스트로 역대 영적스승들의 의식수준을 측정한다는 궤변론자이며 학력위조, 경력위조, 언론날조를 밥 먹듯이 한 전문 사기꾼입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D단체의 후광과(호킨스가 D단체를 옹호한 선례가 있기에) 출판사-서점의 화려한 포장에 압도되어 그를 세계적인 종교학 석학이자 영성계의 거물로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중들은 그가 말하는 황당무계한 오링테스트 이야기를 듣고도 그럴싸한 권위에 압도되어 그를 추종하고 있었습니다.
더욱 황당한 것은 호킨스 박사(?)의 사이비 과학서를 번역하고 호킨스 추종 카페를 운영하며 관련 모임을 이끄는 사람이 서울대 물리학과 출신의 과학도라는 것입니다. 또한 UCLA한국학 연구소에서는 국내외 유수의 학자들을 초청하여 ‘국산 사이비 명상단체’를 옹호하는 논문을 발표하고(서울대 간호학 박사의 임상실험 연구 등) 이에 ‘UN 세계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UN-NGO IAEWP)’ 찰스 마르시에카 회장과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가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헤프닝도 있었습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15&aid=0003078560 IAEWP는 통일교 문선명 교주에게 그랑프리 평화상을 수상한 사례도 있으며 D단체나 M단체가 왜 사이비인지는 검색엔진에 ‘D단체, M단체 사이비’라고 검색해보면 그 근거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저명한 사회지도층과 식자들은 사이비 단체를 비판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단체를 홍보해주며 대중들을 호도하고 있었습니다. 前한나라당 대표, 前외교부 차관, 前MBC사장, 카이스트 교수, 유명 연예인 등이 초능력자를 빙자한 사이비 명상 교주에게 홀려 그 단체의 자문위원과 홍보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제가 직접 본 것은 카이스트 교수와 연예인입니다.)
명상지도자는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초능력자이자 우주의 창조주라고 합니다. 저는 일찍이 견성 체험을 하였기에 그런 체험을 한다고 인간이 전지전능한 신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종교지도자, 명상지도자들은 신비 체험의 기능을 엄청나게 확대 해석하여 자신들이 전지전능한 초능력자인 것처럼 은근슬쩍 위장하고 견성 체험을 하나의 종교적 권위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정말 전지전능한 초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실상을 탐구하고자 했습니다. 자칭 초능력자들에게 초능력을 검증할 수 있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화를 발끈 내며 초능력으로 벌을 내리고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위협을 하더군요. 소크라테스가 맹목적인 추앙을 받는 이들을 찾아가 그들의 무지를 밝히는 과정에서 많은 미움을 산 것과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탐구하고자 하는 학자적 자세는 종종 역경에 부딪히는 것 같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이 이런 황당무계한 주장에 속수무책으로 걸려든다는 것은 저에게 하나의 탐구 과제로 다가왔습니다.(저는 일상에서 학술적인 연구 가치가 있는 탐구 과제를 종종 발견하곤 하며 그럴 때마다 이를 대학 기관과 함께 공동으로 연구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곤 합니다.)
어째서 전문적인 학식을 갖춘 사람들이 사이비 영성단체, 사이비 경영단체, 유사 과학에 빠지곤 하는 것일까요? 이런 현상은 비단 국내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런던대 철학과 스티븐 로 교수 역시 이런 현상에 의문을 품고 ‘왜 똑똑한 사람들이 헛소리를 믿게 될까’와 같은 책을 출간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현상의 원인에 대해 다양한 이유를 들 수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철저한 비판적 사고’야 말로 ‘가짜 합리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백신이라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측면’이 일부 있더라도 ‘가공할 맹신’이 섞여 있으면 어디까지나 ‘사이비 단체’입니다. 가공할 맹신의 종류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초능력입니다. 사후 세계에 대한 문제나 내면적인 깨달음은 검증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러나 물리적인 초능력은 얼마든지 ‘검증’ 또는 ‘시연’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초능력을 주장하는 단체일수록 자기네 단체를 홍보하려고 안달이 나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초능력을 주장해야 할 정도로 급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초능력이 있다면, 초능력 ‘시연’ 한번이면 단체 홍보는 완벽하게 끝납니다. 그럼에도 단지 ‘말로만’, ‘소문으로만’ 초능력을 왈가왈부 하고 시연하지 못 한다는 것은 실제적인 능력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사이비 단체에 지배당한 영성계를 계몽하는 일에 종교학자들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성을 잃은 단체는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비이성적인 원시 종교가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등의 비인간적인 행위를 태연자약하게 저질러 온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종교학자가 대중매체를 통해 사이비 단체를 비판한 사례를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비판이 필요한 이유는 그분들이 비판을 해야 사이비 단체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계층의 사람들도 다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상아탑 안의 종교학자들은 이런 문제를 인식은 하고 있을까요? 저는 망가진 영성계와 닫힌 학계의 문제를 현장에서 몸소 체험했기에 이를 개혁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와 정의감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올바르고 건전한 영성단체를 만드는 것이 저의 비전 중 하나입니다. 각박한 현대 사회 속에서 영성에 대한 갈증을 지닌 이가 많지만, 이를 충족시켜줄 바른 단체의 공급이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명상에 대한 수요는 높은데 바른 단체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사이비 단체들이 글로벌하게 성장하는 것입니다.(최근 종교학자 길희성 교수, 오강남 교수는 민간단체를 설립하고 대중들과의 소통에 앞장서고 계시더군요. 반가운 소식입니다.)
이번엔 철학계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철학계는 ‘영성’이란 이름에 대해 견고한 장벽을 쌓아올린 것 같습니다. 잘못된 영성추구로 인한 중세 철학의 정체, 뉴에이지 사상이 몰고 온 주술적인 면모들을 보면 이런 태도가 어느 정도 수긍은 갑니다.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가선 안 될 것입니다. 영성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합니다. 제가 정의하는 현대적 영성이란 불교의 ‘견성’과 같은 개념입니다. ‘해체적 사상’에 대한 ‘체험적 인식’인 것입니다.현대 서양 철학계의 거물들이 만든 ‘직관’, ‘해체’, ‘표현할 수 없는 것의 표현’ 같은 개념들은 여기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철학계의 다른 문제는 서술 방식입니다. 철학자들은 대중들이 이해할 수 없는 전문용어로 도배가 된 난해한 문체, 전공자가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는 애매모호하고 상징주의적인 문장을 미덕으로 여겨왔습니다. 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마르틴 하이데거, 리처드 로티는 전문화되어 대중들과 격리된 철학을 '철학의 시대적 질병'이라며 강하게 질타했으며, 분석철학자들은 니체, 하이데거, 들뢰즈의 문체가 시(詩)처럼 애매모호하고 상징주의적이라고 비판합니다. 저는 쌍방의 문제를 벗어난 문체를 선호합니다. 과도한 상징적 표현을 자제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어휘와 논리의 비약이 없는 문장을 미덕으로 여깁니다. 이해하기 힘든 전문용어로 길고 난해한 문장을 만들어 지력을 뽐내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학계는 현대 사회의 요구에 걸맞게 발 빠른 변화를 맞이해야 합니다. 현대 사회는 ‘객체지향적’입니다.(고객을 최대한 배려하는 자동화 시스템) 갈수록 모든 것이 복잡해지고 정보가 범람하는 현대 사회에선 단순함이 미덕입니다. 그런데 사전을 한번 봅시다. 웹(web)에서 어떤 전문용어를 검색하고자 하는 사람은 대부분 그 용어에 대한 알기 쉬운 해설을 원합니다. 그럼에도 사전의 해설은 전문용어를 오히려 더 어려운 전문용어로 풀이하는 고지식한 짓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용자는 하나의 용어를 이해하기 위해 더 많은 용어를 공부해야 하고 이것이 도미노 현상처럼 벌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문용어를 이해하기 위해 사전을 찾기보다는 이를 쉽게 해설해 준 블로그나 지식인의 글을 찾곤 합니다.
[문체(Style)에 대하여]
"분명하게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독자가 모이지만, 모호하게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비평가만 몰려올 뿐이다." -알베르 까뮈
-전문지식으로 도배한 학술적인 글들 중에는 껍질은 단단한데 속에 든 알맹이는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학술적인 글이 대중이 아닌 전공자를 위해 쓰인 글일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정작 힘들게 읽고 나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별 것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미 어떤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어야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데, 그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을 단순히 요약 정리해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애매모호한 답변으로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곤 합니다. ‘시장(market)’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국제 여론’은 구체적으로 누구의 의견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고 모호한 발언을 내놓을 때가 많습니다. 이처럼 논제를 구성하는 기본을 밝히지 않는 글은 독자에게 분노를 선사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난해한 문체를 극복한 모범적 인물입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는 난삽한 전문용어와 의미를 알기 힘든 상징적 문체로 책이 도배되어 있었으나, 그가 언어의 의미를 재차 깨닫고 성숙해졌을 때 저술한 <탐구>는 대중을 배려한 간명한 문체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상이 깊기 때문에 문체가 난해하다는 것은 편견입니다.
-과학이나 수학은 전문 기호를 사용해야 한다는 특수성 때문에 전공자가 아니면 심화된 내용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렇다고 철학이 이를 따라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중들에게 꼭 알리고자 할 만큼 중요한 깨우침이 담긴 글이나 저자의 인생이 담긴 글을 보면 간명한 문체로 쓰인 글이라도 독자에게 깊은 내면적 깨우침을 주곤 합니다. 수많은 학술적인 글이 영양가 없는 가공식품 같은 이유는 저자가 글을 쓰면서 너무나 자주 멈추고 어떤 단어를 쓸지 이리저리 걱정하고 재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리드미컬하게 서술하지 않고, 이를 억제하고는 이미 권위를 확보한 사실을 나열합니다. 자신의 목소리와 호흡이 사라질수록 글의 생명력-논지는 불분명해집니다. 이런 글을 쓰게 되는 이유는 이미 권위를 확보한 사실을 나열하지 않으면 타인에게 비판을 당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권위를 확보한 사실을 나열하는 것은 글을 비생산적으로 만들어 죽이는 것입니다. 명강사는 항상 자신의 소신을 중심으로 강의합니다. 최진석 교수, 강신주 박사는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글을 쓰는 철학자입니다. 한국에 꼴레즈드(College de France) 같은 대중을 위한 최고 교육 기관이 생긴다면 이런 분들을 일순위로 초청해야 할 것입니다.
[동서양의 회통과 개념창조]
저명한 사회심리학자 리처드 니스벳은 이렇게 말합니다.
“서양은 점점 동양적인 것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비록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코카콜라를 마시고 청바지를 입고 있지만, 서양의 요리는 이미 동양 요리를 가미한 퓨전 스타일을 지향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미국 내 중산층 유대인들의 휴양지였던 곳들에 불교 사원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미국에서 불교는 신교보다 더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또한 많은 서양 의사들이 동양 의술을 부분적으로나마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두통이나 구토 같은 증상에는 서양 의학보다는 동양 의학의 치료법을 권하기까지 한다. 수많은 미국인들이 요가나 중국의 기체조를 배우고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중략) 20세기 저명한 물리학자인 닐스 보어는 양자역학에서 자신이 이룬 업적은 동양 사상을 물리학에 접목시킨 덕분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서양인들은 외면적인 문화뿐만 아니라 내면적인 사고방식에 있어서도 근대 형식논리의 한계를 깨닫고 유연한 사고방식을 갖추려 하고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만 보더라도 내용을 고려하지 않고 형식적인 모델을 세우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하면 관심의 대상이 되는 현상 자체는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모델을 세우는 작업 자체로 학문적 기쁨을 느낄 수 있겠지만 행동을 이해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경제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한 경제학자 친구의 말을 빌자면, 경제학에서는 처음부터 수긍할 수 없는 원리를 만들어놓고 그로부터 수많은 다른 원리들을 논리적으로 만들어내는데, 이 모든 작업이 행동을 이해하는 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리처드 니스벳, <생각의 지도>
오히려 동양인들이 형식주의적이고 분과적인 근대적 사고방식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모습을 종종 발견하곤 됩니다. 도가철학의 본산지인 중국은 문화대혁명이 오래전에 끝났음에도, 근대화의 영향으로 도가철학을 미천하고 고루한 사상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물론 중국에는 워낙 다양한 사상이 있기에 이를 환원적으로 생각할 순 없을 것입니다.)
철학에 있어서도 동서양이 회통하고 있습니다. 두 사상은 이미 회통하고 있기에 두 사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밝히는 작업이 중요해졌습니다.
불교와 인도의 철학을 흡수했다고 공언한 쇼펜하우어, 이를 이은 니체와 들뢰즈의 포스트모던 철학은 본의 아니게 동양 사상을 전면에 띠고 있습니다. 해외에서는 대표적으로 프랑수아 줄리앙이 이들 간의 비교철학을 연구하였으며 국내에서는 동서비교문학학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논문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들뢰즈가 “표면에서의 사건들의 펼쳐짐(a display of events at the surface)”이라고 표현한 선불교에서 인간과 사물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접속한다. 선적인 표면에서는 티끌에서 우주로, 꿈틀대는 벌레에서 ‘나’로, 풀잎에서 무(無)로, 그리고 무한으로 연결될 수 있다. 그래서 들뢰즈에게 “부처의 나무는 그 자체가 리좀이 된다”(Deleuze and Felix 20).“
“들뢰즈와 불교에게 직관(Intuition)은 불가능한 것-되기와 무아와 같은 관계적 사유를 체험하는 방법이다. 직관은 인간이 언어나 관념을 매개로 하지 않고 대상이나 사물과 직접 접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직관은 단순한 감정이나 감각의 확장이 아니다. 직관은 느낌, 영감, 무질서한 공감과 구별되는 체계적이고 발전된 방식이다(Deleuze, Bergson 13). 직관에 의해 존재가 관계성을 깨달을 때 그는 타자와의 관계를 전체로 확대시킨다. 즉 그는 자신이 이미 이질적인 것들과 관계되어 있는 공생체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들뢰즈에게 “‘모든 것은 하나다(all is one)’라는 말과 ‘모든 것은 복수적이다(all is multiple)’라는 말 사이에 어떤 모순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Pearson 18). 존재는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이미 전체와 접속되어 있다. 이때 전체, 즉 우주는 곧 “관계들로 이루어진 전체”이다. 들뢰즈가 데리다, 라캉, 혹은 푸코와 구별되는 점이 바로 주체와 전체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현대 서구철학자들은 주체의 해체를 주장하면서 주체의 결핍을 강조한다. 하지만 들뢰즈는 인간을 무기물이나 유기물과 별반 다르지 않은 위치로 바라보는 동시에 모든 존재(그것이 동물이든 사물이든 혹은 자연이든)를 긍정하고 이들이 무한히 관계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오현숙, 들뢰즈와 불교의 관계론
영성 철학은 개인을 해체시키면서도 근원적인 전체와의 관계를 긍정합니다. 이 지점에서 들뢰즈의 포스트모던과 영성 철학이 만납니다.
또한 ‘불교와 지성’, ‘불교와 철학의 만남’, ‘불교로 이해하는 현대철학’ 시리즈는 서양 철학자 개개인마다 불교사상과 어떤 점이 일치하는지 면밀히 밝혀놓았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국내 권위자인 황경식 교수는 역서의 서문에서 비트겐슈타인과 선(禪)사상의 유사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들뢰즈의 국내 권위자인 이정우, 이진경 교수는 들뢰즈와 불교사상의 유사성을 밝히는 작업을 직접 했습니다. 동서양 철학을 비교하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기는 분들도 있으나 이는 찬성과 반대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정확한 비교를 할 수 있느냐, 얼마나 사실을 왜곡하지 않을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정신분석의 대가 자크 라캉은 장자에서 중요한 개념들을 따왔으며, 크리스트교 성직자들도 동양 영성과의 융합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술활동을 한 대표적인 인물로 이현주 목사, 토머스 머튼 신부, 정호승 신부, 방상복 신부가 있습니다.(방상복 신부는 ‘불교의 니르바나와 그리스도교의 성령이 둘이 아니다’라는 주제의 논문을 작성하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오강남 , 길희성 교수를 비롯한 종교학계의 석학들도 동양과 서양의 영성이 심층적으로는 같다는 논지를 펼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각기 자기가 속한 종교 전통의 언어를 사용해서 영성이 지향하는 실재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지눌은 이 궁극적 실재를 '진심' 혹은 '공적연지심'이라고 부르며, 에크하르트는 '지성', 라마나 마하리쉬는 '진아' 혹은 '나의 나'라고 부른다.”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영성을 연구하는 서구학자들이 힌두교나 불교와 같은 동양 사상, 특히 선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오래 전부터 양자 사이의 유사성에 주목해 온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한편 에크하르트 신비주의는 선불교를 배경으로 한 일본 학자들 사이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어왔으며, 그를 매개로 해서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 이른바 경도학파 계열에 속하는 니시타니 케이지나 우에다 시즈테루가 대표적 인물이다. 나 자신도 이와 유사한 관점에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영성에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여왔다. 여기서 나는 지눌의 선사상이 불교의 모태인 힌두교 사상은 물론이고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사상과도 근본적으로 일치하고 있음을 밝힘으로써 인류가 초인격적 영성의 세계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해 본 셈이다.” -길희성
종교마다 교리가 다르고 이름이 다르지만 ‘근본적 진리’에 대한 묘사는 유사하며 ‘근본적 진리’가 정말 있다면 그것은 여러 가지일 수 없다는 논지입니다.
“신은 눈에 보이는 존재자가 아니기 때문에 신앙인들에게 피조물들의 허무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그리스도교 신학 전통에 따르면, 하느님은 피조물을 '무로부터 창조하셨다'. 이 말의 뜻 가운데 하나는, 피조물은 허무로부터 왔기 때문에 항시 허무의 그림자를 안고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없이 계시는 분'이라면 우리 피조물은 '있이 없는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인생무상과 죽음을 통한 무와의 대면은 우리를 허무주의로 물아갈 수도 있지만, 오히려 우리 자신이나 주위 사물들이 덧없음에도 불구하고 존재한다는 사실의 신비와 '은총'에 눈을 뜨게 해준다. 진공묘유의 놀라운 세계를 발견하게 한다. 죽음은 이런 측면에서 유한한 존재들에게 감추어진 축복이 될 수도 있다.” -길희성
이런 주장이 옳은가 그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으나, 동서양 철학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객관적으로 밝히려는 작업에는 큰 가치가 있습니다. 동서양 철학의 회통을 피할 수 없는 현시대에서, 두 사상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정확히 알아야 혼선 없는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이 철학이든 종교든 특정 학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른 학문을 재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특정 학문을 공부하며 다른 학문을 떠올릴 수는 있지만, 다른 학문을 가지고 특정 학문을 재단할 경우 왜곡과 폭력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특히 들뢰즈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동양 사상은 체계적 전개가 미흡하여 뜬 구름 잡는 이야기 취급을 받을 수 있는데, 들뢰즈의 철학은 동양적인 사상을 지녔음에도 이를 체계적으로 구현하여 동양 철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우선적으로 탐구하고자 하는 주제는 ‘들뢰즈가 개체 안에 우주 전체가 담겨있다는 이치를 전개했는가?’, ‘들뢰즈의 철학에 있어 영성적인 부분은 어느 정도인가?’입니다. 들뢰즈가 과연 어디까지 탐구했는지 정확하게 알아보고 싶습니다.
아직 들뢰즈를 잘 알지 못 하지만, 제가 본 바에 의하면, 들뢰즈의 감각-지각-충동-행위 이미지는 불교의 오온과 비슷한 구조이고, 해체주의-후기 구조주의 사상은 무아-연기 사상과 구조적으로 맞물리고 있었습니다. 또한 들뢰즈의 의식-운동에 대한 부정과 감각-운동의 긍정을 통한 세계와의 마주침은 영성 수양론의(관조) 일종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들뢰즈의 글을 읽다보면 마치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까지 합니다. 이는 영성(명상) 작가인 크리슈나무르티의 글을 읽을 때 어떤 명상적 기분이 드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치밀한 논리의 이성적인 글이 두뇌를 쫄깃하게 만들어 준다면 생동하는 철학은 두뇌에 신선한 공기를 공급해줍니다.
들뢰즈는 ‘존재에 대한 깨달음’과 ‘존재에 대한 서술’이라는 양 날개를 구비했기에 위대한 철학자로 남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철학은 사회, 예술, 종교의 뿌리이기에 예술보다 창조적이고 종교보다 근본적입니다. 철학자는 ‘개념이라는 건반으로 세상을 연주하는 작곡가’입니다. 함석헌, 류영모,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오쇼 라즈니쉬는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지닌 사상가였으나, 유사 철학자로 남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논리 전개의 빈약함 때문일까요? 혹은 창조 활동을 해낸 예술가가 아닌 다른 이의 개념을 연주한 연주가에 불과했기 때문일까요?
[개척하고자 하는 주제]
저는 <개념창조>를 통해 화엄을 현대적으로 전개하고자 합니다. 흔히 동양사상을 '생성의 철학'이라고 부르지만 이것을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생성하고 소멸할 뿐임을 주장하는 철학’으로 이해한다면 반쪽짜리 견해입니다. 저는 생성과 불생불멸이 어떤 관계인지 밝히고자 합니다.
화엄 철학은 개체 안에 전체가 담겨 있다는 이치를 가장 분명히 설했습니다. 종교로서의 불교는 종파간의 우위를 논할 수 없겠으나 철학으로서의 불교를 논한다면 그 으뜸은 단연 화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도불교와 동아시아사상이 만나 탄생한 화엄사상은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교리를 모두 품고 있습니다. 이에 견줄 수 있는 종파로 선종(禪宗)이 있겠으나 선종은 극단적으로 이성, 교(敎)를 거부합니다. 그러므로 선(禪)을 철학으로 서술하려는 것은 혼돈에게 구멍을 뚫어주려는 것과 같고 노나라 임금이 바다새를 키우려는 것과 같습니다.
“‘남해의 왕 숙, 북해의 왕 홀, 그리고 중앙의 왕 혼돈이 있었다. 남해의 왕인 숙과 북해의 왕인 홀은 자주 중앙의 혼돈의 땅에 가서 서로 만났는데, 혼돈은 그들을 매우 잘 대접해 주었다. 숙과 홀은 혼돈의 고마운 덕에 보답하려고 의논을 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7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을 쉰다고 하는데, 혼돈은 구멍이 없으니 우리가 구멍을 뚫어줘 보답하자”고 의논을 하고 날마다 한 개씩 구멍을 뚫어주었다. 7일째 되는 날 혼돈의 몸에 7개의 구멍이 뚫리며 그만 죽어 버렸다.“
“옛날 바다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이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구소(九韶)의 음악을 연주해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했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죽어 버리고 말았다.” -장자
그러나 화엄은 교(敎)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교(敎)를 통한 선(禪)을 추구합니다. 화엄의 핵심은 ‘일미진중 함시방’, ‘일중일체 다즉일’입니다. 이는 ‘먼지 한 톨마다 그 안에 전체 우주가 들어있으며(일미진중 함시방)’ ‘개체는 우주를 품고 있고(일중일체) 우주를 품고 있는 다양한 개체들은 서로 통해 있다.(다즉일)’는 의미입니다.
포스트 모던 철학이 개체와 전체의 조화를 밝히고 다양성을 제창했다면, 저는 각각의 개체 안에 전체가 들어 있다는 사상을 전개하고자 합니다. 또한 심법과 이성의 관계를 밝히고자 합니다. 이는 시대적 상황과도 맞물리고 있습니다. 영화가 대두되던 시대에 살던 들뢰즈는 영화가 그의 철학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온라인 게임과 가상현실이 저의 철학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곤 합니다.(IT업계에서는 이미 가상현실 기반 런닝머신을 50만 원 선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온라인 게임과 가상현실은 개인 안에 새로운 세상을 탄생시킵니다. 이렇게 세상을 품은 개인들은 동일한 공간에서 서로 소통합니다. 화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또한 현대 물리학과 불교 철학이 유사하다는 물리학자들의 이야기는 이미 상식이 되었습니다.)
철학사를 보더라도 시대가 무르익었습니다. 베르그송은 '지속' 개념을 통해 분석-분할 불가한 성질의 진리를 드러내어 ‘직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리오타르는 미래 철학이 ‘표현될 수 없는 것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심법’이 탄생할 수 있는 환경이 무르익은 것입니다.
달마는 인도 불교와 중국 문화 사이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두 사상 간의 교류는 달마 이전부터 있어왔으나 달마는 이 둘을 유기적으로 융합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습니다. ‘좌선 삼매에 들어가 초월 체험하는 것’이 목적이던 정적인 인도 불교를 중국 문화의 ‘현실성’과 접목하여 언제나 삼매인 상태, 승속불이적(僧俗不二的) 영성 문화를 제창했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삼매인 선(禪)을 탄생시켰습니다.
달마가 한 일은 인도불교를 중국에 소개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한 일은 인도불교의 정수만 뽑아 중국 문화와 유기적으로 융합한 것입니다. 이는 그가 ‘심법’과 ‘중국 문화’ 양쪽에 모두 통달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저 역시 ‘심법’과 ‘철학적 서술’을 모두 구비하여 융합적 혁신을 이루고자 합니다.(한 때는 ‘켄 윌버’가 이 문제를 해결해줄 선각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초기작인 ‘무경계’는 이런 기대를 충분히 가질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의 후속작을 보니 그의 관심사는 ‘철학과 영성의 만남’이 아닌 ‘광범위한 학문들 간의 통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도가철학과 화엄의 재해석]
<도가철학>
근래 들어 노장사상을 극히 표면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노자를 단순한 '정치-모략-병법' 사상가, 장자를 단순한 '개인주의 철학자', ‘소통 심리학자’로 국한시키는 것은 심각한 오류입니다. 노장사상에서 처세술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표면적인 사상은 도가적 '인식론'이란 바탕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글에서 부득이하게 <교육 철학>을 논했으나 교육 철학이 저의 본분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천지자연 속에서 서로 다른 만물들이 각각 번성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만물에 대한 도(道)의 무간섭에 있듯이, 인간사회에서도 백성들의 자발성을 최대로 보장하는 통치자의 무위, 무간섭 속에서 만인의 유위가 포섭될 때 가장 이상적인 정치형태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인간은 사회화가 필요하지만, 그런 사회적 간섭을 최소화하여 그 속에 사는 만물들의 본성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도록 방임하는 ‘무통치의 통치’를 말하고 있다. 이처럼 장자는 만물 하나하나에 총체적인 생명성을 부여하는 ‘도’의 무간섭과 무조작을 결국 ‘무위’로 파악하고, 개별성을 최대로 보장하는 최고통치자의 무간섭 방임정치를 이상적인 사회형식으로 고취하는 이상론으로 제시하고 있다.” -송영배 교수
참으로 훌륭한 해설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첨부한 단락 외의 글을 살펴보아도 ‘심법’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는 것입니다.(심법은 단순한 처세술적인 마음가짐이 아닌 불교의 삼매 같은 의미입니다.) “무간섭 속에서 만인의 ‘유위’가 포섭될 때 가장 이상적인 정치형태가 될 수 있다” 이는 정확한 좌망-심재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좌망 초기에는 좌망을 통해 불편한 감정을 잊고 평화로운 상태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게 발동합니다. 그러나 좌망이 조금 깊어지면 그러한 욕구조차 놓아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무간섭’(道)속에서 ‘움직이는 마음’(有爲)이 포섭되는 상태입니다. 이는 심리적 무위자연의 상태, 충만한 해체의 상태입니다. 자신의 의지로 이러한 관조 상태를 만들고자 하면 그것이 하나의 통제가(有爲) 되어버리나, 좌망은 정신적 조작에 의하지 않은 채 신체적으로 무위 관조 상태를 체득하게 해줍니다.
만약 이러한 심법을 통해 도를 체득하여 노장(老莊)의 마음을 지닌다면 춘추전국시대에는 그 상황에 걸맞은 정치와 처세에 대한 도리를 가질 수 있을 것이고, 오늘날에는 오늘날의 상황에 걸맞은 도리를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화엄철학>
1.화엄의 법계연기를 시간적인 인과법으로 해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종이 한 장은 태양과 나무 등으로 이뤄졌으니 그것들의 계보를 따지다 보면 우주 전체가 종이 한 장에 담겨있다는 식의 해석입니다. 이는 논리적으로 봐도 엄청난 관계성의 비약이지만 화엄의 법계 연기로 봐도 안 맞습니다. 법계연기는 시간적인 것이 아닌 공간적인 것입니다.(조성택 교수도 이를 지적하더군요.) 법계연기는 즉각적 인식입니다. 화엄사상은 인간이 우주를 인식하는 방식에 기반을 둔 사상이지 물리 현상을 논하는 사상이 아닙니다.
2.인식적 이해가 결여된 실천철학적인(윤리, 정치) 해설이 많습니다.
우선 화엄 인식이란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화엄적 인식이 위대한 까닭은 다원론과 일원론을 동시에 지녔기 때문입니다. 불교학계에서는 초기불교의 다원론과(무아-연기) 중국불교의 일원론을(진아-일원) 서로 대립하는 사상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으며 다원론 지지자는 화엄을 다원론으로 해석하고 일원론 지지자는 화엄을 일원론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화엄은 다원론과 일원론의 고유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둘을 동시에 포섭합니다. 오히려 서양 학자가 이 난제를 해결한 것 같습니다. 들뢰즈는 ‘내재적 차이’라는 개념으로 다원론과 일원론이 같다고 주장합니다. 다원론과 일원론이 같다는 것은 무아가 곧 대아(진아)라는 의미이며 도불철학의 핵심 주제입니다. 그러나 불교철학을 조금 맛보기만 한 사람들은 이러한 주장을 말도 안 되는 모순으로 취급하곤 합니다.(종교적인 불교에서는 이미 이런 문제가 해소되었습니다.)
저는 들뢰즈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 하여 그가 '내재적 차이'를 어떻게 전개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므로 제가 체험한 '다원론=일원론'을 짧게 해석해보겠습니다.(상세한 전개는 훗날 학위논문으로 작성할 계획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원론은 '다양성'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원은 모든 개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상태이며 따로 떨어진 ‘근원’이 없기 때문에 어떤 개체를 보든 그것이 곧 근원이 된다는 소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근원은 우주 전체를 뜻합니다. 베단타에서 말하는 진흙으로 모든 형상을 빚었으니 모든 형상 속에는 아트만이라는 진흙이 있다는 비유가 적절한데, 주의할 점은 '아트만'이라는 것이 개체들을 넘어서 개체들과는 무관하게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이는 붓다가 부정한 것) 분리될 수 없는 모든 개체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연기(緣起)이기에 진아(性)라는 화엄 성기론(性起)입니다. 그러므로 동아시아 화엄철학은 초월적인 일원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생성 소멸하는 표면적인 현상에만 천착한 얕은 사상도 아닙니다.
이제 기존 화엄 윤리의 사례를 들어 보겠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다카쿠스가 펼친 상호침투-획일성의 화엄윤리가 일원론에 치우친 단견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화상대주의를 주장한 한용운의 상호인정-다양성의 화엄윤리 역시 다원론에 치우친 단견입니다.(그러나 이는 다카쿠스의 이론에 반발하기 위한 방편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화엄적 인식은 ‘상호침투적 다원주의’입니다. 미국의 진보 신학자인 폴 니터는 최근 이런 책을 썼습니다. <붓다 없이 나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었다> 그는 불교 공부를 통해 기독교를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전통 속에서 더 깊은 통찰을 얻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전통인 기독교와 외부 전통인 불교가 상호침투 했으나 자신의 전통이 오히려 발전했으며 외부 전통에도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은 것입니다. 이는 M&A, 협업, 융합이 활발히 일어나는 현대 기업 윤리와도 맞아 떨어집니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이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점에 있다고 합니다. 인문, 기술, 디자인, 과학, 경영이 서로를 존중하며 각자의 길을 걷는 것은 개인주의적 다원주의입니다. 그러나 화엄적 다원주의는 인문-기술-과학-경영의 고유한 중요성을 각각 인정하지만 그들을 융합하여 시너지 효과를 내려는 상생적, 상호침투적 특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화엄윤리학의 기본 골격입니다. 이처럼 화엄 윤리는 현대 사회와 잘 맞아떨어지는 골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엄적 윤리관은 ‘통섭’이라는 이름으로 설명되어지고 있는 누구나 아는 상식적인 가치관입니다.
“훌륭한 요리사는 서로 다른 맛을 잘 섞어서 조화롭고 감미로운 새로운 맛을 만들어낸다. 이때 각각의 맛들은 자신의 고유의 맛을 잃어버리지 않고 유지하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어 더 훌륭한 맛을 만들어낸다.” -좌전
(심지어는 유교 경전에서도 이런 도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화엄을 구태여 윤리적, 정치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영성 철학적 역할에 충실하고자 합니다. 이는 ‘인식 지평을 넓혀 심리 상태와 인지 능력에 변화를 주는 작업’입니다. 영성 철학의 중요한 가치는 인식의 지평을 획기적으로 넓히는 것에 있습니다. 인지 능력은 미래 사회의 주요한 관심입니다. 촉망받는 신진 학문인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과 맞물리는 가치입니다.
화엄에 대한 저의 조망의 근원은 화엄 사상에 대한 분명한 견성 체험에(해인삼매) 있습니다. 동양철학에서는 직관적 체험을 항상 강조하는데, 이는 직접 미국에 가본 사람과 미국을 말로만 공부한 사람의 차이라고 비유되곤 합니다. 화엄적 견성 체험이란 모든 개체 속에 우주 전체가 담겨있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인식한 상태입니다.(찬물을 마시면 물이 차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인식하는 것처럼) 인식의 범위를 초월해 있는 진리를 어떻게 인식하느냐고 물을 수 있겠으나, 눈앞에 다 볼 수 없는 거대한 사물이 있다한들 일부분은 인지할 수 있는 것, 물체들 간의 관계를 통찰할 수는 있는 것과 같습니다. 화엄 삼매의 상태를 간략히 묘사하자면, 완전한 무아-무자성의 상태이기에 생각을 해도 생각이 없는 것과 같고 행동을 해도 행동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바다와 같은 연기의 그물망이 우주 전체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이 심안으로 보이는 상태입니다. 해인(海印)이라는 명칭의 참 뜻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삼매 체험을 한번 했다고 해서 삼매의 상태가 계속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체험은 하나의 향수로서, 理로서 남을 뿐이며 체험이 지나간 후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진 않습니다. 한때 저는 도를 깨달으면 포정해우(庖丁解牛)에 나오는 백정이나 재경(梓慶)이야기에 나오는 목수처럼 어떤 일을 저절로 신들린 듯이 잘하거나 모든 일에 쉽게 능숙해 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道는 그렇게 신통방통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이란 도는 걸어가며 만들어집니다.
저는 철학의 길을 걷고자 합니다. 이성과 영성의 양 날개를 유기적으로 갖춘 학파를 제창하고자 합니다.
[새로운 봉우리]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여 동양사상이 서구적으로 전복된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서양사상이 오히려 동양적으로 전복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시대를 선도할 철학자는 독일이나 프랑스가 아닌 서양보다 수천 년 앞서 직관-해체의 철학을 제창한 인도나 동아시아에서 나오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전개가 달라진 이유는 지리적 요인 때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해상무역이 발달한 그리스는 시각과(기하학) 논리가 발달했고, 고온다습한 인도는 숲속 은거를 통해 명상 문화가 발달하였으며, 대륙적 농경사회였던 중국은 통일 정치와 농경을 위한, 전체주의적이고 현실적인 철학이 발달했다는 주장입니다. 이를 뒷받침 하듯 농경이 주산업이던 중세 서양은 그리 개인주의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유야 어쨌든 동양은 서양보다 수천 년 앞서 해체적인 철학을 제창했습니다. 그래서 동양철학이 서양철학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양의 포스트모던은 근대 이성을 완성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초(超)이성인 반면, 동양철학은 이성이 아직 성숙치 못한 전(前)이성적인 면모가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주술적인 사상을 매몰차게 비판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점만 주의한다면 동아시아 철학은 현대철학과 상호보완적으로 맞물릴 수 있습니다.
서양의 이성과 동양의 직관을 융합하고자 하는 영성철학은 ‘인식의 지평을 혁신적으로 넓혀 이성-감성-영성을 모두 충족시키는 철학’입니다. 영성철학의 특징을 함축하여 정리하자면 이하와 같습니다.
1.사상적 골격은 화엄과 포스트모던 철학에 있다.
2.이성적 사고를 기반으로 한 직관적 체험을 추구한다.
3.철학의 목표는 이념의 덩어리가 아닌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삶에 직접적인 변화를 주는 존재의 대변혁에 있다.
4.교조주의에 반대하는 열린 사고를 중시하고 비판적 사고를 중시한다.
이런 특징은 형이상학, 포스트모던, 화엄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으나 이 모두를 종합적으로 구비한 학파는 찾기 힘들었기에 직접 집대성하고자 합니다.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이란 논문으로 철학계에 새로운 봉우리가 탄생했다는 것을 알린 것처럼 저는 <개체와 전체>라는 주제의 논문을 작성하여 새로운 봉우리의 탄생을 알릴 것입니다. 들뢰즈가 다양한 전문용어를 체스 말 다루듯이 사용하며 대중들이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복잡한 전개방식을 펼쳤다면, 저는 대중들을 위한 간명한 문체를 사용하고자 합니다.
[죽음의 초월과 참된 자유]
저는 이 글을 통해 저의 <교육 철학>과 <영성 철학>을 설명함과 더불어 제가 왜 철학과에 입학하기에 적합한 인재인지 밝혔습니다.
1. 학문을 탐구하는 올바른 자세를 숙고함에 따라, 부조리한 교육제도를 반성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겼으며, 부조리한 제도를 혁신하고자 하는 용기를 지님.
2. 17세 때 화엄 사상을 견성하고, 독학으로 동양 철학의 전반을 습득하였고, 지속적으로 견문을 넓히고자 서양 철학까지 섭렵해나가는 오성을 지님.
3. 생산적-능동적-창의적 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이라고 할 수 있는 ‘일상의 현상을 깊게 파고드는 탐구심’과 ‘반성적-비판적-종합적 사고’를 모두 갖춤.
4. 아무런 보상(돈, 학위) 없이도 순수한 자세로 학문을 탐구해옴으로써 학문을 대하는 장인정신을 갖췄다는 것을 증명함.
5.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는 원대하고 강렬한 비전을 지님.
6. 광범위한 선구적인 사상을 조직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서술력을 갖춤.(이 글이 만족스러울 정도로 체계적이지는 못 할 수 있으나, 선구적인 사상을 조직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이미 권위를 확보한 사상을 정리하거나 권위를 확보한 사실에 대한 포부를 밝히는 것보다 수십 배 이상 어렵습니다.)
이를 종합해본다면 저는 대학에서 수학(修學)할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가까운 미래에 훌륭한 논문을 제출하여 학계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도 가능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게 잘났으면 남들처럼 수능 봐서 대학에 당당히 입학하면 되지 않느냐?” 이는 동그란 사람을 네모난 틀에 끼워 넣으려는 고리타분한 사고입니다. 저는 이런 소리를 들으면 내적인 표현력, 발산력, 창조력이 억압당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창조성에 민감한 사람은 수능-내신 제도의 이러한 파괴적 성질을 민감하게 알아차리는데, 이러한 민감성은 철학자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위대한 철학자들이 쓴 글을 읽어보면 보통 사람들이 느낄까 말까한 사소한 현상을 굉장히 디테일하게 포착해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대학에 오려면 대학이 원하는 것을 갖출 줄 아는 겸양이 필요하다. 대학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다." 언급한 것처럼 부패한 제도, 뒤틀린 학습을 감내하는 것은 창의성의 본성에 어긋납니다. 이는 전형적인 봉건-산업시대의 농노-노동자적 마인드입니다. 창조경제시대는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능동적으로 창조해내는 것이 미덕입니다. 봉건시대 때는 노예로서 사는 삶이야말로 국가에 충성하는 삶이요, 합리적인 삶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사회의 주를 이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던 소수 혁명적 사상가들이 있었고 그들이 새로운 사회를 개척해나갔습니다. 이와 같이 지금 벌어지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당신에게 어울리는 것은 대학이 아니다. 종교인의 길을 권한다.” 저는 종교로서의(religion) 도교가 아닌 도가철학을 하는 사람이며, 종교로서의 불교가 아닌 불교철학을 하는 사람입니다. 종교로서의 불교에는(여기서 말하는 종교는 물론 dogma로서의 의미입니다.) 교조주의, 신앙, 주술, 기복적 면모가 있습니다. 표층종교로서의 불교가 지닌 신앙적 면모로는 대표적으로 불상에 절을 하는 것이 있겠습니다. 자신 안의 부처에게 절을 하는 것이라고 합리화를 하지만 그것이 불상에 절하는 행위를 모두 설명해주지는 못 합니다. 그래서 미국 불교는(Intellectual Buddhism) 이런 신앙적인 요소를 없앴습니다.
표층 종교로서의 불교뿐만 아니라 심층 종교로서의 불교인 선(禪)조차 종교적 테두리 안에서는 교조주의적 태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화두가 아닌, 종교지도자가 임의로 설정한 화두를 품어야 한다는 전통이 대표적입니다. 이 전통이 부조리한 시점은, 지도자와 수행자가 처음만나서 지도자가 수행자에 대한 별 이해가 없는 상황이라도 그가 던져준 화두를 따라야 하며, 그렇지 않고 스스로 화두를 지니는 것은 교리에 어긋난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는 신부가 주는 빵조각을 먹으면 구원받는다고 믿거나 목사한테 맞으면 은총을 입는다고 주장하는 중세적 태도입니다.
대학은 최소한 중세적 마인드는 넘어서 있지 않습니까? 제가 동양철학을 공부하며 불교에 많은 관심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불교의 ‘심법’과 ‘철학’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새로운 문명과 만나려면 가벼워져야 합니다. 달마는 인도불교를 통째로 들고 중국에 간 것이 아니라 ‘심법’ 하나만 들고 갔습니다. 저 역시 ‘심법’ 하나만 들고 미국 불교(Intellectual Buddhism), 서양 철학과 만나고자 합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
표층적인 영성은 교조주의적 가르침에 토를 달지 않는 것, 교주가 제시하는 교리와 수행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묵묵히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층적 영성철학은 교조주의적 태도를 박살내는 것, 교리와 수행법에 대해 반성적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주체적일 수 있다면 머무는 곳마다 참된 곳이다!”(隨處作主 立處皆眞, 임제선사)
선사들의 파격적인 행동을 보면, 그들의 자의식이 굉장히 강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 수 있습니다. 선사들의 주체적인 모습은 동양의 道-空이 수동적인 비움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공(空)의 어원인 sunya는 ‘부풀어 올라 안이 텅 비었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면 세상을 크게 관조할 수 있다는 뜻이며, 목석처럼 수동적인 삶을 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러한 sunya적 태도는 중국 문화와 만나면서 훨씬 더 능동적인 空, 춤추는 空이 되었습니다. 혜능선사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應無所住 而生其心)는 동아시아 도불(道佛)철학의 상징입니다. 이는 태극권의 철학인 ‘수동적 자세로 강한 힘을 발휘하기’에서도 드러납니다. 단무지를 창안한 선사이자 일본 무도(武道)의 정신적 지주인 다꾸앙(澤庵) 선사의 ‘부동지신묘록’은 이 도리를 재밌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천수관음(天手觀音)에 천개의 손이 있음을 생각해보자, 활을 든 한 손에 마음을 빼앗기면 다른 999개의 손은 할 일이 없다. 한 곳에 마음을 두지 않으므로 하여 천개의 손이 소용이 있다. 관음보살이라 해도 어찌 하나의 몸에 천개의 손을 갖는가? 그것은 부동지(不動智)를 얻게 되면 손이 천개라도 모두 쓸 수 있음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진 모습이다. 예를 들어, 한 그루의 나무에 핀 붉은 잎 하나만을 본다면 나머지 잎은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하나의 잎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무심하게 한 그루의 나무를 본다면 수많은 잎이 남김없이 눈에 들어온다. 한 장의 나뭇잎에 마음을 빼앗기면 나머지 잎은 보이지 않고, 하나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면 백개 천개의 나뭇잎이 모두 보인다. 이것을 깨친 사람은 바로 천수천안관음(千手千眼觀音)이 된다.”
‘머무르는 곳이 없어 마음이 자유자재한(活潑潑) 상태’, 천개의 손을 가진 사람이 되면 누구보다도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선(禪)을 사랑한 이소룡과 잡스가 왜 수동적으로 순응하는 삶이 아닌 엄청나게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융합의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절권도-영화, PC-스마트폰) 그러므로 무위는 자신의 목소리를 죽이고 타인의 목소리에 순응하는 삶이 아닙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죽이는 것이야말로 작위입니다.
선(禪)은 ‘비움’와 ‘직관’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비움의 대상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문화적 선입견’이 있습니다. 직관의 작용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주입된 정보에서 벗어나 세상을 즉각적이고 스스로 마주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메커니즘이 있기 때문에 선의 정신에서 엄청난 ‘능동성’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 같은 과학자들이 대중들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바탕에는 ‘과학적 명철함’이 있었듯이 선사들의 파격적인 행동에는 위의 메커니즘과 같은 ‘직관’이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학술에 있어서도 파격적인 태도가 바람직하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미국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 6월 미국 국무부로부터 일본에 대한 연구를 의뢰 받았습니다. 저자는 한 번도 일본을 가보지 않았으나 도서관의 연구 자료와 주변 사람들의 경험에 의존해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보고서는 오늘날까지도 일본인을 탁월하게 묘사했다고 평가받는 고전이 되었습니다.(‘국화와 칼’) 이는 학문적 연구에 있어서만큼은 ‘경험론’이나 ‘직관’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는 데에 유리하여 학술 연구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저는 글의 서문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수많은 20세기 영성가들은 문학적인 방법을 시도했으나 세월의 검증을 견디지 못 하고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사태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엄밀한 철학적 토대를 마련할 것입니다.” 영성 체험을 했다고 인간이 전지전능해질 수는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연약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근현대 영성들은 자신의 체험에 도취되어 독단에 빠진 사례들이 많습니다.(오쇼 라즈니쉬가 동서고금의 문헌을 자기 멋대로 날조한 사례 등) 저는 이런 사태를 되풀이 하지 않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 인용구를 쓸 때는 원전의 의도에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사용하도록 노력했습니다. 원학자가 사용한 맥락과 대부분 일치합니다.
뭔가 엄청난 것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고이 혼자 간직하다 죽지 않습니다. 제가 이 일을 하고자 하는 가장 내밀한 동기는 선(禪)과 철학의 본질에 있습니다. 인생과 진리에 대한 탐구심이 이 일을 하는 동기입니다. 이소룡은 무도(武道)로 이것을 실현하고자 했고 잡스는 기기(device)로 이것을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누군가 이 글의 뜻을 알아주길 바라며 글을 작성하곤 했습니다. 알아주는 이가 있길 바라며 글을 여러 차례 다듬곤 했습니다. 새로운 봉우리에 봉화를 할 수 있는 불씨는 봉화되지 못한 이상 언제든지 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글의 1차적 의미는 타인이 아니라 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티스트의 작품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당대에 단 한 사람도 없더라도, 그가 한 일의 의미는 그의 작품 안에 있습니다. 대중들의 눈치를 보며 작품을 만든다면 어찌 선구적인 작품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 알아준다면 무척 반길 일이겠으나, 글의 의미는 글 자체에 있으며 이것으로 저는 할일을 마친 것이었습니다.
사회 통념에서 벗어난 글을 쓰며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저 자신을 발견하곤 했으나, 중요한 배움을 얻은 것입니다. '통념주의'로 대표되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져 스스로 고민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한 '자유인'이 되었을 때 참된 행복과 자유, 성숙한 판단과 결정이 깃들 여지가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뻔한 이야기지만 이를 실제로 체득하기는 몹시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러한 자유인이 모여 사는 사회야말로 가장 건강한 사회일 것입니다.
끝으로 영성철학이 담긴 글을 한 토막 소개해 드리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기억으로서의 과거란 언제나 현재경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뒤쪽'에 있는 경계는 무너진다. 지금 이 순간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마찬가지로, 예견으로서의 미래가 언제나 현재경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앞쪽'에 있는 경계도 사라져버린다. 앞뒤로 우리를 짓누르는 듯했던 무게 전체가 순식간에 갑자기, 그리고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은 더 이상 가두어진 순간이 아니라 모든 시간을 채울 만큼 확장된다. 그리하여 '스쳐가는 현재'가 '영원한 현재'로 펼쳐진다. 이것을 기독교 신비가들은 눙크 스탄스(nunc stans)라고 부른다. 눙크 플루엔스, 즉 '스쳐가는 현재'가 눙크 스탄스, 즉 '영원한 현재'로 되돌아간다. 현재는 단지 실재의 한 조각이 아니다. 현재 안에 세상의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과 함께 우주가 존재한다." -켄 윌버 <무경계>
소오강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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