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사류의 영수 심의겸
심의겸은 1535년[중종30]에 태어나 1587년[선조20]에 졸했다. 자는 방숙,호는 손암,간암,황재이다. 영의
정 심온의 6대손이며, 영의정 연원의 손자이고, 명종 국구 강의 둘째 아들이다. 5대조 영의정 회의 아들 한
의 증손이 무후하여 홍의 아들로 입양계대 하였다. 또한 명종의 비 인순왕후의 동생이다.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1555년[명종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562년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검상을 지냈다.
그는 의정부 정4품 관직인 사인으로 일할 때 공무로 윤원형의 집에 들렀다. 세도가 원형의 집에 김효원이
식객 노릇하는 것을 보고 돌아왔다. 그때 김효원은 이미 문장에 뛰어나 그 이름이 있었다. 의겸은 그가 세
도가의 집에 출입하는 것을 아주 곱지 않은 눈으로 봤다. 그런 효원이 장원 급제를 하자 의겸은 효원에 대
해 [세도가 윤원형 집에서 자란 사람]이라 하였다.
의겸이 1572년 이조참의로 있을 때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천거되자 권신에 아부했다하여 이를 반대하였다.
1574년 결국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오르고 영남 출신의 사류가 대거 진출하여 김효원의 명성이 높아졌다.
이번에는 심의겸의 아우 충겸이 이조정랑에 추천되자 김효원이 [이조정랑의 직분이 척신의 사유물일 수 없
다.]고 반대했다.
한양의 선배 사류는 심의겸을 중히 하고 연소한 남도 출신 사류는 김효원을 받들었다. 대사간 허엽은 나이
는 심의겸에 가까우나 김효원에게 사간을 시켜 연소한 사류의 종주가 되고 중앙 원로측 박순을 비롯한 정
철. 신응시 등은 심의겸을 옹호했다. 오늘날 보수 원로 세력과 386 신진 세력 간 힘겨루기 양상의 표본인 셈
이다.
김계휘를 평안감사로 내보내고 이조참판 유희춘을 사직시켜 고향으로 보냈으며 이후백을 함경감사로 내보
냈다. 이것은 허엽의 아들 봉이 이조좌랑으로 있으면서 참판 박근원과 모의해서 취한 조치로 김효원 일당
의 책략이라고 비난을 받은 사건이다.
율곡 이이는 붕당을 우려하여 우의정 노수신에게 [조정이 시끄러우니 그들을 잠시 밖으로 내보내면 다소
진정될 것이라.] 제의했다. 노수신은 섣불리 그랬다가 조정이 더 시끄러워질 수 있다며 신중론을 폈다. 이
때 대사간 정지연이 이이의 말을 좇아서 참판 박근원, 좌랑 이 성중, 허봉 등 김효원 일당을 이조에서 일시
에 몰아내 버렸다.
이로써 심의겸 세력이 갑자기 커져서 그 기세가 도도했다. 이에 놀란 우의정 노수신은 이이의 지난 말을 들
어 김효원을 삼척부사에 심의겸을 개성부 유수로 내보내게 하였다.
이때부터 경서[정릉방]에 집이 있는 심의겸의 원로 사류를 서인, 경동[건천동]에 집이 있는 김효원의 후
배 사류를 동인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이, 성혼의 친구나 문인은 거의 서인 계열이었고 이황,조식의 문인
은 거의 동인 계열이었다.
서인 측 윤현과 동인 측 김성일이 함께 일하며 의견이 대립했다. 윤현은 그의 숙부[두수, 근수]가 다 요직
에 있으면서 서인을 옹호했고 동인을 배척헀다. 동인은 이 3윤[두수,근수, 현]을 논핵하며 좇아내려 했다.
정철이 서인 편을 들고 이발이 동인 편을 들었다.
대사간 김계휘가 나서서 3윤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자 후배 사류들이 들고 일어나 김계휘를 논핵하여 전라
감사로 내보내고 김계휘 편을 든 심의겸의 동생 충겸도 좇아냈다.
이이, 백인걸,김우옹 등은 동,서를 타파하고 사류를 규합해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으며 동서
분쟁은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았다.
왕은 정2품 이상 관원을 선정전으로 불러놓고 동서 분란의 책임을 물어 심의겸과 김효원을 처벌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처벌을 반대했다. 이것은 두 사람이 동서 분당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고의적으로 양당 대립을 부추겨 악화일로를 걷게 한 원흉이 아니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
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라도 활과 활시위 역할을 하는 사람은 존재하기 마련이며, 화살을 시위에 얹어 당기
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심의겸이 활이요, 김효원이 시위라면 활시위를 당긴 사람이 너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동,서 분쟁은 불특정 다수의 횡포다. 개인의 이기가 군중의 힘을 빌어 일으킨 집단 히스테리다. 이것은 조
선 유교 사회에서 유일하게 생긴 현상만은 아니다. 언제든지 있는 현상이다. 박정희 정권 때는 1000여 건
이상, 김대중 정권 때는 300건 정도 있었다고 한다면 노무현 정권 때는 300건이 진행될 모양이다. 오늘날
에 이처럼 흔한 이런 사건은 원시 시대부터 있어 온 텃세에 연유한 사회 현상이다.
한양 중앙의 기존 사류의 세력과 남도로부터 서울에 진입해온 신진 세력 간의 몇차례 텃세 싸움을 너무 과
대 포장하여 호들갑을 떤 듯하다. 오늘로 말하면 주간지에 [가십]으로 실릴 1회용 정치 기사를 마치 미국
의 남북 전쟁보다 더 큰 사건으로 둔갑시킨 감이 없지 않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다. 동방에 조용한 나라! 아침 해가 산뜻하게 뜨는 나라! 2천만
동포가 함께 어울려 정답게 사는 나라이기에 조정에서 누가 정무를 보다가 {방귀}만 뀌도 놀라서 귀양 보
내는 사회다. 우리는 툭하면 역사적인 사소한 사건도 모두 "난리"라고 기술한다. 중국은 사건을 어지간하
면 "난리"라 하지 않고 "변"이라고 한다. 우리는 모두 놀라서 난리로 보고 중국은 사회의 변화하는 현상으로
서 "변"으로 보는 것이다.
이 별것 아닌 사건을 우리 조선조 중기 역사상 초대형 사건 제1호로 기술해 놓았다. 이름도 거창한 동,서 당
쟁이다. 미국 사람들이 들으면 동방의 나라 조선에도 미국과 같이 남북 전쟁이 있었는가 보다 지레 짐작
할 것이다.
이 조그마한 인간 사회의 대립과 갈등을 율곡이 한걱정을 하고 임금이 노심초사했다. 우리 조정 대신들이
모두 안절부절 못했다. 이것은 우리 조상들이 자애가 너무 지극한 탓이다. 60 먹은 아들이 길을 떠나면 80
먹은 노모가 그 아들이 나가 길 거리에서 다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깊은 사랑에서 이런 현상이 유발된 것
이다.우리 역사는 이런 지극한 사랑의 역사다. 우리 역사 기록도 이런 사랑의 눈으로 적어 놓았다.
자애에 가득찬 사관은 온통 걱정 투성이다. 왠 장마가 그렇게 많은지 역사서를 장마로 도배해 놓은 것 같
다. 그 기록만 봐서는 조선은 장마가 져서 홍수로 2000만 동포가 다 떠내려가 씨가 마른 민족이 아닌가 하
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무슨 놈의 화재가 그렇게도 심한지 화재의 기록을 보면 조선 민족이 불에 다 타 죽
은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천둥만 쳐도 걱정이 태산인 우리 어머니 같은 고운 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역사를 쓰다 보니 우리 역사
는 자애로운 노모의 역사요, 노파의 호들갑 역사가 되었고 별것 아닌 사건을 난리요, 전쟁이라 대서 특필했
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오늘날 못난 사람으로 비춰지고 있다. 오죽하면 이웃 나라가 우리를 보고 당쟁으로 날
을 세운 나라요, 당쟁으로 나라가 망했다고 우리를 짓밟겠는가? 그것도 모르고 자라는 젊은 세대들이 조상
을 원수 같이 대하고 있으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그 일련의 사건으로 나라로서는 국력의 소모가 컸고 심씨 문중으로는 큰 인물 하나를 잃어 버렸다.
심의겸은 동서 분당의 희생양이다. 동,서 분쟁이 격화되지 않았다면 그는 마땅히 조정의 영수로 큰 역할
을 하고도 남을 인물이다. 그 보잘것 없는 사건을 동서 분당으로 확대 해석하는 바람에 심의겸이 가장 큰
해를 입었다.
심의겸은 빼어난 인물이다. 1-200년에 큰 인물을 하나씩 내는 심씨 문중에 점지된 인물이 심의겸이다. 한
양 사류의 핵심 세력을 이끄는 영도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세력이 있어야 하며, 학문이 있어야 하
고, 덕망이 있어야 한다. 심의겸은 이 세가지 조건을 다 갖춘 큰 재목이다. 그는 소장 시절부터 중앙 사류
의 명망을 얻어 차차 그 세력의 중심 인물로 부상하여 은연 중에 그들의 영수가 되었다.
2,심의겸과 외숙 이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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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의겸을 이해하려면 이량과의 관계를 알아볼 만하다. 이량은 전주이씨 효령대군의 5대손으로 1519년에 태
어나 1552년 문과하여 도승지를 지내고 공조,이조,예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후손에 5-6명의 판서를 냈
고 현대 와서 초대 국회의장 이기붕을 냈다. 이기붕의 아들 강석을 양녕대군파의 이승만 대통령 양자로 준
집이다.
이량은 심강의 딸,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 심비의 외삼촌이다. 이 때 대비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조정의 기강
을 흐려 놓았다. 명종은 조정의 혁신을 위해 윤원형에 대항할만한 사람을 물색하다가 중전의 외삼촌인 이
양을 가까이 했다.
임금은 이량을 동부승지로 삼아 무슨 일이든 그와 상의하였다. 이 소문이 나자 그의 옆에 이감, 이영, 권
신, 김백균, 김명륜 등이 몰려 들어 세를 이루었다. 또한 자기 아버지 윤원로를 죽인 윤원형에 대해 원수를
갚으려는 윤백원[윤원형의 조카, 김안로 손녀의 남편]도 그 옆에 왔다. 이량은 임금의 지원을 받아
마침내 윤원형을 누르고 말았다.
이제는 이량이 방자해졌다. 이감,윤백원 등과 결당하여 세력을 키우면서 정치를 농단했다. 축재를 하여 대
저택을 금은 보화로 채웠다. 이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신진 사류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조판서 밑에 있
는 신진 사류인 이조정랑 박소립을 파직시키고 이량의 아들을 좋은 자리로 옮겨 주라는 청을 거역한 윤두
수도 몰아냈다. 동부승지 허엽이 경연관으로 임금 앞에서 이량에게 불리한 야기를 했다하여 그도 몰아냈
다.
이량이 이감,윤백원,이영,권신 등 6간이라 불리는 심복들을 모아놓고 사류를 해치려는 음모를 획책했다.
이 사실을 알아낸 심의겸은 처가로 인척이 되는 부제학 기대항에게 이 음모를 알렸으며 누이인 중전과 아
버지 청릉부원군의 힘을 빌려 이량을 귀양 보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로써 박순을 비롯한 많은 사류를 구
제하여 칭송을 크게 들었다.
심강의 아들 7형제 중에서 의겸이 심씨 가문의 3대 상신인 덕부.온, 강으로 이어지는 대인의 기풍을 가장
크게 받았다. 그가 없었으면 조선 상반기에 떨치던 심씨 가문의 성세를 후반기에 잇지를 못했을 것이다. 조
선 후반기의 번성은 오로지 의겸의 복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심강의 맏집 인겸의 후를 자기 아들 엄으
로 잇게 하였고 손자 광세가 5자를 낳아 그 후손들이 조선 후반기에 번성하였다. 영의정이 3명이 나오고 판
서와 참판이 각각 여남은 명이 나왔다. 그 이외도 인물이 수두룩했다. 의겸의 후손이 심씨가 벌인 명문 잔
치의 대미를 장식한 것이다.
조선조 전기간을 통해 명문으로 성가를 올리는 것은 몇손가락 꼽을 정도로 아주 드문 일이다. 청송심씨가
한결같이 명문이 된 것은 의겸 집을 밑바탕으로 한 네 차례의 아들 복 덕분이라 해야 할 것이다. 심덕부가
일곱 아들을 낳아 조선 개국 초기를 휩쓸더니 심온이 다섯 아들을 낳아 세종 시대를 주름잡았고 심강이 또
다시 일곱 아들을 낳아 명종조를 울렸으며 심의겸의 손자 광세가 또다시 다섯 아들을 낳아 조선 후반기를
풍성하게 했다. 이것이 어찌 인력으로 된 일이라 하겠는가? 이로 보면 심씨 가문은 하늘이 도왔다 하지 않
을 수 없다.
그렇다고 청송심씨가 전적으로 하늘 덕에 명문되었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 그것은 그 선조들이 남모르는
노력을 한 덕이겠지만 그 중에서 무엇보다 심온과 심의겸의 희생 덕이 컷다고 할 수 있다. 전자는 명나라
로 피신하여 구명도생할 절호의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목숨 받쳐 조국에 충성심을 보이면서 선비
의 정신을 만천하에 떨쳤으며 후자는 한양 사류의 영수로 독한 마음 먹고 술책을 썼으면 조정 영수도 가능
한 가운데 외척의 세도를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처지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겸은 그 유혹을 뿌리
치며 자신의 희생을 달게 받아드렸다. 그 뿐만 아니라 근신하며 외척의 내색을 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세도
를 부리는 외숙을 꺽어 청류의 희생을 크게 막았다. 이 두 사람의 희생이 없었으면 오늘날에 어찌 심씨 문
중이 그런 명성을 들을 수 있었겠는가?
[출처] 淸松沈門(청송심문) 한양사류의 영수 심의겸